| 요 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
요한의 아들 시몬이 게바라는 별명을 부여받은 것에 대해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시몬을 처음 보았을 때 예언적으로 하신 말씀이라고 기록한다. 마태복음은 16장 16절 이하에서와 같이 베드로의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 위에, 즉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시면서 ‘너는 베드로다’라고 명명하셨다고 기록한다. 유대교 신자이자 어부로 살던 시몬이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고, 더 나아가서 가장 정확하게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하고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앙 성장과 함께 하나님의 크신 복을 받은 증거이다. 베드로의 일생과 그의 복음서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준다고 하겠다.
우리의 일생도 평범한 자연인과 신자에서 거룩한 신앙인의 이름으로 아름다운 족적을 남기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구분선 아래에 몇 개의 주석을 비교해 보도록 타자쳐 올린다.
<IVP 성경배경주석>, p. 1511.
1:42 '게바’는 아람어이며 ‘베드로’는 헬라어로 ‘반석’이라는 말이다. 별명을 붙이는 경우는 흔했으며, 랍비들은 때로 제자들에게 그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구약에서 종종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새로운 특성을 묘사하기 위해 이름을 바꾸어 주셨다(아브라함, 사라, 야곱, 여호수아. 부정적인 경우로는 렘 20:3을 보라).
헬라인과 로마인들은 초자연적 지식(여기에서처럼 예수님이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의 이름을 아는 것과 같은)은 기적을 수행하는 자(보통 마술사)들이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유대인은 선지자나 선지자적 자질을 부여받은 교사는 그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한이 말한 요점에 대해서는 특히 2:24-25을 보라.
2:23-25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마음을 감찰하시는 자’로 불리시는 하나님만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신다고 생각했다.
<IVP 성경주석: 복음서, 사도행전>, p. 272.
1:35-51 첫 제자들을 부르심
(전략) 42절에서는 안드레, 시몬, 예수님의 개인적인 관계가 뚜렷하게 강조되어 있다. 다시 여기에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이 주어진 때에 대해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서 간에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그 이름을 주시는 데 비해서 마태복음 16:18에서는 베드로의 고백 이후에 그 이름이 확정된다. 여기서 예수님이 마태복음 16:18 사건을 가리킬 수 있는 미래 시제를 사용하고 계심은 눈여겨볼 만하다. 베드로와 게바 둘 다 ‘바위’를 의미한다. 이는 예수님이 시몬에게서 이끌어내려 하는 것이 반석 같은 성격임을 암시한다.(후략)
<뉴호크마주석: 신약>, pp. 1258-59.
1:42 보시고 가라사대. 원문은 ‘엠블렢사스 아우토…에이펜’(ἐμβλέψας αὐτῷ…εἶπεν)이다. 여기에서 ‘엠블렢사스’((ἐμβλέψας)는 ‘주목하다’, ‘눈여겨보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엠블레포’(ἐμβλέπω)의 부정과거 분사로서 예수께서 베드로의 성격이나 사람됨을 통찰하셨음을 시사한다. 즉 예수와 베드로의 첫 만남은 비록 단시간이었음에도 직접적이고도 진지한 만남이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여기에서 ‘시몬’(Simon)과 ‘게바’(Cephas)가 서로 대조를 이룬다. ‘시몬’이란 베드로의 다른 이름으로서 이는 예수께서 베드로의 자연적 성품을 꿰뚫고 계심을 나타낸다. 즉 ‘요한의 아들’이란 표현에서 예수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의 상태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시몬’은 ‘시므온’(Συμεών, 쉬메온)이라고도 불렸다(행 15:14). 그렇다면 ‘시몬’이란 구약의 12지파 중 시므온 지파의 조상인 야곱의 둘째 아들 시므온(LXX)과 동일한 명칭이다. 시므온이 과격하고 성미가 급한 인물이었듯이(창 34:25-31), 변화되기 이전의 시몬 베드로도 충동적이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18:10, 25-27; 마 26:31-35; 막 8:32, 33; 14:27-31; 눅 22:31-33). 이러한 시몬의 성격을 간파하신 예수는 시몬이 장차 ‘게바’로 불릴 것을 예언하신다. ‘게바’(כיפא, 케파)란 ‘반석’이란 뜻의 아람어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의 베드로의 성격을 잘 반영한다. 즉 ‘게바’라는 이름은 베드로가 교회를 위한 사도적인 터전을 구축한 여러 요긴한 반석 중의 하나가 된 사실을 상기케 한다. 예수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 중에 베드로는 예수를 세 차례나 거듭 부인하는 나약함을 보였고(마 26:34), 갈 2:11에서도 우리는 베드로의 흔들리는 모습과 오히려 사도 바울의 견고한 반석 같은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인간적 약점들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극복하고 초대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감당하였다(행 1:15-25). 후에 베드로에게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으로 인해 ‘베드로’라는 칭호가 공식적으로 부여되었다(마 16:16-19). 이는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처럼(창 32:24-30), ‘요한의 자녀’인 시몬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중생하여 ‘하나님의 아들’인 게바(베드로)로 되었음을 시사한다.
<칼빈주석: 요한복음>, pp. 64-65.
42. 네가…시몬이니. 사람들은 어떤 사람의 이름을 바꾸어줄 때에는 그 사람이 겪은 어떤 과거의 사건, 또는 현재 그 사람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어떤 것과 연관되어 있는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시몬을 장차 “반석”이 되게 하실 것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네가 요나의 아들 시몬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시몬의 아버지의 이름을 축약된 형태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사람들의 이름을 다른 언어로 옮길 때에 자주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을 보면, 시몬은 요하난 또는 “요한”의 아들이었음이 분명하다.
어쨌든,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취지는 시몬이 장래에는 지금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인물이 되어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시몬의 아버지가 지위나 신분이 높은 자였기 때문에 그를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시몬이 별로 내세울 것 없는 집안, 사람들 가운데서 별 존중을 받지 못했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러한 것이 자기가 시몬을 장차 견고하여 요동치 않는 담대함을 지닌 인물로 만드시는 것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시몬에게 새 이름을 주신 것을 하나의 예언(vaticinium)으로 기록하고 있다. 내가 이 말씀을 예언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장차 베드로의 믿음이 반석처럼 견고해지리라는 것을 미리 내다보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장차 베드로에게 무엇을 주실 것인지도 미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장차 베드로에게 주시기로 정해 놓으신 그 은혜를 지금 여기에서 미리 밝히고 계시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게바”가 지금 당장에 시몬의 이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장차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장차 게바라 하리라. 사실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는 데에 적합한 모든 경건한 자들은 “베드로들”(즉 “반석들”)이라고 불려도 마땅할 것이지만, 실제로는 오직 시몬만이 자신의 독보적인 탁월성(excellentia)으로 인해서 “베드로”라 불린다.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이 마치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지지 않은 것처럼, 그리스도의 자리에 베드로를 대신 앉히고서 교회의 터(ecclesiae fundamentum)로 삼은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고, 거기에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반석”이라고 했다고 해서 그를 교회의 수장(首長)으로 삼은 것은 이중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라티아누스(Gratianus)가 쓴 서사시들 가운데에 교황 아나클레투스(Anacletus)의 이름으로 된 얼빠진 교회법이 하나 나오는데, 거기에서 히브리어 “게바”를 헬라어로 옮길 때에 “머리”를 뜻하는 ‘케팔레’(κεφαλή)로 옮기고서는,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이 이름을 붙여 주심으로써 그를 교회의 “머리”로 임명하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게바”는 히브리어가 아니라 아람어였지만, 바벨론 포수 이후에는 통상적으로 그런 식으로 발음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말씀 속에는 모호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그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을 약속하시는 것을 통해서, 즉 베드로에게 이 놀라운 이름을 주셔서 베드로가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베드로의 이전의 모습을 생각하고서 그를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심으로써, 자신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모든 세대를 향하여 선포하고 계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스터디바이블>, p. 1824.
1:42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나님이 개명해 주실 때는 그 당사자와 그의 운명을 재정의하시는 것이다(창 17:5, 15, 32:28). 예수님은 후에 시몬이 예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옳게 고백하자 “반석”이라고 불렀던(시몬의 남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을 재확인해 주신다(마 16:17, 18).
첫댓글 매우 좋은 내용의 포스팅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개인의 것이지먼 신실하고 충성된 성도들의 신앙고백을 대표하거나 대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진실한 신앙고백을 한 성도들로 교회를 만드신 주님은 지체인 교회들의 머리가 되십니다.
네, 좋은 설명에 공감합니다.
안드레와 베드로 (요한복음 1:37-42), <매튜 핸리 주석>
여기서 우리는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에게로의 전향하는 것을 본다. 그들 중의 하나가 제 3일에 택해지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첫 열매가 된다. 교회의 처음 시작이 얼마나 초라했는지 보라. 또한 위대한 일들의 새벽이 어떠했는지 보라.
Ⅰ. 세례 요한의 제자인 안드레와 또 한 제자가 그리스도를 좇았다(37절). 다른 한 제자는 이름이 나와 있지 않는데 21장 2절과 비교할 때 아마 도마인 것으로 보인다. 또 어떤 사람은 요한 자신으로 본다. 그는 이 복음서의 기록자이며, 그이 태도로 보아 자기의 이름을 굳이 밝히지 않는 것 같다(13:23; 20:3).
1. 그리스도를 좇는 두 제자의 즉각적인 태도를 보자. 그들은 "요한에게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사실을 듣고서" "예수를 좇았다." 아마도 그들은 그 전날도 같은 소리를 요한에게서 들었으나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 다음날 예수를 좇은 것을 보면, 거기에는 같은 내용의 반복과 서적으로 개인적인 대화가 영향을 준 것 같다. 즉 요한으로부터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이야기로써
이 대화가 그리스도를 좇게 만들었을 것이다. 현명하고 깨우치게 하는 정신으로 예수를 따르게 하는 가장 강하고 거의 사로잡을 듯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요한이지만, 예수만이 죄를 짊어지신다.
2. 친절하고 세심한 그리스도가 그들을 보았다(38절). 그들이 그의 뒤를 좇았을 때, 그는 그들을 알아보고 돌이켜 좇아오는 그들을 보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는 자기에게로 오는 사람의 첫 행동과 하늘의 길을 걷는 첫 걸음을 먼저 알고 계신다는 점이다(사 64:5; 눅 15:20 참조). 그는 그들에게 지체하지 않고 먼저 이야기했다. 한 인간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란 이런 과정을 말한다. 시작하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이런 질문은 자기에게 오는 사람의 대담함을 책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찾으러 오신 그리스도는 자기를 찾으러 온 어떤 사람을 책하려 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수줍어하고 겸손해 하는 그들을 영접해서 자기의 친구로 삼으려는 것이다. "와서, 나에게 말하려는 것이 무엇이냐? 너의 청원이 무엇이냐? 너의 요구가 무엇이냐?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역자들은 겸손하고 온화해야 하며,
사람들이 묻도록 용기를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이 제자들에게 한 질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좇아 그의 거룩한 종교를 전파하려 할 때에 자신들에게 물어야 한다. "무엇을 구하느냐? 우리가 계획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이 이냐?"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아직도 세상을 구하거나 자기를 구하거나 혹은 자신을 송이고 인간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찾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구하는가? 선생, 통치자 혹은 화해자인가?" 만약 이 때의 우리 눈이 정직하다면 우리는 빛으로 충만하게 된다.
3. 그의 거처에 대한 그들의 가장 겸손한 물음을 보자. "랍비여 어디 계십니까?"
(1) 그를 "랍비"라 부름으로써, 그에게 가르침을 받겠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랍비란 뜻은 선생 즉 가르치는 선생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박사들 혹은 학자들을 랍비라고 부른다. 그에게 있어서 랍비란 말은, 선생, 위대한 사람 등등 많은 뜻을 가진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랍비는 결코 그런 뜻이 아니라, 지혜와 지식의 원천으로써의 랍비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를 따른 이 둘이 그의 제자가 된 것처럼, 그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그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요한은 이 두 제자에게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랍비로서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다(계 5:9). 우리가 그들에게 통치되고 가르침을 받는데 우리 자신을 맞기지 않는 한, 그는 우리의 죄들을 짊어지지 않을 것이다.
(2) 그의 거처를 묻는다는 것은 그와 더 친히 지기를 바라는 암시가 있다. 그리스도는 이 지방에서 하나의 낯선 사람이었으므로, 그들은 그가 기거하는 숙소를 알고 싶어했다. 그래서 가르침을 받고자 그가 정하는 알맞은 시간과 장소에 가려는 것이었다. 즉 알맞은 시기에 찾아가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들은 정중함과 좋은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또 한편으로 그들은 그와의 간단한 이야기보다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요했다. 그리스도와 어떤 친분을 가지려는 사람들은 부업이 아니라 주요 사업처럼 생각하고 나아가야 한다.
[1]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를 더 알려" 할 수밖에 없다.
[2] 그와의 "확고한 교제"를 원한다. 그들은 그의 곁에 앉아서 그의 교훈을 들으려 했다. 그는 그들에게 "와서 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향하는 좋은 바람이며,
그와의 친교를 장려하는 말이다.
(1) 그는 자기 처소로 그들을 초대한다. 우리가 그에게 더 가까이 접근할수록 그의 아름다움과 우월성을 볼 수 있다. 사기꾼들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멀리함으로 자기 세력을 유지하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자기의 존경과 매력을 맡기고, "내가 거하는 초라한 숙소를 와서 보라.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에게 아부하여 그들을 랍비라고 부르는 자들처럼 그런 기대를 가지고 오지는 말라. 나를 따르려면 어떤 것을 생각해야 되는지 와서 보라"(마 8:20 참조)고 말씀하셨다.
(2) 그는 이 제자들에게 "즉시" 오라고 했다. 그들은 좀더 좋은 때에 그를 시중들려고 그의 거처를 물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즉시 와서 보라, 지금보다 더 나은 때가
결코 없다"고 말했다.
[1]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도 배우자. 사람들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그들을 택하는 것이 최선이다. 즉 쇠는 달았을 때 쳐야 한다.
[2] 우리 자신에게 대해서도 배우자. 현재의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 현명하다. "보라, 지금이 은혜받을 때요, 구원의 날이다."(고후 6:2).
5. 기쁘고 감사에 넘쳐 그들이 초대를 수락했다. "그들은 그가 거처하는 곳을 가서 보았고," "그날을 그와 함께 거했다."
(1) 그들은 즉시 그와 동행해, "그의 거처를 가서 보았다." 은혜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스러운 초청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즉 다윗처럼 한다(시 27:8). 그들은 그와 어떻게 기거할지를 묻지 않고 되어가는 대로했을 것이며, 그들이 알고 있는 최대로 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거처하고 있는 곳은 어디나 좋다.
(2) 그들은 "그 날을 그와 같이 기거한다"는 것을 매우 기뻐했다("주님, 여기가 좋사옵니다"). 그리고 그는 환영했다. 이 때가 제10시경이었다. 흑자는 요한이 로마의 계산에 따라서 그 때를 아침 10시로 모았으며, 그들은 그와 밤까지 머물렀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유대인의 계산에 따라서 말한 것으로 보고, 그 때가 오후 4시이며, 그들이 그날 밤부터 다음날까지 기거했다고 말한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보낸 그 다음 날이 안식일이며, 안식일 전날에는 집에 갈 수 없으므로 지체하고 있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적인 이익과 도움이 되는 만큼 우리는 안식일을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있는 신앙, 사랑, 헌신의 활동으로 그리스도와 친교 하는 그들의 안식일을 보낸 축복 받은 자들이다. 참으로 안식일은 "인자(人子)의 날," 즉 주의 날이다.
Ⅱ. 안드레는 그의 형제 베드로를 예수에게 데려 갔다. 만일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처음이라면 카토릭 교도들은 그 사실에 대하여 소란을 피웠을 것이다. 베드로는 참으로 은혜 안에서 후에 더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안드레가 먼저 그리스도와 친분을 가지는 영예를 획득했으며, 베드로를 그리스도에게 데려 가는 도구 역할을 했다.
1. 안드레게 베드로에게 준 "정보"를 보자.
(1) 안드레가 베드로를 "찾았다." "안드레가 먼저 그의 형제 시몬 베드로를 찾았다." 즉 베드로를 두루 찾았다. 시몬은 안드레와 함께 요한의 설교와 세례에 따라 다녔으므로 안드레는 시몬을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알고 있었다. 아마도 안드레와 함께 있었던 다른 제자들은 같은 시간에 그의 친구를 찾으러 밖에 나갔을 것이다. 안드레는 "먼저" 요한을 만나려고 왔던 시몬을 만났으나,
그의 기대는 예수를 만나는 것이었다.
(2) 안드레는 자기들의 경험을 시몬에게 말했다. "우리는 메시야를 보았다." 다음을 주시하자.
[1] 안드레는 겸손하게도, 그리스도를 만난 영광을 자랑하지 않고 "내가 그분을 찾았다"가 아니라, "우리가 같이 그분을 찾았다"라고 말했다.
[2] 안드레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말한다. 우리는 가치가 있는 진주와 참다운 보물을 찾았다. 그래서 그는 마치 문둥이들이 외치듯이(왕하 7:9)외쳤다.
[3] 안드레는 알아듣기 쉽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메시야를 만났고, 그분은 이제까지 들은 그 이상의 사람이다. 요한은 "그가 하나님의 어린양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했다. 안드레는 그 말을 구약 성서와 비교하면서, 그분은 때가 찼기 때문에 온 아버지께서 보내라고 약속하신 그 메시야이다라고 단정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안드레는 "하나님의 증거를 명상함으로써," 이제까지 "그의 선생"인 요한이 말한 것보다 더 확실하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시 119:99).
(3) 안드레는 "시몬을 예수에게 데려갔다." 안드레는 자신이 설명하지 않고, 근원이신 예수에게로 데려가 그를 소개했다.
[1] "자기" 형제를 진실로 사랑한 하나의 모범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친척들에게 영적인 행복을 찾아 주려는 특별한 관심을 경주해야 됨을 배운다. 우리와 그들의 관계가 그들의 영혼이 잘 될 수 있는 기회를 보태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2] 그것은 안드레가 그날 그리스도와 대화한 결과이다. 은혜로써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최선의 증거는 앞으로 우리의 생활이 거룩해지고 유용성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안드레는 "예수와 함께 있었고," 그래서 그의 얼굴이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충만한 것을 알았다. 은혜를 맛보면서 그는 자기의 형제들도 같이 맛볼 수 있을 때까지는 편안할 수가 없었다. "참다운 은혜는 독점을 싫어하며 한 조각이지만 혼자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한다."
2.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준 "환대"를 보자. 그의 형제 안드레의 권유로 온 베드로를 예수는 환영했다(42절).
(1) 그리스도가 베드로의 이름을 불렀다. "예수가 베드로를 보고, 말하기를 네가 요나의 아들 시몬이로다 하니라."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몰랐을 것이 분명하다.
[1] 그렇다면 첫 눈에 어떤 물음도 없이 그리스도가 그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 이름을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전능함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주님은 자기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처지를 알고 계신다."
[2] 그러나 시몬은 보잘 것 없는 하찮은 사람인데도 그리스도가 꾸밈없고 친절하게 그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하강적인 은혜와 호의의 한 예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모세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를 나타내는 한 예이다(출 33:17) 혹자는 이름의 특징을 주목한다. "시몬"은 "복종적"이란 뜻이요, "요나"는 "비둘기"란 뜻이다. 비둘기같이 복종적인 정신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 필요한 자질이다.
(2) 그는 베드로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주었다.
[1] 이름을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총애"를 뜻하는 것이다. 또 새 이름은 어떤 관작을 나타내기도 한다(계 2:17; 사 62:2). 이러한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리스도는 그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가문의 수치를 씻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제자로 택하셨다.
[2]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뜻하는 이름이다. "너를 게바(번역하면 반석)라 하리라." 베드로는 천성이 딱딱하고 완고하고,
그리고 단호했던 것이 그리스도가 그를 "게바"(반석)라 부른 중요한 패를 겪지 않게 하려 그리스도에게 확고하게 하며, 동시에 그의 "형제들에게 힘을 주며," 다른 형제들에게 도움이 됨으로써 참으로 "게바"(반석)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에게 오는 사람들은 하나의 반석처럼 단단히 그리고 천천히 그러면서도 확고한 결심을 가지고 와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되어질 수 있다. "한결 같이 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를 반석처럼 만들 것이다.
베드로에게 예수를 전도한 안드레에 대한 설명까지 함께 보니 이해가 더 잘 됩니다.
@장코뱅 안드레와 시몬, 특히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로서 애국 애족의 마음이 강했고 진리 추구의 욕구가 강했던 사람들 같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를 만나서 대화를 이어가던 중에 이 분이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걸 확신했을 것입니다.
주석의 풍부한 설명이 이해에 도움을 줍니다.
@코람데오 네, 공감합니다.
게바(Cephas)
뜻:반석, 바위 수리아어 인데 헬라어로는 베드로다.
[1]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별명이다(요1:42). -> 베드로
[2] 바벨론에서 포로된 자의 자손으로 스룹바벨을 따라 유대에 돌아온 자의 조상(스2:26).
<출처: 한국컴퓨터선교회-KCM사전>
게바도 동명이인이 있군요. 작은 정보 같지만 새로운 걸 알게 됩니다.
정확하고 분명한 해설이 들어 있는 좋은 묵상입니다. 공부하며 은혜를 얻습니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