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짱, 아름다운 몸의 시학
최원현/수필문학가. 칼럼니스트
‘아름답고 싶다!’는 누구나 갖고 있을 본능적 욕구일 것이다. 어찌 사람 만이랴. 집에서 키우는 애완용 동물이라도 예쁘다고 하면 좋아하고 밉다고 하면 싫어하며 사람의 표정과 말을 알아듣는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아름답고 싶어 하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특히 사람은 그런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가 더욱 강해 더러는 자신을 오히려 위험의 지경까지 몰아가기도 하고, 자기만의 특별한 아름다움보다도 남이 가진 대중적 아름다움에 더 마음을 빼앗겨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유명인의 모습을 따라 자기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성형을 하거나 몸매를 만들어 가는 열풍이 대단하게 불고 있다.
하기야 먹고 살기에 급급해 하던 때야 이런 일을 언감생심 생각이나 했을 것인가. 이만큼 살만해 져서 생활수준이 향상 되고 삶에도 여유가 생기니 사람들은 사는 문제를 원초적인 생명의 문제에다 즐기는 문제를 얹어 생각케 된 것이리라.
특히 남보다 나를 아름답게 돋보이고자 하는 욕망과 남으로부터 아름답다는 찬사를 듣고 싶다는 자기 우월의 열망은 웰빙 바람을 타고 더욱 드세게 불게 된 것이다. 그것은 외모에 대한 아름다움의 추구를 여성 전유로 생각하던 것까지 바꾸어 요즘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하나같이 외모에 엄청난 신경들을 쓰고 있다.
그런 시대적 생성물 중 하나가 얼짱이요 몸짱이란 말일 것이다. 사실 ‘짱’이란 좋은 의미로 사용되던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의미로 사용되면서 ‘짱’의 문화, ‘짱’의 시대를 열고 있다.
사실 웰빙 시대의 본질적인 욕구는 삶의 질을 향상시켜 자기만족을 높이는 생활의 영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삶의 질 향상에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크게 작용케 된 것이다. 그것은 비단 남에게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만족감에도 큰 영향을 미쳐 자신감 내지 정체성 확보에 까지 큰 몫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 성형수술이 '웰빙'의 대표선수가 되어버렸다. 수술 자체가 단순히 몸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정신적 치유의 몫을 담보하는 행복한 자아실현 수단의 의미까지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얼짱은 한 시대의 대명사가 되었고, 그 얼짱의 시대에서 몸짱의 시대까지 가게 된 것이다.
요즘 들어선 ‘얼짱’만으로는 모자라 ‘몸짱’이 더 뜨고 있다. 말 그대로 몸이 짱인 ‘몸짱스타’가 인기를 누리는 시대로 20대의 몸매를 자랑하는 40대 ‘봄날아줌마’는 네티즌 사이에서 최대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여세를 몰아 몸을 가꾸는 각종 상품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고, 몸짱을 만드는 운동법에다 성형을 해주는 TV프로그램까지 나와 부정적인 우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우려 속에서도 몸짱의 인기는 여전히 상승이다.
한창 인기 있는 가수 비가 ‘태양을 피하는 법’이란 노래를 부르며 웃통을 사알짝 보여주는 안무를 보이자 그의 멋있는 몸매에 여성 팬들이 열광한다던가, 데뷔 후 줄기차게 ‘웃통’의 몸매를 과시하던 권상우가 ‘말죽거리 잔혹사’란 영화에서 아주 화끈하게 벗어버리고 탄탄한 몸매를 과시하며 이소룡의 기묘한 콧소리 기합을 흉내내자 여성관객들이 숨까지 죽이며 스크린 속 그에게 빠져드는 현상은 시쳇말로 ‘몸짱 스타’들이 일으킨 바람이다.
이러한 현상은 어쩌다 순간적으로 생겨났다든가 세기말적인 문란의 징조처럼 생각하기엔 문제가 있을 것 같다. 이것도 분명 하나의 문화 현상일진데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할 것인가에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떠한 문화현상이든 아무 이유 없이 불쑥 튀어나오진 않는다. 처음엔 느끼지도 못할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으나 그런 것들이 조금씩 모이고 합해져 변화의 물줄을 만들었을 것이다.
사실 1990년대 초반부터 인문학 분야에서는 ‘몸의 시학’이 소개 되었었다. 그것이 ‘몸짱’, 성형, 다이어트, 웰빙 등의 열풍으로 발전하여 나타나면서 일상문화 속에 깊숙이 파고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몸의 문화’ 득세 현상에 대해 정신 혹은 영혼의 하위개념으로만 생각했던 육체가 상위개념으로 치고 올라온 것이라고 분석하는 문화평론가들도 있듯이 보고 만지고 느껴보고 싶은 인간의 욕구는 현대인의 보편적인 욕망일 수 있다. 따라서 기본적인 경제여건이 받침 되어 주는 현대인들에게 영혼 못지않게 육체에도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서 다이어트, 웰빙 상품 등이 인기를 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인들의 삶의 가치관 내지 몸에 대한 욕망들이 ‘몸짱’이란 단어 속에 축약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에는 외모 지상주의라는 비판도 가해진다. 그러나 최근의 현상을 보면 또 하나 새로운 사실을 발견케 된다. 얼짱, 몸짱이 예쁜 것, 섹시한 것만이 아닌 자기만의 독특한 당당함으로도 표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금순이나 삼순이가 그런 것이다.
전국 시청률 50%를 넘기며 종영된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주인공 삼순이는 접히는 뱃살에도, 서른 살이라는 나이에도 당당했다.
드라마를 위해 살을 6㎏나 찌웠다는 삼순이 김선아가 오히려 사랑스러워 보여서였을까. 삼순이 덕에 대한민국의 식을 줄 모르던 ‘다이어트 열풍’이 잠시 주춤했다는 보도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에서 중요한 것은 건전한 시각이다. 대중매체나 광고는 극소수의 사람에게 맞는 잣대로 아름다움의 기준을 결정해 버린다. 얼짱과 몸짱 같은 것에 집착하게 되면 필요 없는 열등감이나 허영심만 생기게 된다. 사람의 몸이 보고 느끼고 즐기는 상품처럼 여겨진다면 그것이 아무리 아름다운 모습이 되더라도 볼거리 즐길 거리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확보된 상태에서 나무를 가꾸어 가듯 자연스러움을 유지 시키며 자기만의 독특함으로 남이 갖지 못한 아름다움을 가꿔 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만큼 귀한 것도 없으리라.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인 만큼 서로의 아름다움을 가꿔가되 가꾸고 수정할 수 있는 것은 또 그렇게 해 가면서 나보다 더 좋고 아름다운 것에 대해선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 주는 것이 건전한 사고일 것이다.
언젠가 적십자 헌혈 차에서 헌혈을 하고 있는데 고등학교 1학년쯤으로 보이는 여학생 셋이 올라왔다. 그런데 간호사는 그들을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나는 학생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도 기특한 일이고 여기까지 오는 데는 상당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을 텐데 왜 쫒아버리느냐고 했더니 저네들은 몸의 살을 빼기 위해 다이어트 중인데 며칠씩 굶다시피 해놓고 그것도 모자라 피까지 뽑으려 한다는 것이다. 만일 저들에게서 피를 뽑으면 그냥 쓰러진다는 것이다.
생명을 내걸고 아름다운 몸을 만들고자 하는 저들의 눈물겨운 열정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 한참이나 혼란스러웠었다.
몸짱은 아름다운 건강의 상징일 수 있다.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욕망이 내가 가진 것에 대한 불만으로 커진다면 나는 이미 내 정체성을 잃는 것이리라. 나를 내 모습 그대로 사랑하며 나보다 아름다운 것에 자연스런 동경의 마음을 품고 그를 닮아가고자 한다면 나 또한 아름다운 변화를 체험케 되지 않을까.
상대적으로 나를 초라하게 하는 것은 나의 잘못된 기준이다. 잘못된 자아상을 깨트려야 한다. 그것은 내 내적인 아름다움을 가꾸는 일이요, 나만의 재능을 개발하는 일이요, 내 환경과 상황에 자족하는 마음을 갖는 일이다. 남보다 못하고 작은 것을 가져도 자족할 수 있는 마음이 참된 행복을 가져온다.
몸짱, 그것은 이 시대가 표현하는 몸의 시학이다. 내 모습은 없어지고 전혀 다른 내 모습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삼순이의 당당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이 진정한 몸짱이 되는 것이 아닐까. 영혼과 몸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하모니, 그 아름다운 음악이 바로 몸짱, 몸의 시학일 것이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야고보서 2장 1절)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神妙莫側)하심이라”(시139:14)
건강과생명/2005. 9월호 특집 몸짱/2005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