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다발성골수종으로 최종 판정을 받고 입원할 때에는, 항암치료에 빠르고 좋은 반응을 보여서 1주일 후면 퇴원, 통원치료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내심 했던 것 같다. 아빠가 입원을 하게 된 시점에 1주일 연차를 쓰면서는 분명 그런 예상을 했던 것만 같은데, 1주일이 쏜살 같이 지나버리고 주말이 다가오면서 온갖 부작용에 시달리는 아빠를 보고 있자니, '1주일 후 퇴원'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얼마나 철없는 것이었는지를 뼈져리게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월요일은 다가오는데, 일주일간 잠을 못잔 채 고열과 통증에 시달려서 피골이 상접해 의식이 혼미해져가는 아빠를 두고 출근을 하자니 병실에서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한달 정도 휴직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휴직계를 내기 위해서라도 오늘은 출근을 해야한다는 일념으로, 새벽에 병실에서 회사로 나갔다.
그간 밀린 이메일들에 답하고, 이런저런 회의에 참석하다보니, 내가 언제 간병을 하고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금새 업무에 몰입을 해서, 아빠가 병원에 계시다는 사실을 일순 망각할 지경이었다. 그도 잠시, 병원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힘들어하고 있을 아빠가 다시 눈앞에 증강현실처럼 나타나자마자, 그 순간부터 일은 일대로 하면서, 그와 동시에, 아빠에 대한 걱정은 걱정대로 눈덩이처럼 실시간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CS팀과의 주간회의. 제품 불량률이 얼마로 집계되었고, 불량률을 목표치 이하로 낮추기 위한 대책은 무엇이며, 이를 위해서 각 부서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CS 부문장이 길고도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나는 그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아, 지금 이 순간, 그러니까, 내가 기계의 불량률에 한없이 진지하고 섬세하게 집중하는 바로 이 순간, 아빠의 목숨이 촛농과 같이 실시간으로 뚝뚝 흘러내리고 있구나. 아빠의 목숨이 타들어가는 이 순간, 아빠를 살리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나는 이곳에 이렇게 앉아, 사람의 목숨이 아닌 기계의 수명을 늘려나가기 위해 이토록 갖은 애를 쓰고 있구나. 블랙 코미디 같은 현실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람이 죽어가고 있어요. 지금, 우리 아빠가 죽어가고 있어요. 내가 살리고 싶은 건, 이 차디찬 금속 기계들이 아니라, 아직 몸이 따뜻한 채 숨쉬고 있는 우리 아빠에요.' 이렇게 속으로 외치며, 나는 점잖게 CS부문장에게 이성적인 코멘트를 한다: "포집된 케이스들이 우리 회사 제품 전체를 대변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만, 2년치 통계를 보니 그 데이터로도 충분히 유의미한 경향성이 포착된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 같...."
안타까운 마음 한편으로 깨닫는다. 모든 순간, 모든 생명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그러나, 모든 순간, 모든 생명이 살아지고 있(었)다. 생과 사가 둘이었던 순간이 단 한순간도 없(었)다. 그 어떤 순간도 의미없는 순간이 없(었)다. 늘, 언제나, 이미, 생명과 죽음이 동시에 서로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고 있고, 오직 그 틈바구니 속에서만, 생명의 천사와 죽음의 천사가 서로 눈맞춤하는 그 틈바구니에서만, 인간은 밥을 먹고, 똥을 싸고, 별 의미없는 서류를 심오하게 작성하고, 영양가가 있던 없던 무슨무슨 말들을 나누며 수런수런 했던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던 '의미의 진공' 상태의 부박한 일상의 모퉁이들이야말로, 모든 의미들이 배태되어 있는 의미의 자궁이었다.
이번주에는 재택근무를 하겠노라 선언하고, 사무실에서 무작정 뛰쳐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 단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어떤 곳을 향해, 단 한번도 머문 적 없는 어떤 곳을 떠난다. 태어난 적이 없으니 죽을 바도 없다던 그 말을, 이제야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머물바가 없다는 것. 삶에도, 죽음에도, 의미있음에도, 의미없음에도, 망함에도, 흥함에도, 그 무엇에도. 그저 떠나고, 또, 또, 또, 다시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