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여정, 믿음의 훈련, 믿음의 전사-
“하루하루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공부에는 끝이없다."
오늘 1월30일 다산 어록의 말씀입니다. 날로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공부가 진짜 참 공부임을 깨닫습니다. 이런저런 단상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무신불립(無信不立), 믿음이 없으면 설 수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살고 났는데 노추(老醜)의 욕심만 있고 믿음이 없다면 얼마나 허전하고 허망할까요.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고 신뢰를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이란 말도 생각이 납니다.
‘노화(老化)의 여정’이 아니라 날로 믿음으로 ‘성화(聖化)의 여정’이 된다면 얼마나 멋진 노후의 삶일까요. 일출의 찬란함도 좋지만 일몰의 장엄함은 더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봄의 꽃향기는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만 가을 단풍의 풋풋한 내음에 초연한 아름다움은 마음을 마냥 넉넉하고 편안하게 합니다. 유종의 미란 말도 있듯이 젊음보다 인생 마무리의 노년이 참 중요함을 느낍니다.
어제의 새삼스런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정확히 4시간 간격의 소변이요 하루 6차례의 소변을 보게 됩니다. “아, 몸은 살아 있어 평생 쉬지 않고 일하고 있구나! 태만하고 게으르게 사는 것은 몸에 죄짓는 것이구나!”하는 깨달음이 더욱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에 박차를 가하게 합니다. 더불어 생각난 시편 121장 다음 내용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그분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리라.
하느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네 오른쪽의 그늘이시어라.
낮이면 해도 너를 해치지 못하고,
밤이면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하리라.
주께서 너를 지켜 모든 액을 막으시고,
당신이 네 영혼을 지켜 주시리라.
나거나 들거나 너를 지켜주시고,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러하리라.”(시편121,4-8)
믿는 대로 됩니다. 그러니 이런 하느님을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있겠는지요! 바로 이런 믿음을 위해 한곁같은,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삶입니다. 믿음의 여정, 믿음의 훈련이요, 믿음의 전사로서 우리의 신원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살아있는 그날까지 치열하고 가열찬 믿음의 싸움을 해야 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탈리아 언론인들을 향한 소통을 위한 세 요소에 공감했습니다. 이런 가르침이 우리의 믿음을 북돕웁니다.
첫째 말마디는 “가까움(proxmity)”이다.
이민자들, 가난한 이들, 외로운 이들, 버려진 이들을 결코 잊지 말고 가까이 하라. 하느님의 세스타일은 ‘가까움(proxmity)’, ‘부드러움(tenderness)’, ‘연민(compassion)’이다. 그분은 늘 용서하신다.
둘째 말마디는 “마음(heart)”이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부터 시작하며 가깝게 만드는 것도 마음이다. ‘용기(courage)’도 라틴어 ‘마음(cor)’ 어원에서 기인한다. ‘마음과 함께 시류에 거슬러 가라(go against the flow with the heart)’.
셋째 말마디는 “책임감(responsibility)”이다. 모두가 그 맡은 역할을 다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존중, 그리고 공동선에 깨어있는 책임감이다. 언론인들의 수호성인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말한다.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활동의 위대함이 아니라, 이런 활동을 하게 하는 사랑의 위대함이다.”
사막교부의 일화입니다. 한 제자가 포멘 압바를 찾아 한 말씀 주십사 청하자, “교부들은 매 행위마다 참회로 시작했다.” 그 제자가 다른 말씀을 주십사 청하자, “네가 할 수 있는 한 자선을 베풀수 있도록 노동을 하라. 자선과 믿음이 죄로부터 깨끗이 해준다.” 제자가 또 묻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사부는 “믿음은 겸허하게 사는 것이고 자선을 베푸는 것이다.” 대답합니다. 새삼 참 믿음의 본질은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산(山)과 강(江)이라는 제 자작시도 한결같은 믿음을 상징합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정주의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맑게 흐르는 강”
모두가 한결같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는 예화들입니다. 오늘 복음과 제1독서의 주제도 믿음입니다. 야이로 회당장의 딸이 죽지 않았더라면 회당장은 주님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며 자신의 믿음도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니 딸의 죽음이 전화위복, 야이로의 믿음을 확인케 하는 계기가 됨을 배웁니다. 야이로의 간절하고 항구하고 겸손한 믿음이 감동적이요 이런 사람이 진짜 참사람입니다. 회당장의 간절하고 항구하고 겸손한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의 즉각적 응답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주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니, 구원의 삼박자인 1.주님의 연민의 사랑, 2.따뜻한 스킨쉽, 3.권능의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탈리타 쿰!(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어렵고 힘들 때 마다 아람어 “탈리타 쿰!” 외치면서 즉시 일어나 다시 새롭게 파스카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던 그 여자가 주님을 만나고 자신의 믿음을 확인했으니 역설적으로 하혈병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음을 봅니다. 역시 하혈병을 앓던 부인은 간절하고 항구하고 겸손한 믿음의 결과 치유를 받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자, 부인은 두려워 떨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아뢰자 주님의 자비로운 응답 말씀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거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그대로 오늘 복음에서와 똑같은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 모두를 향한 치유 말씀처럼 들립니다. 말그대로 믿음의 치유와 구원입니다. 주님의 치유의 구원에 반드시 전제되는바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세 스타일, 가까움, 부드러움, 연민을 다시 확인합니다. 예수님을 닮은 믿음의 사람 역시 하느님의 이런 친밀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세 스타일을 지닌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사람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을 통해 다윗의 파란만장한 믿음의 여정을 만나게 됩니다. 대죄는 용서받았지만 믿음의 여정을 통해 보속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참 엄혹합니다. 이 모든 비극과 불행을 겸손과 비움의 믿음의 계기로 삼는 다윗의 한결같은 삶의 자세가 참 경이롭습니다. 앞서는 절친인 요나단의 전사에 통곡하던 다윗이, 어제는 자기를 쫓던 아들 압살롬을 피해 올리브 고개길을 울며 오르던 다윗이 오늘은 압살롬의 죽음에 성문 누각에 올라 대성통곡합니다. 간장을 끊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이런 비극의 와중에도 다윗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음은 그 백절불굴의 믿음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역경을 비움과 겸손의 계기로 삼았기에 다윗의 믿음의 여정도 날로 깊어졌을 것이며 다윗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도 날로 깊어졌을 것입니다. 참으로 끝까지 인내하고 버텨내고 견뎌낸 다윗의 초인적 믿음의 여정이 영원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우리 믿음의 여정에 큰 스승들이 예수님과 야이로 회당장. 열두 해 하혈병 앓다가 치유된 부인, 그리고 사무엘 하권의 다윗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물론이고 이 밖에도 우리는 주변에서 믿음의 스승들을 무수히 만납니다. 특히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 다윗의 주님의 믿음의 전사로서 치열하고 가열한 삶은 이분들이 얼마나 하느님과 깊은 신뢰와 사랑관계에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의 믿음의 여정에 믿음의 전사로서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우리를 도와 줍니다. 자작 좌우명 고백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