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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이야기 스크랩 서원의 제향의례
우보만리 추천 0 조회 146 12.09.09 23: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서원의 제향의례

 

서원은 지역에 세워진 사립 고등교육기관으로 선례후학(先禮後學)이라는 두 가지 특별한 기능을 갖고 있다. 전자는 훌륭한 인물을 높이고 오래도록 기리고자 사당을 세워 선현에게 향화(香火)를 올리는 ‘제향기능’이고, 후자는 선현의 학덕을 계승코자 학교를 세워 많은 인재를 길러내는 ‘강학기능’을 말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고 일제 이후 근대교육이 유입되면서 강학기능은 끊어지고 오늘날에는 제향기능만 겨우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서원에서의 제향의식은 선현의 업적을 찬양하고 그분의 얼을 이어받고자 해마다 정한 날에 향중 유림들이 모여 정성껏 향사례를 거행하는 데서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는데, 소수서원의 경우 나라의 으뜸 서원답게 제례의 의미 또한 가볍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당시 관학(官學)이었던 성균관과 향교 등이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피폐일로에 있을 무렵, 성균관의 문묘(文廟)와 향교 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중국의 특정 인물들을 주ㆍ배향(主ㆍ配享)했다. 이때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소수서원은 과감하게 우리 나라의 인물 중에서 국태민안과 국학발전에 공이 큰 분을 주ㆍ배향하여 당시 사대모화(事大慕華)의 풍토 속에서도 민족교육의 기치를 높였다. 이를 계기로 각지에 세워진 서원들도 본받아 대부분 우리 나라의 인물이나 향중 인물을 주ㆍ배향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지배적 사상이요 학문인 성리학을 처음으로 전수하여 동방 성리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문성공(文成公) 회헌 안향을 추모하고자 신재 주세붕이 회헌의 고향인 순흥 죽계수상에 백운동사당을 세운 것이 소수서원의 시초다.

사당을 세운 이듬해에 강학시설을 마련하여 서원 규모를 갖춘 뒤, 회헌 영정을 사당에 봉안하고 원규(院規)를 제정하여 매년 음력 3월과 9월 춘추로 초정일(初丁日)에 제향토록 했다. 지금은 회헌 영정이 별도의 장소에 봉안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사당에 함께 모셨던 이유가 있다.

일찍이 남송 때 주자가 선현의 화상을 사당에 모셨으나 오랜 세월로 낡아 제 모습을 잃게 되어 새로 그렸다. 그러나 예전 같지 않은 선현의 화상에 주자는 “터럭 끝 하나라도 맞을 리 없으니 어찌 선현의 참모습이라 하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그때부터는 문자신위인 위패(位牌)만 봉안하게 되었다.

그 뒤 퇴계 이황이 후임 군수로 부임하여 “서원의 제향절차가 「가정의례」처럼 너무 단순하고 구차하여 결점이 없지 않은바, 이번에 성균관 석존대제(釋尊大祭)의 의례절차를 따라 정정 보완하게 되었다”라는 글을 남겨 개정 사실과 근거를 밝힘으로써 훗날 시비곡직(是非曲直)이 없도록 했다.

이때부터 소수서원은 다른 서원들과 비교되는 제향의례를 시행해 왔는데, 그 중 문묘제의에 준하는 제향의식을 행하게 된 점이 특이하다. 성균관(문묘)과 향교(대성전)에서는 춘추 석전대제를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거행하므로 이 행사와 달이 겹치지 않도록 소수서원은 음력 3월과 9월 상정일(달리 초정일이라고도 함)로 정하되, 유고가 생기면 중정일(中丁日)에 드리도록 한 것도 그 특성 중 하나다. 특히 우리 나라의 24절기 가운데 삼월 삼짇날(음력 3월 3일)과 중양절(음력 9월 9일)을 기준 삼아 문성공의 제례일로 정한 것은 씨뿌리고 거둠과, 만물의 소생과 수확의 기쁨을 때를 따라 천지신명께 감사한 데서 연유한 것 같다.

또한 중국에서 시작된 유교가 중국에서는 남송시대의 주자 이후 유맥(儒脈)이 끊어졌지만, 고려 말 안향에 의해 우리 나라가 그 도풍(道風)을 이어받게 된 것을 찬양한 주세붕의 <도동곡(道東曲)>을 매번 춘추 향례 때 삼헌관들이 초ㆍ중ㆍ종장으로 나누어 창을 하는 것도 독특한 점이다.

유림들이 모여 제사를 드리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번거롭기는 하나 엄숙하고 정성을 다하는 모습은 다른 종교들 못지않게 참으로 진지하다. 연중 크고 작게 드리는 제향의례는 크게 정기적인 것과 부정기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정기적 제향으로는 춘ㆍ추 제향과 새해 정초인 정월 초닷새에 사당을 참배하는 세알례(歲謁禮), 매달 초하루ㆍ보름에 유사(有司)들이 드리는 알묘분향례(謁廟焚香禮) 등이 있으며, 부정기적 제향으로는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드리는 고유제(告由祭)와 특정인이 사당을 참배하는 알묘봉심례(謁廟奉審禮) 등을 들 수 있다.

춘ㆍ추 제향을 위해 향사일 10일 전에 제유생 출문당회(諸濡生 出文堂會)를 열어 그날 참석한 유림들이 삼헌관(초헌ㆍ아헌ㆍ종헌관)과 육집사 등의 제관들을 뽑고 향사에 관한 회무를 진행한다. 이때 선임된 제관에게는 서원 유림 명의로 소임을 다해 달라는 정중한 서신을 보내는데, 이것을 망기(望記)라고 한다. 망기는 깨끗한 소반에 받쳐 놓고 절을 한 뒤 받는데, 예전에는 사람을 보내 전달했으나 지금은 우편을 이용한다. 또 망기를 받게 된 자가 상을 당했거나 아파서 소임을 행할 수 없을 경우에는 복단(腹單) 또는 병단(病單)이라는 사직서를 보낸다. 이것을 단자(單子)라고 하며, 특별한 사유 없이 단자를 내면 본인의 명예가 실추되고 서원에는 실례를 범하는 게 된다.

제향은 과거에는 전날 입재(入齋)를 원칙으로 했으나 요즘은 시대적ㆍ세태적 환경변화로 당일 입재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입재는 제향에 참석하기 위해 서원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며, 반대로 제향을 마치고 서원 문밖을 나가는 것을 파재(罷齋)라고 한다. 예전에는 입재에서 파재까지 사흘의 기간이 필요했으며, 미리 와서 몸과 마음을 재계하고 제수를 준비한다는 뜻에서 습례(習禮)라고도 했다.

제수 가운데 희생(羲牲)은 전날 마련한다. 예전에는 소를 썼으나 농경사회에서 소가 귀하다 보니 염소로 대체하여 쓰다가 지금은 구하기 쉬운 돼지를 제물로 쓰고 있다. 서원 문밖 성생단(省牲壇)에서 제관들의 심사와 간단한 제의과정을 거쳐서 잡는다.

제관 각자의 수임 사항을 확인하고 경건하고 엄숙한 제례가 되도록 집사분정(執事分定)을 하는데, 이 자리에서 각자 맡을 역할을 정하고 이를 기록하여 분정판(分定版)에 붙인다. 이렇게 일정 장소에 제관들이 모이는 것을 ‘개좌(開座)’라고 하며, 이때 좌중 대표자가 “개좌합시다”라고 외치면 참석자들이 제향에 차질 없도록 여러 의견을 나눈다.

개좌 절차를 마치면 자리에서 모두 일어서고 “파좌합니다”라는 대표자의 외침에 따라 각자의 맡은 자리로 돌아가는데, 이를 ‘파좌(罷座)’라고 한다.

 

소수서원은 사당의 명칭을 문성공묘라고 붙여 문묘와 대등하게 했으며, 문성공 회헌 안향 선생을 주향(主享)하고, 이어 그의 방손인 문정공 근재 안축, 문경공 안보를 배향(配享)했으며, 다시 문민공 신재 주세붕을 추향(追享)했다.

제물은 향례진설도(享禮陳設圖)에 정한 대로 드리나 요즘 구하기 힘든 것은 약식으로 대체하기도 한다. 돼지머리ㆍ소갈비ㆍ방어ㆍ상어ㆍ조기 등의 생고기, 멥쌀ㆍ피쌀ㆍ기장쌀ㆍ좁쌀 등 생곡식, 무ㆍ미나리ㆍ정구지를 다듬어 묶은 생채소, 밤ㆍ대추ㆍ호두ㆍ배ㆍ사과 등 생과일, 그리고 떡과 말린 고기(육포, 건태)와 명주 반 필을 정사각으로 접어 폐백으로 함께 올린다.

퇴계는 그의 문집 『속집(續集)』에 남긴 대로 “무릇 제사는 정성으로 드리는 것인 만큼 그릇이 정결하여야 하고, 희생은 살찐 것으로, 술은 잘 빚어 향기로워야 하며, 제수에 쓰이는 물품은 모두 흠 없이 정결하여야 하되, 화려하여 사치스러운 것보다 검소한 것이 좋다”고 하고 “신이 흠향하시는 것은 정성의 향기인 만큼, 정성의 가치에 따라 신의 강림함이 매우 밝아 삼가지 아니 할 수 없다”라고 기술했다.

이렇듯 서원에서의 제향의식은 선현의 업적을 찬양하고 그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향중 유림들이 모여 정성껏 향사례를 거행한다. 그 과정을 통해 수기필경(修己必敬, 심신을 닦아 성현의 경지에 이름)하고 입사필성(立事必誠, 매사를 반드시 열성을 다함)하여 극기복례(克己復禮, 항상 자신을 다듬어 예의 근본자리로 되돌아감)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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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홍

소수서원 학예연구원이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경북전문대에 출강하고 있다

 

글 출처 : 문화와 나/2002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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