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는 길목,육사 27기 동기들과 함께 부여와 예산 수덕사로 나들이를 떠났다. 사당역을 출발한 관광버스가 죽전과 신갈을 지나 구드레 선착장에 도착하니 형형색색의 코스모스가 활짝 웃으며 반겨준다. 꽃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 마저 가을 꽃빛으로 물드는 것 같았다. 황포돛배에 몸을 싣고 물길을 따라 고란사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강바람을 타고 부소산성이 한눈에 들어오고, 낙화암은 절벽 끝에서 선명한 자태를 드러낸다. 백제 600년 역사 중 가장 찬란했던 123년의 사비 시대가 오롯이 숨쉬는 이곳. 멸망의 한을 품고 삼천궁녀가 떨어졌다는 낙화암의 전설을 떠올려본다.
어쩌면 그 이야기는 승자의 역사 속에 왜곡된 슬픈 유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둥둥 떠다니는 수륙양용버스의 낯선 풍경을 바라보았다. 고란사에 이르니 절벽에 자생하는 고란초와 왕이 마셨다는 고란수가 옛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은 암자이지만 천년 세월을 견뎌 온 고즈넉한 풍경은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번잡했던 생각들이 어느새 강물 따라 흘러가는 듯했다. 다시 뱃길을 돌려 예향 한정식으로 향했다. 고풍스러운 한옥에서 오찬을 즐긴 후 찾은 곳은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이 서린 궁남지였다.
연못 주위에는 백제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듯 국화꽃 잔치가 한창이었다. 아름답게 가꿔진 국화 분재와 포룡정이 어우러진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잠시 무아경에 빠져들었다. 다음 여정은 천년의 숨결을 간직한 덕숭총림 수덕사였다. 숲길을 따라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과 사천왕문, 그리고 황하정루를 차례로 통과하는 동안 사찰의 고즈넉함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었다. 고려 충렬왕 때 세워진 국보 대웅전은 세월의 묵직함과 백제식 목조건축의 우아함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슬며시 소꼬리 모양을 한 우미량의 은근한 곡선미를 바라보며 천년세월을 견뎌낸 그 고고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수덕사를 둘러보며 더욱 가슴을 울린 것은 일주문 옆 수덕여관에 얽힌 인물들의 서사였다. 시대를 앞서갔던 신여성 김일엽 스님, 그녀를 그리워하면서도 스님이라 불러야 했던 아들 김태신 화백, 이혼의 상흔을 안고 찾아왔던 나혜석 화가, 그리고 옥고를 치르면서도 바위에 추상화를 새겼던 이응로 화백까지,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그들의 삶 이야기가 가을 바람을 타고 귓가를 스쳤다. 해질녘 산채비빔밥으로 소박한 저녁을 마치고 서울로 향했다. 동기생들과 함께한 이번 여행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었다.
백제의 찬란했던 역사와 천년고찰의 고요함 속에서 삶을 뒤돌아보고, 함께 늙어가는 벗들의 소중함을 다시 확인한 시간이었다. 백마강의 잔잔한 물결과 수덕사의 은은한 풍경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머물 것이다 가을은 해마다 찾아오지만 같은 가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 함께한 이 시간이 더욱 귀하고 아름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