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은 언제나 화창한 날에 일어난다. (그런데 과연 누구에게 비극일까?)
그날은 그동안 이리 날으고 저리 날으며 팬드래건의 보급기지들을 박살내
던 살라딘이 귀환하는 날이었다.
"살라딘님!"
우리의 살라딘 팬클럽 일원들이 우르르 나가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두
손 모르고 기다리고 있을 때, 진짜 세라자드는 옆에서 조용히 미소띈 얼굴
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계시는 아량을 베풀고 계셨다.
"돌아왔습니다. 폐하."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보고만 있어도 술탄은 살라딘에게 뻑 갔다라는 걸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동안 괄괄하다못해 사납던(?) 진짜 술탄을 알고 있는 용병들을 조용히
몸을 돌려 터질 것 같은 허파를 부여잡고 고생 좀 했다.
"...다치진 않으셨나요?"
우훗, 유나와 경님, 소연의 눈이 순간적으로 몽땅 음흉하게 구부러졌다. 왜
냐하면 말을 건 사람이 세라자드님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신경써주셔서 고맙습니다."
깍듯이 사무적으로 대답하는 살라딘님을 보고는 더더욱 음흉해져만 가는
눈초리.....
더이상 음흉해질래야 음흉해질 수 없는 눈초리가 반달을 넘어서 맥도날드
형으로 구부러져갈때쯤,
"세라자드님... 오면서 팬드래건군의 동향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적들
이 남부로 향했다면서요?"
순식간에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버리는 얀의 목소리에, 잠시 가짜술탄은 흠
칫 했으나 곧 뻔뻔하게 대꾸했다.
"아아, 아마도 호족들을 포섭하려는 걸겁니다. 아무래도 자비단을 떠나오
면서 반골적인 귀족들을 모조리 숙청해버렸던 게 저들에게 위기의식을 심
어줬던 모양이에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유나를 보며 얀은 조금 움찔했으나 곧 말을 이었
다.
"괜찮겠습니까?"
"글쎄... 안전장치가 하나 있기는 한데.... 아마도 굳이 애써서 써먹을 것은
없을 겁니다. 귀족들은 바보가 아니니까... 괜히 버몬트 편을 들어 훗날의
위험부담을 안는 것 보다는 중립을 선언하고 가만히 찌그러져있는 걸 택
할 겁니다. 어차피 남부쪽의 귀족들은 종교계의 원로들이나 다름없으니까
신의 이름을 핑계로 대면 딱 좋겠네요. 나도 그 이상은 바라지 않으니까
요."
"허나, 사피 알딘님의 영향력이 아직은 남아있을 텐데..... 도움을 요청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순간, 침통한 분위기가 사람들 사이를 휩쓸고 지나갔다.
"원로 무슬림께 편지는 드렸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오라버니의 이름과
현 칼리프인 나의 이름을 걸고 투르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승전을 기
도해달라고 말씀드렸지요. 그 이상은 기대하지 않을 렵니다."
".....알겠습니다. 폐하."
"그나저나 지금 적들이 남부로 향했다니 주요전력들은 우다비나에서 후퇴
한 상태이겠군요."
"꼭 그렇게만은 볼 수 없습니다. 버몬트가 바보가 아닌 이상, 우다비나에
확고한 병력은 놔두고 갔을 겁니다."
".....그래도 한번 찔러볼 가치는 있습니다. 좋아요! 방금 오신 시반슈미터
여러분께는 죄송하지만 전투를 시작해야겠습니다."
오랫동안 요새방어와 게릴라전에만 치중해온 술탄의 용병대는 환호성을
질렀다. 모름지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는 자는 일종의 스릴감을 맛보
면서 살 수 밖에 없는 가보다. 허나, 시반 슈미터의 병사들은 보급기지를
중점으로 털었기 때문에 그다지 힘든 전투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하
도 이리저리 왔다갔다거려서 그런지 조금 지쳐있었다.
케먈이 이 사실을 눈치챘고 결국 시반 슈미터는 쉬게 되었다.
그러나 시반 슈미터의 수뇌부 - 얀, 발라, 무카파, 이븐 시나, 살라딘 등은
함께 출전이었다.
"그럼, 내일 출전입니다. 아두스씨의 보고에 따르면 이미 적들은 남부 숲
한가운데까지 들어갔다는 군요. 수일내로 라샤미아에 도착할 것이라고 하
니까 서두릅시다!"
전투를 어린애 소풍기다리듯이 들뜬 마음으로 맞이하는 용병들은 다시금
환호를 올렸다. 그 모습을 희미한 미소를 띄운 채 바라보던 살라딘은 또
다시 착잡해지는 기분에 의아해하며 슬쩍 뒤돌아섰다.
"......!"
....설마?
그러나 분명히 봤다.
죽어도 잊을 수 없는 잔영,
모래 속에 파묻은 과거의 악몽보다 지독한 현실.
사신의 옷자락처럼 사막의 뜨거운 공기속에 조용히 펄럭이는 검은 망토...
마치 온 몸이 굳어버린 듯 조금의 미동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살라딘의
머리는 무서운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왕의 암살자. 무엇을 노리고?
왕?
세라자드!
결론이 나오기까지는 1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암살자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나와 검을 빼들기까지도 마찬가
지.
"안돼애애애애!!!!"
찢어지는 여인의 비명.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살라딘은 몸을 날렸다.
그러나 살라딘의 만류를 가볍게 뿌리치며 침입자는 검기를 날렸다.
눈을 크게 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세라자드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
다.
마르자나의 검이 검기를 막아냈다. 그러나 대가로 검 한가운데가 움푹 들
어간 채, 뒤로 미끌어져넘어졌다.
이븐 시나의 마법이 그를 직격했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상상
을 초월한 강함은 그 누구보다 살라딘 자신이 안다.
그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검을 뽑아들었다. 도망갈 시간이
라도 벌 수 있다면!
전광석화. 그 이외의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포위하려고 다가선 용병들
을 한 칼에 베어버리고 다시금 앞으로 향하려는 암살자앞를 피해 술탄은
후다닥 인의 장벽 뒤로 몸을 숨겼다.
"화이어볼!"
비명과도 가까운 주문영창. 허공에서 생성되는 7개의 불덩어리가 채 닿기
도 전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
"막아주세요! 제발!"
이때까지 그 처절한 비명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차렸다.
이국의 소녀는 너무나 절망적인 눈빛으로 애원하고 있었다.
얀의 지하드가 빛을 뿌렸다. 그러나 간단하게 막혀버렸다.
"아니!"
뭔가를 초월했다는 느낌이다. 언제나 그를 마주하면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그 느낌을 대신하여 모두를 채우고 있는 것은 당혹, 그리고
절망.
".......당신의 운명을 원망하시오...."
순간, 빈틈없이 늘어선 사람들의 틈 사이로 보이던 술탄의 눈빛이 번뜩였
다.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
"플라즈마 슬래쉬!"
퍼버버버버벙!
저쪽에서 또다른 소녀가 대검을 쥔 채 달려오고 있었다.
"아이스 미사일!"
"크윽!"
이번에는 약간 타격을 입었다. 멀찌기 물러서는 암살자들의 주위로 다시금
용병들이 두 겹, 세 겹, 인간방어막을 쳤다.
"폐하! 어서 피하십시오!"
"이대로라면 위험합니다! 어서!"
살라딘은 그때, 술탄의 얼굴위에 떠오른 것이 분노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명을 지르며 물러서는 성안 부녀자들과 온 몸으로 암살자들을 막으려는
용병들의 소란이 겹쳐지며 어느새 암살자는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그러나.....그에게는 타이밍은커녕 그 어떤 조건도 상관없는 무서운 히든카
드가 남아있었다.
그는 슬쩍 입술을 깨물더니, 검을 칼집에 집어넣으려했다.
그때였다.
뭔가가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폐하아아아!!!!!"
망토처럼 휘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절망을 토해내는 듯한 절규가 울려퍼진 뒤, 사람들의 눈에 보인 것은...
"운명을.....원망하라..?"
".........!"
유목민들의 전설에나 나오는 것 같은.... 사막을 떠도는 복수의 악귀를 넘
어뜨리고는 그 위에 올라타, 검으로 그 숨줄을 누르고 있는 여술탄의 서슬
퍼런 모습이었다.
가면속의 눈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그 순간, 카디스 요새는 완전히 정지해있었다.
철가면과 술탄전권대리인은 상대방의 눈색깔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서 마주보고 있었다.
초록빛 눈동자.... 술탄은 그의 오래되고 잊혀진 이름을 떠올렸다.
설아(雪兒), 눈의 아이.......
'영 어울리지 않는 군. 애 이름이잖아.'
하긴, 한제국에선 아명이 따로 있지.
상대가 검을 집어넣고, 필살기를 쓰기 위해 기를 모으던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술탄은 온 몸으로 부딪혔던 것이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자만이 해낼
수 있는 짓이었다. (--;;) 철가면도 설마 술탄이 직접 몸을 날릴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 지 평소의 위명과 실력이 무색하리만치 허무하게
무너졌다.
"......다시 보니 다시금 피가 꺼꾸로 솟는 군. 소연아! 니미!"
전격의 기운을 담은 스탐블링거가 목젖 바로 밑을 지긋이 누르고 있었기
에, 철가면은 뭘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었다. 침조차 삼키기 힘들었으니
까.
"어....."
척-
머뭇거리는 표정과는 달리, 움직임을 봉쇄하는 행동에는 빈틈이 없었다.
에디트의 덕이긴 해도 둘은 당대 일류의 마도사와 검사이니까.
철가면은 자신의 검을 비롯한 모든 것이 봉쇄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공격을 감행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목숨도 끝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베라딘의 화신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아직 앙그라마이뉴가
남아있다. 철가면은 자신이 사면초가에 빠졌음을 알았다.
어느새 그의 목에는 수십개의 칼과 수십개의 총구가 겨누어져있었다.
"밧줄을 가져와."
"폐하."
"어서!"
"폐하! 생포는 불가합니다! 사피 알딘님의 암살자놈이에요!"
"죽이고 살리는 것은 나조차 결정할 수 없어."
"..........?"
철가면에게 의문의 빛이 떠오르는 것을 알면서도 유나는 그걸 모른 척 했
다. 대신, 시선을 비껴, 아직도 창백한 안색을 되돌리지 못하는 세라자드를
바라보았다.
"소연아!"
"알았스~~~~"
소연의 손이 날쌔게, 유나의 손에서 스탐 블링거를 받아들여 그걸 그대로
철가면의 목에다 겨누었다.
"......이 자식이!"
"하나 명심해두는 게 좋아. 너의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발칙한 놈!! 폐하! 후환을 남기지 마십시오!"
"오호? 정말?"
술탄은 숫제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그 지독한 언밸런스에 아군은
물론 철가면조차 헷갈렸다. 분명 겉으로 보기에는 한번만 쳐도 죽을 것 같
은 여자인데....
유나는 그야말로 신이 오르고 있었다. (더불어 분노게이지와 함께)
그래서 신하들의 경악의 눈초리 속에서 아직도, 그를 올라타고 있던 술탄
은.....(;;) 가만히 몸을 숙여, 그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물론 주변에서 이 장면연출로 인해 호흡곤란을 일으킬 듯한 경악에 빠지
든 말든 아무 상관없이.
"네 처남이 여기에 와있어. 감히 내 땅에 난입하여, 내 백성을 죽였지. 당
신을 가둬두는 것은 어렵지만 당신의 검과 가면을 빼앗는 것은 아주 쉬
워."
철가면은 그 자리에서 사후경직이라도 일으키는 듯 뻣뻣이 굳어버렸다. 말
그대로 동상 그 자체.
"그리고 지금 팬드래건 본국은 텅 비어있지? 이판사판으로 결사대 몇만
들여보내면 그쪽이나 우리나 개박살나는 건 매한가지야. 하다못해 명색이
자기네 나라 국왕이고 누이의 남편인데다가 지 사촌형인데 목만 보내져온
다고 해서 버몬트가 못 알아보지는 않겠지?"
그야말로 철가면의 머리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으음.... 이 정도면 천하의 샤른호스트씨라 해도 약간 벅찰 걸?"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눈에 띄게 멍청해진 철가면의 모습을 보며 용병
들은 심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자기네 술탄에게 던졌다.
"경님아~!"
"응?"
"저기 어디에 보면 말이지......"
길고 굵은 밧줄이었다. 소시적 운동회할 때마다 열심히 잡아당기던 줄다리
기 밧줄을 기억하는 가. 그 밧줄이었다. 군사용으로 요새창고 깊숙한 곳에
박혀있던 것을 허구헌 날 요새를 점검한답시고 돌아다니던 유나가 발견해
놓았던 것이다.
쿵~ 데굴데굴데굴~~~~
"음! 음음음음음!!!!"
철가면은 지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 무지막지한 밧줄에 번데기처럼 칭
칭 감겨 감옥안으로 던져졌다. 거기가 재갈까지 물려서.
"음! 음음우우우웁웁웁!"
"시끄러!"
대체 어디서 뚱쳐온 걸까. 유나는 무지막지하게도 철쟁반을 세로로 세워
철가면을 향해 던졌다.
탱-!
소리도 경쾌하게 쟁반은 철가면의 머리에 명중했고, (것도 모서리로) 철가
면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어이, 한시간 간격으로 커즈랑 도발 걸어. 저 자식 소울치 채우면 괴물이
야."
"도발은 직업 어빌리티인데?"
"용병들 중에 하나 해적으로 전직시켰다 말았다 하면서 걸면 되잖아."
"아, 맞다! 그런 수가 있었지..."
"저 자식은 아수라파천무만 안쓰면 우리 밥이야. 몇일 굶긴다음에....으흐흐
흐..."
음흉하게 웃으며 두 손을 싹싹 비비는 유나의 모습은..... 세라자드의 몸이
었기에 더욱 호러블했다.
"야, 경님아....."
유나가 자신이 이룬 성과가 만족스러워 '음하하하하하' 광소를 터뜨리고
있을 무렵, 경님과 소연은 구석에 앉은 채 기절해서 헤롱대고 있는 철가면
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쯤이면 이 녀석, 조금 자기 죄값을 치른다고 봐도 되겠지?"
".......난 벌써 이 인간이 불쌍해지려고 해."
유나와 달리 두 친구들은 동정심이 풍부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진정되질 않았다.
"............"
세 사람이 천막안으로 들어온 건, 겨우겨우 떨리는 손을 무릎사이로 끼워
넣어 떨림을 진정시킨 직후였다.
"....엿같은 자식.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온거야, 대체....."
"가출중년은 무섭다니까. 으이그......"
"......그래도 불쌍하다..."
"워낙 인생자체가 불쌍한 놈이었어."
이것저것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험하게 지껄이며 들어온 친구들은 미리
자신이 와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마자 표정을 밝게 하며 우르르 다가왔
다.
"어디 다치지 않았어요?"
"........유나씨나.... 여러분들은요?"
떨리는 목소리를 눈치채지 못했는 지, 유나는 가슴을 툭툭 치며 아무 일없
다는 걸 보여주더니,
"제까짓게 날아봤자 벼룩이죠. 음하하하하하!!!"
오만하다못해 어딘가 나사가 빠져보이는 자세로 과장되게 웃기 시작했다.
"........라이트 블링거가 벼룩이면 세라프는 바퀴벌레냐?"
"훗, 이 몸이 슬리퍼로 바퀴벌레 손가락만한 걸 때려잡은 적이 있다는 걸
아냐?"
"윽....;;"
"퍽하고 뭔가 터져나오는 데, 누렇고 꾸물꾸물한 건데, 휴지로 닦아내는
게 끔찍해서 죽는 줄 알았다. 바퀴벌레는 터트려서 잡으면 알이 사방으로
튄다는 소리를 들어서 장판 위를 불로 지지기까지 했지."
"우, 우욱.....;;"
"뭘 새삼스럽게~"
".....엽기적인 자식...."
마왕의 정신적인 이지메에 소연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괴로워하던 경님은
세라자드가 멍한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걸 알고, 의아해했다.
"저기..... 세라자드님?"
"................"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기는 했지만, 대체 정확히 뭐가 잘못되었는 지
는 알 수가 없었다.
"어, 어디 아프세요? 혹시 그때 다치신 건......!!"
"아니.... 아니에요....."
세라자드는 조용히 유나에게 몸을 기댔다.
"아무것도.....아니에요."
새삼 자신이 얼마나 위태위태한 자리에 서 있었는 지 깨닫는다. 게다가 처
음 생긴 친구가 자신대신 죽을 뻔 했다는 것도.
"......정말.....괜찮으세요?"
잊어야 한다.
잊어야 해. 오라버니의 등뒤에 숨어서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사는 건 이제
끝이야. 아니, 오래전에 끝났어.
걱정스럽게 묻는 말에, 다시금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는 한참동안 세라자드의 머리를 꽉 끌어안아주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녀의 앞에 주저앉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어주세요. 아마도........당신껜 무척 힘든 일이겠
지만, 꼭 결정을 해주셔야 해요."
어둠......끝이 없는 어둠이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내 눈앞에 드리워진 커다란 손...
'아버지, 어머니는 어디계세요?'
'............'
아버지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큰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도
불구하고 그가 무척 슬퍼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내 아들.....우리는 이제 떠나야 한다....'
'어디로요? 하지만 어머니도 함께 가시죠?'
'..............'
'그렇죠? 어머니도 함께 가시는 거죠? 왜 말씀이 없으세요! 대답해주세요!
아버지....!'
"헉!"
낯선 천장이다.... 순간, 그는 자신이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나 많은 이름, 너무나 많은 기억...
그는 한참을 더듬어서야 자신을 깨닫는다. 그리고 천천히 하나하나 자신의
이름을 되밟아간다. 산재해있는 기억이란 모래알과 같아 손안에 쥐려해도
곧잘 빠져나가지만 오랫동안 반복해온 일에는 요령이 생기는 법. 그는 곧
자신의 현재 이름을 되새기고 자신의 처지를 자각한다.
"....제발 지금 상황이 꿈이라고 누가 말해줘..."
아무리 후까시잡고 회상씬 연출하고 있어봐야 전신이 번데기처럼 동동 묶
여있는 상황에선 소용없다. 철가면은 약간 느슨해져있는 재갈을 완전히 입
밖으로 뱉어내고는 온 몸을 데굴데굴 굴리기 시작했다. --;;;;
일단이 이 무지막지않게 굵은 밧줄부터 풀어야한다. 맙소사...밧줄이 얼마
나 굵은 지 굴러가는 데 온몸이 쑤신다.
".....고생이군....크윽..."
"다 자업자득이라는 거지."
커억! 놀라서 벌떡 일어나려고 하다가 오히려 굴러가는 속도만 빨라졌다.
끄아아아아아- 한참을 데굴데굴 굴러가서야 저 한쪽 구석 벽모서리에 쿵
하고 들이받혔다. .......정말이지 되는 일이 없군.
"으윽....."
"당신덕분에 우린 우다비나 공략을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어. 댁같은
무시무시한 괴물을 내 백성들 사이에 두고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당신같
은 위험부담을 안고 전쟁터에 나갈 수도 없어. 버몬트가 도시를 비우고 있
는 지금이 우리에겐 완벽한 기회인데 우린 당신덕분에 꼼짝도 못하고 잡
혀있단 말이야.... 알아들으셔?"
이윽고 철가면이 헤롱헤롱해져서 어떻게든 움직여보려던 시도를 중지하고
축 늘어졌을 때야 유나는 고문을 멈추었다.
"........끄으으응..."
제 아무리 왕에다 전직 천사장이면 뭐하는 가. 사지 묶여있고 어지러우면
짐짝이지.
"으음... 밧줄 묶음 위에 녹인 금속이라도 들이부을까 했더니 필요없겠군."
"커, 커헉...."
"그, 그건 좀 자제해주라."
"녹일만큼 남아도는 금속도 없고 그거 할려고 들이는 노력도 귀찮아. 게다
가 이 밧줄만큼 튼튼한 것도 구하기 힘들단 말이야. 자제하기 싫어도 자제
해야 되니까 걱정 마."
그리고서는 여전히 헤롱대고 있는 철가면을 바로 뉘운 뒤, 그 위에 다시금
위에 올라탔다. --;;;;;;;
"이봐, 정신 좀 차려봐."
"......@@@@@@"
"빨리 안 차리면 이젠 아주 절벽으로 굴려버린다?"
"....죽이려면 빨리 죽여."
처음에는 어떤 고문이라도 견디고 살아나가야겠다고 생각했건만 이런 상
황에선 뭔가....살고 싶은 의욕이 사라져버렸다.
철가면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동안 사랑하
고 만난 자들과, 영겁의 시간을 거슬러 다시 만나게된 사랑을 떠올렸다.
"또 헛다리 짚고 있네. 너 멍청한 거 세상이 다 알지만 제발 엉망으로 치
닫는 이미지를 어떻게든 붙잡고 싶은 마음도 없냐?"
".........무슨 소리냐."
"너 정말 전직 천사장맞아? 리리스 만나서 눈 뒤집혔을 때도 이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던 것 같은 데...."
놀람이나 경악의 경지를 넘어선, 충격이 철가면의 표정에 리얼하게 드러났
다. 가면을 써도 이 정도인데, 가면을 벗기면 인간의 얼굴이 아닐 것 같다.
--;;
"........대체.....넌 누구냐!"
목소리도 잘 나오질 않았다.
"암흑신 환생이라며? 맨 처음엔 그걸로 멀쩡한 사람 아수라파천무인지 망
나니춤인지로 날리더니 이젠 또 나냐? 나는 또 뭘로 해볼래? 폭풍검도 꽤
멋있던데 그건 어때? 아, 그건 스탐블링거 있어야 쓰는 거지."
"솔직히 말해 이 녀석이 앙그라마이뉴의 화신으로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
니지만.....꾸에에엑!"
퍼버버버버버버버버벅-!
--;;;;;;;;;;;;;;;;;;
세상 산 지 꽤 오래됐지만 저렇게 무지막지하게 사람 패는 건 처음 봤다...
철가면은 슬슬 두뇌회로에 스파크가 발생하고 있었다.
'내, 내가 틀렸나?'
그걸 이제 알았냐! 라고 한바탕 고함을 질러주고 싶지만, 유나는 그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내 오라버니는 베라딘의 화신이 아니야. 살라딘
님도 암흑신의 수하가 아니다. 널 가로막았던 시즈에 대해서는 나도 이것
저것 신경쓰이는 게 있긴 하지만 네가 저지른 잘못에 비하면 미미한 거지.
그래서 너의 신분과 과거, 본명에서 전생까지 담보로 잡고 네 놈을 좀 써
먹어야 할 데가 있어."
"잠깐, 잠깐만.... 네가 암흑신의 환생이 아니라고? 그걸 날더러 믿으라는
건가? 그럼 너는 어떻게 나에대해 그렇게 자세하게 알고 있는 거냐! 그 사
실을....."
"....과거를 기억하는 게 너만은 아니지."
'템페스트 시절의 감동의 엔딩..... 비록 1시간동안의 엄청난 용량인데다가
중간에 그만둘수도 없어서 꽤나 눈물흘렀지만 그 행복했던 시간들.... 그런
데 이딴 녀석이 되어 나타나다닛!'
"......무슨 뜻이냐...."
"그건 알 거 없고 나도 지금 여러모로 바빠. 운명을 바꿔야 하거든. 근데
그럴려고 하니까 죽고 다치는 사람이 너무 많아. 투르는 존속해야 해. 투
르의 백성은 살아야 한다고. 그걸 위해서 네가 좀 도와줘야 겠다."
".....어림없는 소리."
순간, 경님과 소연은 등골이 서늘하게 얼어붙는 한기를 느끼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철가면은 자신이 다른 사람의 살기 앞에서 쫄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
".....뭐라고?"
"......그, 그게 그러니까 사, 사정이...."
창! 소리도 명쾌하게 검집에서 칼이 뽑혀나왔다.
"소연."
"아, 으, 응?"
"이 인간 목 잡아늘려."
"에......"
"자, 잠깐만...!"
"남의 나라 왕을 죽여놓고..... 오라버니를 죽여놓고..... 그것도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순전히 오해로! 그래놓고 이제와서 어림도 없다고? 너란 놈은
양심이란 걸 산골짜기 바위틈에 숨겨놓고 다니냐!"
"아,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하기엔....."
"아아, 너희같은 놈들을 아주 잘 알지."
얼음으로 만든 칼이라는 건 이런 말투를 일컫는 것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킨다고 하는 놈들....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미래를 위해서라면 투르의 백성들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거지?
어차피 파괴신을 섬기는 호전적이고 멍청한 무리들이니까? 투르야 산산조
각이 나든, 몇백, 몇천, 몇만의 사람이 죽든 알바가 아니겠지. 전 인류를
위해 싸워야 하는 영웅나으리께서 뭐가 아쉬워서 젊은 시절 목숨걸고 싸
워야했던 적을 위해주겠어.... 알겠어. 알겠다고...."
퍼억!
"크윽!"
"하지만 말이야! 그렇게 모든 원망은 내가 듣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앞을 걸
어가는 네 놈 발굽에 치어 소중한 것을 잃고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어! 네 미친 사촌놈은 미친 놈 답게 앞 뒤 볼 줄 모르고 쳐들어왔지만!
그런 복수조차 꿈꾸지 못하고 그저 오늘, 내일, 모레.... 그 하루하루를 살
아가는 것조차 벅찬 이들이 있다고! 그들을 희생시키면서 이 세계가 존속
해야 한다고? 하! 차라리 망해버려! 멸망해버리라고! 안타리아 하나 멸망
한다고 이 망할 뫼비우스의 우주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은가? 웃기지마!
어차피 이 안타리아는 아르케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부순 대가로 이루어
진 세계야! 뭐가 소고 뭐가 대인가! 누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희생
되어야 한다는 거야! 희생? 대의라고! 개소리! 순전히 자기만족, 자기우월
감! 네 놈의 그 잘난 이상을 부모를 잃은 어린애앞에서 지껄여봐!"
소연과 경님은 이제 완전히 저 벽쪽으로 붙어서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숨
을 죽이고 있었다.
".......유나 진짜 화났나봐...."
"이해해. 저 자식이 화돋구고 있네."
"그토록 잘난 네놈이야 잃는 것 아무것도 없지! 사랑하는 사람도! 또 네
놈의 나라도! 하지만 나는 피눈물이 나! 왜 하필 이 투르며! 왜 하필....."
왜 하필 그녀인가!
"어째서 나야!"
어째서 그녀야!
"어째서 그 수많은 사람들 중 내 오라버니야!"
어째서 그녀의 오라버니야!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이상을 꿈꾸고 어떤 왕이 되려고 결심하고
있었는 지 네 놈이 알기나 하나!"
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어!
"빌어먹을 팬드래건! 빌어먹을 리처드!"
리처드? 철가면은 의아했다. 이미 오래전에 죽은 패륜왕의 이름이 어째
서....
"망할 놈의 장미전쟁! 전부다 지옥 밑바닥에다 깔아버려야 할 금발머리 꼴
통들!"
자기 나라를 싸그리 도맷금으로 넘겨서 욕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철가
면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망할 놈의 선대술탄! 대체 누가 그따위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한 건가! 왜
받아들인거야!"
옳지 못한 뒷거래. 리처드는 더러운 계약을 제시했고 당시 술탄은 손해날
것 없는 역겨운 거래를 받아들였다. 왜 그 대가를 그녀가 받아야 하나.
"그가 살아있기만 했다면..... 그가 두 눈을 뜨고 이 투르의 왕으로 있어주
기만 했다면!"
그녀는 이런 아픔따위 겪지 않아도 됐어.
"자기 혈육을 죽인 자를 용서하는 기분을 네 놈따위가 알기나 해!"
그녀는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애써 미소지었다.
- 유나씨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어차피 오라버니는 돌아가셨고.... 무
척 밉기는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라니까요...
내 얼굴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녀가 울지 않는 대신, 내가 울 것만 같았다.
- 아주 중요한 일을 위해서라니.... 아직 말씀해주실수 없다고 하니 묻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 사람 나름대로 어떤 큰 일을 위해 애쓴 거라면....
꼭 오라버니가 희생한 만큼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어야 해요. 그 정도
는 말씀해주세요.
'.....너무 거창하게 말해서 믿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인류의 존속이 걸린
문제에요. 사피 알 딘님은 암흑신의 화신으로 오해를..... 받으셨어요. 파괴
신의 부활을 획책하는 무리의.....'
채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보며 그녀는 무척이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 오, 오라버니가요?
'.....아마도 앙그라교의 칼리프라는 것과.... 투르내전을 확대하고 있다는 혐
의를 두어 저질러진 행동같아요.... 물론 사피 알딘님께서는 그저 한족의
원조를 바라신 것 뿐이지만.... 그 저능아가 꼬아서 생각을 하다보니 그렇
게 비춰진 겁니다...'
아마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 지금 유나씨에게..... 꼭 필요한 사람인가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다시한번 그 서글한 미소와 마주하는 게 못 견디게 아팠다.
- 그럼, 잘 부탁드리겠어요.
"그녀를..... 그녀를 위해서 안배된 생은 그런 게 아니었어!"
"어, 어이... 유, 유나야?"
소연은 혹여라도 유나가 철가면에게 진실을 말할까봐 슬슬 걱정이 되었다.
"네 놈 따위가 함부로 망쳐도 될 그런 게 아니었다고!"
칼 끝이 부들부들 떨리며 바로 그의 목에 겨누어졌다.
- 기왕이면 그의 힘이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쓰인다면 좋겠어요.... 유나
씨는 설득하는 데는 천재시잖아요...
"내가 왜! 어째서! 네 놈의 힘을 빌리면서까지 이 전쟁을 끝내야 하는 건
지 알기나 하나! 이 빌어먹을 개자식! 뭘 제대로 알면서 어림도 없다고 내
뱉는거냐고!"
쨍그랑! 검이 바닥에 내던져졌다. 대체 왜 저런 폭언을 들어야 하는 지 알
지도 못한 채 멍해져있는 철가면을 놔두고 유나는 차디차게 내뱉었다.
"며칠 더 굶겨!"
"헤에에에?"
"벌써 이틀째인데?"
"설마 그 잘난 천사장께서 저것가지고 죽지는 않겠지. 아사라니 그 얼마나
웃기는 죽음이야?"
"..........화났네."
"그걸 이제 알았어? 머리끝까지 났다니깐..."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아이들은 철가면에게 한
마디 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개겨봤자 남는 거 쥐뿔도 없어요. 굶어죽기 전에 그냥 승낙하는 게 팬드
래건을 위해서도 좋은 텐데...."
"당신 때문에 안그래도 밉게보인 팬드래건, 두배로 밉게 보이고 있는 거라
구요. 저 녀석 정말 화나면 무슨 짓을 할 지 몰라요. 다 업보를 씻는 거라
고 생각해요."
"나도 솔직히 말해서 당신같은 바보랑 같은 팀 이루기 싫어요. 당신 때문
에 살라딘님이랑 세라자드님이란 고생한 거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
나겠다구요."
"사피 알딘이 베라딘이라니.... 대체 그런 황당한 생각은 어디서 난 겁니
까?"
"아, 이름 맨 뒷글자가 같긴 하군. 그러고보니 살라딘도...."
"당신 정말 클라우제비츠 맞아요? 아수라쓰는 거보니 맞기는 맞는데..."
"늙어서 치매왔나? 이 인간 왜 이렇게 저능아처럼 군데?"
"맞아맞아. 서풍때만 해도 안 이랬다며?"
"본격적으로 망쳐지기 시작한 건 아무래도 템페스트때같지?"
"....난 그거 안 해봤어."
이른바 사람있는 데서 없는 것처럼 말하기...
제 2차로 퍼부어지는 정신공격에 계속해서 멍해져만 있는 철가면을 뒤로
하고 소연과 경님마저 감옥을 나가버렸다.
술탄의 명령은 혹독할 정도로 철저히 지켜졌다.
아마도 계속 이대로 버티다간 공개처형이 되지 않을까 싶다.
철가면은 어느새 포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놀라버렸다.
지금의 이 상황이 크게 절망스러운 것은 아니다. 사지를 움직이지 못한 채
계속 누워만 있어야 한다는 건 정말 힘들지만 어떻게 저떻게 해서 굳이
방법을 취하자면 밧줄을 풀고 달아날 수도 있다.
게다가.... 램버트에 ISS요원, 지그문트 박사도 밖에 있고.... 그 혼자 이 곳
을 쳐들어온다는 건 불가능하지만...아무튼 이리저리 연계를 한다면 굳이
불가능한 것도 아닐텐데....
어쩐지 의욕이 없다.
투르의 여왕은..... 그때 꼭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의 불행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슬퍼하는 얼굴.
".....나이를 먹었나... 감상이 늘었군...."
그런 얼굴을.....본 적이 있다.
- 빌어먹을 리처드 놈! 내 동생들을 어떻게 한 거야!
적들을 향해 처절하게 외치던 젊은 공주...
".....미안, 엘리...."
어쩔 수 없이 가끔 그녀가 생각나는 걸. 괄괄하고 활기찬.... 오만할 정도로
도도하던 내 공주님...
- 혈육을 죽인 자를 용서하는 마음을 네 놈 따위가 알기나 해!
"하.... 전혀 용서한 것 같지 않던 걸..."
굶어서 뱃가죽이 등이랑 사돈맺자고 할텐데 잘도 딴 생각을 하는 군. 죽기
직전이 되면 옛생각이 난다더니 그거냐?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할텐데...."
"꿈도 꾸지 마셔."
허걱-
등불이 켜지며 소연과 경님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 인간들은 사람 딴 생각할 때 나타나는 버릇이 있나? 철가면은 두근두
근대는 심장을 겨우 추스리고는 되도록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려고 애썼다.
"인기척 좀 하게나."
갑자기..... 뭔가 생소한 침묵이 닥쳤다.
".......상처 좀 보여봐요."
낯선 목소리? 누구지?
어슴푸레한 등불 빛을 아래에서부터 받은 얼굴은 조금 섬뜩한 형상이었으
나 철가면은 그 얼굴의 본래모습과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한족의 여자다. 눈빛은 맑아보이지만 평범한 얼굴이다. 하지만 그 얼굴에
깃든 표정은 예사롭지 않았다. 차라리 처절한 비애감이 덜 비참하리만큼
그녀는 무언가를 포기하고 있었다.
"그때.... 경님씨의 아이스미사일에 맞아서 상처를 입은 것을 봤어요."
".......상관할 바 아니오."
경님의 눈에 쌍심지가 돋히려는 순간.
"늦게와서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이 입혀놓은 병사들의 부상을 치료하느라
고 어쩔 수 없었어요. 가해자를 피해자보다 먼저 치료할 수는 없잖아요?"
"세라씨!"
"뭣 때문에! 전 지금 이 녀석이랑 세라씨가 얼굴 마주대고 있다는 사실만
으로도 위장이 거북하다고요! 필요없다는 데 나가요!"
"........과다출혈로 죽은 환자를 본 적 있어요?"
"에?"
"나중에는 고통이 없어요. 점점 체온이 내려가면서 그저 끝도 한도 없는
잠이 와요. 과다출혈로 죽은 사람들은 대개 얼굴이 평온해요. 죽기 직전에
삶을 포기하기 때문이죠. 어차피 살아날 수 없으니까 지난 추억을 되새기
며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하고 죽는 거예요. 그 평온한 얼굴은 피가 모두
빠져나가 꼭 종잇장처럼 하얗죠. ....섬뜩한 이야기지만 아름다워보이기도
해요."
".........."
"지금 제게 치료받지 않으면 당신은 그렇게 죽을 거예요."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으로 영혼이 살아있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따라서
영혼과 육체는 동등하게 존귀하다.
...................
이거.....영혼은 육체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는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까?
"......사, 상처가 그렇게 심각했나요?"
세라자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 초인적인 의지력을 높이 사드리죠.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감히 투르의
술탄을 암살하겠다는 생각을 못했을 테니...."
......그녀가 말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차갑고 무미건조하며,
약간 빈정거리는 기색이 담긴 말투였다. 소연과 경님은 본능에 충실했기
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기꺼이 패닉에 빠져주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의식불명이라면 제 3의 인류라는 대한민국 여고 3년생
의 이름이 울지!
"자, 잠깐.... 하, 하지만 그렇다면 이 밧줄을 풀어야하잖아요."
".......잠시만 풀어주세요."
"안돼요! 유나가 알면...."
"책임은 모두 제가 지겠어요. 게다가 이 분의 몸으로는 지금 도망조차 칠
수 없어요."
"그런....."
"의사로서 말하겠어요. 정말이에요. 이 분은 지금 그저 버티고 있는 거예
요. 절대로 도망 못쳐요."
"대체 이 망할 놈의 검은 망토는 왜 그렇게 고집하는 거예요?"
"혹시 이 망토덕분에 왕궁에 쉽게 침입한 거 아니에요? 암살자가 아니라
광대인줄 알아서."
"설마... 저렇게 재미없게 생긴 광대가 또 있을려고..."
"뭘, 생긴 건 멀쩡하다못해 잘생긴 주제에 속은 완전히 미친 놈도 있는
데."
"하긴."
이 이야기에서 미친 놈 하면 버몬트고 바보놈 하면 철가면이다.
"확실히 늙었네.... 생양아치패션에다 앞머리 염색하고 나돌아다니던 시절
도 있었는 데."
"아, 전에 봤다. 패션하나 끝내주더군요. 에밀리오도 그렇게 하고 돌아다닌
적 있다며?"
"그거야 이 아저씨랑 동시에 나타나려고 꾸민 거지. 그때 이야기만도 소설
하나가 나올텐데."
"게임 스토리로는 좀 그렇지. 그나저나 그게 문제가 아니고....그 멋없는 가
면은 어디서 특수제작한 거예요?"
질문내용에 놀라는 것도 잠시 철가면은 슬슬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질문들에 답해야 하는 걸까.
"철가면은 또 뭐고? 저어기~ 어느 나라 어느 분께서 말씀하셨듯이 정말
네이밍센스 꽝이네. 혹시 팬드래건가는 전부다 이런 거 아냐?"
"정말. 멀쩡한 마룡한테 미친 놈 이름 붙여주는 사람이 있질 않나, 이름이
서너개가 넘는 사람이 있질 않나...."
"어이, 그때 당시엔 미친 놈 아니었어."
"아, 맞다. 그때는 아니었지."
"그나저나 그 놈 이야기나오니까 말인데, 아까 과다출혈이야기말이야."
"그게 왜?"
"버몬트 놈 그렇게 죽으면 괜찮을 것 같다. 그지?"
"오오옷! 그렇네! 그래도 그 자식 꽃미남이니..."
"하얗게 되서 죽은 걸 박제해놓으면 보기엔 괜찮을거야."
".....꿈자리는 사나워도 말이지...."
철가면은 바야흐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자기 동생이 저런 패거리들을 상대해가면서 복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필립이 하늘에서 얼마나 걱정이 많을까. 엘리자베스는 잠도 못 잘거
야.
하는 수 없이 철가면은 결심했다.
어차피 이 전쟁은 끝내야 한다. 어차피 팬드래건을 승리시켜 전쟁을 끝내
는 건 실패했다. 투르는 보기드물게 단결되어 있었다. 술탄의 위험앞에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인의 장벽을 치던 병사들...
그것은 버몬트가 자국의 병사들에게 받아내는 신망이나 위엄과는 다른 종
류의 것이었다. 차라리 버몬트를 물러서게 하는 편이 빨라. 팬드래건내에
서도 말이 많던 원정이었으니....
"도와주겠네."
".......그래요?"
"잘 생각했어요. 살고 싶으면."
"............."
너무나 당연한 대답이었다는 듯 시큰둥하게 반응하는 아이들에게 철가면
은 좀 화가 났다.
"뻔하잖아. 명색이 처남인데 구하지 않으려고 하겠어."
"하긴, 눈 앞에서 사촌동생이자 처남이 박제될지도 모르는 데 가만히 있을
매형이 어디있나."
"버몬트를 살려두는 데는 우리도 찬성이에요. 아무튼.... 그를 슬프게 할 수
는 없으니까...."
"그?"
"......그건 알거 없고, 아무튼 막아주길 바래요. 나중에 유나가 정말 화가
나면.... 웬지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으니까."
"유나?"
"합! 그, 그러니까 세라자드님 말이에요! 폐하요!"
"......그 이름은 또 뭔가?"
"애, 애칭이에요! 우리끼리만 부르는!"
"게다가..... 당신은 이 투르에 아주 많은 빚을 지고 있으니까."
붕대를 감던 세라자드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곧 원래의 동작
을 계속해나갔다.
"앞으로 더 많은 빚을 지게 될거예요."
"파괴신을 없애는 걸.... 우리가 도와주겠어요."
"설마 믿지는 거래는 아니겠지. 믿겠네."
"믿지는 거래죠."
".....무슨 뜻이지?"
"우리 말이에요. 이건 너무나도 우리가 손해보는 거래야. 파괴신이 무슨
남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오뉴월 복날의 개패듯이 패서 될 상대도 아니
잖아."
"좀 힘들긴 해."
끄덕끄덕 수긍하는 경님과 소연의 태연자약한 태도를 보며 철가면은 조금
아연해졌다.
'......오뉴월 복날 개패는 것만큼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군.'
"그리고 또 하나 있어."
경님은 철가면쪽을 곁눈질하며 소연의 귓가에 대고 소근거렸다.
"유나가 원래 몸으로 돌아와야 할 거 아냐."
"핫! 그렇네!"
"쉬잇! 그나저나 유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아저씨한테 도와달라고 한
거지?"
"글쎄....."
"영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