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 기록하다 [후지/後識]
아, 부군께서 돌아가신지 이미 4백여 년이 되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유문(遺文)의 아름다운 자취가 기송(杞宋)1)에는 징험(徵驗)할 문헌(文獻)이 없으니 어찌 만에 하나라도 알 수 있겠는가. 부군은 보백당 대조(寶白堂 大祖)의 초손(肖孫)으로 우뚝이 빼어난 사람으로 생장하였다.
영가(永嘉)2)에서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뜻을 품었는데 남보다 뛰어난 용력이 있어, 일찍이 무과(武科)에 등제하여 임기가 종료되어 물러나 화산(花山)의 동쪽 산기슭에 작은 정자를 짓고 낙동강 가를 거닐며 유유자적하면서 물고기 낚시에 흥취를 붙이고 여생을 보냈다. 서애 류선생(西厓 柳先生)이 정자를 왕래하며 굽어보시고 정자를 ‘어락(魚樂)’이라 당호(堂號)했는데 훗날 또 이곳에 다시 들렸더니 부군(府君)은 이미 세상을 떠나 선생은 슬픈 마음을 가눌 길 없어 절구 시 한수를 읊고 벽상에 써 놓았으니
외로운 정자는 의구히 섰는데3) 옛 주인은 간데없구나 孤亭猶在主人亡 고정유재주인망
세상사 창망하니 거친 세월 덧없어라. 雲物蒼茫歲月荒 운물창망세월황
가을 풀 뜰에 차오르고 오솔길4)은 막혔는데 秋草滿庭行逕沒 추초만정행경몰
한 떨기5) 산국화여 누구를 위하여 향기를 품는가. 一叢山菊爲誰香 일총산국위수향
라 하였다.
짧은 서문에 이르기를 “김세상(金世商)은 비록 무인(武人)이지만 효우가 뛰어난 사람으로 고향 마을에서 칭송하였다.”라 하였다. 선생의 시(詩)와 서문(序文)에서 백세동안 의심이 없도록 징험할 수 있었으니 부군(府君)께서는 충효(忠孝)를 모두 겸하여 온전한 것을 여기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선조의 남은 자취가 아주 없어져 전하는 것이 없으니 무얼 한(恨)하겠는가마는 후손들도 권세와 살림이 줄어서 보잘 것 없이 되었으니 어찌 옛 땅과 선조께서 지은 정자를 지킬 수도 없었기에 소주(韶州)의 실업리(實業里)로 이거한지 세월도 이미 오래되고 옛 땅은 멀고 선조께서 지은 정자가 무너졌으니 아픔을 머금고 한(恨)을 품고 감이 더욱 막심하였다.
지난 광복 후 2년인 정해년[1947년]에 문중의 부형(父兄)들이 서로 모여 의논하고 힘을 도모하여 살고 있는 곳의 곁에 중건하고 옛것을 그대로 써서 이때 문미에 ‘어락(魚樂)’의 현판(懸板)을 걸었으니 부군(府君)의 존령(尊靈)이 평안하시고 후손들은 품은 한(恨)을 풀었다. 또 다행스럽게 나라 안의 여러 군자들이 찬양의 글을 짓고, 기문과 서문, 시가 답지하였다. 이를 모아 한 형국을 이루어 아름다운 시문(瓊瑰)6)이 번쩍거려 찬란하니 진실로 한미한 집안(寒門)의 막중한 보물이기로 잠시라도 먼지 낀 상자 속에 맡겨둘 수도 없어 즉시 이를 간행하여 오래도록 전하기를 도모하려니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그 전말의 글을 쓰노라.
광복 후 43년[1988년] 무진년 백화절에
후손 유진(有鎭)7) 삼가 기록하다.
鳴乎, 府君之沒, 已爲四百餘。星霜之久而遺文懿蹟, 杞宋無徵, 烏可知其萬一哉? 府君以寶白堂大祖之肖孫, 挺生。 永嘉抱濟世之志, 有絶人之勇。早登武科, 秩滿而退, 築小亭于花山東麓下, 洛江上逍遙自適, 托趣漁釣, 以送餘年。 西厓柳先生杖屨臨之, 以魚樂名亭, 後又過此, 府君已沒世矣。 先生不勝悲感, 吟一絶詩題于壁上, “孤亭猶在主人亡, 雲物蒼茫歲月荒, 秋草滿庭行逕沒, 一叢山菊爲誰香。” 小序又曰 : “金世商雖武人, 而孝友絶人, 鄕里稱之”。 先生之詩與序, 可以徵百世無疑, 則府君之忠孝兼全, 於斯可想得矣。 何恨遺蹟之泯沒無傳也, 後孫零替, 不能安古土守先亭, 移居韶州之實業里者, 世已久而古土遠矣, 先亭敗矣, 含痛齎恨去, 益莫甚。粤在光復後二年丁亥, 門父兄合議, 謀力, 重建于所居里傍, 仍舊而揭其楣魚樂於是乎, 府君之尊靈妥安, 後孫之齎恨乃伸。又幸海內僉君子之讚述, 沓至記序若詩。合而成一局, 瓊瑰璀璨, 寔寒門, 莫重之寶也, 暫不可任置塵箱, 而卽付剞劂氏, 欲圖壽傳, 不勝感激, 謹識顚末焉。
光復後四十三年 戊辰 百花節
後孫 有鎭 謹識
1) 기송(杞宋) : 춘추시대 기(杞)나라와 송(宋)나라를 가리키는데, 공자가 하(夏)나라와 은(殷) 나라의 예제(禮制)를 고증하려 하였으나, 기나라와 송나라에 문헌이 없어서 고증할 수 없었던 고사가 ≪논어≫ <팔일(八佾)>에 보인다. 여기서는 어락공에 대한 문헌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2) 영가(永嘉) : 안동의 옛 지명이다. 이외에도 고타야(古陀耶), 고창(古昌), 길주(吉州), 복주(福州). 능라(陵羅). 석릉(石陵), 화산(花山). 창녕(昌寧) 등이 있다.
3) 외로운 정자는 의구히 섰는데 : 후지의 유재(唯在)를 서애선생 문집 별집의 내용대로 유재(猶在)로 정정하였다.
4) 오솔길 : 원문 行逕에서 逕은 삼경(三逕)을 의미한다. 삼경(三逕)은 은사(隱士)의 뜨락을 가리킨다. 서한(西漢) 말에 장후(蔣詡)가 은거한 뒤 집 안 뜨락에 ‘오솔길 세 개〔三逕]’를 만들어 놓고는 오직 양중(羊仲)과 구중(求仲) 두 사람과 교유하며 두문불출했던 고사가 있다. ≪三輔決錄 逃名≫. 여기서는 김세상(金世商)을 장후(蔣詡)와 비유해 표현했다.
5) 한 떨기 : 원문 일총(一叢)은 위 후지에는 수총(數叢)으로 되어 있으나, 서애선생 문집 별집의 내용대로 일총(一叢)으로 정정하였다.
6) 아름다운 시문 : 원문 경괴(瓊瑰)는 진귀한 보석인데, 아름다운 시문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7) 유진 : 기묘생[己卯生(1939)]. 호 우석(又石), 경북 의성군 옥산면 실업리, 1989년 어락정중건시집의 간행을 주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