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교과서 이야기 13
<최소한의 상도덕(business morality )>
다음에 쓸 내용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니 거의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다. 오늘 얘기는 교과서 집필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제목을 붙인대로 최소한의 상도덕에 관한 것이다. 나는 정말이지 이 부분을 묵과하기 힘들다.
내가 2007, 2009, 2015 한국사 교과서를 집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2007이었다. 물론 2015 때도 대거 새롭게 들어온 다른 출판사의 혈기왕성한 선생님들에게 뒤져서는 안 되겠다는 강박이 있었기 때문에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렇지만 2009나 2015는 그래도 기존에 집필한 내용이 있어서 이를 토대로 했기 때문에 2007때보다는 수월한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로 나는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에 교과서 집필 과정에서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성과를 내기가 어렵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나보다 능력있고 공부가 깊은 집필자는 많아도, 나보다 열심히 노력한 집필자는 없다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각설하고, 3개 교육과정의 교과서를 연속으로 집필하다보니 본문 서술 말고도 세 교과서에 서로 겹치는 내용이 있다. 내가 쓴 일제 강점기 단원에서 1면 특집 중에 3개 교과서에 공통으로 나오는 것은 두 가지가 있는 데 그 제목은 다음과 같다.
"이회영과 형제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일제 강점기 경제 개발 어떻게 볼 것인가?"
이 두 주제는 내가 워낙 심혈을 기울여 썼기 때문에 교과서가 바뀌더라도 포기하기 힘들었다. 후자의 경우는 집필 시작할 무렵에 구상하여 가장 늦게 원고를 완성하였다. 순수 집필에만 1주일은 매달린 것 같다. 때마침 허수열 선생님의 "개발없는 개발"이라는 책이 발간되었고, 나는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가면서 그 책을 샅샅이 훑었다. 고등학교 때 교과서 이래로 내가 가장 열심히 본 책인지도 모르겠다. 교과서가 간행되었지만 내용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워 새로 집필할 때마다 내용의 일부를 수정하였다.
전자의 경우엔 일단 이회영 선생의 부인 이은숙 여사의 '서간도 시종기'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대학 다니는 제자에게 부탁하여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봤다(이 책은 어설프지만 pdf 파일로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혹시 이회영 여섯 형제의 사진을 구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 등에서 우당 기념관의 이종찬 관장님과 30여분에 걸쳐 인터뷰를 하였다. 내가 쓰고자 하는 내용에 대해 하나하나 감수를 받았다. 혹시 내용 중에 후손분들이 알고 있는 사실과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도 하면서......
집필 과정의 일은 길게 주절대는 이유는 남들은 쓰윽 훑고 지나가는 원고라도, 집필자들의 깊은 고민과 노력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이 쓴 글을 보고 대충 축약하고 짜깁기 하여 가져다 쓰면 안 되는 것이다.
2009에 이어 2015 한국사에서도 미래엔에 이어 채택률 2위를 기록한 비상교육 출판사의 한국사 교과서에 대해 앞의 몇 가지 이야기에서 나는 강한 불만을 드러내었다. 그 결정적인 내용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번에 비상 교과서에 전자에 언급한 이회영 관련 하단 코너가 실려있다(172쪽). 그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자.
(아래 첨부된 사진을 살펴보면서 보시길. 순서대로 2007, 2015 미래엔, 2015 비상교육이다)
2015 비상 교육의 하단 코너 제목 :
"이회영 형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2007, 2009, 2015 미래엔의 1면 특집 제목
"이회영과 형제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첨부 사료
2015 비상 교육 :
"8월 초에 여러 형제들이 모여서 같이 만주로 갈 준비를 하였다.
비밀리에 땅과 집을 파는데, 여러 집을 한꺼번에 처분하니 얼마나 어려우리요. 그때만 해도 여러 형제들 집은 예전 대갓집이 그렇듯이 종살이를 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고…… 우리 집 어른(이회영)은 위아래 구분 없이 뜻만 같으면 동지로 대접하였다. …… 1만여 석의 재산과 가옥을 모두 팔고 경술년(1910) 12월 30일에 큰집, 작은집이 함께 압록강을 건너 떠났다."
- 이은숙, 『민족 운동가 아내의 수기, 서간도 시종기』
2007 미래엔
"8월 초에 여러 형제분이 모여서 같이 만주로 갈 준비를 하였다. 비밀리에 땅과 집을 파는데,여러 집을 한꺼번에 처분하니 얼마나 어려우리요. 그때만 해도 여러 형제분 집은 예전 대갓집이 그렇듯이 종살이를 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고, …… 우리 집 어른(이회영)은 옛날 범절을 따지지 않고 위아래 구분 없이 뜻만 같으면 악수하여 동지로 대접하였다. …… 1만여 석의 재산과 가옥
을 모두 팔고 경술년(1910) 12월 30일에 큰집, 작은집이 함께 압록강을 건너 떠났다."
- 이은숙,“민족 운동가 아내의 수기, 서간도 시종기”-
(2009, 2015 미래엔 한국사는 디자인 과정에서 서술 내용을 줄여야 했기 때문에 사료 일부를 줄였다.)
복사해서 붙이기 한 것처럼 한 글자도 다르지 않고 그대로이다. 달라진 것은 책 제목에 붙은 도서 표시 부호뿐이다. 그러면 이게 공개된 사료이기 때문에 막 가져다 써도 되는가? 내가 보기에 이 부분 집필자는 이은숙 여사의 책을 본적이 없다. 실제 책의 원문이 교과서에 실린대로 되었을 것이라고 보면 안 된다. 이것은 내가 학생들이 읽기 좋게 적절한 부분을 발췌하여 가다듬은 것이다.
본문 내용도 살펴보자. 비상교육은 하단 코너이기 때문에 미래엔에 비하여 내용이 짧다.
2015 비상교육
"명문가이자 갑부였던 이회영 집안의 6형제는 국권 피탈 이후
많은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남만주 삼원보에 신한민촌을 만들고, 신흥 강습소를 세워 무료
로 운영하면서 민족 교육과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이회영 형제들은 독립운동을 벌이면서 많은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다섯째인 이시영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숨지거나 생활고를 겪기도 하였으며, 병으로 세상을 떠나기도 하였다. 이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면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맞는 도덕적 의무)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다."
2015 미래엔(2007, 2009 모두 내용이 같다)
"이회영 형제들이 만주로 망명하면서 처분한 전 재산은 오늘날의 가치로 최소 600억 원에서 수천억 원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이들은 이를 바탕으로 남만주 유하현의 삼원보에 신한민촌을 건설하고, 신흥 강습소를 만들어 무료로 운영하면서 민족 교육과 독립군 양성을 추진하였다. 척박한 땅을 손수 일궈 논밭을 만들었지만, 때로는 양식이 떨어져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오로지 독립운동에 전념하다 보니, 이회영 일가가 겪은 희생과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이회영 자신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숨졌고, 그 형제들은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대부분 병사하거나 일가족이 몰살당하기도 하였다. 여섯 형제 중 유일하게 다섯째인 이시영만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국무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광복 후 초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많은 애국지사가 있지만, 이회영 형제들처럼 온 집안이 전 재산을 쏟아부어 독립운동에 투신한 경우는 흔치 않다. 더욱이 이 집안은 당대 최고의 명문가이자 갑부였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고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안락한 삶을 포기 하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갔다. 그리하여 우리 역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의 귀감으로 우뚝 섰다."
내용을 좀 축약하고 단어 몇 가지 바꾼다고 표절 아닌가? 난 비상 집필자가 2007 미래엔에 실린 내용을 보고 축약해서 쓴 것이라고 100% 확신한다. 다른 어느 책도 참고하지 않았다. 묻고 싶다. 부끄럽지 않나? 집필자로서 자존심도 없나?(확인하지 않았지만 예전에 중학교 교과서에서도 이 내용을 쓴 책이 있었다. 비상에서 혹시 중학교에 썼던 내용을 가져와 쓴 것인지는 모르겠다. )
여하튼 채택률 1, 2위 교과서에 같은 제목, 같은 내용의 주제가 하단 코너와 1면 특집으로 실려있다는 것이 너무 황당하지 않은가? 미래엔 집필자가 바뀌지 않고 거의 그대로라는 것은 출판계에서 모르는 경우가 없다. 나 자신도 집필자로서 나름 알려질만큼 알려졌다. 본문 슬쩍슬쩍 베껴쓰는 것도 모자라 코너까지 도용하나? 참 자한당스럽다. 검정 2위 교과서에서 박근혜표 국정 교과서가 하던 짓을 다시 봐야하는 참담함을 어케 말로 설명할까? 실로 이회영 관련 내용을 쓰지 않는다면, 이 부분에 하단 코너로 쓸 내용이 없을까?
이 지점에서 또하나 문제는 검정 과정이다. 미래엔에 대해 다른 교과서와 보조를 맞추라는 수정 권고를 한 검정위원들은 왜 이 부분을 비상에 주의를 주지 않았는가? 표절은 검정 탈락의 사유가 된다. 이거는 검정위원의 직무유기이다.
아직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법적 검토를 하고자 한다.
이 글을 읽으시는 선생님들 중에 단 한 분이라도 비상에 쓴 내용이 미래엔 것과 무관하다는 점을 근거를 들어 자신있게 말씀해 주시는 분이 계시면, 이 글을 내리고 비상에 사과할 것이다.
서두에 한국사 교과서 이야기의 밑천이 다 떨어진 말씀을 드렸다. 이제 또 온라인 수업 준비에 바쁘다. 교과서를 하나하나 계속 들여다 보면, 또 하고 싶은 말들이 나올 것이다. 지금은 그저 대충 훑어보기만 했다. 사실은 더 보려는 의욕이 생기지는 않는다.
다음부터는 기회가 되면 미래엔 한국사 교과서에 국한된 글을 좀 쓰고자 한다. 미래엔 한국사 교과서를 선전하는 것도 되지만 내 생각을 정리하는 의미도 있다.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향후 교과서를 집필하시는 분들에게도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위에 올린
한국사 이야기 13에 있는 미래엔 한국사 교과서에 인용된 이회영 선생 부인 이은숙 여사의 '독립 운동가 아내의 수기, 서간도 시종기'과 관련하여 내가 교과서에 인용했던 부분의 원문을 옮긴다. 누군가 이 내용을 압축해서 교과서에 싣는다면 정말 내가 했던 것과 글자 하나 틀리지 않게 똑같이 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 확률이 얼마나될까?
앞으로 혹여 이 사료를 활용하실 분이 있으면 이 내용을 가지고 재구성해서 사용하시길..."8월 회초간(晦初間)에 회환(回還)하여 여러 형제분이 일시에 합력하여 만주로 갈 준비를 하였다. 비밀리에 전답과 가옥, 부동산을 방매(放賣)하는 데 여러 집이 일시에 방매를 하느라 이 얼마나 극난하리요. 그때만 해도 여러 형제 집이 예전 대가의 범절(凡節)로 남종 여비가 무수하고 하속(下屬)의 입을 막을 수 없는데다 한편 조사는 심했다.
우당장 한 분이 옛 범절과 상하 구별을 돌파하고, 상하 존비들이라도 주의(主義)만 같으면 악수하여 동지로 대접하였다. 팔도에 있는 동지들께 연락하여 1차로 가는 분들을 차차로 보냈다. 신의주에 연락 기관을 정하여 타인 보기에는 주막으로 행인에게 밥도 팔고 술도 팔았다. 우리 동지는 서울서 오전 여덟시에 떠나서 오후 아홉시에 신의주에 도착, 그 집에 몇 시간 머물다가 압록강을 건넜다.
국경이라 경찰의 경비 철통같이 엄숙하지만, 새벽 세시 쯤은 안심하는 때다. 중국 노동자가 강빙(江氷)에서 사람을 태워 가는 썰매를 타면 약 두 시간 만에 안동현에 도착된다. 그러면 이동녕씨 매부 이선구씨가 마중 나와 처소로 간다. 안동현에는 우당장이 방을 여러 군데 여러 동지들이 유숙할 곳을 정하여 놓고 국경만 넘어가면 준비한 집으로 가 있게 하였다.
우리 시숙 양석장은 우당 둘째 종씨인데, 셋째 종숙 댁으로 양자 가셨다. 양가 재산을 가지고 생가 아우들과 뜻이 합하셔서 만 여석 재산과 가옥을 모두 방매해 가지고 경술년 12월 30일에 대소가가 압록강을 건너 넘어갔다."
이은숙, 『민족 운동가 아내의 수기, 서간도 시종기』(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 인물연구소, 1981, 46~48쪽
미래엔 교과서에 인용한 원문
"8월 초에 여러 형제분이 모여서 같이 만주로 갈 준비를 하였다. 비밀리에 땅과 집을 파는데, 여러 집을 한꺼번에 처분하니 얼마나 어려우리요. 그때만 해도 여러 형제분 집은 예전 대갓집이 그렇듯이 종살이를 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고, …… 우리 집 어른(이회영)은 옛날 범절을 따지지 않고 위아래 구분 없이 뜻만 같면 악수하여 동지로 대접하였다. …… 1만여 석의 재산과 가옥을 모두 팔고 경술년(1910) 12월 30일에 큰집, 작은집이 함께 압록강을 건너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