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 위에 핀 꽃 절
김연주
싱그러운 초록으로 물드는 산을 오른다. 쉬엄쉬엄 화암사花巖寺를 오르는 느린 발걸음은 아무리 걸어도 그 자리를 맴도는 것 같다. 산길 따라 초록빛 나무와 야생초들의 내음이 가쁜 숨을 따라 코끝을 상쾌하게 스치지만, 새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은 묵직할 뿐이다. 가파른 산길은 사방을 둘러봐도 적막감이 돈다. 옛날 걸었던 오솔길이 아닌 나무 데크로 된 길과 철계단으로 길을 정비했지만, 그 어느 날도 그랬을까. 노년의 발길은 무리가 아닌가 싶다. 세월을 이겨낸 산천은 옛날 그대로다. 이 산길에는 복수초 군락지가 있고 일엽란, 얼레지등이 봄이면 꽃등을 켜 아름답다고 한다. 20년 전 같이 왔던 도반들의 목소리, ‘그 어느 날’의 젊은 나의 숨소리도 바람 소리와 함께 서성이듯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계곡의 물소리는 요란스럽지는 않으나 꽤 길게 이어지는 폭포 너덧 개가 있어 쫄쫄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아, 시원하다.
숲길을 따라 오르다 보니 폭포수 근처에 아주 나지막하고 작아 보이는 평평한 다리가 새로 놓여 있다. 아니 이건 세심교? 아직 완성된 다리는 아닌 것 같으나 세심교라 이름 짓고 조심조심 건너가 본다. 세속에 찌든 마음이 어느 정도 씻기리라 생각하며 건너 오르니 ‘바위 위에 핀 꽃’ 화암사(연화 공주 설화)가 눈앞에 펼쳐진다. 일주문도 없이 꽃비가 내리는 누각 우화루雨花樓가 곧바로 맞이해준다. 국보가 있는 산속의 작은 사찰(전북 특별자치도 국보와 유형문화재)이다. 우화루를 바라보고 왼쪽 화단에 200년 된 목단이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웅장한 출입 통로가 따로 없고 돌담과 옆으로 난 작은 돌계단이 전부인 우화루와 함께 절 마당을 지키는 파수꾼 같다.
우화루 왼쪽으로 가정집 대문 같은 작은 문 위에 연등 하나 걸려있는 산문으로 들어갔다. 우화루는 좁은 사찰의 기도 장소이자 법당의 연장 장소로 꽃비가 내리는 상서로운 곳이란다. 이곳에서 불자들이 불법을 강론하다 보면 그 심심深深한 불심에 부처님의 상찬賞讚 같은 연꽃 비가 그들을 위로했음 직하다. 좁디좁은 절 마당에는 그 흔한 탑도 없이 소박하다. 눈앞에 극락전이 이 또한 소담하게 보존되어 있다. 국보로 승격하여 더없이 화려할 줄 알았는데 옛날 그대로다. 화장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청아한 보살을 보는 것 같다. 마침, 극락전 문이 열려있어 안으로 들어가 삼존불과 웅장한 닫집을 향해 삼배했다. 자연 그대로의 예술적 운치가 돋보이는 극락전은 단청을 거부한 채 고고한 자태를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국내에서 유일한 용머리 모양의 하앙식下昻式 처마가 극락전 편액을 더 돋보이게 한다. 옛날의 단청 안료를 현대에 재현할 수 없어 그대로 보존한다는데, 속인의 생각으로는 비바람에 훼손되면 어쩌나 하는 염려로 안쓰러워진다. 문화재 보존을 위한 전문가의 깊은 뜻이 어느 때까지라도 잘 간직해주리라 생각할 뿐이다.
적묵당 마루에 앉아 마당을 보니 네모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하늘도 네모로 보인다. 아주 작은 절집에는 극락전과 적묵당, 불명당, 우화루 딱 4채의 건물이 자형을 이루고 있다. 네모 마당을 거닐다 보면 자연히 동그라미 형태의 동선이 그려지며 중생의 마음을 원만하게 다듬게 하리라. 불명산 화암사는 비바람 속에서도 꼿꼿하게, 당당하게 세월을 이겨내고 있다는 뜻으로 ‘곱게 늙은 절’ ‘잘 늙은 절’ ‘숨어 있는 절’로도 알려져 있다. 안도현 시인의 시 ‘화암사 내 사랑’을 통해서도 더 유명해졌다. 공양간 앞 벽에 안도현 시인의 시가 걸려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소박하고 아름다운 절, 그냥 예사 절이 아님을 알게 해준다.
산문을 나오려는데 우화루에 깨끗이 속을 비운 목어 한 마리가 걸려있다. 비늘도 벗겨지고 빛바랜 늙은 목어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어라니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시원한 바람결을 따라 물속에서 유영하듯 우아하게 흔들린다. 밖으로 나와 해우소 쪽에서 본 화암사는 바위 위에 지붕이 놓인 듯 바위 위에 불화佛華가 핀 듯 보였다. 작은 사찰이지만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수도했다는 곳으로 지금도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들의 제각각 품은 뜻이 너무 큰 고생 없이 이루어지길 빌어본다. 큰 울림이 있는 기도처로 갖출 것은 다 갖춘 극락세계로 이끌어주는 부처 마당이다.
사붓사붓 산길을 내려오는데 철이 지나서 얼레지, 복수초, 현호색, 노루귀는 보지 못하고 겨우 금낭화, 귀여운 애기똥풀꽃, 붓꽃 등을 보면서 내려왔다. 산야 모두가 초록이 지천인데 굳이 이름있는 꽃만 꽃이랴. 이름 없는 불자들 같은 풀꽃과 함께, 때 묻지 않고 산속에 고고히 숨어 불심을 닦고 있는 마음 하나 만나고 가는 것 같아 발걸음이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