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약대들이 오더라. 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보고 약대에서 내려 종에게 말하되,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 오는 자가 누구뇨 종이 가로되 이는 내 주인이니이다. 리브가가 면박을 취하여 스스로 가리우더라. 종이 그 행한 일을 다 이삭에게 고하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모친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창 24:63-67).
성경에 나타난 ‘이삭’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왠지 ‘귀족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나 아들 야곱과 같이 험난한 인생을 산 것 같지도 않고 특별한 사건이라고는 어렸을 때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명에 의해 번제물로 바쳐졌다는 것밖에 기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특이한, 색다른 느낌까지 주는 문구가 나옵니다. 창세기를 여러 번 읽었어도 쉽게 놓쳐버렸을 그런 내용입니다.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묵상하는 이삭! 성경에 묵상하는 사람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것은 여기 이삭 밖에 없습니다. 시편 기자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주의 법을 묵상하는 사람’이 바로 이삭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모세의 오경(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이 주어지기도 전이기에 요즘의 묵상거리와는 물론 달랐겠지요. 어쨌든 아버지 아브라함한테 들은 하나님이든지, 자신이 만난 하나님이든지 그 하나님과 관련된 것을 곱씹어 보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한다’는 문구에서 오는 어감은 반복적인 행동으로, 마치 습관을 좇아 기도하러 산에 가시던 예수님을 연상케 합니다.
이 당시 이삭은 상당히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아버지 나이 100세, 어머니 나이 90세에 포기했던 자식을 얻었으니 그 돌봄이 어떠했을지 상상하기도 어렵겠지요.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요즘 말로 마마보이처럼 엄마의 치마폭에서 자랐을 이삭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충격 그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성경이 리브가를 통해 모친의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다는 기록을 일부러 남겼겠습니까.
이삭의 삶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아버지 아브라함만큼, 아들 야곱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삶이었습니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서른이 채 안 된 나이에 아버지의 칼에 죽을 뻔하였고(실제 아브라함은 자식을 죽이려고 칼을 번쩍 추켜든 상황까지 갔습니다), 자신을 끔찍이 사랑해 주던 어머니의 죽음, 너무나 예쁜 아내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할까 두려운 객지생활은 그를 묵상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나중에 그랄 목자들이 억지를 부릴 때도 그 소유가 분명한 우물을 세 번씩이나 양보하며, 인내하는 덕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묵상하는 이의 능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묵상하는 이삭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았습니다. 시절에 따라 과실을 풍성히 맺는 삶이었습니다. 그러한 이삭에게 하나님은 백배의 결실(창 26:12)을 허락하셨습니다. 요즘 뜨는 토스트 전문점 이름이 이삭인 것도 아마 이 연고인 것 같습니다만, 결과에만 치중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분명 이삭은 고난을 통해, 그리고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묵상하는 삶을 통해 자신이 점점 익어갔을 것입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의 뜻은 ‘웃음’입니다. 하나님이 자식을 주시겠다는 천사의 말에 사라가 장막 뒤에서 듣고 웃었던 데서 연유한 이름입니다. 어쩌면 이삭은 고난이 닥쳐올 때마다 이런 넉넉한 웃음으로 유연하게 대처해 갔는지도 모릅니다. 고난 가운데 넉넉히 웃을 수 있는 사람, 그것은 묵상하는 삶을 통해 가능할 것입니다.
기영석 전도사님 (성덕교회·부천) |
첫댓글 아~멘 저는 이삭을 생각하면 순종의 모습이 떠오릅니다.우리를 구원 하시려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지 않을까 합니다.감사드리며....마라나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