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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9: 41 본다고 하니
요 9: 41 본다고 하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자기들이 시각장애인인 줄 알았더라면 주님을 믿었을 것이고, 따라서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아 무죄한 자처럼 되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우리가 영적으로 시각장애인이 아니라고 자처한다면, 죄를 더욱 범함이다.
그것은 곧, 요일 1: 8에 말한 대로,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하였고, 요일 1: 10에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시각장애인이면서 시각장애인이아니라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는 죄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여기는 죄를 범함이다.
2] 보는 자들을 심판하러 오신 예수 (요 9: 35-41)
시각장애인으로 있다가 눈이 뜨여진 청년은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 도다”고 생각하면서 이상하다고 여겼다.
세상 사람의 방법으로는 예수님올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이신 줄을 알 도리가 없다. 그들의 눈이 감겨져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신 줄 알려면 그의 신령한 눈이 열려져야 한다.
예수님은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이 눈을 뜬 사건을 영적인 신령한 눈과 연관시켜 아직도 신령한 일에 시각장애인이 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책망하시면서 “보지 못하고 본다”고 하는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들임을 경종 하셨다.
(1) 네가 인자를 믿느냐?
예수님은 언제나 그를 위하여 핍박을 받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멀리하지 아니하시고 가까이 하신다.
* 요 16: 33 -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은 그 청년이 바리새인의 재판에서 출교 조치를 당하였다는 말을 들으셨다. 그는 이제 유대인이면서도 유대교에서 쫓겨난 처지였다.
이 청년이 이런 핍박을 당하는 이유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예수를 시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청년은 참으로 장한 일을 한 것이다.
① 그의 신앙을 본받으면 하나님 앞에서 그의 이름이 부인 받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마 10: 32-33).
② 그의 신앙을 본받으면 이 땅 위에 임할 환난에서 건짐을 받을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의 칭찬을 받은 것은 그의 이름을 배반치 않은 데 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셨다(계 3: 8).
그리고 그들에게 보장하시기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시각장애인을 찾아오셔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고 물으셨다. 이 청년은 아직 믿음이 어렸다. 그가 인자란 주님의 말씀에 그 인자가 누구이며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지에 대하여 몰랐다. 예수님이 그에게 묻고 계시는 인자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하신 분을 가리키신 말이다.
예수님을 만난 이 청년은 아직 자기의 눈을 뜨게 하신 이를 만나본 일이 없으므로 그가 예수이신 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그 청년은 “주여 그가 누구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고 말했다.
인자라고 말씀하신 그 분이 누구이신지 알려만 주신다면 그에 대하여 믿을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이 청년은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이분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해주신 분이시며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너무나도 감격스럽고 반가운 상면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하는 신앙고백이었다.
(2) 보는 자들을 심판하러 오신 예수
“내가 심판하러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사실인즉 시각장애인들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눈은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한 것이다. 이들에 대하여 이미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고 예언했다(마 13: 14).
제자들이 하루는 떡 가져오기를 잊었을 때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이는 자기들에게 떡이 없음이로다고 걱정하고 있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느냐?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고 나무라셨다(막 8: 14-21).
반면에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신다고 하셨다. 보지 못하는 사람이란 지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는 사람을 말한다. 자기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음을 깨닫고 오직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리는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눈을 보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이 눈을 뜬 청년처럼 생명의 빛 되신 예수를 바라볼 수 있게 하심으로 그에게 소망을 주시고 그의 삶을 보람있게 하실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죄는 씻음 받을 길이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이 시각장애인이면서도 자기들만이 빛을 바라보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눈은 앞으로도 뜨여질 가망이 없다.
그들은 그들의 죄악 중에 해메이다가 결국은 망할 것이다.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8: 21).
우리가 시각장애인이 되지 않으려면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 빛을 따라 우리의 인생길을 살아가야 하겠다.
3] 세 종류의 소경 (요 9: 35-41) : agase
(요약)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소경이 눈 뜨는 사건을 통해 영의 눈을 떠야 함을 말씀하신다. 세 종류의 소경이 나타나는데 먼저 소경 아닌 소경이다. 육신의 눈은 떴지만 영적 소경이 그것이다. 다음은 정죄 받는 소경이다. 영적 소경이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자다. 이들은 사실을 왜곡할 뿐 아니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여 함께 멸망에 빠진다. 그러나 고침 받은 소경이 있으니 이들은 한결같이 자기 불행을 알았고 부르짖었다. 눈을 뜬 소경은 두려움 없이 예수를 증거하였다. 이처럼 신령한 눈을 뜰 때 진리를 위해 잠잠할 수 없는 것이다.
(설교)
앞 못 보는 소경 한 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저는 전기 용접을 하다가 눈이 붓고 아프고 보이지 않아 온 밤을 울며 지새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 기도가 장관입니다. “하나님 제 눈만 낫게 해 주시면 일생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기도하며 살겠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런 기도가 나왔겠습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은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은 개안수술의 발달로 심청이 아버지 심봉사가 눈 뜬 사건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방송으로 지켜보면서 얼마나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선지자 이사야는 세상에 오실 예수님을 예언하면서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아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사35:5). 예수님께서도 행하시는 이적 중에 소경이 눈 뜨는 것을 가장 우선에 두었습니다(마11:5). 그것은 그것이 메시야 되신 표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9장 본문에도 소경이 눈뜬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주님은 육신의 소경을 통해 영의 소경의 문제를 교훈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세 종류의 소경을 봅니다.
1. 소경 아닌 소경입니다.
눈을 뜨고도 못 보는 사람을 흔히 당달봉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영의 세계에도 소경 아닌 소경이 있습니다. 바로 영의 소경입니다. 사6:9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영적 소경입니다. 이들은 육안은 떴지만 영안이 닫혔습니다. 성경 진리를 들어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이들은 사물은 보면서도 사리는 분간하지 못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지식의 눈은 밝았지만 옳고 그름에 대한 사리를 분간하는 기준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마23:24) 책망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도 육신의 눈만 떴지 영의 눈은 소경이기 때문입니다(롬1:20). 그래서 육신은 보면서 신령한 것을 보지 못하고, 현세는 보면서도 내세는 보지 못합니다. 이것을 벧후1:9에서는 “원시(遠視)치 못하고” 그랬습니다. 멀리 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에서처럼 한 그릇 식물을 위해 장자 명분을 팔듯(히12:16) 우선 보이는 현실에만 급급하여 내세는 물론 미래의 꿈이나 비전을 갖지 못합니다.
2. 정죄 받은 소경이 있습니다.
39절을 보면 예수께서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서 어떤 사람이 “우리도 소경인가”하고 반문하였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소경은 소경이되 정죄 받는 소경입니다. 하나님이 정죄하는 사람은 소경이면서 소경이 아니라고 하는 자입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소경이면서 소경이 아닌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보는 것이 진리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눈이 있습니다. 육신의 눈 육안이 있습니다. 이 눈도 밝으면 좋습니다. 최근의 뉴스에 의하면 시칠리아 메시나 지방의 어부 시모네 아레나씨는 600미터 거리에 있는 작은 글자까지 읽어낼 정도로 시력이 6.0을 넘었습니다. 높은 하늘에서 먹이를 찾아 낙하하는 독수리의 시력이 5.0인데 그보다 더 밝은 눈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가족들이 다 시력이 좋습니다. 그렇게 육안이 좋은 것은 조상대대로 고기떼를 잡기 위해서 높은 탑에 올라가 바다를 탐지하는 어업을 해오면서 발달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공부나 경험으로 얻는 지안이 있습니다. 이게 열리면 육신의 생활에 불편함이 없고 보물이 굴러다니는 것이 보입니다. 그리고 말씀과 성령이 충만한 자에게만 있는 영안이 있습니다. 제가 예수 믿고 가장 신기했던 것은 믿는 사람에게는 비밀을 숨길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은사로서 알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때 저는 목포에서 성령운동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는 최요한 목사님을 많이 뵀었기 때문에 여러 신기한 일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특히 사모님은 그런 은사가 풍부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저를 위해 기도하실 때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영안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가장 안타가워 하는 사람은 바로 영의 소경입니다. 영의 소경 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영락없이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소경이면서 소경이 아니라고 하는 자들을 정죄하신 것은 그 마음으로는 고침 받을 수 없고 대단히 위험할 뿐 아니라 외식자요 위선자이기 때문입니다. 다들 자기로서는 최선의 판단을 한다면서 살지만 부족함을 알아야 합니다.
또 정죄 받을 소경은 소경생활에 만족하는 자입니다. 이들은 발전할 희망이 없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계3:17-18).
또 정죄 받아야 할 소경은 어떤 자인가?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소경된 인도자”라고 하셨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함께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마23:13에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고 하셨고, 15절에는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고 하셨습니다.
야고보도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약 3:1). 예수님께서는 남을 실족케 하는 자에 대하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마 18:60).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주장만 펴면 자신은 물론 남까지 실족시키는 큰 죄를 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3. 고침 받은 소경이 있습니다.
막10:46-52에는 바디메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로 가실 때 디메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메오를 만났습니다. 바디메오는 소경이었지만 나사렛 예수님이 지나신다는 말을 듣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군박했지만 그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시니 그는 즉각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믿음대로 보게 하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눈뜬 소경들은 눈뜨기 원하여 모두 소리 질렀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소경의 불행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소경인줄조차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맹이요 소경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고침 받을 수 없었고 구주 되신 주님을 배척하여 십자가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눈이 보배라고 합니다. 육신이나 지식의 눈도 그렇지만 영의 눈은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누군지 예수님이 누군지 어떻게 섬겨야 하고 어떻게 믿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면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령한 눈을 뜨면 하나님이 믿어지고 예수님이 믿어지고 성경이 믿어지고 천국이 믿어집니다. 그리고 영의 눈을 뜨면 현재의 진상을 알고 미래의 환상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그동안은 닫혀 진 눈으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열린 눈으로 적극적이고 희망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혹은 지금까지 남의 신세만 지고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남을 도와주고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 김제시의 축협장은 수억의 보수를 포기하고 그동안 무보수로 조합장으로 봉사하였고 이번에 또 조합장으로 당선 되었습니다. 참으로 찾아보기 힘든 일입니다. 그 분은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수천 마리의 돼지를 기르면서 수입의 90%를 선교사역에 드리며 충성하고 있다고 합니다. 며칠 전에 담임 목사님을 만났는데 이런 분 몇 분만 있으면 세상을 뒤바꿀 것만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선한 일에 겁 없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명의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나오는 눈뜬 소경도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에게 예수가 자기 눈을 뜨게 하였다고 겁 없이 말했습니다(11절).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간증하며 예수를 증거했습니다(17절). 그는 그것 때문에 미움을 받고 왕따를 당하면서도 자기의 본분을 다하였습니다. 눈 뜬 당사자가 전하니 그들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눈이 열리면 말하지 않을 수가 없고 진실을 위해 잠잠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눈이 열려 하지 않을 수 없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눈도 중요하고 지식의 눈도 중요하지만 이 시간 하나님께서 더욱 더 밝은 영의 눈을 갖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잘 섬기고 진리를 알아 어둠 속에 헤매는 영혼들을 밝은 데로 인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심판하려고 오셨다.
예수께서 심판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복음을 통해 신자와 불신자, 구원받는 자와 멸망하는 자를 나누신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심판이 된다.
그것은 듣는 사람들을 구원과 멸망, 천국과 지옥의 두 부류로 나누는 점에서 그러하다.
둘째,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셨다.
예수께서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해주신 것은 영적 시각장애인인 죄인들의 눈을 뜨게 해주실 것을 암시한다.
그가 세상에 오신 것은 영적 시각장애인들의 눈을 뜨게 해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영적 시각장애인이 고침받는 것과 같다.
우주와 인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모르고 삶의 목적도 방법도, 죽음의 이유와 그 후의 세계도, 구주 예수 그리스도도 모르던 자들이 구원을 받아 눈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영적 시각장애인임을 알지 못하고 본다고 말하는 자들은 영적 시각장애인이 될 것이다. 스스로 인생의 삶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 그래서 돈을 버는 데나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 눈이 밝은 자들은 영적인 시각장애인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들은 다 자신들이 죄인임을 보지 못하고 창조자, 섭리자, 심판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구주를 알지 못하고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과 영생과 천국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마지막 심판 날을 대비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나면서 시각장애인 된 자의 눈을 뜨게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고침을 받았던 그 시각장애인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알지 못함을 이상히 여겼다.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으셨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지혜롭게 말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셨고, 시각장애인은 예수님을 믿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죄인들은 그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셋째, 예수께서는 시각장애인의 심령의 눈도 밝게 해주셨다.
그것이 주께서 하시는 구원의 사역이다.
구원은 하나님을 알고,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구주 예수님을 알고, 인생의 정로(正路)를 알고, 천국과 영생을 아는 것이다.
주께서는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시고 보는 자들은 시각장애인이 되게 하신다(39절).
영적 시각장애인들은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과 의롭고 선한 길과 천국과 영생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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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움켜쥔 행복은 씨앗이지만 나누는 행복은 꽃이고 열매라고 합니다.
오늘도 꽃피고 열매 맺는 행복한 하루 힘차게 만들어 가시길 기원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