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행복기사’는 존재할 수 없다 - 두 번째 이야기
[기획연재] 감정노동자들의 고충을 나누다 ⑦-SK브로드밴드 통신기사
-지난 회에서 이어짐-
몇 시가 됐든 집에 있으면 편하게 있어야 하는데 기사들은 늘 휴대전화를 끼고 산다. 잘 때도 머리맡에 두고 잔다. 진 씨는 “모르는 번호는 무조건 받는다”고 했다. 고객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왜 전화를 받지 않느냐’고 ‘VOC'에 접수가 들어오면 그것도 감점 요인이 된다.
“‘고객의 목소리’를 ‘VOC(Voice Of Customer)’라고 해요. 고객 불만이 접수되면 안 되니까 몇 시가 됐든 전화를 받아야 해요. 아이러니한 건 제가 A/S기사로 일하는 것처럼 회사는 ‘상담업무’ 직원을 따로 뽑거든요. 그런데 VOC 접수가 들어왔다고 잔소리를 해요. 접수가 0건이 돼야 하는 거예요.”
기자가 만난 진 씨와 이 씨는 전화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라고 했다. 화장실에 있었다거나 씻는 중이었다거나 하는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차라리 (파업 중인) 지금이 편해요. 밤에 꺼놓고 자거나 진동으로 해둘 수 있으니까요.” 진 씨의 말이다.
▲ 서울 집회 모습.(이명호 제공)
통신사 LG유플러스와 SK브로드밴드 비정규직 노조는 각각 11월 19일과 20일 총파업에 돌입했다. 쟁의행위 찬반투표 결과 전국 47개 지회에서 1천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해 95.3% 찬성으로 파업이 가결됐다.
이들은 지난 3월 노조 결성 이후 8개월이 다 되도록 다단계하도급 개선, 노동자 인정, 업체 변경 시 고용안정 등을 요구하고 있다.
노조 관계자는 “우리는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것뿐이다”라며 “한 달에 하루 이틀밖에 쉬지 못한다. 1박2일 동안 쉬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가족 여행도 갈 수 없다”고 토로했다.
또 “진짜 사장인 LG유플러스와 SK브로드밴드 원청은 사용자로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임단협 체결을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조합원 일감 뺏기, 파업 중 불법 대체인력 투입 등 노조탄압만 한다”고 주장했다.
감정노동자의 고충을 나누는 기획취재. 조직 내의 문제점은 잠시 접어두고, (감정)노동자로서 힘든 점은 없는지 물었다. 고객(시민)의 의식이 높아져서 예전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지 않을까.
이명호 씨가 아니라고 펄쩍 뛰었다. “저희는 중간에 끼어서 위에서 욕먹고, 아래에서(고객에게) 욕먹어요. 인터넷이 지금처럼 보급되기 전이 더 친절했어요. 그때는 음료수도 주고 심지어 정말 고맙다면서 돈도 주고 그랬어요. 요즘에는 고객이 급해졌어요. 접수하고 1시간도 못 기다려요. 오전 10시 방문을 원했는데 오후 2시에 왔다고 다짜고짜 화를 내죠. 새벽에 전화하는 고객도 많아요. SK의 경우 강성 고객(블랙커스터머)은 회사에서 만든 것도 있어요. 진상 떨면 다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많아요. 가입자를 이렇게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진상 떨면 해주니까... 사원을 늘려서 만족도를 높여야 하는데 기존 인원으로 유지하려니 힘든 거죠.”
“매 순간 압박을 느껴요. 마음 편하게 쉬지도 못하고. 일이 커지지나 않을까 항상 걱정하고 긴장하고. 솔직히... 돈이라도 많이 주면 모르겠어요.”(이명호)
“회사의 좋은 점이요? 단 하나도 없어요.”(진대철)
두 번, 세 번 전화를 걸어서 불만을 제기하면 변명이나 해명을 해야 하는데, “죄송한데 욕하지 마시고요” 하는 말도 못한다. 한마디 했다가 민원이 제기되면 ‘죄인’이 된다고 했다. “피해가 저한테만 오면 차라리 괜찮은데 전체 기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저 때문에 무거운 얘기가 나오면 옆 사람한테도 너무 미안하고요.”
“1등급부터 5등급까지 등급을 매기니까 나는 쟤보다 위 등급이어야 된다는 의식이 생기죠. 사실은 동료도 경쟁자예요.”(이명호)
좋든 싫든 기억나는 고객이 있는지 궁금했다.
“어제 전화해서 힘내라고, 응원한다고 말해주는 고객이 계셨어요. 저한테 1년 전에 설치 받고 이번에 텔레비전을 추가설치하려고 전화하셨더라고요. 문의할 일 있으면 직접 전화 달라고 말했었거든요. 사정 설명하고 갈 수 없다고 했죠. 기사들이 많지 않아서 방문하는 데 오래 걸릴 것 같다고 얘기하면서 죄송하다고요. 그 분이 괜찮다면서, 힘내라고 하는데 정말 고맙더라고요.”(진대철)
“저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고객이 있는데, 리니지 게임을 하다가 인터넷이 끊긴 거예요. 상담원이 잘 못 알아들으니까 고객이 화가 난 거죠. 당장 오라고, 죽이겠다고 했대요. 고객을 방문하기 전에 상담내역을 읽고 가거든요. 그런 내용을 봤는데 저도 정말 무섭더라고요. 마음을 굳게 먹고 벨을 눌렀더니 칼을 들고 서 있더라고요. 놀라서 문을 닫았죠. (그렇다고 점검을 안 할 수는 없어서) 다시 심호흡을 하고 들어갔어요. 앉아서 2시간을 빌었습니다. 인터넷이 끊기는 바람에 칼을 떨어뜨렸는데 그게 천 만 원짜리였다고...”(이명호)
고객 집에서 개한테 물리는 기사도 있다. 노조가 생기기 전에는 본인이 치료비 전액을 냈다. 노조 결성 이후 10만원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었지만 무급 휴가의 손해는 고스란히 기사의 몫이다.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할까.
“집에 가서 씻으면 보통 10시예요. 그 시간에 누굴 불러서 술 한 잔 하기도 어렵고 집에서 혼자 마시면서 풀어요. 아내가 싫어하지만 나가서 먹는 것보다 낫기도 하고. 지금은 같은 처지에 있는 형님들과 가끔 마시죠. 그분들도 똑같은 상황이에요. 저보다 아이들이 크고, 자녀가 많으니 더 막막하겠죠. 빨리 싸움을 끝내고 싶어요.”(진대철)
“술을 거의 못 먹었는데... 얘기하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더라고요. 혼자 끙끙 앓으면 미쳐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이명호)
혹시 고객들에게 바라는 점은 없을까.
“고객이 직접 압박해주시면 좋죠. SK에 전화해서 기사들 복직시켜 달라고요. 실상을 아는 분들이 별로 없어요. 아니,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욕하지는 말고 지켜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저희만 잘 되자고 하는 게 아니에요. 학교 비정규직도 그렇고 힘든 분들이 많습니다.”
인생의 키워드, 취미, 주말에는 주로 뭘 하는지.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그들에게 차마 묻지 못하겠다고 전했더니, “취미요? 그것도 여유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주말에 다른 생각 안 하고 가족들하고 편하게 보냈으면 좋겠어요.”, “잘릴 걱정하지 않고 일하고 싶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어떤 바람이 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총 파업 전에 인(부)천 6개 센터 전 직원이 강화도 펜션에 워크숍을 갔어요. 단합대회 차원이었죠. 내근직 포함해 130여명의 조합원이 참여했어요. 펜션으로 꾸민 펜션을 빌려서 고기도 구워먹고 공도 차고 그랬죠. 너무 좋더라고요. 우리만의 시간이었어요. 동료를 경쟁자로 느끼지 않고 친구로 생각하는 그런 시간이 또 생겼으면 좋겠어요.”
“부모님이 여수에 계시는데 명절 때 내려간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부모님은 고생스러우니 오지 말라고 하지만 저는 가슴이 찢어지죠.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명절의 그 적막함이라니... 그렇다고 그 기간에 돈을 많이 벌어서 용돈을 넉넉히 드리는 것도 아니고. 대체휴일도, 명절 수당도, 저희는 아무것도 없어요. 명절 전후로 쉬려면 무급으로 휴가를 내야 해요.”(이명호)
“포장 같은 거는 바라지 않아요. 우리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해줬으면 좋겠어요. 숨길 것도 없어요. 우리만을 위해서 (총파업) 하는 게 아닙니다. 비정규직 전체를 위해서예요. 학교노조도 연대해서 도와주고 걱정해줘요. 인천희망연대에서도 기금을 마련해 주셨고요. 씨앤앰, LG유플러스, 금속, 자동차, 학교, 봉사단체 등등 도움이 필요한 곳이 많아요. 적극적인 지지는 아니더라도 쟤들 왜 저러나 비난하는 게 아닌, 이해해주고 지켜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