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의 형성
(고고자료(갑골문)을 통해 본 유교 형성의 배경)
儒家
공자 사상의 근원은 오래전의 은나라 · 주나라 시대의 민족 신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은나라 시대에는 자연적 인간에 있어서 모든 현상은 천명에 의해 정해져 있다고 믿어졌으며, 군주는 이 천명을 주술에 의해 예지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주나라 초기의 주공(周公)은, 인간은 나면서부터 하늘에서 정해준 운명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후천적인 수양 등에 의해 어느 정도 바뀔 수가 있다고 생각하여 독자적인 예(禮)의 문화에 대한 기초를 만들었다. 공자는 이러한 예(禮)의 문화를 만들었다. 전통을 수용하여, 발전시켜서 유교의 기초를 이룩했다.
맹자(孟子)
맹자(孟子-기원전 372년?~기원전 289년?)는 공자의 사상을 이어 발전시킨 유학자이다.
전국시대의 추(鄒)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가(軻)이고,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이다. 어릴 때부터 공자를 숭상하고, 공자의 사상을 발전시켜 유학을 후세에 전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활약한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4세기 전반기이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인에게서 공자가 편찬한 육경을 배웠다. 40세 이후에 인정(仁政)과 왕도정치를 주창하며 천하를 유력했다. 법가나 종횡가가 득세하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은퇴했다. 60세 이후의 삶은 알려진 바가 없다.
공자가 인(仁)이라 부르고 '예(禮)'를 실천하는 인간의 주체성에서 발견한 인간의 덕성(德性)을, 맹자는 인간이 갖추고 있는 하늘의 목적을 지닌 법칙성으로 생각하고 이를 인간의 본성이라 하여 인간의 성(性)은 선(善)이라고 하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던 것이다. (인간의 德은 타고 난다.)
공자는 예를 실천하는 인간의 주체성을 '인'이라 했다. 공자의 사고방식을 계승했다. 개괄적으로 말한다면 공자와 조금의 차이는 있으나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나름대로 발전시켰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늘이 만민을 낳고 그 통치자로서 유덕자(有德者)를 천자(天子)로 명한다는 <서경(書經)> 이후의 천명관(天命觀)으로 뒷받침했다. 하늘의 신앙에 의해 정치권력의 정통성에 기초를 주는 사상이다. 그리고 하늘의 의지는 민(民)의 소리와 천지의 제신(諸神)의 승인으로 알 수 있다 하여 민본주의(民本主義)의 요소가 부가되었다.
은·주 교체기(交替期)의 역성혁명(易姓革命) 사상을 확인하고 있다. 그의 논법은 민의(民意)를 배반하고 인의(仁義)에 어긋난 은나라 왕 주(紂)는 이미 군주가 아니라 한 평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나라 신하였던 주의 무왕은 필부(匹夫)인 주를 토벌한 것이지 군(君)을 시역(弑逆)한 것은 아니라는 격렬한 것이었다. 이 점에 바로 군신의 의 이상의 것으로서 천명(天命)이 설정되어 있다.(왕도론) . 역성혁명(易姓革命) 사상은 쿠테타 세력에게 자기 합리화의 길을 열어 주었다.
순자(荀子)
맹자의 성선설에 대비하여 ‘성악설’을 주장했다고 한다.
순자는 한나라에서는 정통적인 유가의 인물로 여겨졌으나, 송나라 시대 성리학의 학풍 속에서 성악설이 비난받으면서부터 그 이래로 오랫동안 유가의 이단자로 간주되어 왔다.[1] 그에 대한 재평가는 청나라 말기에서야 다시 이루어졌다.
맹자의 성선설을 비판했다.
순자의 사상에서 바탕이 된 것은 예를 지상(至上)의 것으로 한다는 태도이다. 공자는 있는 그대로의 종교의례· 제도· 관습을 예로 삼아 성인(聖人) 주공(周公)에 의해서 집대성된 중국인의 전통적 문화유산으로서 신뢰하고 존중했다. 禮는 공자의 경우 아직 덕목(德目)은 되지 못했었다. 순자는 기본적으로는 공자의 이러한 태도를 지지한다.(태어날 때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그도 예는 성인(聖人)의 작위(作爲)에 의한 것으로 영원히, 즉 시대의 제약을 초월하여 무한하게 타당성을 갖는다고 한다. 공자처럼 예를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순자는 후왕이 예의 내용에 새로 추가하는 요소인 법률에도 성왕의 예와 같은 권위를 인정하고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그 결과 정치사상에서 그는 공자 이후의 덕치주의(德治主義) 전통에 새로 법치주의의 요소를 추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를 강제로 지키도록 함으로, 지키지 않으면 처벌함으로 법치가 되었다.)
순자가 생각하는 예의 내용에는 새로운 요소인 법률이 들어 있다. 순자는 맹자가 생각했던 왕자의 덕의 감화력에 의한 정치방식, '왕도(王道)'에 준하는 것으로서 공자나 맹자가 엄격하게 배격했던 권력에 의한 신상필벌식(信賞必罰式)의, 즉 법치주의 정치 본연의 자세로서 '패도(覇道)'의 존재가치를 시인했다.
(중국에서 법치론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法家) 진시황이 법치를 앞세운 분이고, 그 사상으로 중국을 통일했다. 그 기초를 닦은 분이 순자이다.)
첫댓글 유학의 연원이 결국 하늘과 인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예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겠습니다. 참선 화두에도 "예"란게 이무엇고가 있습니다...
사람이 상대에게 "예"라고 말할 때는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유학의 근본입니다...
禮라는 게 하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존재하는 질서지만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참 좋은 공부를 하고 나갑니다. 예로부터 <禮記>를 중시한 이유를 알겠습니다. 이러한 귀한 가르침을 주시니 늘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
인을 예로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 공자,
공자의 사상을 발전시킨 맹자,
예를 강제로 지키게끔 법치를 주장한 순자,
모두가 위대하신 분입니다
위 학설이 현대인에게도 필요합니다.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시간을 가지게 해주시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