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플러
최금진
루이15세는 왕가의 문장을 박아 넣기 위해 스테이플러를 생각했다
단호하게 제 할 말을 마치고 입을 다물어버리는 스테이플러의 완고함은
노쇠한 자의 빛나는 틀니 같은 것이었다
때로 스테이플러는 환자의 벌어진 살집을 꿰매는 도구였다
살점 속에 흰 뼈가 비치는 살과 살을 엮어 봉합하면
혈관에서 뇌까지 뚫려 있는 상처의 흔적도 보수해 줄 것만 같았다
원고를 보내기 위해 복사된 종이들을 스테이플러로 찍는다
말할 수 없는 것에 함구령을 내리듯 변명의 여지가 없는 문장들이
나를 대신 살아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봉투에 종이뭉치를 넣고
다시 한번 더 철심을 박아 쿵쿵 밀봉을 하고 나면
시간의 한 마디를 꺾어 다음 마디에 이어붙이는 기분이 든다
스테이플러를 열면 수많은 ㄷ자 형태의 문고리들
어떤 문도 쉽게 타인을 통과시키진 않는다고,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살아온 날의 절반을 구부려서라도 전보다 더 단호해져야 한다고
문을 열고 나갈 때마다 뒤를 돌아보는 버릇
그것은 어떤 트로피보다 영광스럽게 나를 붙잡아 놓았다
가슴의 흉터에 난 스테이플러 자국들을 험상궂게 까 보이면서
한 번 떠난 곳으론 다신 돌아오지 않겠다고 나는 다른 안쪽을 닫아걸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은 무수한 쇠못들 같았다
쿵쿵, 당신을 봉투에 넣고 스테이플러를 찍는다
더 멀리 보내기 위해선 가까운 인근부터 잘 고정시키고 봉해야 한다
그리고 차가운 철심들이 구부러지는 각도처럼
뭔가를 접어야 할 때는 손과 허리를 굽혀 힘을 줘야 한다
스테이플러 안에 가득 쟁여둔 폐쇄의 욕망들이
실은 너무 쉽게 뜯길 것을 두려워하는 연약한 종이의 울음이란 걸 알기에
우리는 어디서든 이빨을 앙다물고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