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시
조재훈
시를 쓴다는 것, 부끄럽구나
아름다운 말을 골라야 하는가, 시여
일하는 이의 손, 숨어 우는 아이의 눈물
억울하게 눈 감은 가슴을 떠나
말을 비틀어 무엇을 짜는가
은행 앞 플라타너스에는
새도 와서 울지 않고
버려진 애가 쓰러져 자는데
버려진 애의 건빵만도 못한
시여, 화려한 문패여
겨울 공사장 헐벗은 일꾼들이
물 말아 도시락을 비우고
둘러앉아 몸을 녹이는
모닥불만도 못한 시여, 부끄럽구나
엘리어트가 어떠니 라킨이 어쩌니
우쭐우쭐 떠들어대면서
목판의 엿 한 가락만도
못한 시를 쓰는가, 시인이여
고구마로 한겨울
끼니 이어가는 아우에게
시인이라고 자랑할 것인가
흙을 등지고, 땀을 죽이고
먹고 낮잠 자는
외래어의 시를 쓴다는 것
부끄럽구나, 또 부끄럽구나
― 《고마》제3호 (2022년 / 가을 / 고마문학회)
조재훈
인천에서 태어나 충남 서산에서 성장, 초·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공주사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지냈고, 『시맥』 동인(1955~1958), 민족작가회의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1974년 『한국문학』 신인상 (김현승 시인 추천 「햇살」 외) 『겨울의 꿈』(1984), 『저문 날 빈 들의 노래』(1987), 『물로 또는 불로』(1991), 『오두막 황제』(2010) 등의 시집을 내었다. 『한국시가의 통시적 연구』(1996), 『한국 현대시의 숲과 나무』(2002) 등의 연구서와 비평서, 『소리와 의미』(1998) 등의 역서가 있다. 다수의 논문 등으로 고전시가와 현대시를 아우르는 폭넓은 연구 활동을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