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 필경의 단명
송원 훙 재 석
삶의 직업이란 천태만상이며 인생은 짧아도 예술은 길다는 말이 생각난다. 그 옛날 반상(班常)의 시대만이 아니다. 지난날에도 뭇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자는 글밭을 일구는 문인들이 아니던가. 일정 식민지 시대에서 많은 문인들은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애국애족의 칼날의 필경으로 문학세계를 일군 글밭을 우리 모두는 익히 알고 있으리라.
자유평등 사회인 오늘날에는 직업의 귀천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보는 작가의 위상을 남들은 과연 어떻게 보고 있을까. 문인들을 보는 존경심보다 바뀐 세태를 모르는 사람으로 보는듯한 눈빛이, 마음에 걸리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래도 시대흐름을 잡아 주는 것은 그 시대 문인들의 몫이다. 사명감을 가지고 더욱 노력하며 정진(精進)해야만 한다.
나는 일찍이 문필의 철필(鐵筆) 글씨로 대학도 다니고 공직생활도 시작하였다. 문학적인 글은 아니지만 현실을 보면서 봉사의 글을 수없이 써보았다. 말년에 아내의 중환자실 병수발을 하면서 타들어가는 내 심정을 달래려고 희수의 글쓰기로서 문단에 발을 들어놓은 것이다.
그해 가을학기에 푸른 솔 문인들과 힘께 첫 문학기행에 설레는 마음으로, 강원도 춘천의 김유정 문학관을 갔었다. 김유정(金裕貞 1908-1937) 선생은 청년 해학 소설가였다. 선생의 문학 활동은 불과 4년간이지만 단편소설30편, 수필14편, 번역2편의 많은 글밭을 일구고 그만의 사랑의 족적(足跡)을 남겨놓았다. 6,000석의 부잣집 구두쇠 아버지는 독립운동자금 지원의 연유로 서울로 이사를 갖지만, 선생은 8살 나이로 졸지에 조실부모를 당하였으니 기막힌 운명의 사연이 아닌가.
이때부터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워 학창시절 어머니를 닮은 기생을 보고서 메아리 없는 편지를 수없이 쓰셨단다. 아마도 그때부터 문학의 눈이 뜨이고 23살 때 형의 파산(破産)으로 귀향하였다. 농촌 계몽운동을 하면서 그리운 사랑의 마음으로 박봉자 여인과의 연애도 꽃을 피우지 못했단다.
당시 동내주막집 유부녀인 “들병이” 와의 뜨거운 불륜의 사랑에 열정을 불태웠단다. 이를 계기로 처음 쓰신 작품이 ‘산골 나그네’ 이다. 이어서 ‘총각과 맹꽁이’ 의 단편소설을 쓰면서 다작을 하였다. 인명은 재천이라 하지만 애석하게도 29살 노총각으로 요절(夭折)을 하였으니 너무나도 안타깝고 눈물겹지 않는가.
선생은 짧은 삶의 인생이었지만 사랑의 꽃으로 피우신 글밭의 열매는 예술의 힘으로, 뭇사람의 가슴속에서 영원이 못다 핀 꽃봉오리로서 남아 있으리.
나는 김유정 문학관을 보면서 사랑의 힘으로 미친 듯이 소나기 다작을 하신 선생의 문학정신에 감동을 받았다. 한편 내게는 황혼길 여생에 자신감과 작은 희망의 꿈을 꾸게 하였지. 이는 시대적 여건과 나이가 다를지언정 같은 처지의 마음으로 생각을 했다. 엇지면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나 할까.
일정의 탄압 속에서 풍자작가로 유명한 군산의 채만식(蔡萬植 1902-1958)선생은 글뿐만이 아니다. 다작가로서도 더 유명하지 않는가. 단, 중, 장의 소설을 300여 편, 수필과 동화도 1,000여 편의 글을 우리들께 주고 가셨다.
그중 탁류(濁流)는 식민지 현실세태를 풍자한 애국애족의 장편소설을 쓰시고 48살에 타계하셨으니 이 또한 단명의 아쉬움이 남는다.
부여의 현대시인 신동협(1930-1969)선생도 일정시대 농민의 피폐한 삶의 눈물을 보셨다. 6.25동란은 동족간의 엇나간 역사를 꾸짖고 39살에 유명을 달리하였다. 옥천의 정지용(鄭芝溶 1902-납북자)선생도 140여 편의 시를 남기고 43살에 납북 되여 생사의 소식을 모르고 있단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모두가 단명하였으니 너무나 안타깝지 않는가. 애처로운 생각이 던다.
올해 초가을 청주문인협회 문우들과 충남 당진의 심훈(沈熏 1901-1936)선생의 문학관인 필경사(筆耕舍)를 순방하였다. 선생도 불과 4년 만에 단편소설4편, 장편소설5편, 시 6편 과, 몇 편의 영화평론을 남기고 애석하게도 36살에 아쉬움의 단명을 하셨다. 선생의 항일 시 ‘그날이 오면’과 국민계몽의 장편소설 ‘상록수’를 52일 만에 탈고를 하셨다니 놀라운 필력이 아닌가.
이곳 필경사는 심훈선생의 집필하던 흔적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우리의 얼이 살아있는 초가집이다. 이집도 소설 ‘직녀성’을 중앙일보에 연재한 원고료로 직접설계하고 지은 필경사다. 마지막 작품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의 우승에 감격하여 ‘오오 조선의 남아여!’ 의 즉흥시를 남기였다.
지난 3년간에 나는 여러 문학관을 돌아보면서 마음이 무거웠던 것은 모두 단명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여러 작가들의 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다작의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었던 것이 보람이었다. 글 쓰는 마음가짐을 새로 얻고 일깨움을 받은 것이 문학관 기행의 참맛이 아닐는지……
이제부터라도 나만의 문학정신을 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내 글밭을 꾸준히 일구어 보려고 조심스러운 마음다짐을 하면서 변해가는 세상을 따라가리라. 2012. 9. 15 청주문인협회 문학기행을 하고서
첫댓글 " 김유정(金裕貞 1908-1937) 선생은 청년 해학 소설가였다. 선생의 문학 활동은 불과 4년간이지만 단편소설30편, 수필14편, 번역2편,
일정의 탄압 속에서 풍자작가로 유명한 군산의 채만시(蔡萬植 1902-1958)선생은 글뿐만이 아니다. 다작가로서도 더 유명하지 않는가. 단, 중, 장의 소설을 300여 편, 수필과 동화도 1,000여 편의 글을 우리들께 주고 가셨다.
충남 당진의 심훈(沈熏 1901-1936)선생의 문학관인 필경사(筆耕舍)를 순방하였다. 선생도 불과 4년 만에 단편소설4편, 장편소설5편, 시 6편 과, 몇 편의 영화평론을 남기고 애석하게도 36살에 아쉬움의 단명을 하셨다. "
'나만의 문학정신을 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내 글밭을 꾸준히 일구어 보려고 조심스러운 마음다짐을 하면서 변해가는 세상을 따라가리라...'
감상 잘 하고 갑니다.
좋은 글 감상 잘 하고 배우고 갑니다.김유정 문학관을 보면서 사랑의 힘으로 미친 듯이 소나기 다작을 하신 선생의 문학정신에 감동을 받았고. 선생의 항일 시 ‘그날이 오면’과 국민계몽의 장편소설 ‘상록수’를 52일 만에 탈고를 하셨다니 놀라운 필력입니다.훌륭한 분들은 하나같이 단명들 하시니 슬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