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는 단종(端宗)의 정비로, 1454년에 간택령에 따라 왕비교서를 받고, 즉위하였다.세조에 의해 남편 단종이 강등되면서 군부인(君夫人)으로 격하되었다가, 관비가 되었다. 한때 신숙주가 그녀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으며 이에 세조는 그를 노비이지만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냈고, 82세로 세상을 떠날때까지 그곳에서 남편 단종의 명복을 빌며 평생을 보냈다고 한다.
6호선 창신역 3번 출구로 나와서 위로 올라 간다.
낙산 공원 이정표가 나오면 길을 따라 위로 계속 올라간다.
이곳에서 우리는 정순왕후 유적지 답사를 시작한다. 좌측으로 내려가면 이화벽화마을 방향이고 왼쪽으로 내려가면 자주동샘, 비우당쪽으로 내려 간다.
비우당
비우당은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실학자 지봉 이수광(1563-1628)이 저서 ‘지봉유설’(芝奉類說)을 지은 곳으로 알려졌다.
집터에는 이수광이 살았던 집을 복원해 놓고 있는데 부엌 1칸, 방2칸으로 이루어진 조선시대 전형적인 서민가옥 형태를 하고 있다. 원래 이수광의 외가쪽 인물로 청백리로 널리 알려졌던 유관이 살았던 집을 이수광이 고쳐지어 살았다고 전해지는 집이다. 현재의 가옥은 최근에 옛모습을 복원한 것으로 실제 초가집과는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조선시대 한양에 거주했던 선비들이 소박하게 살았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자지동천
자주동샘 옆에는 자주물이 든 명주를 널어 말리던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는 '자지동천(紫之洞泉)'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자주동샘
정순왕후가 폐위된 뒤 빨래를 했던 곳으로 단종비가 시녀들과 함께 샘에 지초(芝草) 뿌리를 풀어 저고리 옷고름이나 댕기에 자주색 물감을 들이는 일을 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단종비를 돕기 위해 여인시장 상인들이 옷감을 염색하는 일을 맡겼다고 한다.
비우당 옛터 비석
정업원터
정업원 터의 조그만 비각 안에는 영조가 1771년 단종비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비각은 평소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비석을 보기 어렵다. 창살 틈새로 보면 비석 정면에
'淨業院'이란 글귀만 겨우 들여다보인다. 훗날 영조가 이곳이 정순왕후가 머물렀던 곳임을
알게 되어 영조47년(1771)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석을 세워 표지로 삼도록 하였다.
현판(前峰後巖於千萬年)
비각 현판에는 영조가 썼다는 '前峯後巖於千萬年 歲辛卯九月六日欽涕書'(전봉후암어천만년 세신묘구월육일흠체서)라는 글귀가 있다. '앞산 뒷바위 천만 년을 가오리 신묘년(영조 17) 9월 6일에 눈물을 머금고 쓰다'라는 뜻이다.
이곳은 조선 시대 양반가 여인들이 비구니로 출가하면 거처하던 곳으로 단종비는 이곳에서 출가해 스님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청룡사
청룡사는 고려 후기 성리학자인 익제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딸이며 공민왕의 비(妃) 혜비(惠妃)가 이곳에 거주하였으며, 조선 초 태조의 딸 경순공주(慶順公主)가 여기에서 머물렀다. 또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가 이곳에서 출가하여 평생 수행하였다
우화루(雨花樓)
폐위된 단종은 영월로 유배를 떠날 때 이곳에 잠시 들러 "비가 꽃처럼 내린다"는 이곳에서 단종비와 마지막 밤을 보냈다고 한다.
우화루를 지나 지하 화장실로 가는 계단 오른쪽에 난 작은 쪽문으로 들어서면 단종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정업원 터가 나온다. 정업원은 왕실가 출신 여인들이 출가해 머물던 곳으로, 단종비는 이곳에서 시녀 3명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대웅전
현재의 대웅전은 1973년 극락전 자리에 터를 넓혀서 정면 5간, 측면 2간의 팔작지붕으로 지었으며 ‘대웅전’현판은 청남 오제봉(吳濟峰)의 글씨이라 한다.
심검당
심검당은 대웅전 앞 왼편, 명부전 아래에 있다. 심검당이란 참선을 하는 도량이라는 의미이다.
동망각
매년 가을 길일을 택하여 동망각에서 정순왕후의 넋을 기리며, 마을 주민들의 무사 안녕과 평온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고 있다.
단종 비 정순왕후는 왕비로 간택했지만 남편에게 사약을 내리고 영원히 이별하게 한 세조보다 53년을 더 살았다. 덕종, 예종, 성종, 연산군 등 세조 자손의 죽음도 지켜본 후 1521년 6월 82세로 생을 마감했다.
중종은 정순왕후가 승하하자 대군부인의 예로 해주 정씨 사가의 묘역에 조영(造營)하도록 했으며, 숙종은 1698년 단종과 정순왕후를 추숭해 종묘 영녕전에 들였다. 이때 '어그러짐이 없고 화합하라'는 뜻에서 시호를 '정순'(定順)이라 하고, '평생 단종을 밤낮으로 공경함이 바르다' 해서 능의 이름을 사릉(思陵)이라 지었다.
조선 영조는 1771년 친히 '동망봉'(東望峰)이란 글씨를 써서 이곳 바위에 새기게 했지만
일제강점기에 채석장이 되면서 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동망정
동망봉은 남편을 떠나보낸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올라 단종이 있던 영월 방향을 바라보고 명복을 빌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곳으로, 지금의 동망정은 단종 비를 기리기 위해 훗날 지었다고 한다.
영도교
단종이 그의 숙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도 영월로 귀양갈 때 그의 비 정순왕후 송씨가 18세의 나이에 영월로 떠나는 단종을 이곳까지 나와 서로 이별하였으므로 영이별 다리, 또는 영영 건너가 버린 다리라는 뜻으로 전해 오다가 성종이 친히 영도교라 명명하였다.
단종은 1441년(세종 23)에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는 문종이 세자이던 시절 소실로 들어왔다가 두 명의 세자빈이 폐출된 후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단종을 낳고 사흘 만에 죽었고, 후에 추존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에는 문종의 즉위와 함께 왕세자가 되었으며, 1452년(문종 2) 5월에 문종이 죽으면서 나이 불과 12세 왕위에 올랐으나, 즉위 1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이 일으킨 정란(靖亂)으로 유명무실한 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