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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의 목회 활동(2)
벧엘 예배당의 교인과 목회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는 1872년에 만주 지역에 파송된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 한국인 권서의 기도와 성경 번역 등 말로 다 할 수 없는 피나는 노력이 아펜젤러의 선교 열정과 결합 하여 결실을 맺게 된다. 벧엘 예배당의 교인은 존 로스가 데리고 온 2 명의 권서인을 비롯해 강씨, 최씨와 그의 아내로 5명의 한국인과 일본 기독교인 남성 2명이 들어와 7명으로 구성되었다. 벧엘 예배당은 한옥으로 사방 8자가 되는 방의 크기였다. 아펜젤러를 비롯한 모든 교인은 좌식(坐式)으로 예배를 드렸다. 예배 형식은 아펜젤러가 영어로 기도를 시작하면 성도들은 마가복음 1장부터 차례대로 강독하였다. 마가복음은 만주에서 이미 한글로 번역된 쪽복음서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다음 권서인 중 한 명이 기도를 인도하였다. 아펜젤러는 “나는 이 예배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중심지가 되도록 기도했다. 현재 서울에는 교인 수가 예배 교인을 포함하여 모두 7명이다. 이곳의 모임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여러 명 있다”라고 기록했다. 교인 수는 적었지만 모임에는 생기가 넘쳤다.
▲1898년 촬영한 초기 정동교회의 예배당 내부로, 정동교회는 벧엘예배당이 모태였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
벧엘 예배당이 세워지면서 한국 선교의 시작을 알리는 최초의 열매들이 생겨났다. 1887년 10월 9일 한국 감리교인의 첫 예배가 드려진 이후 감리교 최초로 여성 세례가 거행되었다. 이날 한국 감리교인을 위한 최초의 성찬예배를 드렸으며, 아펜젤러의 첫 한국어 설교가 시작되었다.
한글 성서를 최초로 번역한 존 로스 선교사는 아펜젤러의 선교사역에 감탄했다. 그는 아펜젤러의 집에 머무는 동안 아펜젤러의 성품과 사역 원칙, 방식을 보면서 한국 사역이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 라고 기대했다. 로스는 아펜젤러의 첫 사역과 열매들이 사회에 모범이 되어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개신교의 첫 여성 세례자와 성찬예식
1887년 10월 16일 주일, 아펜젤러는 권서인 최씨의 아내에게 세례를 주었다. 최씨 아내는 개신교 최초의 여성 세례자였다. 아펜젤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녀는 세례문답에 매우 확실하고 분명 하게 대답했다. 나는 우리 감리교가 안방까지 들어간 것이 무척이나 기쁘다. 말씀을 받은 다른 여성들도 있다. 하나님 첫 열매를 축복하소서!” 아펜젤러가 ‘안방’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복음이 한국의 가장 핵심 장소까지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방은 대문, 부엌, 사랑채를 거쳐 들어가는 곳이다. 한국 남자들에 이어 여성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진 것은 한 가정의 온전한 복음화가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복음이 수용되고 정착된 곳에 성찬예식이 이루어진다.
▲아펜젤러가 1900년 서울 남대문 상동에서 촬영한 한국 여자 감리교인
일주일이 지난 10월 23일, 아펜젤러는 한국 교인들의 주일예배를 위해 성찬예식을 거행했다. 벧엘 예배당이 반석 위에 굳건히 세워진 교회가 되도록 성찬예식을 가졌다. 성찬에는 권서인 최씨를 비롯해 최씨의 아내와 장씨, 강씨, 한씨, 의사 스크랜턴이 참석했다. 최초의 한국인 감리교 예배와 여성 세례, 성찬 예식에 이르기까지 아펜젤러 의 첫 성찬예식은 생명의 떡을 백성에게 나누어주는 감격으로 이어 졌다.
개신교 최초의 예배와 수요기도회
아펜젤러는 남녀 구분 없이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하는 선교를 지향했다. 하지만 한국의 문화는 남녀를 엄격히 구분하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복음전도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예배를 드리는 모습에도 이러한 풍습은 여실히 드러났다. 현대 교회와는 다르게 한 장소를 사용하면서 남녀 자리를 구분해야 하는 모습은 벧엘 예배당도 예외가 아니었다. 최씨 아내가 세례를 받은 후 한국 감리교회에 복음을 듣고자 하는 여성들이 점차 몰려들었다. 이에 1887년 11월, 가옥을 매입하여 벧엘 예배당을 확장 했다. 사방 8자가 되는 정사각형의 좁은 예배당이 8×16자가 되는 직사각형의 예배당이 되었다.
그리고 설교 강대상을 중심으로 가운데 휘장이나 병풍을 사이에 두고 남녀가 자리를 잡았다. 보통 남녀의 자리 배치는 강대상에서 회중석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남동녀서(男東女西), 남좌여우(男左女右)라 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상식이다. 회중이 많이 있는 예배당의 경우에는 철저히 남녀가 구분되고 여자들의 모습이 보이면 안되기 때문에 출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지고 깊숙이 위치한 장소가 여자 들의 자리가 되었다.
실제로 남녀가 구분되었던 예배당의 도면이나 사진을 살펴보면 남녀의 위치는 거의 출입구의 동선 길이에 따라 구분된다. 예배의 모습은 여성들이 교회로 몰려오면서 자연스럽게 남녀의 자리가 구분 되었을 것이며 아펜젤러는 정중앙에 있어야 하는 강대상을 남자의 위치로 이동하여 남녀를 철저히 구분하였을 것이다.
▲초기 정동교회는 남녀 자리를 구분했다. 출입문 가까이에 남자가 앉았고, 여성은 멀리 앉았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
1887년 12월 4일 주일,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학생 유치겸, 윤돈규에게 세례를 주었다. 학생을 중심으로 세례를 받은 이들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복음에 목말라 있었다. 아펜젤러는 학생을 중심으로 수요일 저녁 기도회를 시작했다. 이것은 개신교 최초의 수요예배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배재학당 학생들과 세례를 받은 학생들이 모여 시작했다.
호기심에서 주일예배에 출석하는 이들이 모인 회중예배와 달리 수요기도회에 모이는 이들은 더욱 진지했다. 이들은 모일수록 신앙을 갈구했다. 아펜젤러는 신앙에 목말라 하는 이들에게 하나라도 더 많이 주의 진리를 가르치길 원했다. 그는 일상에서 의사소통 문제를 잘 언급하지 않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임할 때마다 한국어에 유창해지고 싶었다. 그의 일기에는 언어를 위해 기도하는 대목이 많이 나온다.
성탄예배와 한국어 설교
아펜젤러는 권서인 최씨의 도움으로 한국어 설교를 시작했다. 그 해 12월 25일 성탄절이었다. 아펜젤러가 영어로 말하면 최씨가 한국 말로 표현했다. 어떤 대목에서는 서툴러도 한국어로 직접 말했다. 그는 “나는 설교를 읽을 수밖에 없었지만 어느 정도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말할 수 있었다”라고 일기에 기록했다. 성탄 설교 본문은 마태복음 1장 21절이었다. 예배는 세례와 찬송, 스크랜턴의 기도, 말씀 봉독(마태복음 2장, 누가복음 2장), 설교, 주기도문, 찬송(‘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축도로 진행되었다. 사회는 길모어 선교사가 맡았다.
성탄예배는 성황리에 마쳤다. 아펜젤러는 한국어 설교를 한 자신은 초라했지만, 주의 이름으로 설교했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지 않도록 기도했다. 아펜젤러는 한국 선교 2년 반이 되면서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그가 추구한 선교는 한국인처럼 되는 것이었다.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한국어로 설교할 수 있는 때는 행복한 날이 될 것”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그는 한국인의 진정한 친구가 되길 원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결혼
1888년 3월 14일 아펜젤러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을 집례 했다. 일제강점기 잡지인 <별건곤(別乾坤)>(1928. 2)에서는 최초의 서양식 결혼이 1890년이라고 언급하지만 아펜젤러의 일기에는 이보다 2년 더 거슬러 올라간다. 일기에 따르면 결혼 당사자는 한용경으로 아펜젤러에게 두 번째로 세례를 받은 인물이다. 한용경의 상대 배우자는 과부 박씨(박시실)였다. 당시 윌리엄 스크랜턴의 시병원(施病院)에서 일하던 한용경은 그의 부인이 불과 4개월 전 세상을 떠나자 기독교인 친구들의 소개로 25세인 과부 박씨와 혼인을 맺기로 하였다. 한용경은 박씨에게 마가복음서와 십계명을 보내 신앙을 소개했고 그녀도 마가복음과 십계명을 좋게 생각했다. 이에 한용경은 결혼식순을 신부에게 보내 결혼식을 함께 준비하도록 했다.
결혼식에는 감리교 선교부 모두와 장로교 선교부 몇 사람, 친구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한국의 전통 혼례와 다르게 저녁에 시작되었고 신랑 신부가 앞으로 걸어 나오는 것을 비롯하여 아펜젤러가 주례를 인도하면서 기독교식으로 예식이 거행되었다. 결혼식이 끝난 후에는 케이크와 아이스크림을 먹고 차를 마셨다. 이 결혼식은 최초의 교회 결혼식일 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 결혼식의 기원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기독교식 결혼이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은 생각보다 큰 의의를 지닌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선 후기의 역사적 배경과 관습을 알아야 한다. 조선 후기에는 과부에 대한 사회 인식이 부정적이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과부는 수절(守節) 즉 정절을 지켜야 하는 사회적 인식이 팽배해 재가(再嫁)는 사실상 괄시를 받았다.
물론 이는 계층에 따라 달랐다. 양반 집안 과부는 대부분 수절을 선택했다. 그러나 양인 이하의 계층은 과부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상당수가 재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재가를 하더라도 불리한 조건에서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재가한 여성에 대해서는 마을과 이웃에서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
▲젊은 부인과 어린 남매가 시장에서 사온 물건을 나르는 모습으로, 조선 말기 과부의 외출 복장을 짐작할 수 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
과부 재가에 대한 편견은 1894년 6월에야 비로소 깨진다. 고종이 갑오경장을 통해 과부 재가를 언급하면서 악습은 공식적으로 폐지 되었다. 그런데 한국의 개신교는 이보다 6년이나 먼저 과부 재가를 실천했고 신부인 과부 박씨에 대하여 차별이 아닌 남녀를 평등한 위치에 놓고 결혼식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아울러 결혼으로 인한 무리한 가계 지출을 지양하고 결혼의 좋은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당시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 글은 한국교회총연합에서 발행한 <한국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의 "한국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의 생애와 신앙"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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