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신앙 내용의 독특성"
성경은 비록 인간들에 의한, 인간의 것들을 그 근거와 형식으로 기록한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 인간들의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런 면에서 성경은, 곧 그 성경이 자체적으로 증언하는 것을 종합하면, 비록 비유적이고 상징적 표현들이긴 해도, 곧 '창조주가 피조물들, 즉 존재인 그 사람들에게 주는, 그 창조주의 말이고 그 뜻이며, 역시 그 말들의 기록이다. 굳이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그 의미가 아주 깊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니 이런 표현으로는 부족하고, 역시 '우리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 창조주가 피조물인 인간들에게만, 굳이 이런 말을, 그것도 기록으로, 역시 그 인간들을 통해 남기는 이유는, 역시 그 성경에 의하면, 오직 그 '하나' 곧 '그 창조주를 알고 역시 그와 하나 되게 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의 이해다.
먼저 이해되어야 하는 그 하나의 관건은, 곧 그 창조주는 그런 피조물들, 그 중에서도 우리 인간들과 같은, 그런 언어 곧 '말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 뜻은 분명 '우리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이해다. 물론 이 때 '없다'는 의미는 곧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그런 말이 없으면 그나마라도 거의 서로 간에 소통을 할 수 없는 존재들인데 비해, 그 창조주는 그런 물리적이고 존재적인 소통의 도구가 전혀 필요 없는, 그러기에 우리 곧 존재들과는 아예 차원이 전혀 다른, 그래서 굳이 사용하는 표현으로, '영원'이라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시 그런 면에서 그 창조주의 피조물들 중에서 굳이 인간들만 이런 소통의 도구가 주어진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그것도 그런 우리적 입장에서 보면, 그 창조주의 일종의 섭리이고 예정이기도 하다.
곧 개인적인 이해로는 짐승들과의 차이도 바로 그것이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가 아는대로, 물론 짐승들에게도 그런 서로가 소통 할 수 있는, 일종의 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리나 제스츄어는 있지만, 그것을 인간들처럼, 생각을 담아 표현하는 그 말, 그리고 그 말을 표현하기 위한 기록은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나름의 생각 없이 그저 본능적으로 표현하는 소리나 몸짓이 그 전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성경의 비유적 표현으로, 사람을 때로 짐승이나 동물 등으로 표현할 때의 의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상징과 비유적이겠지만, 그런 면에서 성경이 말하는 짐승이나 동물들은,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생각(영)없이, 그저 본능적으로 표현하는 말 곧 소리만 있는 존재'들이다. 영이 없는 몸 만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좀 더 확대해서 생각해 보자면, 그런 피조물인 인간의 모든 말이나 기록들은, 그런 동물이나 짐승들과는 분명히 다르게, '생각이, 다르게는 '그 의미'가 '그 말에 담긴'다. 즉 우리 인간들에게 소통이란, 실은 그 말 자체라고 하기 보다는, '그 말에 담긴 생각 곧 의미를, 서로 나누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짐승에게는 없는, 그 생각 곧 그 의미가 어디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냐' 하는 것과 '그 생각을 나누는 방식 중에는 글 곧 기록이 있는데, 그 기록에는 그야말로 무수한 내용들이' 담긴다. 그리고 이제는 문명의 발달로 그런 기록은 하루에도 수 천 권이 넘는 문서들로도 만들어진다. 문제는 그 서로 다르기에, 만들어지는 그 인간들의 그 말들을 근거한 기록들이, 과연 '무엇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들의 눈에는 그 기록 곧 문자 곧 그 말들을 근거한 표현들이, 먼저 보이기에, 그 안에 진정으로 담긴, 어떤 면에서는 그 기록을 남긴 사람들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는, 아니 거의 하지 못한다고 해야 하는, 그 기록의 '원리적이고 본질적인' '생각(영)'이 있다'고 할 수 있다는 나름의 이해다. 바로 그것이 곧 '그 창조주에 의한 그 피조물'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생각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은 그 전체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아주 '작은 파편들'이라고 보인다. 그러기에 무슨 말, 곧 글이든지 그 내용 속에는, 본인도 모르게 '파편적 요소들이 담긴다'는 이해다. 그것은 굳이 인문학적인 것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글이라는 것들 속에는 다 마찬가지다. 곧 생각 없이 쓰는 글은 없기 때문이다. 곧 수학에도 담긴다.
문제는 그것들을 굳이 파편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분명한 것이 그것을 가진 인간들이지만, 그 전체 곧 '그 하나를 그 원리로 이해하지는 못한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그것이야말로 '그 창조주의 예정이기도 하다'는 생각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아예 그런 인간들의 육신적이고 존재적인 삶에는, 그런 것이 전혀 문제도 지장도 없다. 다만 자기들이 분명 그 파편적인 것들을 통해, 서로 소통한다고는 하지만, 정작 그 전체적 실제인 곧 '그 하나인 그 창조주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가 없고, 그것이 '이 땅을' 사는데, 별 문제도 없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에게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 곧 종교를 통해서 다. 유일하게 종교는 바로 그것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물론 건드리긴 하지만, 정작 모르기는 그 종교도 마찬가지다. 곧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들 중에, 시대나 상황에 따라, 그 문제를 지적하고 안다고 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물론 그런 사람의 그런 지적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배척을 당하기도 한다. 그 이유가, 모르긴 하지만 왠지 캥기는 것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왜 그런 줄은 모르기' 때문이다. 역시 이미 언급한대로, 그 인간들에게는 자신들이나 서로 간에, 알게 모르게 그 파편이 들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는 이해다. 그 파편들을 서로 연결하여, 그 내용 곧 그 하나를 진정으로 알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사람 곧 그리스도 즉 성령 역시 진정한 그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것을 먼저 알았던, 옛 사람이 말하기를 '구술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한 것이라는 의미다.
그런 면에서 성경도 예외없이 '그런 인간들에 의한, 인간들의 기록'이기에 분명 그 창조주의 뜻을, 곧 그 내용을 담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 형식은 그렇게 파편적으로 구성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기에 '성경은, 읽는 사람이 그 원리를 가지고 꿰어야 비로소 성경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 원리 곧 전체적 내용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읽으면, 성경으로 윤리도덕을 강조하여, 이 땅의 고상한 삶을 그것으로 착각하거나, 아니면 무당이 되거나, 그래서 결국은 그 성경이 말하는 그런 '우상 숭배가 된다. 곧 사탄 마귀 귀신이 되기도 한다. 바로 그 대표적인 존재들이, 유대인들이고 그들 중에서도 바리새인들이었다고 해야 한다. 그러기에 당시로서는 가장 바른 삶을 살았던 모범적 존재들을 향해, 예수는 '독사의 자식'이라고 했던 것이다.
하긴 그 예수도 비유로 그런 '독사(뱀)'였다는 자기 인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파편들을 꿰어야만 비로소 이해되는, 일종의 '선악과의 비유'다. 역시 그런 독사 중에 독사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그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고 자기를 자랑하던 바울이, 그렇게 그 독으로 죽이는 독사에서, 예수처럼 자기가 죽어, 그 독으로 오히려 살리는, 그 신앙 내용의 핵심 원리이기도 하다는 사실, 그 아이러니를, 일반 사람들이 어찌 쉽게 이해 할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성경은 바로 그런 모습을 가리켜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단정하고, 그럼에도 '그 하나님이 한다'고 확실하게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도 역시 '예정'이라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때와 역시 '시대마다의 그리스도의 등장'이다. 성경은 그 이야기를 담았다.
그런 면에서 성경은 그저 읽는다고 읽혀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읽힌다. 그러나 그렇게 읽는 사람에게는, 그 파편적인 것들만 읽혀,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그 성경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곧 저주와 심판에 있기도 한다. 그런 저주나 심판은 우리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상상하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즉 성경이 그렇게 전체의 뜻 곧 의도대로가 아니라 그렇게 파편적으로 읽히는 것 자체가 저주이고 심판이기도 하다. 곧 그 짐승의 자리에 그대로 머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옥, 곧 그 땅에 갇힌 것이다. 그것이 은혜인 것은, 바로 그런 자에게만, '그 성령 곧 그 말이 들린다'는 것이다. 그 특징이 먼저 자기가 바로 그런 존재인 것을 아는 것으로 시작한다. '구원의 서광'이다. 비로소 '짐승에서 인간'이 된다. 구원이다.
예수가 말하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다'는 표현, 곧 그 예수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그런 병든 자를 위하여 왔다'는 것과 역시 그 예수의 표현대로 곧 진정한 복음이 전파되면 나타나는 현상으로 증언 되는 곧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상징과 비유적 표현들의 의미도, 역시 다르지 않게, 마찬가지의 의미인 것이다. 성경은 먼저 맹독이다. 그 독은 우리를 그런 병든 자로 만들거나 아니면 죽인다. 그러나 그 병듦과 죽음은, 다시 진정으로, 곧 짐승에서 곧 인간 다운 인간으로 살리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 독으로 만든 해독제가 곧 그 복음'이다. 곧 '진정한 구원은, 그렇게 짐승으로는 죽고 다시 진정한 '그 창조주와 하나인 인간'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추신: 다시 나름 편집하여 쓰고 나서 읽어보니 내가 읽기도 쉽지 않은 글이다. 감안하고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복음 전도 곧 설명이 그리 간단치 않기 때문이라고 변명 해 봅니다.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