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근한 물
이영숙
햇살과 바람을 체에 치고 그늘을 용량대로 섞어 치댄 낮을 발효시킵니다 조금 부풀어 오른 낮을 밀대로 밀어 진정시킨 후 도톰하고 네모나게 썬 소음을 중앙에 얹고 양 끝을 접어 중간에서 세심하게 봉합해 줍니다 다시 밀대로 밀어 평평해진 낮을 바닥에 두 손 포개듯 가로로 세 겹 접고 세로로도 세 겹 접고 잠시 쉬어가며 이 과정을 수차례 반복합니다 소음의 겹이 켜켜로 증식합니다 낮의 강력과 박력이 또 한 번의 발효를 거쳐 구워져 질감과 맛이 부드러운 수십 겹 수백 겹의 밤이 되는 건 페이스트리 빵을 만드는 과정과 흡사합니다 하룻밤은 대략 이틀의 발효를 거쳐 완성됩니다
겉은 파삭해도 속은 촉촉한 밤을 결대로 찢어먹거나 부랑자와 멧비둘기, 나팔꽃들은 밤의 휘장을 한 장씩 받아 두른 채 저마다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 상처를 핥거나 밤을 지키느라 나뭇잎 밟는 소릴 내는 족속도 있습니다 밤은 수요를 다 채우고도 남아돌지만 상하는 일은 없습니다 뜨거운 물 반 차가운 물 반 이런 조합에선 쇳내가 납니다 비등점을 지나온 물에 무수한 겹이 생깁니다 뭉근한 속도로 끓어오른 뜨거운 차를 훌훌 불며 마시는 동안 시시각각 물은 밤과 몸을 적시며 머그컵에서 뭉근하니 식어갑니다
몸은 캄브리아시대부터 현생누대에 이르는 지층을 모두 간직하고 있어서 어느 날 불쑥 석탄기나 백악기 부위가 융기하기도 합니다 고사리 화석이라도 출토되는 날이면 몸은 여러 날 앓아요 병이 오는 방식입니다 어스름에 이끌려 몸은 집 밖으로 나가기도 합니다 각기 다른 온도의 생경한 지점들을 통과하며 흘러드는 물을 겹겹이 쌓아 올려 화석연료처럼 검은 석촌호수에서 오늘도 초승달배가 오락가락하네요 배에 탄 이들과 걷는 이들 중 누가 더 영양가 높은 밤을 먹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배를 타거나 걷거나 한 몸으로 두 가지를 동시에 이행할 수 없어서 우리는 호수의 안팎에서 불빛 어린 미지근한 물을 내려다봅니다
―《시와반시》 2024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