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사상적 동지이자 연적이 된 김단야
박헌영은 1924년 화요회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조선공산당의 창당을 위한 인적, 물적 자원 조달 활동을 하였다. 동시에 비밀리에 연락을 통해 국내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와 연락, 공산당 창당 계획을 알리기도 했다.
1925년 4월 17일 김약수, 김찬(김낙준), 조봉암, 조동호, 강달영, 허정숙, 정칠성 경성 소공동의 중식 식당 아서원(雅敍園)에서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의 창당하고 조직에 창당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4월 17일과 4월 18일 화요회 야체이카의 대표 자격으로 참여하였고, 바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에는 김재봉(金在鳳)이 임명되었으나 뒤에 박헌영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이후 잇단 체포와 탄압으로 공산당의 지도자들이 옥사하거나 병사한 것 역시 박헌영이 조선공산당 내에서 지도적인 위치로 오르는 요인이 되었다. 4월 18일 박헌영은 자신의 집에서 김단야·조봉암 등과 비밀리에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였고,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에 선출되었다.
공산당 창당 직후인 4월말부터 그는 직접 공산당의 창당을 알리는 격문과 서신, 홍보를 지하단체를 통해 각지의 학교 및 청년단체 앞으로 배부하였다. 언론을 통해 그는 일본의 제국주의를 비난하는 성명을 언론을 발표하고 격문으로 뿌렸다. 수감과 재판, 국외 탈출수감과 재판
1925년 11월 25일에 터졌던 신의주 사건을 계기로 11월 29일, 박헌영은 아내 주세죽과 함께 경성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됐다. 수감 후 악랄한 고문과 취조를 받았으나 박헌영은 조직책과 동료들의 은신처를 끝까지 비밀에 부쳤다. 주세죽은 약 3주 만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고, 박헌영은 열차편으로 경성으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1월 말경 박헌영이 신의주 사건을 계기로 당시 상하이에 체류 중이던 여운형에게 보내려던 보고서가 일제의 밀정에 의해 발각되어, 조선공산당 조직이 드러나면서 다른 간부들과 함께 체포, 구속되었다 . 그에게는 일왕에 대한 반역 혐의, 공산당 정당 조직, 폭력·선동 혐의, 노동자 파업 독려 혐의 등이 부과되었다. 수감 직후 박헌영은 고문을 당하였다. 1926년 6월 10일 황제 순종의 인산을 계기로 6·10 만세운동이 개최되었다. 옥중에서 그는 6·10 만세운동의 배후 주모자로 몰려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했으나. 총독부 경찰은 끝내 그가 6·10 만세운동을 선동했다는 혐의점을 찾지 못한다.
1927년 9월 14일자 매일신보. 신의주 재판 첫 공판을 다룬 기사 내용이다. 1927년 9월 13일 박헌영은 신의주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첫 공판에 나온 101명의 피고인 중 그에게 발언 기회가 오자 그는 '공산주의의 목적은 해방의 정의와 실현'이라며 무죄를 주장하였다. 재판장과 법관들이 조용하라고 하였으나 박헌영은 계속 자기 주장을 역설하였으며, 박순병이 고문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들을 살려내라'며 안경을 던지고 재판정에 달려들었다.
그의 다른 동료들도 같이 달려들었고, 총독부 경찰은 그들을 바닥에 쓰러뜨린 다음 무지막지하게 구타하였다. 박헌영이 광인처럼 난동을 부리자 일본 경찰과 간수들이 달려들어 그를 끌고 나갔다. 일본 경찰과 간수들에 의해 끌려나온 박헌영은 형무소로 돌아간 뒤, 심한 폭행과 구타를 당해야만 했다. 동지들의 죽음과 계속된 고문으로 박헌영의 정신과 육체는 피폐해져 갔다. 감옥 안에서 동지인 박순병, 박광흠, 박길양, 권오상 등이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감옥에서 사망했다. 한편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당수 차금봉을 비롯한 공산당 간부가 체포, 구속되어 옥사, 희생됨으로써 그는 조선공산당을 지도하는 위치에 올라서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