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성탄주일을 맞이해서 여러분과 함께 “소동하는 자와 기뻐하는 자” 動揺する者と喜ぶ者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성탄절,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도 일본에는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분들도 적지 않다고는 합니다만, 그래도 교회에 몇 년 다닌 정도가 되신다면 매년 찾아오는 성탄절에 대해서는 잘 아는 것을
지나서 좀 식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성탄절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한 번 간단한 문제를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어디에서 태어났다고 알고 계십니까. 예, 일단 이스라엘에 있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요. 그렇다면 베들레헴의 어디에서 태어났다고 여러분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예, 우리는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 탄생에 대해서 동서양에 있는 그림들을 보면,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은
바닥이 온통 지푸라기로 덮여 있는 마구간이고, 그 주변에서 말이나 양들이 웃고 있고, 예수님은 구유에 싸여서 누어있고,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인 요셉과 마리아가 그 옆에서 역시 방긋방긋 웃고 있습니다.
자, 여기서부터가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 이 땅에 오셨을 때,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는 기록이 성경에 있을까요?
없을까요. 만약에 있다면 어디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사실 성경을 본다면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당시 마구간의 위생상태가 어땠겠습니까. 마구간을
만화로 그려놓으니까 소나 말이나 양들도 귀엽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참 지저분한 곳이지요. 아무리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이라 하더라도
그와 같은 위생상태에서, 하물며 동물들이 왔다 갔다 하는 그 지푸라기 위에서 아이를 출산했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장소가 마구간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가복음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2장 7절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男子の初子を産んだ。そして、その子を布にくるんで飼葉桶に寝かせた。宿屋には彼らのいる場所がなかったからである。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누가복음 2장 12절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あなたがたは、布にくるまって飼葉桶に寝ているみどりごを見つけます。それが、あなたがたのためのしるしです。」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누가복음 2장 16절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そして急いで行って、マリアとヨセフと、飼葉桶に寝ているみどりごを捜し当てた。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신약성경에 있는 총 4개의 복음서 중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다음에 누인 곳이 구유, 즉 가축들의 먹이를 담는, 말하자면 여물통이었다는
기록은 오직 이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그리고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뭐, 구유가 있었으니까 태어나신 장소는 마구간이었겠지……라고 하는 이 막연한 추측에서 시작해서, 결국은 사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좀 적지 않게 부자연스러운 주장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예수님이 어디서 태어나신 것인가에 대해서, 누구는 동굴 같은 곳에서 태어나셨다고 하기도 하고, 누구는 집과 마구간을
연결하는 그 사이 공간에서 태어나셨다고 하기도 하는 다양한 주장이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는지 연결통로에서 태어나셨는지 하는 점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보면 성탄절에
대해서 아직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부분도 적지 않다는 사실은 인정해야겠지요. 그래서 평소에도, 아, 이건 내가 잘 아는 곳이니까
대충 넘어가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럴수록 방심하지 말고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더라도 우리에게 대단히 친숙한 내용이라서 그냥 대충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이겠습니다만, 여기에 담긴 내용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의 상황을 알아봄으로 인해서 오늘도 주님께서 주시는 크나큰 은혜를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장 1절~3절
1.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1.イエスがヘロデ王の時代に、ユダヤのベツレヘムでお生まれになったとき、見よ、東の方から博士たちがエルサレムにやって来て、こう言った。
2.「ユダヤ人の王としてお生まれになった方は、どこにおられますか。私たちはその方の星が昇るのを見たので、礼拝するために来ました。」
3.これを聞いてヘロデ王は動揺した。エルサレム中の人々も王と同じであった。
개역한글
1.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해, 우리가 쓰고 있는 서기는 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해를 기점으로 만들어졌습니다만, 사실 실제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해는 서기 1년이 아니라 기원전 4년 경이었다고 요즘은 이해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이스라엘의 왕은 말하자면 로마의 꼭두각시라고 할 수 있는 헤롯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동방박사가 몇 명이었다고요? 세 사람이죠?
예, 이것도 오해입니다. 마태복음 2장 11절에 보면 세 가지 예물을 드렸다는 기록은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동방박사가 세
사람이라고 하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 찬송가를 보면 116장 제목이 <동방박사 세 사람>이었습니다만, 한참 지나서야 사람들이, 아, 성경에는 동방박사가 세
사람이라는 기록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새찬송가에서는 같은 116장 제목이 <동방에서 박사들>로 바뀌었지요.
영화 같은 곳에 보면 특이한 복장을 한 세 사람이 쓸쓸하게 낙타를 타고 오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만, 정말 과연 그런지는 의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더라도 동방 박사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헤롯 왕을 만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냐 하면 당시 동방 박사들은 사회적으로
봐도 왕을 직접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신분이 높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동방이라고 하면 이는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외국에서 먼
거리를 왔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그와 같은 지체 높은 사람들이 쓸쓸히 무슨 나그네처럼 세 사람이 낙타를 타고 왔다? 아니요. 그것은
대단히 부자연스럽습니다. 성경에 보면 <박사들>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두 사람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든 세 사람이든
간에 그 일행들은 또한 한 두 사람이 아니었겠지요. 아마도 수 십 명에 달하는 일행들이 예루살렘을 찾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는 유대인의 왕이 어디서 태어났느냐고 묻습니다. 갑자기 많은 수의
외국인들이 예루살렘에 왔다는 것만해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을 텐데, 그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수소문합니다. 그런데 그게 뭐냐
하면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 곳을 찾아 다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놀랍니다. 당시 왕이라고 하면 지금의 대통령이나 총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대부분의 나라에 있는 대통령이나
총리라고 하는 것은 일정 임기가 되면 물러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당시는 어떻습니까. 왕이라고 하면 절대적인 권력을 갖게 되고, 그리고 평생 동안 그 자리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정상적이라면 이 또한 일반적으로 그 왕권은 자녀들을 통해서 대대로 물려받게 됩니다.
이와 같은 권력이기에 때로는 이 왕권을 빼앗기 위해서, 자신의 친구들은 물론이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부모형제들까지도 서로 죽이고 하는
일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볼 때 비일비재 했던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외국에서 지체 높은 사람들이 와서는 유대의 왕이 태어났다고 하고, 그 유대인의 왕을 찾으러 왔다고 한다는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는 뭐, 요즘이라도 큰 사건이겠지요. 예를 들어서 무슨 사이비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정말 동서양의 고위당국자나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석학 같은 사람들이 한국이나 일본에 몰려와서, 아, 지금 이 나라에 새로운 왕이
태어났는데 우리가 만나러 왔다고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이렇게 된다면 21세기라 하더라도 여러 가지 풍파를 일으킬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동방박사들이 하는 말들이 좀 특이합니다. 그 사람들이 그러면 무슨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왕을 찾으러 왔는가 하면, 그게
아니라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다는 것이에요.
이 점에 대해서 어떤 과학자가 하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믿음이 있으신 분이십니다만,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요즘은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당시 천체를 재연할 수 있는데, 그 때 당시 목성과 토성이 어떻게 움직이고 하는 강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 강연을 들었을 때 대단히 흥미로워했습니다만 조금 의문이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만약에 당시 동방박사들이 정말 그 때 토성과
목성을 보고, 그 특이한 움직임으로 메시야 유대인의 왕 탄생을 알아냈었다고 한다면, 마태복음 2장 9절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마태복음 2장 9절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博士たちは、王の言ったことを聞いて出て行った。すると見よ。かつて昇るのを見たあの星が、彼らの先に立って進み、ついに幼子のいるところまで来
て、その上にとどまった。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이 기록에 의하면 동방박사들이 따라온 별이 앞서서 인도하다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 위에 머물러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해서 그들이 수소문하던 메시야가 탄생한 곳,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의 한 곳을 알아내어 찾아갔다고 합니다.
참고로 이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의 거리를 인터넷으로 찍어보니까 남쪽으로 9.6킬로 정도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요.
물론 구약에도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기록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 4절~6절을 봅니다.
마태복음 2장 4절~6절
“4.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王は民の祭司長たち、律法学者たちをみな集め、キリストはどこで生まれるのかと問いただした。
彼らは王に言った。「ユダヤのベツレヘムです。預言者によってこう書かれています。
『ユダの地、ベツレヘムよ、あなたはユダを治める者たちの中で決して一番小
さくはない。あなたから治める者が出て、わたしの民イスラエルを牧するからである。』」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동방박사가 유대인의 왕을 수소문한다는 말을 듣고 가장 긴장했던 사람은 바로 당시 왕이었던 헤롯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최고의
지식인층이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집합시킵니다. 그리고 야, 지금 외국에서 지식인들이 예루살렘에 몰려와서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고
하는데, 거기가 어디일 것 같으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성경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이 말하기를, 성경에는 베들레헴이라고 나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들이 인용한 구절은 구약 미가서에 있는 내용입니다.
미가 5장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ミカ書 5章2節
「ベツレヘム・エフラテよ、あなたはユダの氏族の中で、あまりにも小さい。だが、あなたからわたしのためにイスラエルを治める者が出る。その出現は昔から、永遠の昔から定まっている。」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이 기록을 알았던 그들은 메시야가 탄생하는 곳을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마태복음 2장 7절~8절을 봅니다.
마태복음 2장 7절~8절
“7.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そこでヘロデは博士たちをひそかに呼んで、彼らから、星が現れた時期について詳しく聞いた。
そして、「行って幼子について詳しく調べ、見つけたら知らせてもらいたい。私も行って拝むから」と言って、彼らをベツレヘムに送り出した。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그래서 헤롯 왕이 동방박사들에게 말하기를, 이봐 자네들, 성경에 의하면 메시야가 탄생하는 곳은 여기서 9킬로 정도 남쪽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곳이라고 하는데, 당신들이 가서 아기를 찾으면 나한테 알려달라 하고 말합니다. 그는 경배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지요. 자기도 아니고 자기 자식도 아닌 다른 인물이 왕이 된다고 한다면 이는 살려둘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그 아기를 죽이기 위해서 알아보라고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는 마태복음 2장 16절에 나오는 그 또래 아기의 대학살 사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 이제 동방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 곳이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베들레헴이 예루살렘에서 그리 먼 거리는
아니고, 그리고 베들레헴이 작은 고을이었다고는 합니다만, 초행길인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을 알아내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당시 베들레헴은 인구조사를 하기 위해서 몰려온 사람들 때문에 대단히 혼잡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마태복음 2장 9절에 의하면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그들을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이는 곳 위에 머물러 섰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안으로 들어가보았더니 아기와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예물을 드렸다고 마태복음 2장 11절에는 기록합니다.
이와 같은 성경 기록을 본다면 과연 정말 하늘에 있는 목성이나 토성 만을 보고, 어떤 대략적인 지역이 아니라, 그 혼잡한 베들레헴
중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 집을 정확하게 특정할 수 있었을까.
만일 그게 아니라면 정말 무슨 별이 나타나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 집 위에 정확하게 머물렀기 때문에 찾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만, 이는 그야말로 나중에 천국에 가서 이 동방박사님들을 만났을 때 물어봐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메시야 탄생을 동방박사들은 알았으나 막상 유대인들은 알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은 메시야가 오신다는 기록이 성경에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구약에
보더라도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말라기까지 구약 39권 속에 보면 계속해서 메시야가 오신다는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와 같은 성경 내용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메시야가 태어난다고 하면 그곳은 베들레헴이다 라고 하는
사실은 그들에게 있어서 상식과도 같은 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몰랐던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메시야가 <어디>에서 태어나실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았으나, 더욱 중요한 <언제>
태어나실 것인가에 대해서는 몰랐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알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경을 단지 지식으로밖에 알지 못하고, 지금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왕이 태어났다고 하면 누구보다도 헤롯 왕은 불안해집니다. 자신의 왕권이 흔들리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유대인의 왕을 본다면 초대 왕은 야곱의 막내 아들인 베냐민 지파 사울 왕이었습니다만, 그는 하나님께 순종을 다하지 않았기에
버림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왕위는 이 또한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 지파 다윗 왕으로 이어지게 된 다음에는 남북으로 갈라진
다음에도 남쪽 유다 왕을 계속해서 유다 지파가 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왕으로서 정통을 따진다면 다윗의 자손인 유다
지파입니다만, 그렇다면 헤롯은 어땠냐 하면 그는 에돔 족속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아들이 아니라 야곱의 형제, 에서의 후손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전혀 이스라엘 자손으로서는 정통성이 없습니다. 그래도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말하자면 로마한테 잘 보여서 간신히
거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는데, 이제 새로운 유대의 왕이 태어났다고 하니 긴장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오늘 본문에 의하면 불안해진 헤롯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소동했다고 합니다. 안절부절 못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하늘의 별을 보고 메시야 탄생을 알았던 그들은 어땠습니까.
마태복음 2장 10절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その星を見て、彼らはこの上もなく喜んだ。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그렇습니다. 그들은 기뻐했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 번 생각해보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00년 가까이 노예생활을 하다가 이제 모세의 인도 하에 애굽을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들의 인구는
남녀노소 모두 합해서 대략 200만명 정도가 되었을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홍해를 건너서 광야로 들어서게
되었지요. 하나님께 끝까지 순종하였더라면 그들은 머지않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아이고, 우리는 못합니다. 하고 물러서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꼼짝없이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게 됩니다. 그 광야라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거기는
먹을 거리는 고사하고, 마실 물도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그런 광야에서 2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40년이나 굶어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일부 과학자들은 성경이 거짓이다, 가짜다, 신화다, 꾸며낸 이야기다 라고 하면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역사나 기적을 억지로
왜곡해서 해석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던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그것은 화산이 분출한 것이다.
홍해가 갈라진 것은 그것은 바다가 아니라, 울창한 갈대 숲을 지난 것인데 그게 마치 바다 같아서 그렇게 바다가 갈라진 것이라고 적힌
것이다……신약에 보면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처음 만났다는 것은 그것은 무슨 벼락에 맞아서 본 환상이다……이런 식으로
억지로 꿰어 맞추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한 두 명도 아닌 2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광야에서 40일도 아닌
40년 동안이나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증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합니까.
출애굽기 16장 35절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イスラエルの子らは、人が住んでいる土地に来るまで、四十年の間マナを食べた。彼らはカナンの地の境に来るまでマナを食べた。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이 만나라고 하는 식량은 매일 아침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양식이었습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 만나를 먹었는데, 그런데
이게 참 묘합니다.
이 만나에 관한 기록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16장 19절~24절
19.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21.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22.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23.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24.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19.モーセは彼らに言った。「だれも、それを朝まで残しておいてはならない。」
20.しかし、彼らはモーセの言うことを聞かず、ある者は朝までその一部を残しておいた。すると、それに虫がわき、臭くなった。モーセは彼らに向かって怒った。
21.彼らは朝ごとに、各自が食べる分量を集め、日が高くなると、それは溶けた。
22.六日目に、彼らは二倍のパンを、一人当たり二オメルずつを集めた。会衆の上に立つ者たちがみなモーセのところに来て、告げると、
23.モーセは彼らに言った。「主の語られたことはこうだ。『明日は全き休みの日、主の聖なる安息である。焼きたいものは焼き、煮たいものは煮よ。残ったものはすべて取っておき、朝まで保存せよ。』」
24モーセの命じたとおりに、彼らはそれを朝まで取っておいた。しかし、それは臭くもならず、そこにうじ虫もわかなかった。
19.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20.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21.무리가 아침마다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고 해가 뜨겁게 쪼이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22.제육일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두목이 와서 모세에게 고하매
23.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24.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 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모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아침에 만나를 거두면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매일 아침마다 나가서 하루치 만나를
거두어야 그 날 먹을 양식을 거둘 수 있지, 그렇지 않고 쌓아두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다음 날에는 못 먹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만 보면 그래, 뭐 자연현상이다……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이 지키라고 하신 안식일. 이 날은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하셨고는데, 그러면 그 날 먹을 만나를 거둘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거두고 싶어도 안식일에는 이 만나가 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를 대비해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전날은 이틀 치를 거두어서 안식일까지 먹어도 되게 하셨습니다. 그 때는 안식일인 다음날까지
보관을 해도 냄새가 나지도 않고 벌레도 생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어떻게 단순한 자연현상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셨을까요. 아니, 그냥 좀 넉넉히 모아두고 필요에 따라서 먹을 수 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농사를 짓고 짐승들을 기르고 하면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아침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만나를 먹게 되다면 그들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생각해보세요. 처음에는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오늘 거둔 만나를 먹으면 이제 내일 먹을 것이 없어요. 내일까지 놔두면 벌레가 나고
냄새가 나서 못 먹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요? 예, 그렇습니다. 하늘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았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바로 이와 같은 가르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그들이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신명기 8장 3절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それで主はあなたを苦しめ、飢えさせて、あなたも知らず、あなたの父祖たちも知らなかったマナを食べさせてくださった。それは、人はパンだけで生きるのではなく、人は主の御口から出るすべてのことばで生きるということを、あなたに分からせるためであった。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거둔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우리가 사는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우리가 사는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으로 우리가 사는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시 동방박사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동방박사. 말이 좋아 동방박사이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막상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왕이 나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오히려 이방인이 그리스도 메시야의
탄생을 알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잠시 성경을 살펴봅니다. 구약성경 가장 마지막 장인 말라기를 보면 말라기 1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말라기 1장 11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日の昇るところから日の沈むところまで、わたしの名は国々の間で偉大であり、すべての場所で、わたしの名のためにきよいささげ物が献げられ、香がたかれる。まことに、国々の間で偉大なのは、わたしの名。──万軍の主は言われる──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그리고 마태복음 12장 21절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12장 21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異邦人は彼の名に望みをかける。」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고 이미
구약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지금을 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 아시아에서 훨씬 더 높임을 받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 이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십니다. 그와 같은 내용은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고 그 외에도 많은 곳에서 언급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어떠한 모습으로 오실지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7절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見よ、その方は雲とともに来られる。すべての目が彼を見る。彼を突き刺した者たちさえも。地のすべての部族は彼のゆえに胸をたたいて悲しむ。しかり、アーメン。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자, 그렇다면 언제 오시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만,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13절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日、その時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날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깨어있는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信仰の創始者であり完成者であるイエスから、目を離さないでいなさい。この方は、ご自分の前に置かれた喜びのために、辱めをものともせずに十字架を忍び、神の御座の右に着座されたのです。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예수님,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깨어있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의지하고 내 지식이나 내 노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 주님을 만날 날이 다가왔을 때, 당시 주님을 바라보지 못했던 헤롯
왕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소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만을 바라보던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기뻐했던 것처럼, 우리도 기뻐하고
기뻐하며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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