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동의 연혁 (仁同의沿革)
1. 인동의 연혁 (仁同의沿革)
♣ 우리 인동 지방의 연혁을 알기 위해서는 아득한 옛날로 그슬려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유물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신석기시대(BC 3000)의 유물로 보여지는 인동 입석(괘혜암)과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유물로 생각되는 고인돌(지석묘:支石墓) 이 지금의 임수동 (산219-4번지 실트론 공장 내)에 6기가 남아 있다. 그리고 구평동 공영 개발 지구 내에는 남방식 고인돌 2기가 택지 개발로 없어졌다. 이 지석묘는 낙동강 강변에 산재해 있는 다른 지방의 지석묘와 같이 선사시대 떄 (B.C 7세기)것으로 추정되며 상당한 집단 세력이 인동 지방에 거주하였음은 경북 대학 박물관 논문에 충분히 고증(考證)되고 있다.
♣ 신라(新羅)이전 삼한 시대(三韓時代)때는 (A.D 5세기경) 진한(辰韓)에 속하였으며 진한의 북동부 12소국 중 (기저국(己抵國), 불사국(不斯國), 근기국(勤耆國), 란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 염해국(冉奚國), 군미국(軍彌國), 여담국(如湛國), 호로국(戶路國), 주선국(州鮮國), 마연국(馬延國), 사로국(斯盧國), 우유국(憂由國) 군미국(軍彌國)에 속했으며 지금의 금성골 이 왕의 도읍지로 추정한다. 이 사실은 사학자 천관우 씨의 “가야사 연구”와 1998년 대구 대학 박물관에서 발굴한 황상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 등으로 속속 밝혀지고 있다.(사로6촌이 병합하여 사로국(斯盧國)이 되고 또 다른 소국들을 병합하고 가야국을 병합하여 신라를 건국하였다)
♣ 언제인지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군미국 은 신라에 흡수되었으며(신라11대 조분왕 (230-247)대로 추정한다) 삼국 통일(676년)이후 제31대 신문왕5년(685년) 사동화현(斯同火縣) 이라 부르다가 제35대 경덕왕 16년(757년)에 수동현(壽同縣)으로 고쳤다. ♣ 경덕왕 때?(742-764) 다시 인동현(仁同縣)으로 고치고 별호를 옥산(玉山)이라 하였다.
♣ 고려 제8대 현종9년(1018년) 에 상주목 경산도호부(尙州牧 京山都護府 약칭 경산부, 지금의 성주)의 속현 이 되었다.
♣ 고려 제34대 마지막 왕 공양왕2년(1390년)인동현 에 감무(監務)를 두고 약목현을 속현으로 하였다.
♣ 이조 제3대 태종13년(1413년) 인동현 에 현감(縣監)을 두었다. 이때 인동현 의 호구 수는 657호에 인구는 4551명이었다.
♣ 임란 이후(1592년)이조 제14대 선조37년(1604년) 천생 산성이 수축되면서 선조38년(1605년) 인동 현이 인동 도호부(仁同 都護府)로 승격되고 부사(府使)를 두면서 조방장(助防將=지역 방위 부사령관 정도, 지역 방위 사령관은 영남 관찰사 ?) 을 겸직시켰다. 선조41년(1608) 조방장 제도를 폐지 함. 이때에도 약목현 을 속현으로 두었다.
♣ 이조 제26대 고종32년(1895,6,23음력 윤5월1일) 인동부 는 인동 군으로 격하되어 대구부에 소속되었다. 이때 인동 군은 9개 면으로 편성되었다. (읍내면, 북면, 동면, 석적면, 장곡면, 기산면, 문량면, 북삼면, 약목현)
♣ 고종 33년(1896.8.6일) 인동은 경상북도 인동 군으로 되었다.
♣ 고종 34년(1897년) 조선이란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고쳐 불렀다.
♣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은 국권을 잃고 일본의 식민지 통치로 넘어갔다.
♣ 1911년 인동 군청을 인동 읍내면 에서 경부선 철도 의 편리한 교통 문제로 약목으로 옮겼다.
♣ 1914년 3월1일 인동군 9개 면과 칠곡군을 병합하여 칠곡군(漆谷郡)으로 하고 읍내면(인의, 황상, 진평, 임수, 구평, 신동, 시미)과 북면 (양호, 거의, 옥계, 구포, 금전)을 합하여 인동면(仁同面)이 되었다. 이때 군청 소재지를 왜관으로 옮겼으며 인동 땅이던 성수동이 산동 면으로 되었다.
♣ 1945년 8월15일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 1950년6월25일 - 1953년 한국 동란 을 겪음.
♣ 1960년4월19일 학생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인 이승만 정권 이 무너짐.
♣ 1961년5월16일 군사 혁명으로 박정희 가 정권을 잡음.
♣ 1977년2월15일 인동면 과 구미읍 을 합하여 경상북도 구미 출장소로 됨.
♣ 1978년2월15일 구미시로 승격함.
♣ 1979년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로 공화당 정권 무너짐.
♣ 1995년1월1일 구미시와 선산군 을 합하여 구미시로 현재에 이름.
1424년에 부사로 격을 높이고 조방장을 겸직하게 하였다는 사실은 1698년 인동 부사 최문징이 발간한 옥산지에 기록된 사실이며 선조37년(1604)도호부 겸 조방장을 두었다는 사실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중종25년(1530)발간) 실린 사실인데 이 두 이야기는 가늠 하기가 힘든다. 다만 이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만 기록한다.
<용어 해설>
고증(考證)= 사물들의 시대, 내용, 가치 등을 옛 유물에 근거하여 옛날 증거를 세워 이론적으로 증명(해명)함.
감무(監務)= 고려말 조선 초에 현령(縣令)을 둘 수 없는 작은 현에 둔 우두머리.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 인동읍지, 칠곡군지, 성주군지, 구미사료집, 대구대박물관 발굴조사 발표문,
가야사 연구, 옥산지,)
2. 리동(里洞)의 명칭 생성과 변천 과정
선조38년 (1605년) 인동이 도호부로 되면서 인동 소재지는 부내면(府內面) 이라 하고 지금의 양포동 지역은 북면(北面)이라 했으며 동면, 석적면, 장곡면, 기산면, 문량면, 북삼면, 약목현 등이 있었으나 여기에서는 지금의 인동 지역인 리 동 만 언급한다. 고종32년(1895년) 인동 군으로 격하되면서 1896년에 부내 면을 읍내면(邑內面)으로 고치고 북면은 그대로 두었으며 마을의 명칭도 많이 변경되었다. 동 단위의 마을을 방(坊), 리(里), 촌(村), 동(洞)으로 변경되었다.
① 인동 도호부 부내면(府內面)이 관할하던 마을은 (1605년)
(동부) 신촌안태리(新村安泰里) 일명 마적동(馬迹洞) 지금의 인동 중학 서편
옥산리(玉山里) 지금의 옥산 밑.
(남부) 도세리(道世里) 지금의 도세(구획 정리 지구)
벌양전(伐羊田) 지금의 운수 연수원 밑, 양원 역에서 말을 먹이던 목장, 천민들의 마을
지소촌(紙所村) 도세(주공아파트자리) 딱밭꼴(종이를 만들어 관가에 납품하던 천민들이 살든 마을)
진평리(眞坪里) 지금의 진평3통
역촌리(驛村里) 지금의 강동 교회 부근(진평1통)
남산리(南山里) 인의3동(남산). 명종9년(1554)인동현 인선방(仁善坊)에서 여헌 장현광 출생.여헌 문집)
중리(中里) 지금의 인의1동(관아가 있던 마을, 구 성당 뒤편 강동 주택 부근) 중리를 일명
인의방(仁義坊) 이라고도 함.
연복리(延福里) ?
석남촌(石南村) ?
(서부) 서대촌(西大村) ?
임수촌(臨水村) 임수동
장암촌(壯岩村) 지금의 임수동 여차정이 있는 마을, 여차정 옆에 장암이 있다.
부지암촌(不知岩村) 동락 서원 뒤편
옥랑촌(玉郞村) ?
(북부) 검성촌(劍城村, 儉城村) 지금의 검성골
황상촌(凰顙村) 지금의 황상동(黃桑洞) 凰 암 봉황새 황, 顙 이마 상,
(왜놈들이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동명의 한자를 바꾸었다)
② 인동 도호부 북면(北面)이 관할하던 마을 (1605년)
양촌리(陽村里) 지금의 양말
증동촌(甑洞村) “ 시루꼴
거리곡(巨里谷) “ 거리실
진가곡(眞價(?佳)谷) 진골 (현 금오공대 자리)
문림촌(文林村) 무이미 (옥계1동 안 마을)
가락촌(嘉樂村) 가라골
온족동(溫足洞) 옴지꼴 (쓰레기 매립장) 버들가지로 고리나 상자를 만드는 천민들이 살든 마을.
정산촌(鼎山村) 솔뫼
가곡촌(加谷村) 가실 (금전1동)
와천촌(臥川村) 와래 (금전2동 교회 있는 마을)
10개마을 참고문헌 玉山志
③ 인동군 읍내면(邑內面)이 관할 하던 마을은 (1896년)
중리동(中里洞) 관아가 있는 마을을 중리동 이라 하였다 구 성당 뒷편(강동주택)
교동(校洞) 향교가 있던 마을 校里라고도 함. 인의2동
남산동(南山洞) 지금의 남산(인의3동)
구평동(九坪洞) 구진벌(舊陣伐) :임란 때(1592년)장사진 장군의 전쟁터로 추정됨.
화암동(火岩洞) 불바우
토동 (吐洞) 도토꼴 무지개=옛날에는 수직꼴(水直)이라 불렀던 것이 무지개로 변천되었 다.
외신동(外新洞) 지금의 신동
내신동(內新洞) “
역동 (驛洞, 驛里) 진평1동
구제동(救濟洞) 진평2동 (현 강동 교회는 처음 구제동 교회로 설립됨 1901년3월)
진평동(眞坪洞) 진평3동
황상동(凰顙洞)
검성동(儉城洞) 옛 부족국가인 군미국의 도읍지
임수동(林水洞 (臨洙)
우담동(牛潭洞) 갓등
시미동(侍美洞) 제3공단 조성으로 없어짐
어봉동(御鳳洞) 은 뒤에 어은동(魚隱洞)으로 개칭되어 인동읍 지도에는 등재되어 있으나
읍내면 관 활에는 없음.
④ 인동군 북면이 관 할 하던 마을은 (1896년)
양호동(陽湖洞) 양말
증 동 (甑洞 :會洞) 시루꼴
하 동 (下洞) 빈수꼴
진 리 (眞里) 진가곡
용수동(龍首洞) 용수꼴
명 동 (明洞)
거 의 (居依, 居衣, 居義) 거리실
문림동(文林洞) 무이미
온수동(溫水洞) 따뜻한 지하수가 솟는 마을(온천수를 개발하다가 경제성이 없어 실패를 했다)
옥계동(玉溪洞) 옥계 교회가 있던 마을(4공단 조성으로 마을이 없어졌다. 필자의 고향, 1939-1956 까지)
정산동(鼎山洞) 솔뫼
온조동(溫造洞) 옴지꼴 (쓰래기 매립장)
가촌동(佳村洞) 가라골
가곡동(加谷洞) 가실
구복동(九卜洞) 금포 국교가 있던 부락, 분교로 되었다가 분교도 없어짐
와천동(臥川洞) 와래
⑤ 칠곡군 인동 면으로 되었을 때 (1914년)
인의동(仁義洞) 중리동, 교동, 남산동 을 합함.
구평동(九坪洞) 구진벌, 불바우, 도토꼴, 을 합함.
신 동 (新洞) 외신동, 내신동을 합함.
진평동(眞坪洞) 진평동, 구제동, 역동 을 합함.
황상동(黃桑洞) 황상동(凰顙洞), 검성동 을 합함.
임수동(臨洙洞) 임수동(林水洞), 우담동(牛譚洞)을 합함.
시미동(侍美洞) 구미 제3공단 조성으로 마을이 없어짐.
양호동(陽湖洞) 양호동, 증동, 하동을 합함.
거의동(居依洞) 거의동, 명동, 진가동, 용수동을 합함.
옥계동(玉溪洞) 문림동, 온수동, 옥계동을 합함.
구포동(九浦洞) 구포동, 증산동, 송상동, 온조동, 가촌동(가라골)을 합함.
금전동(金田洞) 가곡동, 구복동, 와천동을 합함.
※ 우리 나라에서 성(性)을 사용한 시기는 ?
고구려 419-491 장수왕 때
백 제 346-376 근초고왕 때
신 라 540-576 진흥왕 때
일반적으로 온 국민이 성을 가진 시기는 고려 문종 9년(1055)부터 이다 이 때부터 는 과거에
응시하려면 성이 없는 사람은 응시 할 수 없었다. 노비나 천민은 조선조까지 성이 없었다.
※ 오복(五福)이란 ?
1. 壽 수하고
2. 富 부유하고
3. 康寧 건강하고 걱정이 없는
4. 收好德 덕을 쌓고
5. 考終命 편안히 죽음
※ 인동은 이렇게 변해 왔다.
군미국(軍彌國)(진한에 속함 4세기) →
사동화현(斯同火縣)(685) →
수동현(壽同縣)(757)→
인동현(仁同縣) 별칭 옥산(玉山) →
경산도호부에 속현(1018) →
인동현(감무)(監務)(1390)
인동현(현감)(1413) →
인동도호부(仁同都護府)(1605) →
인동군(仁同郡)(1895) →
일제(1910) →
인동면(仁同面)(1914) →
해방(1945)→
구미출장소(1977) →
구미시(龜尾市)
4. 인동은 군미국(軍彌國) 이었다.
인동 지역에는 군미국(軍彌國)이란 부족국가가 있었다.
진평동에 남아 있는 인동입석(仁同立石 문화재 자료 제184호, 신걸이바위)은 그 축조시기를 결정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으나 대개 신석기 후기인 B.C 3000년 전으로 추정하며 임수동 산219-4번지에 남아 있는 6기의 고인돌(지석묘(支石墓) 도 거의 같은 시기의 것임을 학자들의 논문에 의해 고증이 되고 있다. 선사 시대부터 낙동강변 왜관, 석적, 인동, 선산, 도개, 지역으로 이러한 지석묘가 분포되어 있음은 이 지역에 많은 집단들이 선사 시대부터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할머니의 할머니 또 그 할머니가 삶의 터전을 꾸려 나왔던 땅. 수 천년을 거슬려 올라가면 그곳엔 찬란한 빛이 살아 숨쉬고 있다. 수렵과 농경 생활을 하다가도 초근목피(草根木皮)로 허기진 배를 채웠던 이 땅의 아버지 와 어머니들 그들은 가난 속에서도 여유로 움을 잃지 않고 지금의 구미시 황상동 일원에서 기개를 떨쳤다. 일찍이 이 땅의 조상들은 황상 벌에 나라를 세워 백성을 통치하고 농경 생활을 이어 갔으니 바로 군미국(軍彌國) 이었다.
(1) 군미국의 실체
기원을 전후해 오늘의 경상도 지방에는 진한(辰韓)의 12소국이 분포돼 있었다. “삼국지” 위지 변진 전에서 흥미로운 것은 軍彌國 이다. 사학자 일본인 점구방지진(點具房之進) 과 李丙燾(이병도) 千寬宇(천관우) 등은 지명의 유사성과 소국 배열 순서 고분군의 소재지 등을 통해 진한 12소국의 위치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천관우(千寬宇)는 군미(큰뫼) 를 해발 977m 의 금오산으로 파악하였으며 그 동쪽에 위치한 인동 지방을 진한 계의 군미 지역으로 추정했다. (참고문헌 :천관우(千寬宇)의 가야사 연구 P79 , 97) 군미국은 인동 지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다가 신라에 편입됐다. “삼국사기” 34 지리 성산군 조에는 사동화현(斯同火縣)을 수동현(壽同縣)으로 고쳤다고 하였는데 같은 내용을 고려사 56 지리(1) 상주목 인동현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인동현조 외에 각 읍지를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인동 지방이 신라 영토에 편입된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에서 눌지왕(417-458) 때에 오늘의 구미 도계면 지방으로 고구려에서 불교가 들어온 사실과 소지왕 (479-500) 때에 국왕이 오늘의 선산 지방인 일선군을 들러 이재민을 위문하고 장정을 징집하였다는 사실에서 이 시기에 낙동강 중상류 지방까지 신라의 영향이 미친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군미국은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 인동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 나갔 던 부족국가 이였음에 틀림없다.
(2) 수난 당한 황상 고분군(黃桑古墳群)
군미국은 황상 고분군만을 남겨 두고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유일하게 군미국의 실체를 어느 정도 밝혀 줄 황상 고분군은 일제 치욕 때 한차례 수난을 당했다. 그 후로 도굴 군들에 의해 봉분이 처참하게 파 해쳐졌다. 조상들이 남겨 준 유일한 문화유산이 일인들에게 유린당하고 다시 한번 우리들의 손에 의해 수난을 당한 것이다.
황상동은 70년대 들어 급격히 변모를 거듭했다. 구미 공단이 들어서고 부터 논밭이 공단과 택지로 변했다. 따라서 1,500여 년 전에 존재했던 군미국의 실체를 파악하기란 어렵다. 단지 현재 생존해 있는 이 지역 출신들의 입을 통해 군미국의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3) 드러나는 軍彌國의 위용
일제에 의해 유린당했던 황상 고분군은 1962년8월 들어서 그 실체를 들어 낸다.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황상동 뒷산의 낮은 구릉에 있던 3기의 고분을 23일간 발굴해 장신구(裝身具)인 금동제관식(金銅製冠飾 :머리에 쓰는 관모의 일종), 금동제이식환(金銅製耳飾環 :귀걸이의 일종) 도은철대(渡銀鐵帶:허리띠의 장신구), 금동제이(金銅製履:신발), 적은 칼, 마구 류 인 철구, 금구, 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경대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사람의 뼈도 발굴되었으나 만지면 가루가 되어 채취하지 못했다. 황상 고분군은 1962년 3기의 석실분 발굴 이후 35년만에 대구대학교 박물관 측에서 종합 발굴에 들어간다. 대구대 박물관 측은 1998년7월10일부터 11월11일까지 구미 황서 초등학교 예정 부지 내 문화 유적 발굴 조사에 들어가 113기의 고분을 조사 확인했는데 목곽묘 42기, 석곽묘 68기, 대부단경호 등 토기 493점, 방추자(실을 뽑는데 쓰는 기구) 12점, 등 1000여 점이 출토되었다. 시기를 달리하는 (4세기말에서-6세기초) 유구들이 중복되어 나타나고 출토 유물도 다양해 묘제의 변화 양상 및 토기 변천 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 한 자료가 될 뿐 아니라 군미국의 실체를 밝히는데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할 것이다. 유물은 대부분 산사태로 교란되고 도굴된 상태였으나 한 무덤에서 단야구 집게와 망치가 출토. 매장 주체의 직업이 대장장이였음을 추측케 했다. 그러나 이번에 발굴된 집단의 출토 품 중에는 철기를 제외한 금속류는 매우 희귀해 세환이식 2점, 외에는 금제, 은제, 동제와 재갈을 제외한 마구류의 출토 예도 전무했다. 대구대 박물관 측은 발굴 조사 지역 북쪽에 조성된 중대형 봉 분을 가진 주체 세력과는 구별되는 기층 집단의 묘역으로 판단했다. 이번 발굴은 4세기 말경에서 6세기 초경까지의 묘제 변화 양상과 토기의 변화 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뿐 아니라. 인동 지방에 뿌리를 둔 고대 군미국의 실체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증거를 학계에 제공했다. 미 발굴된 황상 고분군 능선 아래 우측에는 지표 상에서 30-50cm 를 파 내려가면 깨진 도자기와 거의 원형의 모습을 지닌 도자기 뚜껑 등이 출토되곤 한다. 현재 이 지역은 마을 주민들이 옥수수 등을 심기 위해 땅을 일구고 있다.
이상 발군된 유물들을 종합적으로 볼 때 이 지방에 고분의 형성 시기와 상당한 지배 계층이 아니면 가질 수 없었던 귀중품 이 출토됨은 부족국가의 지배 계층의 무덤이었을 것으로 단정을 내리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4) 빼앗긴 지명을 찾자.
황상 고분군은 명당 중 명당에 위치해 있다. 한낮에는 빛이 잘 들고 마사토 층으로 무덤 조성에 유리했다. 현재의 지명 황상(黃桑)은 일제 치욕 때 이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겠다는 일인들에 의해 개명된 지명이다. 원래는 황상(凰顙)으로 “뽕나무에 앉은 봉황” 의 뜻이었는데 일인들이 “황금색의 뽕나무” 로 해석을 격하한 것이다.
황상 고분군은 봉황이 알을 품고 날개를 펼친 형상을 하고 있다. 황상 고분군 일원에는 높이 2m 너비 1.5m 가량의 둥근 화강암들이 지상에 노출돼 있는데 마치 알이 흩어져 있는 것 같다. “군미국 백성들은 다산(多産)과 부족의 번영을 기원해 묘지를 조성한 것 같다. 황상 고분군은 황상 벌을 사이에 두고 봉두산 과 마주하고 있다. 봉두(鳳頭)란 “봉황의 머리” 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봉두산 은 봉황의 수컷이었고 황상은 봉황의 암컷으로 군미국 백성들은 그 사이의 평원에서 농경, 수렵,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일인들은 이 지역에서 훌륭한 인물이 난다고 하여 지명까지 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5) 군미국의 가상도
군미국은 어떠한 모습을 지녔을까. 특이한 것은 군미국의 중앙에 황상 고분군이 마련됐다는 사실이다. 군미국 백성들은 아마도 풍수 지리학에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군미국의 화복과 번영을 기원하며 조상의 묘를 명당 중 명당에 조성한 그들은 한때 인동 지역을 중심으로 맹위를 떨쳤음을 짐작케 한다.
(6) 금성골
현재의 황상동 금성지 부근을 검성골 이라 불렀다. 금성지 부근은 천혜의 요새였다. 양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성의 역할을 했고 골의 좁은 입구는 적을 차단하기에 적당했다. 물이 많고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는 이곳에 군미국의 왕이 거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검성지의 “검” 은 “왕” 의 상징적인 형태소로 해석된다.
(7) 진골
검성골 아래를 진골이라 불렀다. 현재의 인의 주택 부근의 진골은 군미국의 지배 계층이 상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삼국사기” 잡지 권 7 직관 上에는 “신라의 벼슬 이름에서 ”이벌찬“ “이척찬” “잡찬” “파진찬” “대아찬” 이란 벼슬이 있는데 여기까지는 오직 진골만이 받게 되고 타성은 못 받는다고 적었다. 현재까지 사람들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인의 주택 부근의 “진골”은 군미국이 신라에 합병된 후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라의 진골 중 한사람을 군미국에 파견하여 이곳을 통치하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진골에는 이주 단지가 들어서기 전 까지만 해도 큰 우물이 있었다. 주민들은 현 경로당 부근 놀이터에 있었던 우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물이 철철 흘러 넘쳤으며 나무뿌리에서 내 뿜는 감로수 와 같이 맑았다고 했다.
(8) 화동골과 옥터
진골에서 더 내려오면 화동골과 옥터가 있었다. 지금의 인동중학교 와 인동시장 부근인데 이곳에서는 주로 군미국의 백성들과 병사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화동골에 대한 내력은 전해 내려오고 있지 않으나 옥터에 대한 내력이 구전되고 있다. 인동 시장 부근의 옥터 에는 편편하고 넓다란 바위가 있었다. 논 한가운데 있었던 바위 주변이 옥터 라는 게 주민들의 주장이다. 옥터 부근에서는 여러 구의 인골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곳에 옥터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주변을 병사들이 거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9) 성황지와 어은골
현재의 사거리 부근을 일컬어 “성황지” 라 불렀다. 성황지 에서 옥계동 쪽으로 2Km 가량을 일컬어 “어은골” 이라 칭했다. 성황지 에는 크다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 한가운데는 봉분 처럼 불룩하게 솟은 땅이 있었다. 현재 델코 부지에 있었던 “성황지”는 공장이 들어서면서 그 실체가 들어났다. 주민들은 이 연못 한가운데 솟은 땅을 고분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곳에서 주춧돌과 기와장이 발견되면서 이곳에 누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성황지는 아마도 군미국의 지배계급이 풍류를 즐겼던 곳으로 추측된다. 어은골에는 예로부터 주막이 많았다. 이곳은 옛날 한양으로 가는 큰길이었다. 이곳에는 그래서 주막으로 상권이 발달했으리라고 생각된다. 돌 고개 조금 넘어서면 대원군의 척화비가 있다. 또 이곳은 고려 말 부터 조선 중기까지 초원(草院)이라 하는 출장하는 관리들의 숙박소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동국여지승람(조선 9대 성종 때(1495년대)에는 기록이 있으나 그로부터 230년 후에 간행된 여지 도서에는 초원이 없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영조(1725년) 이전에 이미 폐원 되었 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