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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40
3월20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cpbc 오늘 미사**
https://youtu.be/K3xvETjoy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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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날 찌르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냐?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이 남긴 언행은 너무도 파격적이고도 의미심장한 것이어서 두고두고 사람들 사이에서 희자되고 있습니다.
한 농부와의 대화입니다.
“옳은 말을 하다 보면 누군가 자네를 칼로 찌를지도 몰라. 그럴 때 어떻게 하겠어? 그땐 말이지, 칼을 빼서 자네 옷으로 칼에 묻은 피를 깨끗이 닦은 다음 그 칼을 그 사람에게 공손하게 돌려줘. 그리고 ‘날 찌르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냐고, 고생했냐'고 그 사람에게 따뜻하게 말해주라고. 거기까지 가야 돼.”
이러한 그분의 생각은 당신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철저하게 실현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시골 아낙네가 장일순 선생님을 찾아와 딸 혼수 비용으로 모아둔 돈을 기차 안에서 몽땅 소매치기 당했다며, 그 돈을 찾아달라고 선생님께 매달렸습니다.
선생님은 그 아주머니를 돌려보내고 원주역으로 가셨습니다. 원주역 앞 노점에서 소주를 시켜놓고 앉아 노점상들과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기를 사나흘 하자 원주역을 무대로 활동하는 소매치기들을 죄다 알 수 있었고, 마침내는 그 시골 아주머니 돈을 훔친 작자까지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를 달래서 남아 있는 돈을 받아냈습니다. 거기다 자기 돈을 합쳐서 아주머니에게 돌려줬습니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 지은 뒤로도 선생님은 가끔 원주역에 나가셨는데, 그것은 그 소매치기에게 밥과 술을 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소매치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안하네. 내가 자네 영업을 방해했네. 이것은 내가 그 일에 대해 사과를 하는 밥과 술이라네. 한 잔 받으시고, 용서하시라고.”
앞으로 소매치기 같은 것 하지 말라든가 나무라는 말 같은 것은 일절 하시지 않았습니다.(최성현, ‘좁쌀 한 알’ 도솔출판사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지켜야할 가장 중요한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덧붙여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사랑의 실천 대상인 ‘이웃’이 누구인지 당신의 한 평생 삶을 통해서 잘 가르쳐주셨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 이웃은 가까운 사람들, 절친한 친구들, 괜찮은 동료들 나와 ‘죽이 잘 맞는’ 사람들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이웃’은 차원을 달리하였습니다. 예수님께 이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족들, 열두 제자들뿐만 아니라 압제자 로마인들도 포함되었습니다.
이방인들, 세리와 죄인들, 생활이 문란한 여인들뿐만 아니라 막가는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들, 행동 하나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던 바리사이들... 모두가 다 이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웃 사랑은 늘 멀고도 요원한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것이 그리스도인으 사랑입니다. 한계가 없습니다. 너무나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것이어서 힘겹게 느껴집니다. 때로 하느님은 너무도 요구가 많은 분이시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러나 한계나 장벽을 두지 않는 너무나 보편적인 그리스도인의 사랑, 힘들기에 도전해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 다시 한 번 마음 크게 잡수시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면서 힘겹고도 먼 사랑의 길을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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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망치를 쥐고 있는 사람에겐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평생을 인간의 욕구에 대해 연구한 애이브럼 매슬로우는 사람의 욕구를 5단계로 나누었습니다. 가장 밑의 1단계는 ‘생리적 욕구’로 먹고 마시는 등의 생존을 위한 욕구가 자리합니다. 그다음도 이와 비슷한 생존 욕구인데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자리와 지위를 차지하려 하는 ‘안전욕구’입니다. 제3단계도 생존 욕구입니다. 하지만 가족과 공동체, 사회에 소속되어 사랑을 받고 보호를 받기 위한 ‘소속과 애정욕구’입니다. 4단계도 이와 비슷한데 애정을 넘어 인정받으려는 ‘존경욕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5단계는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완성하려는 ‘자아실현 욕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의 주장에서 중요한 것은 1단계가 해결되어야 2단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2단계의 안전욕구와 3단계의 애정욕구에 관한 실험 중에 ‘프라이팬 모성애’ 실험이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상대로 한 고문으로 점점 온도가 높아지는 바닥에서 결국 엄마는 아기를 밟고 올라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실험을 일본도 했는데 731부대의 ‘물통 모성애’ 고문이라고 합니다. 물이 점점 차오르는 상황에서도 결국 엄마가 아기를 밟고 수면 위로 올라와 숨을 쉬었다고 합니다. 이런 비인간적은 행위를 통해 얻어 낸 결론이 인간은 생존 욕구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사랑의 욕구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매슬로우는 “망치를 쥐고 있는 사람에겐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매슬로우가 말하는 망치는 바로 욕구입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욕구가 자신을 지배하게 되고 이성도 그 욕구에 따라 작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이웃을 심판하지 않고 사랑해야지!’라고 결심해도 잘 되지 않는 이유는 망치를 내려놓지 않고 생각만 바꾸려 하기 때문입니다. 망치를 내려놓으면 생각도 바뀝니다. 생각은 욕구에 지배당합니다. 사람들은 ‘망치로 어떤 못을 때릴까?’라는 생각만 하면서도 깊은 숙고를 하는 사람이라 착각합니다. 망치를 쥐고 있는 상태에서 하는 모든 생각은 자신을 살리려고 이웃을 이용하려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러다가 자신도 망치에 맞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망치를 쥐고 태어나는데 그것이 생존욕구입니다. 생존욕구는 이웃을 죽이는 욕구입니다. 동물들은 타자의 생명을 먹으며 자신의 생명을 유지합니다. 이 생존욕구가 인간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생존욕구가 지배하면 항상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으로만 살아야 합니다.
매슬로우는 인간의 힘으로 이 생존욕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절대 인간의 힘만으로는 생존욕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욕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고 생각만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생각은 욕구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욕구를 따르는 생각이 행동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욕구를 먼저 변화시키지 않고 생각만 바꾸려다가는 사람 흉내 내는 원숭이가 됩니다. 욕구는 원숭이인데 행동만 사람처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를 지배하는 욕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욕구는 ‘자기정체성’에 의해 결정됩니다. 자신이 누구라는 정체성이 욕구를 바꾸는 것입니다. 생존하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라는 정체성을 갖고 나서는 자식을 위해 생명을 포기하기까지 합니다. 혹은 1년을 더 살거나, 지금 죽고 5억을 선택하거나 하라고 할 때, 아이들은 하나같이 1년을 더 살기를 선택하지만, 아버지들은 자신들이 아버지이기 때문에 1년을 더 사느니 자녀들을 위해 지금 죽어 5억을 받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런 사랑은 자신들이 부모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자기 정체성은 무엇에 의해 결정될까요? 자기 정체성은 ‘믿음’에 의해 결정됩니다. 자신이 누구라는 자기 정체성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에게 준 믿음을 받아들임으로써 결정되는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는 늑대로부터 그 정체성을 받아 자신이 늑대인 줄 압니다. 그러면 늑대의 본성이 그 아이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본성이 채워질 때 행복하다고 믿습니다.
모든 인간은 부모로부터 ‘인간’이란 자기 정체성을 물려받습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기에 ‘인간’이란 자기 정체성은 곧 인간의 ‘본성’이 됩니다. 본성은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이 믿음은 인간의 본성, 즉 인간의 욕구에 사로잡혀 살게 만듭니다. 인간은 남을 심판하고, 육체의 욕망을 채우며, 더 소유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정체성은 자신들의 인간인 부모에게서 받는 본성입니다. 자신을 인간이라고만 믿으면 여전히 망치를 쥐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드님을 보내시어 당신이 우리 아버지가 되심을 믿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사람의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성체를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믿지 않을 수 없게 하셨습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망치를 내려놓고 마치 하느님 사랑의 본성을 멍에로 맨 소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의 본성, 하느님의 욕구에 지배받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당신의 멍에를 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비로소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분의 멍에는 그분의 욕구입니다. 그분의 욕구를 우리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 사랑의 욕구에 지배받으면 이웃을 어떻게 행복하게 해 줄까만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계명의 역할입니다. 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개로만 나뉩니다. 계명은 하느님 자녀의 정체성을 지닌 이들에게 주어지는 멍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의 도구로 삼으셔서 이웃을 행복하게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소’입니다. 소는 주인의 멍에에 가하는 힘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됩니다. 소가 망치를 쥐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종이 될 때야만 그 지겹던 이웃을 심판하던 망치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비로소 안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왜 이 계명들을 가지고도 그렇게 살지 못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망치를 내려놓지 않고 그와 반대되는 사랑의 계명을 따르려는 모순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 새로운 망치를 만들어 자신도 그러면서 그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때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망치를 쥐여준 장본인은 ‘자아’라는 이름으로 우리 안에 숨어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멍에는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지 않고서는 나에게서 실현될 수 없는 욕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사람의 자녀라는 믿음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신앙생활 해 봐야 망치로 계속 사람을 치면서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다고 착각하며 살게 됩니다.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는 것, 이것이 망치를 쥐고 태어나 원죄에서 벗어나 다시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자격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매슬로우가 불가능하게만 여겼던 그 다양한 망치들을 내던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를 믿어 나를 죽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당신 욕구를 실현하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이해한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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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28-34 :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하라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28절)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계명에 달려있다고 하신다.이 사랑의 계명은 어떻게든 선을 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랑이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다. 모든 계명들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는데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이다.
예수님은 신명6,4를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29절) 라고 대답해 주신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다. 이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시며 인간을 지배하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0절)고 하신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31절)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를 모른 체하지 않고, 돈을 자기 몸보다 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만물의 주님께서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자비롭게 행한 것을 바로 당신께 해드린 것으로 여기심을 알고 있다. 그리고는 열심히 그 선행을 실천한다.
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함께가 아니면 완전하게 표현될 수 없다. 이웃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느님을 떠나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확증은 바로 우리 가운데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꾸준히 일하고 그들을 끊임없이 돌보아 주는 일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당신 계명을 지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는다고 하신다.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친밀한 사랑을 알고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처럼 진실해야 한다고 고백하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말한 율법학자의 대답은 주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도 자비를 가로막는 판단은 하지도 말고 듣지도 않아야 한다. 자비는 모든 번제물괴 희생제물보다 낫기 때문이다. 사순절의 모든 삶은 바로 이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어야 한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 이 말씀은 율법학자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아직도 떨어져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율법학자는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말씀을, 그 자비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아직 멀리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하면서 상대를 닮아간다고 한다. 부부의 모습이 닮은 것도 서로간의 사랑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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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호세아의 외침은 하느님의 용서를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백성들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당신께 돌아올 때 그들에게 복을 내리시는 분으로 표현됩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이 살게 하시며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강복하시는 모습은 백성들에게 화해하시는 하느님으로 자리 잡게 합니다. 이런 하느님의 호소에 백성들은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은 우상 숭배를 일컫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향한 백성의 고백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가장 큰 계명 안에서도 표현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가장 큰 계명 또는 황금률로도 불리는 이 계명은 단순합니다. 모든 것을 다하여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 계명은 구약 성경의 요약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고 다른 신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셔야 할 자리에 무엇이든 다른 것이 놓인다면 그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을 신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더욱이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개의 계명처럼 들리지만 실상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의 실천적인 모습입니다. 여기에는 ‘나’ 자신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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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랑>
“율법 학자 한 사람이 ...... 그분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8-31)
율법학자는 ‘첫째가는(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계명의 근본정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계명들을 ‘더 중요한 계명’과 ‘덜 중요한 계명’으로 구분하지 말고, 계명의 근본정신을 생각하면서 모든 계명을 똑같이 잘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마태 5,17-19) 예수님께서는 ‘계명의 첫째’는(근본정신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시는데, ‘사랑’은 계명의 근본정신이기도 하고, 계명을 지키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신앙생활의 근본정신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 가르침에 대해서, “그러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사랑에 대한 정의(定義)는 없는데,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사랑에 대한 정의로 삼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섬기고 싶어 하는 마음이고, 또 그렇게 섬기는 일이다.” 이 정의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 정의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뿐만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도 해당됩니다. 여기서 ‘섬긴다.’라는 말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전부를 주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섬기는 사람’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22,27)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지극 정성으로 섬기게 됩니다. 이 말은, 부모와 자녀, 연인과 부부, 형제와 친구와 동료 사이의 사랑에 모두 적용되고, 교회에도, 국가와 민족에도 모두 적용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좋아하는 감정이나 소유욕을 사랑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은(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감정의 영역에 속한 어떤 무엇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삶을 모두 바치는 ‘의지’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8-10)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라는 말을 “사랑은 하느님입니다.”로 바꿀 수 있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이고(모든 것이고),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잃은 양을 애타게 찾는 ‘착한 목자’의 그 애타는 마음이 곧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셔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신 예수님이 곧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16)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사랑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면서, 그 사랑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하나?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1요한 5,3)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1요한 3,23)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실현됩니다. 동시에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이웃을 외면하고 스스로 고립되어서, 혼자서만 신앙생활을 하고, 혼자서만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은 ‘사랑 없는’ 태도입니다. 그 자신은 자기가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생각은 착각일 뿐입니다. 사랑 없는 생활은 신앙생활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을 외면하는 것은 사실상 자기 자신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과 자기 사이에 높은 벽을 세워 놓고 자기 혼자서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 구원도 외면하고 헛일을 하는 것입니다.)
계명에 관해서 예수님께 질문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자 예수님께서는,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칭찬하십니다.(마르 12,34)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가 있다.”이기도 하고, “아직은 하느님 나라에 완전히 도착한 것은 아니지만 방향은 잘 잡고 있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그 방향으로 끝까지 잘 가라는 칭찬과 격려의 말씀입니다. 또는 알고 있는 것은 정확하니까 그것을 잘 실행하라는 격려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대해서, 또 사랑 실천에 대해서 올바르게 아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알고 있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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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훈일 세례자요한 신부님]
<첫째 가는 계명>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이 우리를 더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더 사랑한다고 확신합니다. 실상은 하느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면서도 말입니다.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자기만큼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장담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공언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그제야 예수님께서 자신을 더 사랑하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즉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사랑의 고백은 위선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면 자연히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평생 진정으로 한 사람을 사랑하기도 벅찹니다. 더군다나 원수까지도 사랑하려면 나에게 과연 이웃사랑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도 들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것도 역시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해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까? 비록 지금 고통당하고 시련 속에 있지만 이 세상 무엇보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계시니 세상은 아직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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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수도회 황인수 이냐시오 신부님]
<자신을 다 버리는 사람은>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피정한 적이 있습니다. 수사님들은 끝기도 할 때가 되면 불 꺼진 성당에서 제대 위쪽, 성모님 모습이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를 향해 서서 성모 찬송?(Salve Regina)?을 바쳤는데 저도 수사님들의 그레고리안 성가 곡조를 따라가면서 영원을 생각하며 깊이 허리를 숙이곤 했습니다.
수사님들은 어제처럼 오늘도 살베레지나를 불렀을 것이고 오늘처럼 내일도 이 노래를 부를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어제가, 오늘이 그리고 내일이 영원 속으로 들어가며 허리 꼿꼿한 젊음이 한쪽으로 비스듬히 늙어갈 것이었습니다.
‘시간은 무엇이며 젊음은 무엇일까?? 살베레지나 한 곡조 속에 영원이 들어 있는 것을, 살베레지나로 시작한 푸른 젊음이 비르고 마리아(Virgo Maria)?로 황혼에 잠겨드는 것을….’ 그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해 한 분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랑으로 내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그렇게 그는 영원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렇지 않고 시간에, 돈에, 상황에 끌려 다니며 사는 사람은 끌려 다니며 살게 되지요. 그는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사람입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자신을 다 버리는 사람은 이미 지상에서 그 갚음을 받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세속에서는 자기 언니였던 세레나 수녀에게 주는 권고의 말입니다. 우리도 이 지상에서, 죽은 어느 날 저 위에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종이 아니라 주인으로, 자유인으로 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을 다해 하느님과 내 이웃을 사랑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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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학생들을 위해서 피정 지도할 때가 있었습니다. 8일 동안 학생들과 함께 있으면서 같이 기도하고, 묵상하고, 산책하면서 지냈습니다. 한 신부님께서 사제들의 모임방에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성당과 성화를 주제로 한 ‘퍼즐’이었습니다. 신부님들은 퍼즐을 맞추면서 자칫 무료한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피정이 끝날 때쯤이면 퍼즐이 완성되었고, 피정의 집에는 액자로 만들어서 드렸습니다. ‘최후의 만찬, 고딕 양식의 성당, 돌아온 아들’과 같은 퍼즐을 만들어서 드렸습니다. 저는 집중력이 부족하고, 끈기가 적어서 퍼즐 완성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몇몇 신부님은 놀라운 집중력과 상상력으로 퍼즐을 맞춰나갔습니다. 전체 퍼즐을 맞추기 전에 색깔별로 분류를 하였습니다. 모양별로 분류를 하였습니다. 맞추기 비교적 수월한 모서리 면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하면 하나 둘 모습이 나타나고, 마지막 하나의 퍼즐을 맞추게 됩니다.
중국에서 시작한 신종코로나 바이러스가 한국과 일본에도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지리적으로 가깝기도 하고, 경제와 문화 교류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라는 퍼즐을 어떻게 맞추는 것이 좋을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나친 공포와 두려움은 퍼즐을 맞추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특정한 집단이나,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도 퍼즐을 맞추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보건 당국의 책임을 추궁하고, 비난하는 것도 퍼즐을 맞추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을 정쟁의 도구로 삼는 것도 퍼즐을 맞추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원인을 규명하고, 환자를 돌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신종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증상이 의심되는 사람은 자가 격리를 하고, 보건당국에 신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부는 정보를 신속하게 공개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보건당국과 정부의 지침을 따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전염력이 강한 독한 감기라 생각하고, 조기에 치료받으면 완치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퍼즐을 맞추는 최상의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모두 서로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주는 겁니다. 바이러스는 물리쳐야 하지만,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사랑해야 할 우리의 이웃입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라는 퍼즐이 빨리 맞춰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을 저희에게 인자로이 내려 주시어 언제나 저희가 지나친 욕망을 끊고 주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그들은 다시 내 그늘에서 살고 다시 곡식 농사를 지으리라. 그들은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 내 백성이 내 말을 듣기만 한다면, 이스라엘이 내 길을 걷기만 한다면, 내 백성에게 나는 기름진 참밀을 먹이고, 바위틈의 석청으로 배부르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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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사랑>
마르코 12,28ㄱㄷ-34 (가장 큰 계명)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참사랑>
그대
나 되도록
나
그대 되는 것
그대
나 되기 전에
나
먼저 그대 되는 것
그대
나 되지 않더라도
나
그저 그대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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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언젠가 들었던 발레리나들의 배역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발레단 안에는 여러 가지 역할이 있는데 크게 나누자면 다 함께 군무를 추는 역할, 그리고 혼자서 춤을 추는 솔리스트의 역할입니다. 당연히 군무를 추는 이들보다 혼자서 춤을 추는 솔리스트가 더 실력이 좋습니다. 홀로 시선을 집중 받으며 여러 가지 감정과 아름다움을 연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솔리스트보다 더 출중한 사람이 맡는 역할이 있는데, 이를 프리마 돈나 (prima donna)라고 부릅니다. 이태리어로 “첫번째 여성”이라는 뜻의 프리마 돈나는 남자 무용수와 함께 춤을 추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혼자 춤을 추는 것보다 두 사람이 합을 맞추어 예술을 표현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얼핏보면 독무를 하는 것이 둘이서 함께 춤을 추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나의 실수를 메워줄 수 있을 것 같고 덜 외로울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프리마 돈나가 더 어려운 이유는 함께 춤을 추는 발레리노와 많은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상대는 남자이기에 근육의 탄성도 다르고 키와 무게도 다릅니다.
이들이 힘을 합쳐 예술을 표현한다는 것은 본인을 통제하는 힘이 있고 남을 배려하고 맞춰주는 힘 또한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만큼 수많은 시행착오, 노력과 고통을 감내 했을 때에야 가능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많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부모로써, 자녀로써, 부부로써, 친구로써, 이웃으로써 계속해서 타인과 합을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와중에 타인과 함께 춤을 추는 것이 홀로 춤을 추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은 우리에게 안도감을 줍니다. 인간 관계 안에서 우리가 겪는 갈등과 어려움들이 통상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가지 모두를 강조하므로 “사랑의 이중계명”이라 불립니다.
이 말씀을 듣는 저는 이렇게 하느님께 투덜대고 싶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란 참으로 쉬운데 이웃을 사랑하기란 너무 어렵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내가 힘이 들 때 언제든지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반면에, 이웃은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하느님께서 저에게 바라시는 이웃 사랑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아주 완벽한 사랑은 아니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둘이서 합을 맞추는 것이 더 어렵다는 세상의 이치를 하느님이 모르실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 어느 정도 봐주시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어린 핑계가 아닙니다. 이는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입니다.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게 되고, 그리하여 더욱 타인을 위해 “노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있기에 전적으로 가능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곧 하느님의 사랑이 전제되어 있으므로 이웃을 사랑하려 노력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받아 누리며 그것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이웃 사랑의 계명은 더 이상 의무로 느껴지지 않고 자연스레 시도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선한 영이 나의 몸과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면, 내가 굳이 나에게 상처를 입힌 이웃을 이해하고 사랑하려고 발버둥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선한 영이 흘러나와서 이웃을 따뜻하게 돌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앞서 말씀 드렸듯 우리는 완전하지 않기에 하느님의 사랑을 매 순간 상기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두 명의 무용수가 길고 긴 연습으로 합을 맞추어 아름다움을 연기할 수 있게 되듯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며 사랑을 시도하고 시도하다 보면 어느새 그것이 몸에 익어 자연스러운 것이 되리라 믿습니다.
율법만으로는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강제성이 있는 법으로 사랑을 시도할 수 있다는것 자체가 말이 안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한 모범으로 십자가 위에서 수난을 받으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아니 나 자신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는 사랑. 그 위대한 사랑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율법만으로 통제될 수 있는 사회 또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사회가 계속해서 유지되려면 분명 보이지 않고 통제할 수 없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곧 사랑과 용서, 자비와 같은 인간의 따뜻한 마음입니다.
만약 이러한 것들이 결여된 사회는 매우 차갑고 험악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러한 사회를 만들지 않도록 마음 속에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숨겨두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원동력으로 우리는 다시금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누군가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 힘들게 느껴진다면, 지금의 계속해서 시도하고 노력하고 있는 이 과정이 프리마 돈나가 되기 위한 연습 기간이라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연습을 하는 지금은 넘어질 수도 있고 여기 저기 통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이 없다면 결코 나의 아름다움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 인고의 시간을 견디어내고 계속해서 타인과 합을 맞추다 보면 누구보다 아름다운 프리마 돈나가 되어 하늘 위로 번쩍 들어 올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 와중에조차 자신의 춤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혹은 사소한 실수가 또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을 지켜보신 하느님께서는 흐뭇한 미소로 따뜻한 박수를 보내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 율법 학자에게 하시는 다음의 말씀을 큰 소리로 외치시며 말입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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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신선한 성령의 봄바람이…>
봄철엔 바람이 많습니다. 바람이 자주 부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무는 가지마다 새싹을 틔우려 합니다. 그러려면 가지까지 물을 올려야 합니다. 그러나 나무는 스스로 물을 올리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바람은 나무를 흔들어 물이 가지까지 잘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래서 봄철에는 바람이 많다고 합니다.
“신선한 봄바람입니다.” 신비스러운 자연 현상입니다.
저는 요즘 코로나 19로 어렵고 힘든 삶이지만, 봄바람이 불 때마다, 고운님들의 심령에도 성령의 바람이 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제가 바라보는 곳에 앞에 제가 만들어 놓은 가시관 쓰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이제 모든 것을 치유하고 회복되었음을 좋겠다는 중재기도를 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품은 고운님들을 향해 드렸던 기도들, 잃었던 것이 다시 돌아와 품에 안기고, 질병이라는 아픔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던 몸과 마음이 회복되고, 그리고 고운님들이 바라는 모든 것들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뿐 이었습니다.
“하지 마십시오. 고운님이 하지 마십시오. 고운님 안에 계신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하시게 하십시오.” 아멘.
오늘 매일 미사 책 복음은 이런 주제 말씀이 있습니다.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러자 율법 학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 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너의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셨을까요? 당시 율법 학자들 대부분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메시아로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몰아가고 있을 때, 그 율법 학자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주님이신 분”으로 믿고 계명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는 이 말씀에는 “나를 믿고 따라오너라.”라는 하느님의 자애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시대가 바뀌고, 사람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결혼한 지 80년 된 이 부부는 ‘서로 사랑하는 비결’을 묻는 말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남들처럼 우리 부부도 가끔 다툽니다. 하지만 그날을 넘기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화가 난 채로 잠자리에 든 적이 없었지요.”
또한 “배우자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려면 ‘미안하다’라고 말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돼요.”라는 말도 잊지 말라고 합니다. 80년이라는 결혼 생활을 한 어르신 부부가 거룩하고 위대하게 보였던 이유가 있습니다.
“미안하다.”라고 말하는 순간에 “내가 상대방을 존중하는 사랑의 시작이다.”라는 것입니다.
고운님들은 어떻습니까?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먼저 “미안하다.”라는 말도 못 하고, 화를 품고 잠자리에 들다 보면 오만가지 분노, 짜증이 나서 몇 번을 일어나서 기도했다가 또 눕고, 또 일어나서 앉자 다가 묵주를 잡고 한숨 쉬기를 반복하고 “미안하다.”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 입에서만 계속 맴도는 그 말을 하지 못해서 불안하고 힘들게 보낸 시간들...ㅠㅠㅠ
☞내가 너에게 “미안하다.” 한 마디면, 내 몸과 마음에 그리고 심령에 신선한 성령의 봄바람으로 충만해질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미안하다.”라는 한 마디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저 두레박도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품고, 몸과 마음이 아픈 님들과 간호하는 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요즘 코로나 19로 참 많이 어렵고 힘든 삶의 연속입니다. 이제 하느님이 주시는 신선한 성령의 봄바람으로 고운님들의 삶을 치유하고 또 회복되어 아름다워지고 거룩해지는 충만한 은총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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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442)
♧♧ 시편 78편 11절…
"그리고 잊어버렸다. 그분의 위업을. 그들에게 보여 주신 기적들을"
여기서 말하는 ‘위업’은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과 광야 여정 가운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여러가지 기적들을 가리킵니다.(12-16절. 참조) 따라서 이 구절은...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배신했다는 의미입니다.(신명기 32장 6-7절. 이사야서 1장 2-3절. 참조)
♧♧ 시편 78편 12절…
"그분께서는 그들의 조상들 앞에서 이적을 일으키셨다. 이집트 땅 초안 평야에서"
* 그분께서는 그들의 조상들 앞에서 이적을 일으키셨다.
‘이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페레’라는 말은 ‘기적’ ‘놀라운 일’ ‘기인한 일’을 뜻하는데, 구체적으로 이것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집트 땅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을 말합니다.(탈출기 7-12장. 참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조상들의 눈앞에서 열 가지 재앙을 행하여 보이셨지만, 고집부리고 반항하는 저들은 이내 이적을 잊어버리고 광야 길에서 어려움에 처하자 하느님을 원망하고 죄를 저질렀습니다.(17절. 참조)
* 이집트 땅 초안 평야에서...
‘초안’은 나일 강의 타니틱 지류의 동쪽에 있던 도시로 이집트를 다스렸던 힉소스 왕조가 수도로 삼았던 성읍으로 추정됩니다.(민수기 13장 22절. 이사야서 19장 11과 13절. 에제키엘서 30장 14절. 참조)
♧♧ 시편 78편 13절…
"바다를 가르시어 그들을 건너가게 하시고 물을 둑처럼 세우셨다."
이집트 군대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뒤를 추격해 왔을 때, 하느님께서 홍해를 가르시며 그 가운데로 이스라엘을 지나가게 하신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탈출기 14장 21-22절, 15장 8절. 참조) 이 홍해 사건은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하느님의 기적들 가운데서 언제나 가장 크게 여겨지는 것이었습니다.
♧♧ 시편 78편 14절…
"낮에는 구름으로, 밤이면 불빛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에 입성하기 전까지의 광야 여정 중에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더위와 추위를 막아주신 하느님의 보호의 섭리를 가리킵니다.(탈출기 13장 21절, 40장 38절. 민수기 9장 15-16절. 참조) 아마 하느님의 이러한 보호의 손길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 땅에 이르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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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패션 잡지 ‘컬러스’는 하나의 설문 조사했습니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에게 천국은 어떤 모습인가요?” 스스로 천국, 하느님 나라가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보십시오. 한가운데에 하느님께서 계시고 구름 위에서 사는 평화로운 모습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 나라를 상상하기도 하지만, 지금 사는 이 세상의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천국에서는 남자들이 요리해요.” “일광욕해도 햇볕에 살이 타지 않고, 산소통 없이 물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요.” “초콜릿을 마음껏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아요.” 사람들은 일상의 좋았던 그리고 사랑하는 부분을 천국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긴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뿐,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주 작고 소소한 일상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곳이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잡지의 편집장인 디자이너 터보 칼맨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은 일상에서 즐거움을 찾는 일.” 지금의 자리가 하느님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을 하고 또 사랑을 받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니까요. 율법 학자 한 명이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대답하십니다.
이 율법 학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면서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대답하지요. 이때 예수님께서는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고 이르십니다. 바로 지금 사랑하며 사는 삶이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에 사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사랑에 맞춰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나 자신이 하는 사랑에 대해 묵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욕심 가득한 사랑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진정한 사랑을 실천해야지만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질 수 있으며,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 나라를 즐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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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목적>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갱년기’라는 단어는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전신적 노화 현상으로 흥분, 두통, 불면 등의 이상 증세가 나타나지요.
그러나 사실 남성에게도 옛날부터 있었고 지금도 다가오는 증상이라고 합니다. 단지 남자라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풍조 때문에 참고 넘겼을 뿐이라고 합니다. 이런 갱년기가 오게 되면 무기력함이 동반됩니다.(참고로 저 역시 갱년기에 해당하는 45~55세 범주 안에 들어왔지만 아직은 전혀 느끼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삶의 목적이 무의미해지면서 점점 분노가 찾아오고 걱정으로 밤에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는 불면증을 겪게 된다고 하더군요. 미국 미시간대 연구 팀에 따르면 은퇴한 50세 이상 중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삶의 목적이 있느냐 하는 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결론을 발표했습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은 마음가짐이 몸의 면역 반응을 끌어내는 듯 했다. 이는 행복한 사람이 오래 사는 것과 같다.” 삶의 목적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 삶의 목적이 하느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계속 말씀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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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회개와 사랑 실천-
살기위하여, 영육靈肉이 살기위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의도적으로 노력하고 실천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크고 비상한 사랑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일상에서부터 실천할 수 있는 작고 평범한 사랑입니다. 어제 성 요셉 축일에도 성 요셉상과 더불어 ‘사랑하는---’으로 시작되는 여러편의 카톡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성 요셉의 위로와 평화의 축복 인사 받으시고 가족 모두가 행복하세요!”
앞으로도 웬만하면 모든 편지의 서두는 사랑으로 시작하려 합니다. 또 어제 뜻밖의 손편지를 받고 감동했습니다. 지금은 80세 고령이 되신 옛 수련자 때 40대의 젊은 수련장신부님이셨습니다.
-“주님의 平和. Fancisco 신부님, 오랜만에 불러보네요. 사순절도 벌써 3주간으로 접어 드네요. 기쁨과 平和의 부활 대축일 맞으시기 바랍니다. Newton에서도, 화순에서도, 왜관에 와서도 정신없이 살다 보니 신부님께 바로 전해야 할 편지가 17년이나 묵어 있었네요. 아주 미안하게 되었어요! “코로나19” 때문에 난리가 난통에 우리도 수도원 안에 갇혀서 살고 있는데 빨리 끝났으면 좋겠는데! 나는 수도원 안에서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Fancisco 신부님도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겸손하면서도 섬세한 사랑이 배어 있는 편지였습니다. 한참 후배에게도 깍듯이 존대말을 사용하는 것이 겸손한 사랑임을, 또 나이, 성별에 관계 없이 모두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참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해야 삽니다. 사랑은 삶의 의미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어제 일간신문에서 본 특별한 기사도 잊지 못합니다. 청소업체를 운영하는 30대 젊은 사장에 대한 기사가 신문 한면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청소비는 원룸은 기본 30만원 이상, 투룸은 40만원 이상이다. 청소 인력은 2-8명, 청소 시간은4-10시간, 집마다 천차만별이다. 6명이 하루 10시간씩 꼬박 이틀 청소한 집도 있다. 저장강박증이 있던 고인의 집이었다. 1.5t트럭이 세 차례나 물건을 가득 실어 나갔다.
---구더기, 하루살이, 바퀴벌레가 들끓는 방은 차라리 정글이었다. 냉장고 안에 서식하고 천정에서 침대로 툭툭 떨어지는 바퀴벌레는 아직도 적응이 안된다.
---청소를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의뢰인들의 삶의 흔적을 본다. 쓰레기집 청소 의뢰인 8할 이상은 우울증에 시달리는 분들인 것 같다. 약봉지가 많이 나온다. 우울증은 본인밖에 모르는 병이다. 그들은 집을 치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무기력증 때문에 도움없인 못치운다. 얼마전 클린어벤져스 8명이 7시간 동안 청소한 의뢰인 여성이 보낸 글이다. ‘그동안 계속 세상이 나를 넘어뜨리는 기분이었는데 청소 도움을 받고 누군가가 나를 일으켜 주는 기분을 느꼈다.’
---청소에서 희열을 느낀다. 등산과 비슷하다. 땀나고 힘들고 어려워도 마지막에 현관에 서서 깨끗한 집안을 들여다 보면 산 정상에 서있는 기분이다.”-
사랑이 가득한 청소업체 젊은 사장이었습니다. 아, 비상한 사랑이 아니라 제 주변부터, 냉장고부터 잘 청소하는 것이 자기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이 없어, 사랑을 잃어 무의미한, 무관심한, 무기력한, 무의욕의 삶에 방치된 집이요 방임을 봅니다. 청소 의뢰인 8할이 우울증 환자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합니다.
참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나를, 사랑을, 희망을, 꿈을, 기쁨을, 감사를, 기도를 잃고, 잊고 외롭고 힘겹게 살아들 가는지요!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데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니 계속 내적으로 무너져 내린 삶, 급기야 자포자기 폐인의 삶이 되기도 합니다. 하여 영육의 죄도 병도 늘어만 갑니다. 1인가구가 늘어가는 현실은 더욱 그런 추세가 될 것 같습니다.
이래서 사랑입니다. 사랑이 깨어 있게 하고 정리하게 하고 청소하게 합니다. 누구도 탓할 수 없습니다. 살기위해, 영육이 살기위해 사랑은 필수전제조건입니다. 활력있는, 의욕있는, 희망찬, 아름다운, 향기롭고 매력적인 삶을 위해 사랑해야 합니다. 비상한 큰 사랑이 아니라 일상의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요, 우선적인 사랑이,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목표, 방향, 중심, 의미, 희망, 기쁨, 생명, 행복 등---우리의 모두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답은 사랑뿐입니다.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나은 사랑입니다. 경신례敬神禮의 거부가 아니라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샘에서 샘솟는 자기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나를, 이웃을, 일상의 모두를 사랑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 사랑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그러니 이런 하느님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여 끊임없는, 마음으로부터의 회개입니다. 하느님 사랑에로의 초대에 대한 응답이 바로 회개입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이스라엘은 바로 우리 각자입니다.
회개하여 돌아올 때 체험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호세아가 하느님의 사랑을 참 시적으로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회개하여 마음을 연 이들에게 들려 오는 하느님의 다정한 음성입니다.
“나 이제 그들의 마음을 고쳐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그들은 포도 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 내가 응답해 주고 돌보아 주는데, 에프라임이 우상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는 싱싱한 방백나무 같으니 너희는 나에게서 열매를 맺으리라.”
회개하여 사랑의 은총 가득 받은 참 아름다운 영혼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이런 하느님을 떠나 스스로 자초한 불행이요 화이니 정말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참으로 사랑하는 이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이요, 분별있는 사람들이요 주님의 길은 걷는 의인들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답은 사랑뿐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오늘도 사랑의 새하늘, 새땅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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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실천함으로써 완성됩니다>
으뜸가는 계명이 무엇인가를 논하는 일은 예수님시대 전후에 종종 있었던 일입니다. 유다교에는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248조항은 명령, 365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많은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중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잡다한 계명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으로 요약하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시키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 참조 : 신명6,4-5)는 것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12,31. 참조: 레위19,18).는 사랑의 이중계명은 십계명의 핵심정신이고,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의 근본정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전 생애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됩니다.(손희송)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하여 동의를 표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12,34).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하였지 아직 들어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계명에 대하여 슬기롭게 말하고 동의한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천상의 나라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함으로써 완성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 나라요, 알고만 있다면 멀리 있지 않은 밖이라는 사실입니다. 운동경기에서 골인을 한 것과 골인할 번한 것은 분명 다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캐오 이야기(루카19,1-10)를 기억하시지요? 예수님께서 나무에 오른 자캐오에게 “오늘 이집에 구원이 내렸다.”고 선언하셨고 율법학자에게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는 학자답게 이론으로 알고 있었고, ‘훌륭하십니다.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라고 말하며 감히 예수님을 평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캐오는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하며 즉시 변화된 행동을 보였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7) 그러므로 사랑에 목말라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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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얼핏 듣기에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제시하는 듯하지만, 곰곰이 머물러 보면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고 계신지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정말 몰라서 배우고 싶은 걸까요? 아니면 답을 훤히 알지만 예수님을 시험해 보려는 걸까요? 이도 저도 아니라면, 모든 계명을 아우르는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계명을 콕 집어 달라는 걸 보니 그동안 세부적인 조항들을 열심히 따지며 지키다가 제 풀에 지친 걸까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이 말씀에 가만히 머무릅니다. 이 계명이 단순히 내 편에서 해야 할 절대 의무라면 부담스럽고, 늘 부족해 송구스럽고, 또 무겁게 느껴져야 할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뭉클해지고 눈시울도 뜨거워집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계명이 나에게 부과된 의무이기 이전에 먼저 하느님께서 나에게 하고 계신 것이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이 계명은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법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다 주십니다(예수님께서 1인칭 단수인 "너"라고 하셔서 그대로 받았습니다). 당신 마음, 목숨, 정신, 힘을 다 내어 주십니다. 그렇게 나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십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호세 14,2)
제1독서에서는 호세아 예언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호세 14,3)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화려하고 엄청난 제물이 아니라 우리 마음입니다. 소박하고 진솔한 사랑 고백이고 가난한 영의 기도입니다.
"나의 분노가 풀렸으니 이제 내가 반역만 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호세 14,5)
주님은 마치 실컷 죄 지으며 제멋대로 살던 우리가 이제 그만 당신께 돌아서려고 마음만 살짝 먹어도 당장 모든 걸 용서하려고 기다리시는 분 같습니다. 그분은 사랑하는 우리를 기다리며 언제라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십니다.
"이슬, 나리꽃, 싹, 아름다운 올리브 나무, 레바논의 향기, 내 그늘, 포도나무, 포도주, 열매..."
이어지는 주님의 축복들이 얼마나 생기 넘치고 찬란한지요. 이 모든 것이 죄로 기울어 등돌리고 있는 동안에는 볼 수 없었던 하느님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가 회개함으로써 이 모두를 얻는다기보다, 이 모두를 주시려는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 회개가 아닐까 합니다. 바로 "내 것이 다 네 것"(루카 15,31)이었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내 백성에게 나는 기름진 참밀을 먹이고 바위틈의 석청으로 배부르게 하리라."(화답송)
마음을 다해 당신께 다가서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기름진 참밀은 빵의 형상으로 오시는 당신이십니다. 바위틈의 석청은 꿀보다 단 그분 말씀이시지요. 성체와 말씀!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가장 귀한 것을, 아니 당신을 통째로 주십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랑은 하느님과 우리의 상호적 사랑입니다. 더할 수 없을 만큼 극진히 서로에게 쏟아붓는 사랑은 그래서 하나입니다. 사랑으로 하나 된 존재들에서 네 사랑과 내 사랑을 칼로 베듯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랑에서 넘쳐 흘러나오는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 모상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라고 하십니다. 지식 안에 맴도는 것은 아직 사랑이 아닙니다. 화려한 언변으로 불러대어도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는 사랑은 주님만이 아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온 존재를 바쳐 주님을 사랑하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그 사랑이 이웃으로 흘러 세상에 온기와 향기를 더하고 있으니 감사합니다. 어려운 시기를 함께 동행하며 진정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벗님이 있어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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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야훼의 종과 요셉은 묵묵히 고통을 받아냄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구합니다.
다른 인간의 선을 위한 대속적인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으신 분께서 엄청난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매 맞고 상처를 입으신 덕택으로 여러분의 상처는 나았습니다.”(Ⅰ베드 2,24)
♣욥 :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욥기 1,21-22) 아내가 “당신은 아직도 다신의 그 흠 없는 마음을 굳게 지키려 하나요?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려요” 욥은 “당신은 미련한 여자들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드려야 하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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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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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호세 14,10)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화답송>에서는 “내가 주님, 너희 하느님이다.”(시 81,11)라고 노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마르 12,29)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먼저 ‘존재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곧 행동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곧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우리 주님’이라는 그분의 존재차원을 밝히십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의 존재의 차원도 밝혀주십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의 소유’라는 것을 밝혀줍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마르 12,34)고 할뿐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아마도 율법학자에게 있어서 아직 사랑의 실천이 남아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아직 더 확장되어야 할 사랑의 계명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구약>의 ‘사랑의 계명’은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약>에서는 ‘이웃 사랑’을 동포 사랑으로 한정하면서(레위 19,18) 함께 사는 이방인들까지를 포함(레위 19,34)시키고 있다면, <신약>에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가 10,30-37)에서 보여주듯이 무제약적, 무차별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원수까지도(마태 5,44) 포함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합니다.(마태 5,48) 또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레위 19,18)하여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고 있는 반면에, <신약>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하여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사랑의 시금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근본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신명기>(6,4-5)의 ‘하느님 사랑’과 <레위기>(19,18)의 ‘이웃 사랑’을 한데 묶으시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곧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우리가 ‘한 몸’이라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같아집니다. 물론, 이 때 ‘한 몸’이란 ‘너의 몸이 내의 몸이고 나의 몸이 너의 몸’이라는 혼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새 천년기](24항)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일부”인 형제들이란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한 몸의 지체’로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일부이기에, 나의 일부인 형제의 아픔이 바로 나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형제가 나의 일부이듯 하느님의 일부가 되고, 형제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 되고, 하느님 사랑이 곧 형제 사랑이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형제가 곧 하느님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표현을 빌려본다면, 남편에게는 아내가 하느님이요, 상인에게는 손님이 하느님이요, 본당신부에게는 본당신자들이 하느님이요, 대통령에게는 국민이 하느님이요, 나에게는 공동체 식구들이 하느님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이중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곧 ‘남’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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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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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떼어주는 사랑>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더 이상 희생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참다운 인간의 모습임을 말씀하십니다.
많이 가진 사람이
더 가지려고 더 누리려고 위만 쳐다볼 때,
가진 것 없고 가진 것 마져 위태로워
힘겹게 사는 사람은 슬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직접 나서서 사랑할 수 없다면,
뒤에서 후원할 수 있고,
몸으로 뛰는 사람을 도우면 큰 사랑이 됩니다.
'빨리 빨리' 근성을 지닌 한국을
무시하던 나라들이 그 진가를 보고 놀랍니다.
차별하는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는
그 무엇을 주는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그 안에 웃고 있습니다.
"사랑은 자기를 떼어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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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 28)
생명을 깨우는
사랑의 계명입니다.
끝내 사랑한다는
이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나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은 분명
사랑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도
버릴 수 없는
첫째 가는 사랑의
참된 계명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한자리에
모아들이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삶의 가장
첫째가는 순서 또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다시 시작하는
우리들 삶입니다.
너와 나 사이에
하느님 사랑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보다
더 강력한 힘은
없습니다.
힘들어도
살아갈 이유가
사랑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 사순이
사랑의 참된
시간이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사랑을 위한
아픈 시간이며
사랑을 위한
첫째 계명입니다.
###############
(2)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세상 모든 것들은 결국 하느님을 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평화와 일치,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랑의 힘은 생명의 힘입니다. 사랑은 가장 충만한 진리이며 신비입니다. 사랑보다 더 깊은 신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비로움의 주체는 창조자이신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의 시간을 빛나게 합니다. 우리를 알아주는 이는 영원한 사랑이신 하느님 뿐 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결코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리를 결코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를 위해 언제나 모든 것을 바치는 피와 살의 사랑, 생명의 사랑, 영원한 사랑을 우리에게 선물하십니다.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사랑을 먹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모든 것은 신비이며 사랑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온정신을 다해사랑하는 생명의사순시기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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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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