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1월 23일 청와대 조직개편을 통해 민정수석에 우병우 민정비서관을 내정했습니다. 우병우 민정수석 내정자는 박연차 게이트를 수사하면서 검찰에 출석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수사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단순히 노무현 전 대통령을 수사했던 일보다 우병우 민정수정은 박근혜 정권 집권 3년 차에 청와대가 어떻게 권력을 유지할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인사입니다.
우병우 민정수석이 가진 배경과 어떻게 민정수석이 될 수 있었는지, 그 의미를 알아봤습니다.
'부자 검사, 그 원천은 처가 덕분이었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은 대한민국 고위 공직자 중 가장 부자입니다. 2014년 8월 14일 관보에 공고된 재산만 무려 423억3230만 원입니다.
원래 우병우 민정수석은 검사 시절부터 부자검사로 불리었습니다. 대학교 3학년 때 사시에 합격한 수재였던 우병우 민정수석이 400억이 넘는 부를 갖게 된 배경은 처가 덕분입니다.
우병우 민정수석의 부인은 (주) 정강중기,정강건설 이상달 회장의 딸입니다. 2008년 이상달 회장이 사망하면서 재산은 더 늘어났습니다.
우병우 민정수석의 부인은 (주)에스디엔제이홀딩스의 주식 2200주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주)에스디엔제이홀딩스는 기흥CC를 운영하는 (주)삼남기업의 모회사입니다.
(주)에스디엔제이홀딩스는 자본금 5천5백만원에 불과한 상시 종업원 5명 미만의 회사이지만, 1967억원이 넘는 자산을 보유한 (주)삼남기업의 모회사입니다.
관보에는 (주)에스디엔제이홀딩스 주식을 주당 5천원씩으로 신고했지만, 실제 자산가치를 따지면 수백억 원이 넘습니다.
우병우 민정수석의 부인 명의 재산만 많은 것이 아닙니다. 우병우 민정수석도 본인예금만 4억9천5백만 원이 넘고, 해외 국채만 99만5천주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보통 공직자 재산공개를 보면 국채나 공채, 주식을 보유한 사람은 많지만, 특이하게도 우병우 민정수석은 무려 백만 주에 가까운 해외 국채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본인과 배우자 명의의 예금만 183억 2077만 원에 남에게 빌려준 채권만 165억8051만 원을 가진 우병우 민정수석 부부의 재산만 보면, 공직자라고 보기보다는 '준재벌'이라고 봐야 할 정도입니다.
이상한 것은 재산이 423억이 넘으면서도 우병우 민정수석 본인이나, 부인 명의의 자동차가 한 대도 없다고 신고했다는 점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직접 수사하고도 사표 내지 않았던 인물'
우병우 민정수석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노무현 대통령을 직접 수사했다는 이력입니다. 대검 중수1과장으로 재직하던 2009년, 검찰에 출두했던 노무현 대통령을 직접 조사했던 사람이 우병우 주임검사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검찰 조사를 받고 23일 만에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검찰 수뇌부는 무리한 전직 대통령 수사의 책임을 안고 사표를 내기도 했습니다.
임채진 검찰총장과 이인규 중수부장도 사표를 냈는데, 유독 우병우 중수1과장은 사표를 내지 않고 오히려 승승장구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우병우 중수1과장은 '대검 범죄정보기획관'과 '대검 중수부 수사기획관'을 거쳐 '인천지방검찰청 부천지청 지청장'이 됩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무리한 수사를 했다는 검찰 내부의 판단에 따라 두 차례에 걸친 검사장 승진에서 모두 탈락, 2013년 5월 사표를 내고 검찰을 떠나게 됩니다.
권력에서 떠났던 우병우 민정수석은 불과 1년 뒤인 2014년 5월,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으로 화려하게 권력 내부로 다시 들어옵니다.
'우병우 민정수석 기용은 김기춘의 작품'
우병우라는 인물이 청와대 민정수석에 임명됐다는 것은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닙니다. 가장 먼저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왔던 시기를 살펴봐야 합니다.
2014년 5월 12일 우병우가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 임명되자 법조계와 야당에서는 '몰지각한 인사'라고 난리가 났습니다.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 서거 5주년을 불과 10여 일 앞두고 벌인 5월 12일 우병우 카드는 그 누가 봐도 노골적인 세월호 타개 카드였습니다.
실제로 세월호 정국에서 잠시 우병우 카드는 정치권의 이슈가 됐고, 이 카드는 세월호 정국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절대 흔들리지 않는 통치를 지속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심어주기도 했습니다.
우병우가 단순히 세월호 돌파 카드가 아니라는 사실은 정윤회 문건이 터지면서 밝혀졌습니다.
정윤회 문건으로 사망한 최모 경위의 유서에서 '너무 힘들어 하지 마라, 나는 너를 이해한다. 민정비서관실에서 너에게 그런 제의가 들어오면 당연히 흔들리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라는 문장 때문입니다.
당시 청와대 민정비서관은 우병우, 즉 우병우 민정비서관이 '정윤회 문건' 사건의 청와대 해결사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우병우 민정비서관이 해결사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직접 보고할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1월 9일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이 사퇴했습니다. 이유는 여야가 합의한 국회운영위 출석 요구 때문입니다. 김기춘 비서실장이 국회 출석을 지시했는데도 왜 김영한 민정수석은 사퇴까지 했을까요?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우병우 민정비서관은 김영한 민정수석의 부하입니다. 그런데도 김기춘 비서실장은 공직기강비서관실 업무인 공직자 감찰업무를 김영한 민정수석이 아닌 우병우 민정비서관에게 주면서 청와대 감찰업무를 맡겼습니다.
한 마디로 김영한 민정수석은 부하였던 우병우 민정비서관에게 밀리고,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소외당한 것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김기춘 비서실장은 자신의 심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우병우를 민정수석으로 승진시켰습니다.
우병우 민정수석 내정자는 사시 19기로 김진태 (사시 24회) 검찰총장이나 황교안 (사시23회)법무부 장관보다 후배입니다. 그런데도 김기춘은 우병우 민정비서관을 민정수석으로 승진시켰습니다.
정윤회 문건 파동 이후, 청와대 문고리 비서관 3인방으로 불리던 권력은 대거 수면 아래로 잠겼습니다. 안봉근 제2비서관이 있던 제2부속실은 폐지됐으며, 이재만 총무비서관은 인사위원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제 청와대 권력은 오로지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집중된 셈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우병우라는 권력의 칼을 함부로 휘둘렀던 심복이 더 큰 칼을 차고 올라왔습니다.
우병우라는 인물이 앞으로 김기춘 비서실장이 쥐고 있는 청와대 문고리를
지켜주기 위해, 어떤 일을 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는 그가 향하는 최종목표가 권력의
중심부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그의 행보가 더 무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