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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 기도
주님...
분주함 속에서도 주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사오니 오늘 하루도 넉넉히 거룩한 불구자로 살게 하시어 죄에 대하여는 느리게 하시고 의에 대하여 민감하게 하옵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케 하시고 새 영과 새 마음을 두사 주의 영으로 다스리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눅 1:57-66
제목 : 주의 뜻인 영생에 초점을 맞추어 살 때, 모든 순간이 곧 형통이다.
57.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58.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59.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60.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62. 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63.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64.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허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65.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66.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 나의 묵상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은 지 8일이 지나 할례를 하러 모였다.
친척들이 모여서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사가랴’라고 지으려고 하였으나 엘리사벳은 사가랴가 아니라 요한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네 친족들 중에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없다고 하면서 사가랴로 지어야 한다고 강요하였다.
59절의 ‘하고자 하더니’로 번역된 헬라어 ‘에칼룬’은 그렇게 하려고 하는 강한 의지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들은 요한이 아니라 사가랴로 지어야 한다고 계속 고집했음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아버지의 이름으 ㄹ따라 아이의 이름을 짓던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풍습과 이름을 중요시했던 유대인들의 삶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의 이름을 ‘사가랴’로 지으려고 고집했던 친척들은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명했던 천사,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고집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 사회 관습까지도 초월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달아야 하나님의 뜻과 멀어지지 않고 그 뜻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아이의 이름을 짓는 문제로 옥신각신 할 때 아버지 사가랴에게 물었다.
사가랴는 주위의 친척들의 주장이 완강한 것을 알지만, 그는 글자판에 아이의 이름이 ‘사가랴가’가 아니라 ‘요한’이라고 썼다.
이 일로 인하여 주변의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그가 왜 집안에 있지도 않은 이름을 쓰는지에 대한 것과 함께 엘리사벳과 동일하게 요한이라고 쓰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또한 놀랍고 기이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들의 이름을 짓는 것은 아버지의 고유 권한으로써 주변의 사람들이 워낙 ‘사가랴’로 지어야 한다는 강압에 못 이겨 ‘사가랴’로 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사가랴’가 아니라 ‘요한’이라고 지었다.
그것은 단순히 천사의 말을 듣고 그 이름을 쓰는 차원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아버지 사가랴의 믿음의 행위를 주변에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과 다름없다.
사가랴는 의롭고 신실한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지만, 사람의 이성을 뛰어넘는 믿음을 가지지는 못하였었다.
그래서 그토록 아들을 달라고 부인과 함께 기도하였지만, 그들이 다 늙어서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판단되지 아이 갖는 일을 포기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더 이상 사람으로써 아이를 갖는 것이 불가능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이를 주시겠다고, 그것도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라고까지 말씀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사가랴는 도무지 이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수태고지를 하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도 그렇고 그의 아내 엘리사벳도 이미 늙어서 아이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가랴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즉시 그는 징계를 받아 말 못하는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자신의 믿음 없음으로 인하여 벙어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잘 아는 사가랴는 사람들의 말을 듣기보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완강한 고집을 뿌리치고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었던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모르는 주변의 친척들과 사람들은 당시의 관습과 풍습을 저버리는 사가랴를 나무라거나 비웃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사회의 관습과 풍습 그리고 사람들의 비웃음까지도 초월하여 그 뜻에 순종할 때 주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사는 삶의 지혜요 믿음의 행위인 것이다.
사가랴가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자 그 순간 닫혔던 그의 입이 열리고 묶였던 그의 혀가 풀리며 말을 하게 되었고 그는 그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할 때 이처럼 닫힌 입이 열리고 묶인 혀가 풀리는 역사가 일어난다.
이것은 징계가 풀리는 것을 의미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믿는 증거로 보여주시는 것이다.
믿음이 없던 자에게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바로 이런 기적들이다.
그러나 이런 기적은 항상 있지 않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기적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심으로 믿음이 작은 자들에게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요 은혜인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이다.
주님께서는 그런 믿음에서 자라나기를 원하신다.
(엡 4:11-14)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벧후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히 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또한 믿음이 자라났다고 해서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신앙과 세례와 안수와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과 같은 제법 큰 믿음일지라도 거기에 머물지 말고 더 완전한 데로 나아갈 것을 독려하신다.
한편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대로 순종한 사가랴가 닫혔던 입이 열리고 묶였던 혀가 풀리므로 말을 하게 됨에 따라 그 소문이 삽시간에 유대 전체에 퍼졌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그 말을 마음에 새기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떤 인물이 될까?” 하였다.
이 아이가 범상치 않은 것은 다름 아니라 주의 손이 그 아이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주의 손이 함께하심은 곧 하나님이 함께하심이다.
한 마디로 하면 임마누엘의 은혜인 것이다.
주의 손이 함께 할 때 그로 인하여 때로는 우리의 삶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형통인 것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신실한 요셉의 경우 하나님께서 늘 언제나 그와 함께 하셨다.
그런 요셉은 상상할 수 없는 고난가운데 빠지고 만다.
형들에 의해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다.
그 후에 그의 인생은 점점 꼬인다.
보디발의 종으로 팔려간 요셉은 여주인의 유혹을 이겨낸다.
피가 펄펄 끓는 청춘인 요셉이 여주인의 유혹을 이겨낸다는 것은 정말 참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사는 요셉은 육신적으로 형통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생이 꽈배기처럼 꼬이고 마는 것이다.
그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다.
그런데 거기서 두 관원들의 꿈을 해몽해 줌으로써 출옥의 좋은 기회를 맞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 관원장이 출옥하자마자 요셉의 간청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해서 요셉은 만 2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는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항상 요셉과 하나님은 함께하셨지만 그 요셉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요셉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평가가 바로 ‘형통’이었다.
(창 39: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진짜 형통의 의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마치 사가랴의 친척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아들의 이름을 당시 사회 관습과 문화에 따라서 ‘사가랴’로 해야 한다는 것과 정작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그 관습과 문화를 뛰어 넘어 ‘요한’이라고 짓는 것과 동일하다.
내가 지금 비록 고통과 고난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그 자체로 ‘형통’인 것이다.
따라서 형통이란, 주님의 뜻과 언약을 이루는 그 자리에 있음이 곧 형통이다.
비록 상황적으로는 죽을 것 같고, 숨쉬기조차 힘들지만, 그 일이 주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라면 그것이 바로 형통인 것이다.
세례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주님의 길을 닦는 자로 태어난다.
그는 주님을 뛰어 넘을 수 없는 영원한 2인자이다.
그는 자신 스스로 주님의 신발 끈을 푸는 일도 감당하지 못할 자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요한은 태어난지 30년 만에 요절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 형통한 자이다.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는 실패한 인생이라고 볼지 모르나,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때 그는 진정으로 성공한 인생이요 형통한 자이다.
왜냐하면 주의 손이 늘 그와 함께 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유대인들처럼 끊임없이 표적을 구하는 자였다.
그런 표적을 보면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것 같고, 보이지 않으면 주님이 나를 떠나신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나는 표적을 보는 것이 대단한 신앙의 소유자인 줄로 착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방언을 유창하게 하고, 병고침을 받거나 그런 기적을 행하는 사람을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했었다.
이런 사람은 얼마나 하나님이 사랑하시기에 그런 기적을 체험하는가 하면서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또한 나는 내가 계획한 일들이 내 뜻대로 되지 않고 계획대로 풀리지 않을 때도 세상적 육신적으로 잘 나가는 사람들을 정말 부러워하였다.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며 사업을 잘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랬었다.
예수 잘 믿으면 나는 그렇게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주님을 잘 섬긴다고 해도 일이 꼬일 뿐 풀리지가 않았다.
나는 혼돈에 빠지고 신앙이 점점 혼미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일은 목사가 돼서도 마찬가지였다.
교회를 개척할 때 기도하기를 “하나님, 이제 제가 개척을 합니다. 제가 하나님 일 할테니까 하나님은 제 일 책임져 주세요.”라고 하였다.
내가 원하는 나의 일이란, 바로 나의 자식들, 나의 모든 육신적인 삶을 책임져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르고 신앙생활을 했으며, 이처럼 소경과 같은 자로 목회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모르니 내가 당하는 환난과 고난에 대하여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복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닫혔던 내 눈이 떠졌다.
막혔던 내 귀가 열린 것이다.
나는 복음을 알지 못했기에 제대로 전할 수도 없었지만, 예수 믿으라는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그런 벙어리와 같았다.
그런데 묶였던 내 혀가 풀리고 입이 열리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당한 고난의 의미가 너무도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 의미를 깨닫는 순간, 무릎을 쳤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이요 뜻이었으며, 내가 그 언약의 길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나는 답보 상태에 있던 나의 믿음의 눈이 위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동안 나는 만물 안에 갇혀서 땅의 것에만 천착하며, 목회를 해도 땅의 것으로 보상 받으려는 나의 근시안적 신앙이 이제는 마치 인공위성을 실은 로켓이 땅을 박차고 올라가 대기권을 뚫고 하늘 위로 올라가듯 나의 믿음의 눈이 만물 위, 창세전의 세계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
나는 그래서 지금 형통하다.
세상에 속한 그 무엇에도 미련이 없다.
나는 세상에 매이거나 묶인 자가 아니라 오직 주의 손에 묶여 있는 자로써 주의 손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
오늘도 임마누엘 주님께서 여기까지 나를 도우시는 에벤에셀로 역사하심을 믿으며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돌려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게 주신 은혜를 다시금 주님께 돌려 드리나이다.
다윗은 주님께 받은 것을 다시 주님께 돌려드린다고 고백합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음을 믿은 다윗의 고백입니다.
(대상 29:12-14)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주님...
영광을 받으소서.
높임을 받으소서.
홀로 찬양을 받으소서.
주님이 주신 그 영광을 다시 주님께 돌려 드리오니 그 영광이 주께로 말미암았음을 고백합니다.
나를 형통케 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오니 받아주소서.
나로 나 되게 하신 주님을 사랑합니다.
죽었던 나를 십자가의 은혜로 살리사 아들의 생명을 주시고 자녀 삼아주셨사오니 나는 무지하고 아무 것도 아니지만, 불가능을 가능케 하신 능치 못함이 없으신 주님을 이 시간 두 손 높이 들어 찬양하오니 영광 받으소서.
할렐루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