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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별곡 였던 기순녀는 놀랄 만한 생존본능과 권력의지로 황실의 중심을 파고들어 결국 황후 자리를 꿰찬다. 노국공주는 원나라의 왕족으로 고려 남자를 따라 개성으로 들어와, 자신의 친정과 조국에 반기를 드는 남편 공민왕을 열심히 내조한다. 그녀는 원나라 연경에 고려붐을 일으켰고, 조선을 성(省)으로 만들어 제후국화하려는 황실의 기도를 막았으며 치욕적인 고려 공녀시스템을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위세를 믿고 안하무인으로 거들먹거렸던 그녀의 오빠들이 이미지를 망쳤다. 공민왕은 반역죄의 꼬리를 붙여 기철을 비롯한 기황후의 척족들을 제거한다. 국가 기능과 면목을 치명적으로 굴절시킨 원나라 황실에서 온 여인인데 말이다. 몽고인은 고려를 굳이 정복하여 복속시키지 않고 정략결혼을 통해 통제하고자 했다. 노국공주는 왕비이면서도 대장공주 (大長公主)라는 직함으로 불린다. 그녀는 원의 순종(順宗)의 손자인 위왕(魏王) 패라첩목아의 딸로, 실제 공주는 아니지만 가까운 황족의 딸을 황제의 양녀로 삼아 고려 왕족과 혼인을 시키는 관행에 따라 ‘대장공주’가 되었다. 남편인 왕전이 왕위(공민왕)에 오른 이후에도 여전히 대장공주로 불렸는데, 그 까닭은 대장공주의 ‘직급’이 왕비 직급보다 더 높았기 때문이다. 고려 왕실과 원 황실의 권력 관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보겠지만 우리 쪽에서 보면 매우 고마운 사람이다. 개혁군주 공민왕을 적극적으로 도와, 태조 왕건이 개국하던 때의 그 건강한 나라로 돌아가려는 야심 찬 프로젝트를 함께 수행했다. 제 나라에 칼끝을 겨누고, 원나라에 동조적인 세력들을 제거하는 남편을 격려하기도 했다. 이런 선택을 한 그녀에게 갈등은 없었을까? 적대적인 국가 사이에서 배신과 충성은 동전의 양면 같다는 사실을 우리는 같은 시대 두 여인에게서 확연히 본다. 단지 사랑의 맹목에 빠져 고려의 우군이 된 여인이 아니라, 시대적 소명감과 뚜렷한 자아관을 지닌 여인인 노국공주를 이 ‘미인별곡’에 초대하고 싶다. 들어와 20세가 된 왕전. 그는 거문고 연주가 뛰어났고 시를 잘 썼으며 그림도 빼어난 예술가 취향을 지녔다. 수려한 용모에 활달한 성격이 돋보이는 패기만만한 청년을 기황후는 아꼈다.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고 충혜왕의 동생이었던 그는 1344년 조카 충목왕에게 밀렸고 왕이 4년 뒤 병사하자 1348년 또 다른 조카 충정왕에게 다시 밀렸다. 왕족으로 저 정도 인물됨됨이면 이미 왕위를 맡아야 하나, 그의 어머니(명덕태후 덕비 남양홍씨)가 원 황실 출신이 아닌 고려인이라는 점 때문에 검토 대상에서 배제됐다. 깊이 심취했다. 원 황실의 정략적인 원칙 때문에 길이 막혀 있는 왕자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는 사람은 고려인 출신의 황후였다. 그녀가 평소에 눈여겨보아온 노국공주를 왕전과 배필로 만드는 데 공을 들인 까닭은 그런 마음에서 우러나온 격려 같은 것이었다. 다른 공주들과는 달리 겸손하면서도 성정이 쾌활한 그녀가 쓸쓸한 고려 왕자를 달랠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사랑을 만들고 사랑이 운명을 여니 미리 짐작하여 두려워하지 말아라. 스물두 살 신부와 스무 살 신랑이 국화꽃 두 그루처럼 나란히 섰으니 향기롭구나, 젊은 시절이여. 보르지긴 보탑실리(孛兒只斤 寶塔實里, 노국공주의 이름)는 지혜롭고 부드러워 그야말로 보배로운 탑이니, 총명한 고려 왕자에게 큰 힘이 되리라. 높이면 흐르기가 어렵다. 상대가 높아지면 저는 낮아지고 상대가 낮아지면 저는 높아져야 물 흐르듯 흐른다. 의견이 있더라도 먼저 나서서 말하지 말아라. 의견이 틀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기분을 상하게 하여 논의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일이 생길 수도 있는 법이다. 다툼이 없고 네 의견이 다 관철될 수 있단다. 미색이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묘약이라 하나 미색이란 원래 밝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지어라. 그리고 공주여, 혹여 고려가 신국(臣國)이라 하여 사내를 낮추지는 말아라. 그것은 왕자가 낮아지는 일이 아니라 부부가 모두 낮아지고 험해지는 것이니 지혜로운 일이 아니다. 부디 고려청자 빛처럼 아름답게 살아가거라.” 했소이다. 연경 생활 10년 만에 마침내 왕이 되어 이렇게 돌아가다니…. 공주여, 솔직히 나는 운명을 믿지 않았소. 내가 왕위에 오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소. 조카(충정왕)가 그렇게 하루아침에 주저앉는 일이 어찌 저절로 일어난 일이겠소. 아마도 기황후마마가 우리를 배려한 뜻이 있었을 것이오. 하나, 고려의 왕이란 정말 파리 목숨 같소이다. 내가 이런 얘길 해선 안 되지. 황후마마의 성은에 감사를 해야 하는데…. 어쨌거나 선왕들 중에 충렬·충선·충숙임금은 모두 폐위와 복위를 되풀이했고, 충혜·충목에 이어 충정왕까지 단명을 면치 못했으니, 원에 충성하는 ‘충(忠)’자를 단 왕이 되는 일이 멍에를 진 마소와 다름없소이다. 이제 얼어붙은 압록을 엉금엉금 기어 제 나라로 들어오니 불현듯 두려운 마음이 드는군요. 대국의 황실에서도 ‘사랑’이란 허울에 불과하며 권력을 장식하는 사치품과 다르지 않다는 걸 나는 깨달았소. 기황후가 순제(順帝)폐하의 마음을 사로잡아 권세를 차지한 일이 어찌 사랑만으로 이뤄졌겠소. 그리고 나 왕전도 천하의 속물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소. 공주와 결혼한 것은 그야말로 계산된 사랑, 정략적인 결혼이었을 뿐이오. 이번에 내가 왕으로 낙점되고 보니 그 사실이 더욱 분명해지는군. 하지만 그것만으로 결혼한 건 아니란 말이오. 내게는 당신 같은 원군(援軍)이 필요했소. 그러지 않고서는 고려 왕이 될 수 없기 때문이지. 이것이 진실이오. 나는 당신을 사랑한 게 아니라 당신의 권력을 사랑한 것이고, 당신의 혈통을 사랑한 셈이지. 털어놓고 보니 마음이 시원하긴 하네. 원나라 황실에 목이 매달린 고려 왕이 뭐가 좋다고 정략결혼까지 했단 말인가? 나는 이런 사람이오. 공주여, 이런 뻔뻔한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이오. 미안하오. 10년간의 볼모 생활이 넌더리가 나서 공주를 이용하려 했던 모양이오. 진심으로 내 생애 끝까지 당신만 사랑하며 살고 싶소. 내 거문고처럼, 내 붓끝처럼, 열정을 다해 나를 던지고 싶소. 새파래진 그 입술, 압록의 추위 탓이오? 내 뒤숭숭한 이야기 때문이오?” 그런 말씀 하지 말아주오. 나 보르지긴 보탑실리는 그대와 일생을 같이하기로 한 몸, 그러니 내가 바로 그대요. 나는 우연히 그대를 만난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그 이름을 듣고 사모해왔습니다. 달려왔듯이 나는 왕을 향해 멀고 먼 은하를 헤쳐 달려온 것이오. 우리의 만남은 수억 년 시간 전에 이미 예정된 것이고, 그대와 나의 이름은 저 은하 너머에 이미 사랑을 하도록 기록되어 있었다오. 빛을 밝히는 일 또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내 핏줄이 그대에게 도움이 되고, 내가 그대의 배필이 되는 일이 그대의 힘이 된다면, 그것만큼 흐뭇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대와 내가 맺어지도록 하늘이 우리에게 결합의 이유를 만들어준 것이니 이 또한 저 은하계의 배려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몽고 사람이고 그대가 고려인이란 사실이 우리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원래 고려도 저 먼 핏줄을 돌이켜보면 우리와 같은 겨레붙이였다고 하더이다. 아마도 아주 먼 시간 어디에선가 그대와 나는 사랑을 다 못하고 헤어졌던 인연인지라, 이렇게 다시 돌아와 사랑을 나누는 게 아니겠습니까? 빼어난 점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슬픔, 그대의 분노, 그대의 약점 또한 사랑합니다. 그대의 고려도 내 몸처럼 사랑하고 그대의 운명도 내 삶처럼 사랑하려 하나이다. 내 사랑이 가여우시거든 그대 또한 나를 힘차게 사랑해주소서.”(이때 왕전이 그녀를 꼭 껴안으며 눈물을 흘린다.) 원나라의 부패와 쇠락을 지켜보면서 세상의 흐름을 읽었다. 그가 그림을 그리며 짐짓 무심(無心)으로 일관했던 까닭은 내면에서 끓었던 분노와 열정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왕이 왕 구실을 못하는 고려의 굴욕을 들여다보며 개혁의 야심을 키웠다. 그중 가장 골치 아픈 자들은 기황후의 오빠들인 기식·기철·기원·기주·기륜 5형제였다. 이들은 기순녀가 순제의 둘째 황후가 되자 고려와 원나라에서 저마다 득세하여 친원(親元)그룹의 핵심 역할을 했다. 그 밖에 조일신·노책·권겸도 만만찮은 친원파였다. 실력을 행사했다. 노책(盧頙)과 권겸(權謙)은 딸이 원 황실의 태자비가 되면서 벼슬을 얻은 이들이었다. 노책은 집현전 학사, 권겸은 태부감 태감이었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몽고 패션을 금지하고 원나라에 빼앗겼던 쌍성총관부를 되찾는 작업을 추진한다. 또 친원파를 중심으로 한 권문세족(權門勢族)이 지녔던 사병과 토지를 몰수하는 개혁을 실시한다. 정책을 저지하는 방안을 논의하는 한편, 원 황실로 밀사를 보내 왕의 반원(反元) 행위를 알렸다. 이 무렵 공민왕이 궁궐을 거닐며 달을 볼 때 노국공주가 다가왔다. 그늘이 달을 가리는가 봅니다. 지난번 연회 때 덕성부원군 빠엔부카(伯顔不花, 기황후의 오빠 기철의 몽고 이름)가 저지른 소행을 들었습니다. 이놈이 마마의 안전에서 술에 취한 채 자신을 신(臣)이라 칭하지 않고 감히 ‘나’라고 말을 했더군요. 제 누이의 권세를 믿고 간이 배 밖에 나왔으니, 곧 주벌(誅伐)해야 할 자입니다. 하지만 사사로움으로 어찌 나라의 대의를 그르치겠습니까? 원의 황후는 고려인이나 이미 고려인이 아니며, 고려를 그대처럼 귀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황후의 권세가 이 나라를 무단히 괴롭히는 셈이니, 바로잡아야 할 일입니다. 건너갔습니다. 빠엔부카가 저렇게 왕을 능멸하는 까닭은 스스로 뭔가 크게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원이 더욱 기울어지기 전에 고려에서 세력을 더욱 굳히려는 것입니다. 빠엔부카가 누이의 힘을 빌려 ‘폐위(廢位)’ 모의를 꾸미고 있다는 첩보까지 들어온 마당이니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칼을 만지작거리는 자를 먼저 베는 일은 천하의 근심을 없애는 일입니다. 너그러움에 익숙해져 있는 자들인지라 짐작도 못할 것입니다. 설마 황후의 오빠를 고려 왕이 대접하려나 보다 하고 거들먹거리며 모여들 것입니다. 궁궐 병사 50명을 숨겨놓으시고 대역죄를 꾸미는 저들을 주살(誅殺)하십시오. 이 피의 정의(正義)는 이 노국공주가 집행하고자 하옵니다.” 왕을 돕는 필살의 계책을 내놓았다네. 죽음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네. 기마족의 기상으로 말을 타고 궁궐을 휙휙 날아다니며 친원배(親元輩)들을 풀 베듯 베었네. 궁궐 대문으로 배를 내밀고 들어온 기철과 권겸을 철퇴로 쳐 죽였네. 노책은 집에서 붙잡아 한칼에 주살했네. 기철의 아들 기유걸과 기완자불화, 노책의 아들 노제, 권겸의 아들 권상화는 모두 잡아들여 송도 거리에서 처형을 했다네. 수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제 나라 팔아 영화를 누린 자들의 최후를 지켜보았네. 죽어가는 이들에게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네. 남의 토지와 아내를 빼앗고, 사병을 동원해 횡포를 일삼던 자들, 민심도 이미 등을 돌렸다네. 고려를 어지럽히던 무리들을 일거에 없앤 건 원나라에서 온 노국공주 칼끝이라네.” 폐위하고 덕흥군을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 덕흥군은 충선왕과 궁인 사이에 태어난 왕자로 어려서 중이 되었다가 원나라로 건너가 있었다. 기황후가 원나라 황제를 움직여 덕흥군을 고려 국왕으로 결정하자 최유는 요양성의 군인 1만 명을 빌려 고려로 쳐들어간다. 군사를 패퇴시킨다. 국력이 쇠퇴한 원나라는 고려와의 불화가 부담스러웠고 원 순제는 공민왕의 복위를 승인하는 조서를 보낸다. 그리고 최유를 포박하여 고려로 압송하고 덕흥군은 영평부로 귀양보내버린다. 최유는 그해 11월에 고려에서 처형된다. 몽고인이 가졌고, 색목인은 그들을 보좌하는 일을 맡았으며 한인과 남인은 천대받았다. 몽고인은 유목생활에 익숙했던지라 정치가 거칠었다. 백성을 신음하게 한다. 이 무렵 한족을 중심으로 붉은 수건을 머리에 둘러싼(백련교와 미륵교 신자들의 표시) 저항세력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이 홍건적이다. 송나라 황제의 손자로 자칭한 한족들이 들고 일어난다. 홍건적은 불꽃처럼 세력을 키웠으나 내분으로 원나라 군사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만주로 몰려간 그들은 퇴로를 한반도로 잡는다. 펼쳐 홍건적은 거의 궤멸되고 잔병 300명이 압록강을 건너 도주한다. 이후 1361년 10월 홍건적 10만 대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재침한다. 홍건적이 절령(悰嶺:자비령)의 방책(防柵)을 무너뜨리고 개경으로 진군하자 공민왕은 11월 19일 남쪽으로 몽진을 간다. 이해 12월 15일 복주(福州, 현재의 안동) 에 다다른 공민왕은 정세운(鄭世雲)을 지휘관으로 임명하며 재기를 노린다. 복주까지 내려오셨네. 살을 에는 추위와 미친 눈보라 뚫고 고려의 희망이 우리 곁에 오셨네. 5년 전 기씨 일족 처단할 때 활인검(活人劍) 번쩍이던 귀하신 노국대장공주님, 고려 군왕을 목숨보다 사랑하여 나라도 버리고 목숨도 아끼지 않는 어지신 우리 왕비마마. 얼음물 흐르는 송야천을 어찌 걸어가시리요. 우리가 견우성 만나는 직녀의 발아래 누운 까막까치처럼 마마의 다리가 되어드리리. 복주는 복 받은 땅, 이곳에서 힘을 차려 나라를 다시 찾으소서. 변방 산골 백성이라도 하해 같은 성은이 어찌 미치지 않으리. 마마의 흰 버선 아래 하나하나 복주 민심이 허리 굽혀 노국(魯國)다리 되었으니 마음 편히 건너가소. 우리 마마, 귀하신 공주님, 인(人)다리 지어놓았소. 놋다리 건너며 슬픔을 잊으소서. 어느 윤에 놋다리뇨 청계산에 놋다릴세 이 터전이 뉘 터이뇨 나라님의 옥터일세 이 기와가 뉘 기와뇨 나라님의 옥기왈세 그 어데서 손이 왔노 경상도로 손이 왔네.” 없었구려. 천하를 새로이 경영하여 태조(왕건)처럼 되고자 하는 고려의 별이여. 마침 복주 땅은 태조대왕이 후백제의 견훤 무리를 내쫓은 복지(福地)라. 이곳 성주 김선평, 행정관 김행, 호족 장길은 목숨 걸고 태조를 도와 고려 개창 공훈으로 3태사가 되었지요. 새 나라를 세우소서. 정월대보름 달빛이 아름다워 용안이 더욱 눈부시니, 이토록 가까이 있어도 무시로 그대가 그립습니다. 고뇌하는 그 모습 보면서 제 마음이 더욱 아립니다. 오늘 아침 복주 백성들이 귀밝이술과 부럼을 비롯해 오곡밥에 삼색나물·고사리나물·시래기나물·가지나물·도라지나물 따위 가지가지 진채를 들고 왔습니다. 시골 사람들이 이토록 왕실을 받드는 마음씀씀이가 기특하니, 이 나라가 어둡지 않습니다. 민심의 후의에 의지하여 조촐한 술상을 차렸으니, 이런 쓸쓸한 가운데서도 마음이 아련하여 가슴이 뛴답니다. 점지해주지 않을지요. 우리가 영원히 함께 있도록 기도를 올려볼까요. 사랑하는 왕이시여, 전란으로 여기까지 내려왔지만 그것을 굳이 수모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홀연히 행궁(行宮)을 하셨다고 여기시고 마음 편히 술 한잔 받으소서. 전하와 술 한잔 나누는 이 영호루의 달빛을 죽어도 잊지 못할 겁니다. 내가 그대를 지금부터 영원까지 사랑하겠노라고, 달빛 속에 적어놓으려 합니다. 가슴 뛰는 사람 안에 숨막힐 듯 갇혀 있으니, 까닭 없이 눈물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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