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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초기 개념미술의 현황 : ST 전시를 중심으로
책상엔 백지가 놓여 있었다
휴지통엔 뭉쳐버린 더 많은 백지들이
눈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나는 내 안에 들끓는 마그마를
황홀하도록 백지에 쏟아붓지 못하고
벽돌 딱딱한 벽에 머리를 기댄 채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내 대신
의자가
책상의 백지와 마주 앉아 있었다
………………………………………
밖에는 끝없는 눈보라가
유리창을 눈의 깃털들로 덮으며 휘돌아가고
눈보라를 일으키는 힘의 날개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힘의 날개는 붕새의 날개여도 좋았다
………………………………………
의자 대신 내가
다시금 책상의 백지 앞에
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혀를 목구멍 속으로
삼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상에 백지가 놓여 있었다
펜이 놓여 있었다
- 최승호, 눈보라 중에서 -
우리 나라 196, 70년대 탈 평면 미술 중에는 의자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여럿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의자를 하나의 기호로 또는 상징적인 오브제로 보고 말문을 열려고 한다.
의자는 미술가에게는 작업하는 몸의 일부처럼 친숙한 오브제이다.
해서 그런지 그것은 여러 작가들에 의해 작품으로 다루어졌으며 개념미술의 원조인 죠셉 코수스(Joseph Kos
uth) 역시 그를 다양한 방법으로 재현 또는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초기 개념미술가들은 의자에 앉아서 미술을 탐구하는 글을 쓰는 대신 이를테면 의자라는
오브제를 제시했다.
미술의 개념추구를 언어나 이미지보다는 행위나 사물에 의탁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해서 나는 빈 의자를 작가의 외출 또는 그들의 언어적 개념활동의 부재의 징표로 보고, 더 나아가 안에서 들끓
는 생각과 밖의 눈보라를 각기 작가 내부의 표상 되지 못한 아이디어와 외부 미술계의 거센 자극으로 끌어다
놓아보았다. 결과적으로 본래의 詩意와는 무관한 해석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1. 말문 열기
1)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전환과 역동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196, 70년대의 우리 나라 현대미술을 점검하는
전시를 개최한 바 있다. 그 성과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로 이 전시는 그간 거대 흐름인 앵포르멜과 단색화 사이에
위치해서 학술적, 비평적 음지에 있었던 이들에게 제자리를 찾아주어야 할 필요성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현대미술사의 기술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앞으로 철저한 검증의 과제를 안고 있으며, 멀지도 않은
과거의 미술이 추상적인 흔적으로만 남아 있거나 한번도 평가의 기회가 없었던 작품들이 왜곡 속에 파묻히고
망각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보면 이런 제대로 보기의 노력은 만시지탄의 감이 있다.
이 글의 주제로 삼은 개념미술의 경우도 이제껏 그 범위와 성격을 규명하는 기본적인 논의도 없었으며 따라서
개별 작품의 수준을 가려보는 일 역시 제대로 시도된 적이 없다.
이 글은 이런 상황을 마주하여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과 대답의 결과물이다.
자연히 우리 미술사의 성장과 함께 앞으로 살찌워 가야할 시론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나는 비었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한정하지 않으면서 빈 의자의 이미지가 과연 타당한지를 탐구해
보려고 한다. 이제 더 이상 혀를 삼킬 수 없는 시인처럼 누군가는 빈자리를 메우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2. '실험미술'이라는 명칭
우리 현대미술에서는 1960년 중 후반부터 10여 년 사이의 오브제, 입체, 설치, 해프닝, 영화, 이벤트, 개념적
작업 등을 예외 없이 실험미술이라고 일컬어왔다. 또 이 시기를 역동, 격정, 도전, 반란, 전환 등 한결같이 충전
되고 열기에 가득찬 말로 수식해왔다.
그렇다면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고려할 것은 실험미술이라는 명칭의 타당성과, 그렇게 생산적이었던
시기가 그후의 미술에 넘겨준 유산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당대 미술을 실험미술이라고 부른 것은 그 당시부터 4 반세기가 지난 현재까지 거의 아무런 반대 없이 이어져
온 일이다.
몇몇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이일은 당시 이들을 모색과 실험으로 평가했고, 근 20여 년 후에 전시를 통해 이를 재조명한
윤진섭 역시 실험미술로 규정하는데 의의가 없었고, 최근 상재된 학위논문에서
김미경 또한 해당시기를 '실험미술의 보고'로 평가하고 있다.2)
그런데 실험미술이라는 말은 우선 그 의미가 극히 모호하고, 모든 시대의 새로운 미술은 실험미술이 될 특성과
자격이 있으며 또 일정 시기가 지나면 그 실험성은 약화되기 마련이기 때문에 특정 시기나 장르만을 실험미술
로 고유명사화 할 수는 없다.
여기서 일단 실험미술이란 '새로운 사고나 기술, 혹은 두 가지 모두를 탐구하는 것과 관련된 미술에 적용되는
불명료한 의미의 용어'라는 사전적인 정의와,
아방가르드와 동의어지만 굳이 나눈다면 재료나 기법 면의 확장에 치중한 것이 실험이라는 부연설명을 받아들
인다면3)
새로운 장르의 확산에 근거한 우리의 명칭부여는 이 시점에서 마땅히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당시의 탈 회화, 탈 평면, 또는 보다 크게는 탈 앵포르멜이라는 기류 속에 정도와 개인별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외부의 정보와 자극을 소화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미술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 실험미술이라는 명칭으로 고착
시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미술이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새로운 형식의 창조를 향한 '실험성'
이 전제조건이었던 외국의 경우와 달리 주어진 양식을 받아들인 우리의 경우에는 실험이 어떤 식으로 내면화
되었으며, 우리 나름의 집중적이고도 가시적인 형식 실험이 있었느냐가 판단의 잣대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그 실험의 유산이 단색화(모노톤)의 발생과 전개에 어떤 맥락으로 연결 또는 단절되었는지도 평가의
실마리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미술사가나 평론가들이 한결같이 실험미술이라는 말을 적용해왔으므로 여기서 당시 미술의 중심에
있었거나 옆에서 지켜본 몇 몇 작가들의 관찰을 참조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최명영은 실험정신이 우리 풍토와 갈등을 맺고 있다고 보고 그 이유로 기존질서와 시대적인 요청의 갈등,
세계와 지역의 갈등, 안정되지 못한 짧은 현대미술의 역사와 사회여건 속에서 새로운 흐름의 대세를 맞이하는
현실 등을 든바 있다.4)
또한 당시 상황을 아마도 가장 충실하게 전한바 있는
박영남은 발상지에서는 이미 유행이 지난 미술을 받아들인 우리 나라에서 이들을 실험으로 묶는 것은 무리이며,
회화에도 실험정신은 있었으므로 이들만 실험미술이라거나 평면은 추상이고 입체와 해프닝은 실험이라는
도식은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했다.5)
김구림 역시 전위미술에 대한 입장들을 밝힌 1975년의 한 좌담회에서 이런 포괄적인 분류에 반대하여 해프닝
이나 입체가 곧 전위는 아니라고 했으며, 해프닝의 최전방에 있었던
정찬승은 해프닝이 당시 우리에게는 맞지 않는 것을 몰랐다고 반성하고 외래사조에 휘말린 것을 부끄럽게 여긴
다는 고백을 한 바 있다.6)
덧붙여서 현 시점에서의 회고를 살펴보면
이승택은 실험이 일시적인 현상이었던 것은 시류에 편승한 증거라고 판단하고,
이건용은 실험미술은 바람직한 명칭이 아니라는 의견이고,
최태신은 당시는 누가 새 경향을 먼저 받아들이느냐가 관건이었다고 증언하며,
김용익은 당시 논리적인 토대 없이 새로운 것은 좋은 것이라는 시각으로 수용해서 결과적으로 스타일만 실험적
이었으며 백색주의로 바로 간 것이 그 증거라고 해서 부정적인 견해들을 제시한바 있다.7)
물론 이상 예거한 작가들만이 당시 상황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 해당 작가들까지 이 명칭에는 회의적
이라는 사실은 간과할 수는 없다.
다음으로 상황의 역동성에 관한 문제인데 당시 앵포르멜에 대한 포만감과 무력감은 새로운 미술에 대한 갈증을
고조시켰으며 우리 미술의 결점 중의 하나인 획일화를 벗어난 이 시기에는 다양한 시도와 변화가 추구되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최태신과 김장섭이 지적하듯이 이는 다양한 자극이 한꺼번에 들어왔고 정보수용의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자 수입과정의 혼란스러운 열기였다고 판단된다.8)
또 이런 분위기가 평면으로 돌아간 단색화의 등장과 함께 뚜렷한 유산 없이 급속한 퇴조를 보인 사정을 감안할
때 열기의 문맥과 성격은 일시적이고 따라서 실험정신에 투철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아래에서 논의될 개념미술의 경우도 그 한 예가 되겠지만 당시 미술에서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단적이고도 꾸준한 실험정신의 발현은 살펴보기 어렵고,
또한 단색화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도 연속보다는 단절로, 교류보다는 배타적인 영역구축 등 실험의 성과가 계승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당시 미술을 더 이상 한데 묶어서 실험미술로 부르지 말고 굳이 필요하다면 보다 포괄적이고 적절한
명칭을--예를 들어 더 좋은 대안이 나올 때까지 '탈 평면 미술'--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3. 196, 70년대의 개념미술
우선 우리 나라의 상황을 검토하기 전에 간략하게 개념미술의 정의와 특성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개념미술이란 용어 역시 실험미술이라는 말만큼이나 모호하고 광범위하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에서 개념적인 요소는 모든 작품에 개입되어 있지만 이것이 하나의 독립된 미술형식으로 등장한 것은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미니멀리즘이 퇴조를 보이면서이다.
미니멀리즘은 알다시피 작품의 아이디어와 그의 제작이 이원화되어서 작품 구상이 제작 전에 완료되는 미술
이다. 이때 아이디어 즉 개념이 작품성립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판단이 개념 자체가 작품이라는 생각으로
발전하여 독립된 장르로 성립된 것이 개념미술이다.9)
좀 다른 각도에서 보면 개념미술이 대두한 것은 60년대 초반부터 점증한 개념화된 미술의 결과인데 구체적
으로는 점점 더 자기 참조적이 된 모더니즘 미술, 물질화된 전통적인 미술의 시각적 요소에 대한 도전이 된
환원주의, 뒤샹을 필두로 한 미학적 내용에 대한 부정이 미술을 거의 정보로까지 몰고 간 경향,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품이 전시되거나 소통되는 방법 자체에 대한 의문을 작품의 내용으로 삼는 경향 등이 그
선행요인으로 거론된다.
개념미술의 주요 분야 역시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겠지만 비교적 포괄적인 것으로는
1)가장 주도적인 언어적 개념미술,
2)미술가의 역할을 형식적이고 구성적인 것에서 떠나 그 몸을 강조하고 사용한 것,
3)미술의 생산과 수용을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미술로 '민주화'한 것,
4)미술제도권 비판,
5)좀 다른 영역으로 사회, 정치적인 상황에 대한 적극적인 언급을 한 南美의 미술 등이 거론된다.10)
그런데 개념미술은 워낙 국제적인 추세였으므로 다양한 작품양상 만큼이나 그 정의나 범위에 대해서는 합의가
어려우며 그 전성기(1966-72) 또는 주요시기(1965-75)가 아득한 과거가 된 현 시점에서도 논의가 분분한 실정
이다.
개념미술의 권위자인 루시 리파드는 이 분야의 고전이 된 책을 쓰면서 비물질화(dematerialization)를 그 가장
기본적인 특성으로 규정하고 자신이 알고있는 거의 모든 개념미술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했다.
그에 의하면 개념미술이란 '아이디어가 우선 遍在하며 물질적인 형태는 이차적인 것으로, 가볍고, 한시적이고,
싸고, 소박하며(unpretentious) 그리고/또는 비물질화'된 미술이다.11)
이런 기준에서 보면 ST의 많은 작업들은 개념미술의 범주에서 벗어나거나 특수화한 현상을 보여준다.
1) 특성과 발단
흔히 우리 나라 개념미술은 AG에서 시작되어 ST에서 심화되었다고 하는데 미술계에 개념미술이 '공식적'으로
소개된 것은 1970년 AG 2호에서 '사념작품 Thinkworks'이라는 명칭으로 미국의 주요작가와 작품들을 간단히
다룬 글을 통해서이다.12)
그러나 ST를 개념미술의 대표적인 창구로 본다면 시기적으로는 70년대 초반에서 10여 년 간 지속된 ST는 미국
과 약간의 시차가 있으며, 또 미국에서는 개념미술이 미니멀리즘에서 파생한 것이라면 우리의 경우에는 소위
'한국적 미니멀리즘'이 이와 거의 무관하게 대두하여 개념미술과 동시대 현상으로 공존한 차이가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구미의 개념미술이 국제적인 현상으로 긴 파장을 남겼다면 ST가 개념미술에 대한 의식적인
또는 집중적인 관심을 가진 것이 1975년 이후라는 점에서 기간이 짧고 참여작가의 수도 그리 많지 않았던
소규모 운동이었다.
그런데 ST의 작업들은 오브제나 입체가 주종을 이루었고 행위를 통해 개념의 표현과 전달을 의도한 물질적
이고 시각적인 것이 뚜렷한 특징이었다.
또한 고도로 이론화된 미술이 전제되거나 분석적인 작업의 배경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한 이론과 논리가 요구
되는 미술의 개념규정이나 영역설정에 관한 언어 분석적인 작업이 전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작업의 양상도
물성을 탐구하거나 또는 나름대로 연륜이 쌓인 행위미술을, 그 중에서도 해프닝과 차별화 된 이벤트를 주로 한
것이다.
이런 오브제나 이벤트 위주의 개념적 성향의 작업들은 가까운 일본의 영향이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개념미술
을 오브제, 입체, 설치와 행위라는 새로운 분야와 더불어 유사한 전위미술로 이해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13)
실제로 당대에는 개념미술을 대지미술, 프로세스 아트, 행위미술, 비디오 등을 포함하는 상당히 포괄적인 것
으로 이해했으며, 마땅히 양식적으로 구분해야할 것을 혼용한 사례도 발견된다.
어쨌든 이런 배경에서 AG와 ST의 연결고리이자 우리 나라 개념미술 제 1호라고 칭할 수 있는 작품이 1969년
10월에 김구림 김차섭 두 사람의 협동으로 탄생한 우편미술(mail art) <매스 미디어의 유물>이다.
우편 시스템을 매개로 한 미술은 그 기원이 플럭서스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우편미술이라는 독립된 명칭이 있
지만 따로 장르를 나눌 만큼 종류가 많거나 집단적인 미술은 아니었으므로 통상 개념미술의 일환으로 파악한다.14)
김차섭에 의하면 이 작품은 장차 우편 시스템이 통신의 유물이 되리라는 예측과 함께 미술이 전자 미디어의
대두에 너무 무관심한 것을 비판한 "실험적 공동행위"인데, 현실을 공명할 여건이 있는 행위인지, 예술적 행위가
되는지, 아니면 전적으로 대중 기만적 행위인지에 대한 확고한 이론 전개가 불가능하므로 철저한 탐구적 행위로
보아주기를 바란다고 부연하고 있다.15)
당시의 여건으로는 너무나 생소한 작업이었으므로 이런 '설명'이 첨가되었겠지만 이 작품은 우편 통신의 종말을
예감하고 곧 폐기될 편지라는 수단을 통해 미술작업을 주고받으며, 더 나아가 관객이 작품의 완성에 참여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보의 제공과 (통신)미술의 개념 점검이라는 성과를 얻었다.
가까운 일본의 하이레드 센터가 1964년 4월에 <통신위성에 관한 예술적 전단지>를 만들어서 우송한 예가 있는데
비록 전통과 첨단이라는 차이가 있고 작품의 내용도 전혀 다르지만 둘 다 통신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비교가 된다.16)
또한 우편미술의 대표적인 작가인 일본 출신의 온 카와라(On Kawara)가 1968-9년경에 <일어나다 I Got Up >,
<가다 I Went>, 또는 <나는 아직 살아있다네 I'm Still Alive>등의 일상적인 사건의 기록을 지인 들에게 단순히
엽서로 보낸 것과는 달리 이들은 편지 보내기가 예술이 되는지를 질문하고, 받는 사람들이 작업을 완성하게 한
것이 특징이다.
<매스 미디어의 유물>이 발표 된지 얼마 안 되는 그 해 12월에 이대입구에 있는 동양미술학원을 거점으로
이건용, 김복영이 주축이 된 동료들의 토론 모임이 발단이 되어 'ST 미술학회'라는 ST의 모체가 되는 모임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첫 모임부터 "초현실주의의 비판과 새로운 가능성의 모색"이라는 주제로 김복영이 초현실주의를 개관
하는 발표를 함으로써 공부하고 토론하는 그룹의 성격을 규정지었다.
당시 홍익대 대학원생이었던 김복영은 처음부터 학회의 성립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후 세미나를 주도
하고 전시 도록의 서문을 쓰기도 했는데 이는 AG가 평론가들을 참여시킨 것과 유사하다.
또한 그룹을 굳이 학회라고 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로 차별화와 지적인 야심을 읽을 수 있는 일면이다.
어쨌든 1970년 3월에는 이건용과 김복영 외에 김문자, 여운, 박원준, 한정문, 신성희등 7명의 창립회원이 확정
되었고, 김복영이 초현실주의를 오늘의 상황에서 어떻게 살리는가 라는 주제로 "의식의 공간화와 조형방법론"을
발표하고 유근준이 토론에 참여한 창립 공개 세미나를 가졌다.17)
1970년 초에 김복영이 왜 초현실주의를 논의했는지는 의아하게 생각되기도 하지만 이는 당시 오브제나 입체는
전위라는 사상이 팽배해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즉 앵포르멜에서 헤어나면서 졍크 아트, 앗상블라지, 누보
레알리즘등이 소개되었고 이들은 다다 또는 그보다는 초현실주의의 오브제 사용에 큰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
이다. 미국의 팝 아트와 달리 누보 레알리즘이나 동경의 네오 다다 오가나이저는 모든 오브제에 내재해 있는
이제껏 알지 못하던 기이함에 끌렸었고 이런 오브제觀은 아래에서 살펴볼 ST의 창립 전 서문에 고스란히 반복
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18)
2) ST의 전시
ST의 창립전은 1971년(4. 19-24) 국립공보관 전시실에서 이건용, 여운, 김문자, 박원준, 한정문 5인의 참가로
열렸다.
ST (space time의 약자)라는 그룹명에서도 보이지만 도록에는 작가명이나 제목이 영어로 표기되었는데 이는
미술 정보의 통로가 영어권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이자 이들이 지식 엘리트 그룹이라는 과시로도
보인다.
이건용의 <구조 71-ㄱ>, <구조 71-ㄴ>, <구조 71-ㅁ>은 바닥에 놓인 입방체 앞으로 천장에서 내려진 곡면의
망을 설치하고 그 망 뒤로는 흰 천을 걸어서 입방체에 걸치게 만든 것으로 이런 입방체가 여럿 놓여있는 작품
이다. 이건용은 도록에 "오브제의 구조적 전개"라는 제목의 글에서 "단순 존재인 object는 어떤 계기를 통하여
의식의 엄청난 질적 변화(비약)를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때 구체물(object)은 그 어떤 새로운 논리적 조립과
구조적 전개를 필요로 한다."고 썼다.
그렇다면 그는 이런 논리와 구조의 표상인 입방체를 통해서 "인류역사의 모순을 논리적 구조의 전개 속에 묶으
려"는 원대한 목표를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박원준은 self 라는 단어를 반복하여 제시하고 또 <나의 6개 엄지손가락>에서는 조금씩 다른 엄지손가락을
자화상으로 표현하여 자신의 이미지를 기호화했고,
김문자의 회화 <우주를 향한 촉수의 공명판>은 우주를 상징하는 어두운 공간을 초현실주의와 추상표현주의적
으로 그린 것이다.
한정문의 <중력> 또한 평면작업으로 우주의 중력을 기하학적인 원근법의 공간으로 나타냈으며,
여운의 <가시, 불가시>는 공보관의 입구에 면한 벽면에 모기장을 설치하고 그 아래에는 사람들이 밟고 다니면
깨지면서 반사하도록 거울을 배치하고 그 앞에 위에는 형광등을 달고 아래에는 거울을 놓은 사방을 모기장처럼
둘러친 직육면체의 구조물을 놓았다. 이것은 모기장이 갖는 유년기의 추억과 신비감이 모티브가 된 작품으로
장소성을 다루어 본 것이다.19)
이상에서 본 창립전의 성격은 평면과 입체가 섞여있는 뚜렷한 특징이 없는 것으로 우주, 중력, 구조, 물질 등을
다루고 있지만 주제의 심화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창립전 이후에는 2회전까지 2년의 공백이 있었으며 이 사이에 이건용은 AG에 참여하여 2회 1971년(12. 6-20)
의《현실과 실현》전에 각목, 생목, 흙으로 된 설치작업 < 71-12>를 내고, 72년 (12. 11-25) 3회의《탈 관념의
세계》전에는 기둥, 돌, 밧줄을 이용한 <관계>를 출품했다.
이 둘은 모두 모노하적인 작품인데 주목되는 것은 이일이 3회전의 서문에서 "관념의 신기루 속에 매몰되는"
개념미술을 비판하고 있는 점이다.
따라서 ST의 리더로서 이건용은 당시 아직 그룹의 정체성에 대한 뚜렷한 비젼이 없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AG와는 74년 마지막 전시까지 극소수 참여자 중의 하나로 가담했던 사실이 초기 ST와 AG의 연결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2회전은 1973년(6. 17-23) 명동화랑에서 열렸는데 한정문과 김문자는 빠지고 이일, 성능경, 김홍주, 남상균,
이재건, 장화진, 조영희, 최원근, 황현욱이 새로 참여했으며 이중에 장화진, 조영희, 이재건 역시 2회전에만
출품한 작가들이다.
이건용은 정방형의 궤짝에 한지를 안팎으로 붙여 바르고 바깥쪽은 30여 센티미터 가량 넓게 발라서 바닥에 붙인
다음 세 가장자리를 잘라내고 들춰진 부분에 돌을 놓은 <관계?>,
김홍주는 상자에 자갈을 깔고 그 위에 푸른 색 스프레이를 뿌린 <돌과 파랑>, 남상균은 아크릴 박스에 담배꽁초
를 넣은 <질료 I>과 성냥개비를 넣은 <질료 II>,
박원준은 알루미늄 포일로 다리를 감았다가 허물벗듯이 그대로 떼어놓은 <脫殼>, 성능경은 광택이 나는 스텐레
스 스틸 판을 휘어서 세워놓고 그 양쪽을 돌멩이로 버텨놓은 <상황>,
여운은 100호 사이즈의 흑백 캔버스를 나란히 놓고 그 위에 흰 천을 무한대 (∞)식으로 엮은 뒤 앞쪽으로 늘여
뜨려 놓은 <무제-73>, 이일은 캔버스 아홉 개를 붙이고 가운데 한 개만 칠해서 바닥에 놓은 <9분지 1 회화>,
이재건은 화선지에 수성 페인트를 칠하고 마르기 전에 연속적인 흠집을 낸 <백 1, 2, 3>, 장화진은 나무 박스를
하나는 직육면체로, 하나는 삼각형으로 만들어서 핑크와 실버의 스프레이를 섞어서 뿌리고 일루젼을 통해 물질
을 빛의 입자로 보이게 한 <Video 3, 4>,
조영희는 갈포지에 오일과 아크릴로 선을 그어가다가 불규칙적인 옹이 같은 이미지를 만든 <들풀>,
최원근은 의자 위에 사지가 뒤엉킨 인형을 줄로 얽어놓아 초현실주의자 한스 벨머(Hans Bellmer)의 작업을
연상시키는 <앗상블라지 A>, 황현욱은 천 위에 돌을 무작위로 얹어서 천의 영역 안과 밖에 있는 것을 대비한
<비 일체성> 등을 전시했다.
2회에도 여전히 회화, 오브제, 입체가 섞여있고 모노하적인 물성의 탐구가 주된 내용이었는데 이 가운데 장화진
이 물감으로 TV 스크린의 효과를 낸 것이 특이하며 최원근이 인형을 포박한 것은 색다른 작업이었지만 인형은
심리적인 내용과는 무관하게 단지 오브제로 사용되었다.
이때에는 전시와 병행해서 유준상을 연사로 초대하여 코수스의 "철학 이후의 미술 Art after Philosophy"을 주제
로 공개 토론회를 열었다.
3회전은 1974년(6. 21-27)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에서 개최되었고 김용민, 송정기, 최효주가 새로 가입했다.
김홍주는 천에 칼라로 패턴을 반복하거나 수묵으로 번지게 한 <확장>,
남상균은 전년도에 이어 벽에 솜을 걸고 그 앞에 머리카락을 천에 싸서 늘어놓은 <질료 4>, 성능경은 4개의 판넬
위에 당일의 신문을 붙이고 매일 광고와 사진만 남긴 채 기사를 오래내는 행위성 작업을 하면서 청색 반투명
아크릴 통에는 오려낸 기사를, 투명 아크릴 통에는 전날의 뼈대만 남은 신문을 넣은 <신문 1974년 6월 1일 이후>,
이일은 캔버스 아홉 개를 붙여서 벽에 걸고 가운데 하나를 뒤집어 놓은 것과 반대로 모두 뒤집고 가운데 한 개만
바로 놓은 <9분지 1 회화 II>, 송정기는 철망 위에 합성수지를 씌운 인체를 테이블 주위에 둘러 앉혀서 삭막한
회사 또는 사회의 분위기를 연출한 <죽음의 장소>,
여운은 각기 <상황>이라는 제목으로 유리창틀 안에 신문과 사진 콜라지를 넣고 자물쇠를 채운 작품과, 전시장의
문 위에 포장지를 대고 노끈으로 묶은 뒤 체인으로 감아서 자물쇠를 채우고 아래 부분을 찢어놓은 작품을 발표
했다. 이때 그의 작업은 시사성이 짙은 것으로 바뀌어서 콜라지에는 독재자나 김지하 등 감옥에 간 사람들의
얼굴이나 또는 플레이보이 지의 일부를 넣어서 자유를 구속당하는 인간과 상품화된 인간을 섞어놓아 복합적인
시대상황을 반영했으며 체인과 자물쇠 역시 억압에 대한 것이지만 작가는 분단상황에 대한 언급을 한 것이라고
한다.
이건용은 평면에 주름진 모습을 그려 넣은 천을 벽에 걸거나 천을 겹쳐 쌓아놓고 스프레이를 뿌린 뒤 한 장씩
펼쳐놓아서 일루젼과 평면성을 다룬 <제시>,
최원근은 역시 인형 파편들을 파넬 위에 모아놓고 스프레이를 뿌린 <앗상블라지 B>,
최효주는 사람 키 크기의 나무로 만든 비석을 3개 만들고 그 위에 화선지(神位)를 온전하게 붙인 것, 반쯤 태워서
재를 아래쪽에 놓은 것, 마지막에는 재만 남은 것을 올려놓은 <虛 3> 등을 전시했다.
이때는 이일이 75년 파리 비엔날레에 ST 그룹을 추천해서 그 준비를 위해 서울 근교 야외에서 몇 가지 공동작업
을 하기도 했는데 바닥에 돌들을 놓고 그 위에 천을 씌우거나, 사각형태 공간을 돌을 고르고 그 위에 흙을 깔거나,
종이뭉치를 태워서 연속적으로 늘어놓거나, 박힌 돌을 뽑아서 그 옆에 쌓거나, 땅위에 흰 페인트를 흘러내리게
하는 작업들이 있었다.
이들은 자연을 캔버스로 삼는 대지미술 작업이며 미국이나 영국의 많은 선례가 있다. 공개토론회도 열려서
김복영이 발제한 "현대미술의 역사성과 반역사주의"가 논의되었다.
3회 전시 역시 물질, 일루젼, 죽음, 사회, 시사적인 것 등 여러 가지 관심이 표출되었는데 이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성능경의 신문작업이다. 당시의 억압적인 시대상황에 대한 언급이자 언론매체의 허구와 작위성 또는 그
힘에 대한 효과적인 항변이었던 이 작업은 작가가 매일 자르고, 버리고, 쌓는 퍼포먼스 식으로 진행하여 시간
의 경과와 함께 휴지가 되는 뉴스의 속성도 보여주고 있어서 지금도 시효가 다하지 않은 작품의 예가 된다.
성능경은 아직은 개념미술이라는 충분한 의식을 가지고 한 작업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것은 ST전에서는 처음
으로 기록될 수 있는 개념미술의 예이다.20)
1975년(10. 6-14)의 4회전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전시실에서 열렸고 이건용, 김용민, 김홍주, 남상균, 성능경,
송정기, 여운, 최원근, 최효주, 황현욱 등의 기존 멤버들이 참가했는데 도록 없이 한 장 짜리 안내문만 만들었다.
초대장에는 "한국현대미술의 딜렘마를 자기 논리 및 분석의 결여로 보고, 창작과 평론의 관계부재를 절감하고,
논리와 분석을 사진, 물질, 환경, 행위(이벤트)를 통해 모색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어서 이때 ST가 처음
으로 그룹의 정체성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밝힌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벤트와 사진의 대두를 주목할 수 있는 이 전시는 그해 4월에 처음 이벤트를 선보인
이건용이 <금긋기>, <건빵 먹기>, <열 번 왕복>, <두 사람의 왕복>, <셈 세기>등 5개의 이벤트를 했다.21)
이건용은 자신의 행위를 해프닝과는 다른 이벤트, 또는 '논리-이벤트'라고 불렀는데 그는 60년대는 해프닝,
70년대는 이벤트라고 정의하여 전자는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상황에 따라 행위가 좌우되지만 이벤트는 논리적
으로 행위가 진행된다고 서로 구별하였다.
또한 ST에서 이벤트를 하던 작가들 역시 충동적이고 산만한 해프닝으로부터 자신들의 이벤트를 차별화 시키
려고 노력하였다22) 그러나 이런 구분은 구미에서 행해졌던 이벤트와 해프닝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옳지 않
으며 그들이 쓴 이벤트라는 명칭 역시 본래의 뜻과는 사뭇 다르다.23)
이건용이 이벤트를 처음 선보인 것은 그해 4월 《'75 오늘의 방법전》을 통해서였는데 현대미술의 흐름에 밝고
일본에 체류했던 김구림과의 대화가 그 계기가 되었다.24) 따라서 이벤트라는 말 역시 일본으로부터 온 것인데
당시 플럭서스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거의 없었던 우리 나라에서 이 말을 직수입했을 리는 없고 일본은 플럭서
스의 중요 멤버여서 60년대 초반부터 이벤트가 성행했기 때문이다.
김홍주는 낡은 거울 프레임에 캔버스를 대고 그린 극 사실 풍의 <거울>, 최효주는 시멘트로 비석을 만들어 한 쪽
을 부시고 그 위에 시멘트 물을 끼얹은 <虛 4>,
황현욱은 통나무를 톱으로 자르고 톱밥을 그대로 놓아둔 작업, 여운은 학이 그려져 있는 칠이 벗겨진 낡은 거울
위에 사람의 얼굴 사진을 콜라지 하고 그 윗 쪽에 격자 무늬로 테잎을 붙이고 스프레이를 뿌린 뒤 붓질을 가해
서 전통과 현대, 낡음과 새로움을 대비한 <옷과 거울>을 출품하고 그 위에 옷을 걸어놓았다.
사진 작업들로는 김용민이 거리에서 발견되는 온갖 종류의 못을 찍은 <못>, 이건용이 이벤트 <손의 논리>의 손
동작 들을 찍은 사진, 최원근이 무제로 종이배를 만들어서 의정부에서 중랑천으로 띄워 보내는 전 과정을 시리
즈로 찍은 것 등이 있었다.
성능경은 이때 일종의 메타-사진으로 사진의 자기응시, 프레임, 자의성 등을 다루었는데 앨범을 찍은 사진을
앨범의 내용물로 채운 <앨범>, 거울을 설치하고 거울을 그 주변과 함께 찍어서 전면과 등뒤의 풍경을 병치한
<여기>, 거울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서 흐릿한 이미지를 만들어낸 <거울>, 자를 찍어서 실제 자 위에 얹어놓은
<자> 등을 내놓았다. 이런 작업은 넓게 보아 개념사진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때 여러 ST 작가들이 사진에 관심
을 가진 것은 당시 사진매체의 대두와 사진을 이용한 서구개념미술가들의 전반적인 영향이 아닌가 한다.
에드 러샤(Ed Ruscha), 베허 부부(Bernd and Hilla Becher), 발데사리(Baldessari) 외에도 사진이미지를
사용하는 많은 개념미술이 있었으며, 사진가 중에서도 특히 케네스 죠셉슨 (Kenneth Josephson)의 작업은
개념사진의 예로 80년대 구성사진이나 미디어 아트의 선례가 된다.
또한 하이 레드 센터의 멤버였던 아카사가와 겐페이(赤瀨川原平)의 흔히 간과되는 도시환경을 담은 1970년대
초반의 사진작업 역시 일상적인 사건이나 환경을 주제로 한 개념사진의 선례로 흥미롭다.
테마전으로 전환하기 시작한 1976년(11. 22-27)의 5회전은 '사물과 사건'이라는 주제로 출판문화회관에서
열렸으며 김용철, 김장섭, 안병석, 장석원, 김선이 새로들어오고 기존 멤버로는 이건용, 김용민, 남상균, 성능경,
최원근, 최효주가 참여했다.
이때 김복영이 쓴 서문은 주목할 만한데 그는 '현대자연주의'는 사물과 사건으로 세계를 표현하며 사건은 사물에
귀속되므로 만남은 현상 아닌 사건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다. 또 사물을 직접 부딪치는 경험의 사건은 이미지로
구성되지 않으므로 '사물을 찾아가는 사건예술가'들의 진정 새로운 예술의 출현이 기다려지며 개념 예술이론은
생과 사물을 회복시키기에는 미약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룹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에 속하는 이 시점에
도 개념미술을 비판하는 서문을 실은 것은 ST가 아직도 개념미술에 대한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었다는 증거이다.
대신 물질과 사건 즉 오브제와 이벤트를 강조하는 것인데 그의 논조와 상응해서 이때부터 이벤트가 전시의 주가
되었다.
전시 오프닝에 이건용, 김용민, 성능경, 장석원이 퍼포먼스를 했는데 이건용은 7개의 <신체 드로잉>으로 <화면
뒤에서>, <화면 앞에서>, <옆으로 서서>, <팔에 기브스>, <다리 사이?gt;, <양팔로>, <어깨를 축으로>를 행하고
결과물인 베니어판을 입체로 냈다. 이들은 보통 결과물罐?남는 드로잉을 행위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서 신체의
궤적을 기록한 작업으로 전환한 것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제약을 가한 팔과 손의 왕복운동이 그려낸 반복적인 선
드로잉이 작업의 결과물로 남는다.
성능경은 <위치>, <팔 흔들기>를 행위로 하고 이벤트의 결과물을 사진 작업으로 만든 <담배 피우기>, <손>,
<검지>, <위치>, 김용철은 담벽, 하수구, 도로표지판, 대문, 창문 등을 찍은 뒤 인화지의 일부분을 화학처리해서
지우고 모서리를 칼로 찢은 듯한 흔적을 유화나 연필 등으로 그려 넣은 <이것은 종이입니다>로 사진은 결국
종이라는 주장을, 최원근은 손의 그림자를 찍은 사진작업 <작품 76>, 사물의 부분에 관심을 가졌던
김선은 사진의 특정 부위를 강조하기 위해 실크스크린으로 아웃라인을 그리는 작업을 했는데 자신의 초상사진에
입 부분을 매직으로 둥글게 표시한 사진 등을 무제로 제시했다.
강창열은 무제로 돌에 돌을 그리고 바닥에 천을 깔고 그 돌을 올려놓고 또 천에도 돌의 이미지를 그려 넣은 작업,
김홍주는 문짝 위에 납작한 가오리와 파리를 그려 넣은 <거울 1>과 경대 위에 거울 속에 여인을 그려 넣은 <거울
2>, 남상균은 0부터 9까지를 순서대로 반복해서 가로 세로로 배열한 <數 1>,
안병석은 화면의 두터운 물감을 철필로 긁은 <계기 I>, 장석원은 돌 자갈 몇 개를 넣은 까만 보자기들을 끈으로
묶어서 나란히 벽에 걸어놓은 <묶음의 묵상>,
김장섭은 1.4미터 크기의 마루 널빤지 가운데에 못을 박고 노끈을 달아 그 끝에 붓을 달아서 콤파스처럼 네 모서
리는 남겨둔 채 원형으로 검은 안료를 칠하고 마지막에 붓 대신에 몽당 빗자루를 달아놓은 <물질+행위>,
최효주는 석고로 손의 모양을 뜬 <가위, 바위, 보>를 전시했다.
이때는 나까하라 유스케(中原佑介)의 "개념예술과 예술의 개념"이 토론되었으며 이벤트와 사진 외에는 여전히
물질이나 일루젼에 대한 관심이 주를 이루었다.
1977년(10. 25-31)의 6회전은 견지화랑에서 '대지를 만들고 세계를 여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열렸는데
새로이 강용대, 강창열, 강호은, 김용익, 박성남, 신학철, 윤진섭, 장경호가 들어가서 수적으로는 5회의 13명에
이어서 가장 많은 17명이 참가했다.
이번에도 서문을 쓴 김복영은 사물과 사건은 大地가 떠받치는 것이며 "해프너 들이 환경, 신체, 대지를 통해서
나타낸 시위는 '예술은 또 다시 자연을 갈망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였다는 점에서 금후 현대사에서 그 의의가
크게 강조될 것이며, 컨셉추얼 아트와 극사실주의는 이 이념을 어느 정도 성숙된 원리의 실험에 의해 표명한
획기적인 것으로 부각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대목에서 그의 개념미술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 것과 그가 생각
하고 있었던 ST의 개념작업은 행위와 자연이 그 틀과 내용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는 또 세계와의 연결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민족'이 그 한 통로인데 ST 작가들이 이를 무시하고 현대의
맹목적 추세에 휩쓸린 것이 아니라고 '변호'하고 있어서 당시 널리 퍼져가던 단색화의 이념을 의식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벤트는 이건용이 <얼음과 백묵은 발신하라, 오버>, 성능경이 <한장의 신문>, 강용대가 <공간=점유성>,
윤진섭이 <서로가 사랑하는 우리들>, 장경호가 <물닦기>와 <이것이 이것이요>를 내놓아서 가히 행위미술의
전성기를 이룬 느낌이다. 이건용의 <얼음과 백묵은 발신하라! 오버>는 시간의 흐름에 의해 절로 녹아 없어지는
얼음과 인위적인 힘을 가하면 문자로 변하며 닳아 없어지는 백묵을 매체로 이 둘과의 교신을 시도한 것이고,
성능경의 <한장의 신문>은 신문을 들고 앉아서 무작위적으로 읽다가 읽은 부분을 오려내기를 반복하고 마지막
에는 골격만 남은 신문을 한참 들고 있다가 퇴장하는 것이고, 신문을 메모지 사이즈로 오려서 각기 접사 촬영한
뒤 전지 사이즈로 확대하고 명사만 알루미늄 테잎으로 가리거나 무작위로 조합한 사진작업은 신문 편집을 흉내
내면서 신문의 기능을 질문하는 것이었다.
윤진섭의 <서로가 사랑하는 우리들 We Stroke>은 어린이 마차, 자갈, 색지, 나뭇가지 등을 재료로 집을 짓고
울타리를 치면서 관객과 함께 놀이적인 행위를 해본 것이다. 이것은 지나치게 무겁고 관념적인 ST의 이벤트에
대한 대안으로 관객을 재미있게 참여시켰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이다.
김용익은 네 장의 모조지에 색연필로 작은 격자무늬를 그린 뒤 그것들은 약 2평방 미터의 범위 내에서 벽과
바닥에 조용히 던져놓아 살짝 접히기도 하고 격자가 일그러지기도 하는 <위상>으로 위상수학에 입문한 느낌을
나타냈고,
김선은 원형의 사물에 관심을 가지고 실크스크린으로 원형을 그려놓고 그 안에 공, 시계, 선풍기, 바퀴 등을
그려 넣은 무제, 사물에 대한 경험을 시각조건으로 극대화시키기 위해 물질의 구조를 촉각적인 표면으로 통합
하는 작업을 하던
김장섭은 각기 <사물+행위>라는 제목으로 철망들을 5, 60 센티 높이로 쌓고 그 위에 물감을 칠해서 틈틈이 스며
들게 하고 그 뒤에는 역시 같은 작업을 한 장방형의 철망 한 장을 벽에 기대 세워 놓은 작품과, 열린 직육면체
상자를 윗 부분을 남기고 검은 안료를 두껍게 바른 작업, 신학철은 연탄집게와 숫자 돌멩이 등을 색실로 캔버스
에 부착시켜서 당시 탈 이미지 회화와는 다르게 이미지를 회복하고 오브제의 성격을 추가하는 <연탄집게>와
<숫자놀이>,
장경호는 지각을 탐구하는 작업으로 공사장의 지게 받침대와 녹슨 쇠막대를 가져다놓고 그 위에 알아보기 힘든
거미줄을 얹어놓은 무제, 강창열은 드럼통에 드럼통을 그려 넣고 돌에 한지를 적셔서 입히고 말린 다음 잘 접착
한 부분은 돌처럼 채색한 무제, 김용철은 거리 휴지통, 버스정류장 표지판, 공사장 벽 등을 찍은 사진에서 이미
지의 일부를 지우고 오일로 추가 작업하여 사진과 회화를 결합한 <사진 회화 photo-painting>들을 발표했다.
자료 발간 및 토론으로는 브라이언 오도헤르티(Brian O'Doherty)의 "흰 입방체의 내부"와 비타이트 빙클러즈
(Bitite Vinklers)의 "한스 하케"를 일부 번역한 "Haacke의 예술"이 대상이었다.
실질적으로 마지막인 1980년(6. 26-7. 2)의 7회 전시는 3년의 공백 뒤에 <전체와 국면>전으로 동덕 미술관에서
열렸는데 이때는 구성원의 가장 큰 변화가 있었던 해로 그간 꾸준히 참가하던 주요 멤버 남상균, 김홍주, 김용민
이 탈퇴하고 송정기와 김용철도 빠지게 되어서 그룹의 성격은 이미 많이 달라지고 침체가 시작된 때였다.25)
대신 정혜란, 김용진이 새로 참가하고 이건용, 강용대, 강창열, 강호은, 김선, 김용진, 김장섭, 성능경, 윤진섭,
최효주가 전시했다. 새로 참가하면서 번역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한 정혜란이 쓴 서문에서는 그간 등한시한
개인적 관심이나 취미, 정서와 반응을 주목하고 있어서 태도의 변화를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변화해 가는 세계
미술계의 흐름을 반영한 듯하다.
강용대는 아크릴 판을 건축적으로 구성한 <육각형에서>, 강창열은 병 여러 개 위에 물감을 두텁게 바르거나
꽃잎을 붙여서 물질감을 강조한 <회화>, 강호은은 나무와 로프에 유화작업을 한 <작업 80>,
김선은 그룹의 지나치게 무겁고 논리적인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 당시 인기 있었던 대중 만화의 컷트를 실크
스크린 해서 일정한 대상을 반복적으로 지움으로써 드러내는 <팬티>등, 작고한
김용진은 극 사실로 바닷가나 예수를 주제로 한 그림,
김장섭은 대나무 발 대여섯 개를 말아서 로프로 묶은 뒤 검은 안료를 칠하거나 볏짚을 지붕 잇듯이 기대 세우고
안료를 칠한 <사물+행위>,
성능경은 사건현장을 찍은 신문사진에 임의로 특정 부분을 점선으로 강조하여 역시 나름대로 편집한 <현장 I>,
윤진섭은 종이에 드로잉한 <작품 A> 이건용은 나무, 로프, 연필, 벽돌, 천 등을 이용한 설치 <현신>,
최효주는 광목 천 위에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24개항의 대답을 만들어 각자 적절한 대답
에 표시하게 한 설문작업과, 병행하여 별도의 켄트지에는 다른 대답을 쓰게 한 <예술은 무엇인가>로 관객의
많은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이때에도 회화, 입체, 설치 위주로 물질과 행위가 주종을 이루었는데 김선의 만화가 이채로우며 김용익의 <위상>
과 최효주의 <예술은 무엇인가>를 개념미술로 들게 된다.
최후의 8회전은 1981년(6. 25-7. 1) 동덕 미술관에서 현대미술 워크숍의 일환으로 열렸는데 이때는 이건용,
성능경, 김장섭만 남기고 기존 멤버들이 대거 탈퇴하고 도록도 만들어지지 않아서 종래의 ST의 성격이 많이
퇴색한 채로 궁색하게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를 ST의 연속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기록도 성의 있게 보존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건용은 <화장지 압축>과 박용숙과 함께 물주전자를 이용한 즉흥 이벤트를, 성능경은 기존 작업의 연장 선상
에서 사진작업 <현장 6>을, 김장섭은 발을 묶은 7회의 <사물+행위>를 내고, 이훈이 판자촌을 찍은 사진을 모아서
판자집 형태로 만든 작업을, 정혜란과 최민화(당시 최초란)가 참여했지만 나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ST는 자신의 종말을 자체 증명한 셈이 되는 이 전시를 마지막으로 10여 년간의 활동을 접게 된다.
3) ST와 개념미술
이상에서 재구성해 본 전시를 중심으로 이제 그들 작업의 성격을 규명할 순서이다. ST가 활동을 접을 즈음인
1981년에 동덕여대 미술관에서 ST, 현실과 발언, 그리고 서울 '80 세 그룹이 참가한 현대미술 워크숍이 있었다.
주제 발표자로 나선 이건용이 요약한 ST의 구성과 설립 그리고 그 목표와 성과를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ST는 서구의 사고와 방법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기존의 행태를 백지화하고 비판토론을 거쳐서 수용
하고자 했으며, 창작과 논리라는 지적인 유기적 관계를 증진시키고, 단순한 장인이 아닌 思考者로서 예술의
본질을 새롭게 사고하고자 했다.
그 성과는 논리적 작가 타입 형성과, 입체, 사진, 평면화, 이벤트 등 매체의 개혁을 통한 미디어의 영역확장이며,
결과적으로 예술의 개념과 미디어의 문제를 통한 본질적인 문제추구이다. 또한 외국의 주요 논문을 공개토론
하는 등 진지한 세미나를 열었고 지성적인 모임과 순수한 활동전개로 한국화단에 좋은 작가와 이념을 구현할
수 있었다.26)
그의 발표는 ST의 활동과 이념 또는 그 성과 등을 대부분 요약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우선 명칭을 '학회'라고
했을 정도로 이 시기의 소그룹들 가운데 ST만큼 활발하게 토론하고 연구하는 자세를 보인 단체는 없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외래사조를 주먹구구식으로 받아들여왔던 기존의 풍토에 대한 반발과 비판 외에도 시대가
변하면서 미술에 대한 지적인 갈증과 욕구가 팽배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또한 AG가 비교적 좋은 구성과
목표를 가지고 시작했으면서도 단명한 반면에 ST는 10여 년을 존속했다는 것도 당초 이들이 화단의 세력구도
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 '비주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존속 연수나 참가 인원의 수보다는 작품의 성과인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들의
개념미술에 대한 관심은 단색화와 백색열풍이 대두하기 시작한 1975년 이후에야 가시화 되었고 활동의 정점
이라고 할 5, 6회 역시 개념미술에 대한 뚜렷한 자의식이나 집단적 추구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당시 그들이 공부한 외국 논문이나 기사 중에 개념미술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은 1973년에 공부한 코수스
의 "철학 이후의 미술"과 1976년에 토론한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의 "개념미술과 예술의 개념" 정도가 있는
데 이들마저도 내용이 어려워서 충분한 이해를 전제로 한 비판적 활용은 불가능했다고 판단된다.
그보다는 미술가가 단순한 오브제 제작자를 넘어서며, 무언가를 만들지 않고서도 미술을 할 수 있다는 각성을
통한 의식의 변화가 큰 성과였다.27) 물론 이런 변화는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우리 식의 개념미술의 추구와
실천에는 뚜렷한 역할을 하지 못한 아쉬운 결과를 남겼다.
7회까지의 전시를 총평해보자면 입체작업과 회화 平面에 대한 점검에 대해서는 전자는 ST만의 업적도 아니고
후자 역시 그들만의 집중적인 노력도 아니며 굳이 개념미술이라고 하기가 어렵다.
또한 사진은 ST의 여러 작가가 새롭게 시도한 것이지만 성능경을 제외하고는 개념적인 차원까지 꾸준히 시도한
사람이 없다.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이벤트인데 이건용은 특유의 간명한 행위와 군더더기 없는 논리적 사건의 전개로 당대
행위미술의 대가가 되기에 손색이 없는 작품들을 내놓았다.
따라서 그의 이벤트는 행위미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를 위시한 일부 이벤트 작가들의 신체, 장소, 행위를 통한 세계와의 관계적 사건이라는 선문답 같은
주장과 추상적이고 모호하기 짝이 없는 관념에의 경도는 스스로의 작업을 秘意적인 소통단절로 몰고 간 문제점
이 있었다.28)
그렇다면 그들의 이벤트는 개념미술에 속하는가? 의도 면에서 그렇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양식적인 분류에
따르면 개념적인 행위미술로 보아야 할 것이 그들 대부분이 뚜렷한 개념의 추구보다는 신체나 場이 강조되는
사건의 전개에 치중한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4. 후속연구를 위하여
이상의 논의 끝에 ST가 개념미술 그룹이었는지를 다시 한번 자문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들의 작업은 크게 보아 입체작업을 통한 물질탐구와 형식실험 그리고 행위를 통한 논리나 관념의 점검이었다.
그들의 개념미술에 대한 이해나 추구 역시 개인적인 격차가 심했고 의식적으로 개념미술을 한 작가는 극소수에
불과하여 몇몇 산발적인 작품만 발표되었다. 다만 작업에서 개념적인 면에 눈을 뜨고 그쪽으로 다가간 시도들은
발견되지만 6회 이후의 급작스러운 변화와 단절로 의미 있는 결실을 맺을 기회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미 응집력이 사라진 그들은 단색화로, 민중미술로, 아니면 개인적인 노선변경으로 각자의 길을 갔고 햇수로는
10년이나 지속된 ST는 이제 대부분의 참여작가들에게 희미한 그림자로 남아있을 뿐이다.
나는 첫머리에 작가가 외출한 빈 의자의 이미지로 말문을 텄었다. 그간 머리 속에 전시를 재구성하면서 많은
작가들이 의자에 앉기보다는 주변을 서성이거나 아예 외출하여 다른 작업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한때 글이나 말 대신에 제시한 '의자'들은 개념의 색깔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당시 작가들의 마음속에 표현의 통로를 찾지 못한 '들 끊는' 개념들이 과연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어쨌든 그것은 거센 눈보라가 휩쓸고 가버렸고 이번에는 그 바람은 나라 안의 것이었다.
하나 바람에 날려갈 정도의 에너지였다면 당초 무시해도 좋은 것이리라.
서구 개념미술이 그 前史에 대한 필연적인 산물이었다면 우리는 그 단초야 어찌되었든 유산밖에 논할 것이
없는 위치에 있다. 해서 이 글의 끝은 ST와 단색화의 관계와 그 유산에 관한 것이 된다. 윤진섭은 70년대의 개념
화 논리화의 훈련 덕분에 화면을 감정 분출의 장이 아닌 사색의 장으로 보기 시작했다고 하고, 오광수는 미니멀
리즘과 컨셉추얼 아트의 한국적 변형이 비물질화한 단색화이며 이것이 우리 식의 개념미술이라고 주장한다.29)
그러나 화면의 마티에르가 엷어졌다고 그것이 곧 비물질화이며, '사색의 장'이 되었다고 그것이 곧 개념미술의
성취인가? 보다 근본적으로 개념미술이 단색화의 틀 안에서 논의될 성질의 것인가? 개념미술에 관한 이런 질문은
우리가 넘어야할 또 하나의 산인 단색화로 이어진다.
주
1) 이 글은 ST 작가들의 적극적인 도움과 자문이 없었으면 결코 완성될 수 없었다. 가물거리는 기억을 되살려서
반복되는 질문에 성실히 답해주고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주신 작가 여러분 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2) 이일, "변화와 모색 그리고 실험: 한국현대회화 10년사," 공간 (1976년 11월), 44 ; <공간의 반란-한국의 입체
설치 퍼포먼스 1967-1995>전을 기획한 윤진섭은 입체, 설치, 퍼포먼스와 이벤트, 오브제, 개념미술을 예로 들고
있다. 윤진섭, "6, 70년대 실험미술의 성과와 반성," 한국 추상미술 40년 (재원 1997), 95-122 ; "70년대 한국
실험미술의 전개와 그 양상-이벤트, 오브제, 개념미술을 중심으로," 미술문화, 71. 한편 김미경은 분류의 애매함
을 인정하면서도 보다 구체적으로는 새로운 오브제, 대좌제거, 상황과 장소위주의 설치적 입체, 퍼포먼스와 영화
를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예술지상주의적인 조형적, 개념적 실험'은 제외하여 실험의 범위를 대부분 사회 비판
적인 작품들에 한정시키고 있다. 김미경, "196, 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과 사회,"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 청구
논문(2000), 1-6, 120.
3) 실험과는 달리 전통적인 수단을 쓰지만 새로운 의식을 포함한다면 아방가르드라는 설명이 있지만 이를 엄밀
히 구별하기는 어렵다. 이런 곤경에 대한 처방으로 곰브리치는 미술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20세기의 모든 미술
을 실험미술의 범주에 넣었다. 해럴드 오즈본 편, 한국미술연구소 역, "실험미술," 옥스퍼드 20세기 미술사전
(시공사, 2001), 362 참조.
4) 최명영, "실험정신과 풍토의 갈등," 홍익미술 (1972 창간호), 43-62. 그는 이어서 한국 작가의 조형의식이
지극히 사변적이며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에서 출발하여 서구의 합리적인 조형적 구조로서 이를 실현하고 있기
때문에 이 간격이 좁혀지기가 매우 어렵다고 보았다.
5) 박영남, "한국 실험미술 15년의 발자취," 계간미술(1981, 봄), 89-98.
6) 좌담회 (김구림, 심문섭, 정찬승, 사회: 박용숙, 1975, 2. 20) "최근의 전위미술과 우리들." 공간 (1975, 3),
59-64.
7) 2001년 오상길 인터뷰, 타잎 스크립트, 이건용, 8; 최태신, 4; 이승택, 3, 5: 김용익, 2.
8) 최태신, 오상길과의 인터뷰, 2001, 7. 13, 타잎 스크립트, 9 ; 김장섭, 필자와의 인터뷰, 2001. 9. 22.
9) 결과적으로 작품은 지각의 대상에서 개념적인 것으로 변하고 그것은 비물질화를 주요특성으로 가지게 되
었다. 이는 또한 소수민족 운동 등 유동적인 사회상황과 상업시스템에 함몰한 미술에 대한 저항으로 대두한
다양한 '포스트-오브제,' '포스트-스튜디오' 미술의 일환이기도 하다.
10) Alexander Alberro and Blake Stimson, eds. Conceptual Art :A Critical Anthology (Mit., 1999),
xvi-xxxvii.
11) Lucy Lippard, Six Years: Dematerialization of Art Object from 1966 to 1972 (U. of California Press,
1973), vii. 주요 개념미술가들의 오브제 미술에 대한 반발과 공격은 광범위한 것으로 언어를 기본으로 한 분석
적인 개념미술가 죠셉 코수스나 아트 앤드 랭귀지(Art & Language)는 물론 더 이상의 오브제는 필요 없다는
뜻에서 자신의 기존작품들을 火葬한 죤 발데사리(John Baldessari), 작품은 반드시 제작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 로렌스 와이너(Lawrence Weiner) 등 반-오브제, 비물질은 개념미술의 주요 본령이었다. 한편 리파드의
정의는 처음에는 비물질화에 초점을 둔 보다 더 제한적인 것이어서 반대도 많았는데 그렇다고 다다부터 시작
하여 20세기 미술 거의 전부를 개념미술의 넓은 범주로 관련시키는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초기 리파드의
글은 Lucy Lippard and John Chandler, "The Dematerialization of Art," Art International (1968, Feb), 31-6 ;
후자의 관점으로는 Tony Godfrey, Conceptual Art (Phaidon, 1998) 참조.
12) 현재까지 개념미술에 대한 학문적이고 집중적인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AG와 ST를 함께 다룬
석사 논문이 있지만 전시작품에 대한 정리와 평가 면에서 미비한 점이 많다. 이은주, "1970년대 한국에 나타난
개념미술에 관한 연구: AG와 ST를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미술학과 석사학위논문(1995). AG에 실린 글은
개념미술을 '대지작품, 워터 워크, 공중작품, 허무예술, 아취 워크' 등의 여타 신생 미술과 함께 '불가능 예술
Impossible Art'의 일종으로 다룬 Art in America 지의 기사를 번역한 것이었다. 다빋 시레이 "불가능의 예술
이란 무엇인가?" AG 2(한국아방가르드협회, 1970), 32-3.
13) 오브제나 입체나 모두 일본에서 들어온 말로 일본에서 오브제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1950년 말 경으로
컴바인이나 앗상블라지 같은 작품에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 시초이고, 전통적인 조소의 개념을 적용시킬 수 없는
구조물을 입체조형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이다. 이들은 둘 다 전통적인 미술의 개념을 타파
하고 예술에서 삶의 리얼리티를 증진시키기 위한 매체로 인식되어 전위미술의 반열에 속해 있었다. Alexandra
Monroe, Japanese Art after 1945 (Harry and Abrams, 1994), 159 ; 三木多聞, 원색 현대일본의 미술 (小學館,
1980), 13-조각. 우리 나라에 이 말들이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경으로 소위 실험미술의 대두와
일치하는데 이 글에서는 당시의 용례를 좇아 이 말들을 쓰고 양자의 정확한 구분은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오브제와 입체의 차이는 원래의 뜻이 확산되고 다양해지면서 아주 모호해졌으며 거기에 설치까지 가세
되면 그 구분은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그러나 종래의 조각개념이 근본적으로 확산되었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양자를 굳이 나누어서 분리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보다 공간위주의 개념인 설치와의 구분도 용이해진다.
14) George Brecht는 60년대 초반에 이벤트의 스코어를 친구들에게 메일로 보내기 시작했다. Kristine Stiles, "Between Waste and Stone, " In the Spirit of Fluxus (Walker Art Center, 1993), 66.
15) 김차섭, "실험적 공동행위: <mass media의 遺物>을 발표하면서," AG 2(한국아방가르드협회, 1970), 6-8
참조. 이 작품은 종이에 두 사람의 지문을 각기 다른 색으로 찍고 지문이 양분되도록 찢은 뒤 따로 밀봉하여
하루의 시차를 두고 100장 발송하고 사흘 뒤에 "귀하는 매스미디어의 유물을 감상하셨습니다" 라고 쓴 카드를
다시 발송한 작업이다. 김차섭은 미협 선거로 싸움만 일삼는 사람들을 놀래주기 위해서 한 작업이고 또 자신은
남북분단을 고려했다고 최근 회고한 바 있다. 오상길과의 인터뷰, (2001, 8. 21) 타잎 스크립트, 3.
16) 이 작품은 일본의 통신 위성 발사 시기가 구미의 정치적 사건과 연관된 것에 착안해서 일종의 경고문을
무작위로 선정한 사람들에게 보낸 것이다. 아카세가와 겐페이(赤瀨川原平), 동경 믹서계획-하이 레드 센터-
직접 행동의 기록, 김미경 역, 일본의 실험미술 (시공사, 2001), 154-60.
17) 초창기의 기록에 관해서는 이건용이 개인적으로 작성한 연보에 의거했고, 창립 세미나는 이건용, "창립을
위한 연구회보 (소책자), vol. I (1970. 3), 1-5 참조.
18) Monroe, 157.
19) 여운, 필자와의 인터뷰, 2001, 9, 15.
20) 자신의 모든 작품에 대한 설명은 성능경, 필자와의 인터뷰, 2001, 9. 5.
21) 이벤트의 자세한 기술은 박용숙, "이건용의 이벤트," 공간 (1975, 10/11), 79-80.
22)그룹토론 (김용민, 성능경, 이건용, 사회: 김복영), "사건 장과 행위의 통합 '로지컬 이벤트," 공간 (1976, 8),
42-45.
23) 이벤트는 원래 플럭서스의 행위미술을 칭하는 말로서 죤 케이지의 제자들인 플럭서스 작가들의 음악적인
행위미술을 해프닝과 구별하기 위해 이벤트 (또는 이벤트 스코어, notation, piece)라고 부른데서 유래했으며
플럭서스 미술가들이 짤막하고 단순한 행위로 이루어진 극히 일상적인 작품들을 구상하고 실현했던 것이 그
시원이다. 따라서 이벤트는 우연과 무작위성을 근거로 한 짧고 단일한 구성인 반면 해프닝은 탄탄한 프로그램
이 있는 환경적(environment)인 것으로 대개 더 길며 계획된 기간동안 지속되는 차이가 있는데 우연과 계획은
양자 모두에 개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는 혼동되어 사용되기도 했다. Adrian Henri, Total Art (Oxford U.
Press, 1974), 157.
한편 이벤트나 해프닝보다 훨씬 광범위한 의미인 퍼포먼스는 1970년대가 되어서야 독자적인 분야로 인정받은
장르로 따라서 명확하게 규정하기가 어려운데 대규모 관객을 직접적으로 만나며 충격을 통해 예술과 문화의
의미를 재규정 하게 하는 방식으로, 연극과 달리 공연자는 배우와는 다른 미술가이며 내용은 전통적인 플롯이나
내러티브를 따르지 않는 '작가들의 실시간 예술 live art by artist'이라는 정의가 있다. 퍼포먼스는 초기에는
개념미술의 아이디어를 보여주거나 실천하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보다 관객을 의식하는
화려하고 세련되며 여흥을 주로 하는 미술이 되었다. Roselee Goldberg, Performance Art (Thames and
Hudson, 1979), 7-9.
24) 김구림은 자신이 권유하여 이건용이 했지만 처음에는 부끄러워하면서 회피했다고 하고, 이건용은 이미
이벤트는 잘 알고 있었지만 수가 키시오(菅木志雄)의 이벤트 얘기를 들은 것이 계기이지 김구림의 권유 때문은
결코 아니라고 하고, 성능경은 김구림과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백록 화랑 전시를 계기로
이건용이 갑자기 이벤트를 하겠다고 제의했다고 한다. 김구림은 필자와의 인터뷰, 2001, 9. 14, 9. 29 ; 이건용은
필자와의 인터뷰, 2001, 9. 15 ; 성능경 "캔버스여 흔들려라," 가나아트 (1996. 5) 참조.
25) 성능경은 이런 이탈이 박서보의 '에꼴 드 서울'로 멤버를 하나씩 빼 가는 전략 때문에 이루어졌고 결과적
으로 그룹이 와해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후반 ST의 총무를 맡고 있었던 김장섭은 이들 중 일부는 이건용의
독주에 대한 반발로 이탈했으며, 또한 이미 해체 상태인 그룹을 마지막 8회까지 끌고 간 것도 이건용, 성능경의
고집과 강권 때문이었다고 했다. 성능경은 오상길과의 인터뷰, 8-9 ; 김장섭은 필자와의 인터뷰, 2001, 9. 22.
26) 이건용, "한국의 현대미술과 ST," 그룹의 발표양식과 그 이념 (제 2회 현대미술 워-크숍 주제발표 논문집,
1980), 1-5. 발표 이후에 그룹 간의 활발한 토론과 논쟁이 있었는데 이때 ST는 신생그룹인 '현실과 발언'과의
논쟁에서 크게 밀렸으며 당시의 시국이 암담했던 만치 미술이 현실을 외면한다는 비판에 변변한 대응을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7) 김홍주, 필자와의 인터뷰, 2001. 9. 2. 당시에 개념미술을 한다는 것이 미술가들 사이에 자랑은커녕 부끄러
운 일에 속했다는 증언은 그들의 활동과 작업의 여파가 얼마나 미약했는가를 말해준다. 성능경, 필자와의 인터
뷰, 2001, 9. 5.
28) 이미 글이 지나치게 길어졌고 이벤트의 기록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관계로 이 글에서는 그것을 자세
하게 복원해서 다루는 것을 포기했지만 곧 이어서 다른 문맥에서 그들의 이벤트를 주제로 그 경향과 영향관계,
그리고 다른 이벤트들과의 비교 연구 등을 다룬 글을 발표할 예정이다.
29) 윤진섭, "70년대 한국 실험미술의 전개와 그 양상 : 이벤트, 설치, 개념미술을 중심으로." 공간의 반란 (시립
미술관, 1995), 76 ; 오광수, "70년대 한국미술의 비물질화 경향" 같은 책, 48.
강태희(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