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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남 이순신연구소,백두대간 의병전쟁 답사회,의병정신선양회 원문보기 글쓴이: 범털과개털(미산고택,저상일월)
대한독립의군부는 의병장 둔헌遯軒 임병찬林柄瓚이 1912년 조직한 비밀결사이다. 註1) 임병찬은 전북 옥구 출신으로 명문거족의 후예였으나 집안이 빈한하여 이역吏役에 종사하였다. 그는 1888년 옥구의 호장을 담당하고 있던 중 흉년으로 농민의 실정이 곤궁해지자 감사에게 글을 올려 세금을 감해 줄 것을 상신上申하여 관철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호남지역 선비들의 천거로 1899년 2월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折衝將軍僉知中樞府使兼五衛將을 제수받고, 7월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樂安郡守兼順川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제수받았다.
그는 1906년 2월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과 사제의 의를 맺고, 1906년 6월 정읍井邑의 무성서원武成書院에서 창의하였으나 곧 피체되어 대마도對馬島
에 유배되었다. 1907년 1월 일본에서 귀국한 임병찬은 당시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참여하여 단연동맹회의소斷煙同盟會議所를 조직하고 전북단연기도회全北斷煙期圖會의 찬성장贊成長으로 참여하는 한편, 의병투쟁을 전개했던 동지들과 함께 무력투쟁으로써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임병찬은 1908년 두 차례에 걸쳐 헌병대에 구속되어 탄압을 받았으며, 1910년 12월에는 한일합병으로 주어진 은사금을 거부함으로써 굳은 지조를 보여주기도 했다.
1912년 음력 9월 28일 충청도 공주公州 유생 이식李拭이 전해 온 광무황제 고종의 밀칙을 받고 대한독립의군부이하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다. 임병찬을 독립의군부 전라남도 순무대장獨立義軍府 全羅南道 巡撫大將에 임명하는 고종의 황칙皇勅과 칙령勅令은 비밀리에 독립의군부를 조직하라는 것이었으나, 임병찬은 두 차례에 걸쳐 사직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913년 1월 10일 전참판 이인순李寅順을 통해 재차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에 임명한다는 고종의 칙령이 내려지자, 1913년 1월 16일 아들 임응철林應喆로 하여금 이인순을 서울로 배웅토록 하고, 이명상李明翔·곽한일郭漢一·전용규田瑢圭 등과 활동 방략을 구체적으로 협의케 하였다. 그 후 2월 4일 아들 응철이 귀가하면서 다시 고종으로부터 황칙을 받아 왔는데, 임병찬을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총장 겸 사령장관巡撫總將兼司令將官으로 격상시킨다는 밀지였다. 이에 임병찬은 전라남북도를 망라하는 의병 조직의 결성에 착수하여 각처의 인사들을 접촉하였다. 註2)
1913년 11월 15일 임병찬은 당시 국권회복운동의 추세를 면밀히 분석하고 일제에 맞서 투쟁할 방법을 제시한 「관견管見」을 작성하여 고종에게 상소하였다. 임병찬의 상소관견문은 독립의군부의 활동 방향과 투쟁 방법을 제시한 것이었다. 註3) 이후 임병찬은 호남지방의 조직 구성을
완료하고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가 이명상·이인순 등과 3월 23일 독립의군부의 편제를 완결하였다. 註4)
독립의군부는 「관견」의 내용을 기초로 조직의 편제를 갖추었다. 관견은 임병찬이 1904년의 의병 창의와 1906년 최익현과 의병 창의를 통해 인식한 투쟁 방법과 국권상실 이후 헌병경찰제도 아래에서 한국민의 국권회복운동을 면밀히 분석하여 독립의군부의 활동 방향과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임병찬은 독립의군부의 조직에 향약조직을 활용하였다. 임병찬이 구상했던 향약조직은 독립의군부 관제에 그 대강이 나타나고 있는데, 행정기관과 민권기관으로 구분되어 있다. 행정기관은 병마도총장兵馬都總長, 사령총장司令總長, 순무총장巡撫總長, 관찰사觀察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향장鄕長, 면장面長, 이장里長, 통장統長 등의 순이었다. 민권기관은 참모총약장參謀總約長, 참모부약장參謀副約長, 참모약장參謀約長, 도약장道約長, 부약장府約長, 군약장郡約長, 향약장鄕約長, 면약장面約長, 이약장里約長, 약정約正으로 구성되었다. 註5)
독립의군부의 조직은 의병활동을 했던 인사나 전직관료, 그리고 그 자제들을 중심으로 엄밀하게 진행되었다. 註6) 1914년 3월 완성된 독립의군부
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註7)
◇ 총대표인
임병찬·민정식閔正植·이명상·이인순·조형하趙衡夏·곽한일·채상덕蔡相德김용응金鏞應·전용규·조재학曺在學·최만식崔萬植·이승욱李承旭·고석진高石鎭
◇ 각도 대표인
경기도 : 최영설崔永卨
충청도 : 유준근柳濬根
경상도 : 권진원權鎭遠
전라도 : 이중익李重翼·최영풍崔永灃·박재구朴在求·이권제李權濟·오계화吳啓嘩
강원도 : 서상렬徐相烈
함경도 : 김성문金性文
평안도 : 이도성李道成
황해도 : 유응두柳應斗·오창근吳昌根·송낙선宋洛善
◇ 각군 대표인(생략)
그런데 위의 독립의군부 편제에 나타나고 있는 인물은 수원대표였던 김창식 외에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독립의군부는 임병찬이 「관견」에서 목표로 했던 구상을 실천하기 전에 노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독립의군부는 투서운동과 태극기게양운동을
통해 국권회복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1914년 5월 독립의군부는 국권의 반환을 요구하는 투서를 전국적으로 발송하고, 동시에 국권의 반환과 일본군병의 철병을 요구하는 전화와 태극기를 게양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즉 각국 공사관과 조선총독부·경무부·순사주재소·부·군·병참 등에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투서를 송부하고, 투서가 조선총독부에 도착함과 동시에 전국 350여 처에서 전화가 도달하도록 하고, 나아가 전국적으로 태극기를 게양한다는 것이었다. 註8)
그러나 1914년 5월 23일 김창식 등이 피체되면서 독립의군부의 조직은 노출되었다. 註9) 김창식·이기영李起永·李起周·강봉주姜鳳周·이용철李容轍·정철화鄭哲和·조중구趙重九·김현각金顯珏·유병심柳秉心·윤호尹浩·신규선申奎善·
윤이병尹履炳 등이 피체되었던 이 사건은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독립의군부의 군자금모집사건이었다. 註10)
임병찬은 독립의군부의 계획이 드러나면 조직마저 와해될 것을 염려하여 단독으로 조선총독 사내정의에게 면담을 요청하였다. 이것은 독립의군부의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돌파구를 모색한 것이었지만, 일제는 임병찬의 면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14년 6월 1일 임병찬은 사내정의와 일본 내각 총리대신 대외중신大隈重信에게 두 차례에 걸쳐 투서를 하였지만, 6월 3일 경시청에 체포되었다. 이리하여 임병찬은 6월 12일 보안법 위반으로 감금 1년의 유죄 선고를 받고 6월 15일 거문도에 구금되었고, 관련 인사들도 모두 피체됨으로서 독립의군부의 조직과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註11) 거문도에 유배당한 후 임병찬은 단식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후 다시 거문도에 유배되어 1916년 5월 23일 병으로 순국하였다.
성명 | 출신지 | 신분 및 경력 | 활동상황 | 비고 |
김창식 | 경기 수원 | 의병 | 이인영의진 우군장, 유형 15년 독립의군부 군자금 모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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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 충남 청양 | 의병 | 허위의 사위, 이기상의 아우 독립의군부 참여, 독립자금 모집 |
2002 애국장 |
강봉주 | 충남 공주 | 양반유생·의병 | 노병직 부하, 독립자금 모집 | |
이용철 | 충남 부여 | 독립자금 모집 중 피체 | 1996 애국장 | |
정철화 | 경기 용인 | 의병 | 의병장 허위 휘하의 방인관부대 비서 유형 15년, 독립자금 모집 중국 동삼성으로 망명 |
1990 독립장 |
조중구 | 충남 부여 | 독립자금 모집 | 1990 독립장 | |
김현각 | 충남 서산 | 유생·의병 | 독립자금 모집 | |
윤호 | 충남 보령 | 독립자금 모집 | ||
신규선 | 전남 군산 | 독립자금 모집 | ||
윤이병 | 충남 노성 | 관인 | 영선사 주사, 「복수토역소」 을사늑약 반대 격문, 동우회 창립 독립자금 모집 |
1968 국민장 |
당시 일경이 파악한 독립의군부의 관련 인사는 54명이었다. 註12) 이들 중 군자금모집사건에 연루되어 피체된 인사는 김창식 등 11명으로 대부분 임병찬이나 허위와 관계가 있는 인물로 〈표 6〉과 같다.
『고등경찰요사』에 의하면, 독립의군부사건과 관계 있는 경상북도 출신은 ‘폭도의 수괴로서 당시 한국 제일의 활동가로 불리던 유자儒者 허위許蔿의 일족, 부하 또는 교우가 많고, 또 상당히 저명한 유자가 참여하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의병장 허위와 관련 있는 인물은 이기상李起商·이기영李起永·정철화·이은영李殷榮·여영조呂永祚·김창식 등이었다.
이기상과 이기영은 형제로 충남 보령 출신이었다. 이기상은 1907년 경기도 연천에서 창의한 허위의 비서로 활동하였으며, 이기영은 허위의 사위가 되었다. 이들 형제가 허위와 깊은 관계를 맺은 것은 1896년 김산의진金山義陣에 창의장으로 이기찬이 추대되고 군관으로 이기하가 참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1896년 당시 상주 유생 이기찬은 목천木川에 거주하는 친척인 이기하와 함께 허위를 방문하여 함께 김산으로 가서 창의를 하면서 깊은 인연을 맺는 것으로 보인다. 註13) 이기찬과 이기하는 종
형제였고, 이기하와 이기상, 그리고 이기영은 형제였다. 註14) 여영조초명 永韶는 김천 출신으로 허위와 함께 김산의진의 참모를 역임하였고 김천지역에서 태극교太極敎를 창립하였으며, 註15) 정철화는 허위의 부하였다. 이은영은 허위와 함께 13도창의군을 이끈 이인영의 아우이며, 김창식은 이인영의 우군장이었다. 註16) 그러나 일제의 한국병합 이후 허위의 유족들은 1912년 허겸許蒹을 따라 도만한 뒤였고, 허위의 장남 허학許壆이 독립의군부에 참여하여 활동했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독립의군부 사령장관 임병찬과 관련 있는 인물은 그의 아우 임병대林炳大와 아들 임응철, 그리고 독립의군부 결성 과정에서 관여하였던 이인순·전용규·이식 등이다. 그 외 각처에서 의병항쟁에 참여했던 의병장과 의병, 그리고 각 지방에서 명망이 높은 유생들이 주목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독립의군부의 독립자금모집사건 신문조서에 의하면, 1913년 군산에서 대한교민광선회大韓僑民光鮮會를 조직하고 서간도의 통화현 합니하에서는 광제회光濟會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을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피고 윤이병·윤호·유병심·신규선 등은 일찍이 일한병합에 열복하지 않고 몰래 기회를 봐서 구한국의 국권회복을 기도하고자 대정 2년 겨울부터 군산群山 부근에서 정철하·김현각 등과 누차 회합하여 밀의하고 대한교민광선회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려는 뜻을 같이하였다. 피고 4명은 차례로 경성에 와서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먼저 서간도西間島에 이주할 동지와 연락하는데 힘쓰기로 하였다. 대정 3년 5월 7일 윤호·유병심·신규선 3명이 경성을 출발하여 서간도
에 이르러 동도同島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 거주하며 광제회라는 것을 조직하고 몰래 국권회복을 획책하였다. 한편 여준呂俊·이승규李昇奎·이규준李奎俊·김창환金昌煥 등과 오가며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말하고, 바야흐로 구주전란에 고무되어 일본과 독일이 전쟁에 뛰어 드려는 기회를 노려 동지를 규합하고 자금의 조달을 협의하여 피고 윤호·유병심 두 사람이 모두 조선에 돌아가 그 일을 담당하기로 맹서하고 동지에서 수령 여준으로부터 격문檄文을 수령하였다. … 동년 8월 22일음 7월 2일 동지를 출발하여 동년 9월 12일 경성에 도착하여 피고 윤이병과 회합하고 바야흐로 서간도에 있는 동지들의 상황을 고하고, 또 휴대하고 온 앞서의 신문지를 열람시키고, 피고 등 2명의 귀선歸鮮 목적을 밝혀 그 운동에 착수할 때 마음의 동요가 없도록 도모하였으므로 치안을 방해한 자이다. 註17)
1913년 풍기에서 결성된 광복단光復團이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과 연계하여 독립군자금모집과 국내외 연락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상황에서 독립의군부도 만주의 독립군기지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국내에 잔존하고 있던 의병세력과 유림세력을 규합하여 독립의군부를 결성한 임병찬은 1914년 5월 국권의 반환을 요구하는 투서를 전국적으로 발송하고, 동시에 국권의 반환과 일본군병의 철병을 요구하는 전화와 태극기를 게양한다는 장서투서의 계획을 세웠다.
한편 독립의군부의 관련 인사들은 국내에서 비밀결사 조직인 대한교민광선회를 결성하고 국외인 서간도에서는 광제회를 결성하여 국내외를 연결시키고 동지의 규합과 군자금의 모집에 착수함으로써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독립의군부는 결성 당시에는 왕정복고를 목표로 했던 복벽주의 유림
의 독립운동단체였으나 점차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과 연계하여 독립군자금모집과 국내외 연락활동을 전개하였던 비밀결사로 전환하였다.
1910년 국권을 잃어버린 뒤 지금까지 의병투쟁이나 계몽운동을 전개했던 민족지사들은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마저 잃어버리게 되었다. 따라서 1910년 이후 독립운동기지건설에 참여하려는 민족지사들의 만주 이주는 계속되었고, 한편으로는 도만했던 지사들이 국내로 잠입하여 독립운동기지건설에 따른 인적·물적 지원을 목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 그 일환으로 국내에서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는데, 대한독립의군부·풍기광복단·민단조합·대한광복회 등이었다.
풍기에서 결성된 광복단光復團은 1913년 정월 채기중蔡基中의 주도하에 당시 풍기에 이주하여 살고 있던 전원식全元式·정성산鄭性山 등 10여 명이 조직한 비밀결사이다. 註18) 광복단 결성의 전후 사정을 『양벽도공제안실기梁碧濤公濟安實記』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봉초全鳳樵·정성산鄭星山 양공이 래방하여 시국이 날로 잘못되어 감을 논하며, “요사이 풍기에 의기義氣가 충천하는 선비 소몽素夢 채기중이 있어 생산작업生産作業에 구애받지 않고 3가三家의 재산을 모두 합하여 풍기에 혁명기관革命機關을 비밀히 설치하고 엄밀히 전국 의려義旅의 잔당殘黨 장교將校와 모험용사冒險勇士
를 모집하여 바야흐로 대사를 도모할 계획입니다. 공께서 마땅히 가서 논의하고 지휘함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은 흔연히 풍기로 따라 가서 채공과 더불어 하룻저녁 뜻을 나누고 마침내 사생을 함께 하자는 약속으로 혼인을 허락하여 초례일醮禮日을 정하고 돌아온 즉, 공의 계자季子이며, 날짜는 계축癸丑 2월 15일이다. 이해 정월 다시 출발하여 만주를 다녀와서 성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만주에서 일이 끝나지 않고 또 감기가 들어서 부득이 체류하게 되니 본가로 서신을 보내 그대로 혼행婚行을 치르도록 명하였다. 고로 밤을 도와 치행治行하였다. 그러나 정한 날은 이미 지나 2월 30일에야 겨우 머슴 한 사람에 두 필의 폐백을 지도록 하고 배행配行과 신랑新郞이 모두 걸어서 풍기로 갔다. 풍기읍에 이르러 초두의 주점에서 소몽이 사는 마을을 물은 즉 과연 멀지 않았는데, 경주에서 초행醮行이 왔다고 하니 동지 10여 인이 나와서 맞이하였다. 註19)
풍기광복단은 채기중이 주도하여 전국의 의병장 및 용력을 갖춘 인사를 단원으로 조직한 혁명기관으로 무력투쟁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겠다는 독립운동단체이다. 이것은 1911년 전개된 중국의 신해혁명과 같이 새로운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독립의 달성이라 할 수 있다.
채기중은 함창군咸昌郡 : 현 상주군 함창면 이안면利安面 소암리素岩里에서 1873년 태어나 1902년 풍기에 이주하여 살고 있던 인물 註20)로 전원식·정성산 註21) 등과 더불어 처음 광복단의 조직을 계획하였다. 이들 3인은 가산을 합하여 광복단의 자금으로 삼고 전국의 의병장과 용력을 갖춘 인사들을 규합하였다. 양제안의 막내 아들 양한성의 초례행렬을 맞이한 ‘동지 10여 인’이 이들이었다. 이들은 의병에 참여하였던 경력의 소지자들로 풍기면
동부리東部里와 서부리西部里 일대에 우거하고 있거나 주변지역에서 참여하였던 인물들이 아닌가 한다. 註22)
채기중은 광복단을 결성하고 전국적으로 단원을 결속하는 과정에서 양제안 註23)을 영입하였고, 그의 아들 한성과 자신의 딸을 혼인시켜 연비관계를 맺었다. 양제안은 과거 진천기군鎭川起軍·김산의진·홍주의진洪州義陣·
산남의진山南義陣 등에 참여한 의병장으로 영일군 죽장면 두마리 보현산에 은거하였던 인물이다. 그가 풍기광복단의 결성에 참여하게 된 것은 함께 의병활동을 전개했던 동지들을 규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풍기광복단의 단원은 채기중상주·유창순庾昌淳 : 천안·유장렬柳璋烈·한훈韓焄 : 청양·강순필姜順必 혹 秉秀, 풍기·김병렬金炳烈·정만교鄭萬敎·김상오金相五·정운홍鄭雲洪 : 괴산·정진화鄭鎭華 : 예천·장두환張斗煥 : 천안·황상규黃尙奎 : 밀양·이각李覺 등이었다. 註24) 이들은 풍기광복단 결성 초기의 단원들로 대부분 의병적인 인물이거나 『정감록鄭鑑錄』에서 말하는 십승지지十勝之地로 알려진 풍기에 우거寓居한 인사들이다. 특히 의병 출신의 강순필·정진화 등 경북 북부지역 출신들은 이강년의진의 의병이었고, 註25) 유창순·한훈 등 충청도 출신들은 민종식의 홍주의진洪州義陣의 의병이었다. 註26)
채기중이 상주에서 풍기로 들어가 우거하면서 광복단을 결성할 때, 이들의 영입이 이루어졌다면, 이들 외에도 충청도와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의병출신자들과는 밀접하게 기맥을 통하고 있었을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풍기광복단의 강순필은 1914년 9월 결성된 민단조합民團組合에 가담하여 경북 북부지역의 이강년의병진 출신 예천인 조용필趙鏞弼·정진화鄭鎭華·윤창하尹昌夏 등을 풍기광복회에 영입하였다. 더욱이 민단조합의 단원이었던 문경 이은영李殷榮·예천 김낙문金洛文·아산 이세영李世永 등은 1913년 임병찬이 조직한 대한독립의군부에 참여하고 있던 의병 출신으로 이들을 통해 충청도 등지의 의병출신자들과도 기맥을 통하는 등 깊은 유대관계였다.
1910년 국권을 잃어버린 뒤 국내에서 항전기반을 상실한 의병 출신
의 인사들은 새로운 대일항전의 기지로서 만주를 설정하였다. 이들이 만주로 망명하여 활동하는 과정에서 상호 교통이 이루어졌음은 말할 것도 없고, 만주에서 국내를 왕래하며 국내의 근거지를 설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풍기광복단이 결성되었다.
풍기광복단의 방략은 만주의 독립운동기지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자금모집을 목표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우선 풍기광복단의 단원들은 비밀결사를 결성 과정에서 서간도에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던 망명지사들과 직접 연락을 취하며 왕래하고 있었다.
양제안은 풍기광복단에 참가한 뒤 1913년 정월 만주에 들어가 활동하였고, 만주에서 만난 박상진과 이복우李福雨를 풍기의 채기중에게 소개하였다. 註27) 양제안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결성 초기부터 풍기광복단은 만주의 독립운동기지와 관계를 맺고 군자금의 모집과 청장년의 국외 이주를 추진하고 있었다.
풍기광복단의 채기중은 모험용사 80여 명을 조직하여 만주로부터 권총과 탄환을 구입하고 전국에 걸쳐서 부호의 금고를 강탈하여 군자금으로 제공하기로 하였다. 註28) 채기중은 강병수와 함께 군자금 탈취를 계획하고 강원도 영월군 상동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중석광에 광부로 잠입하여 활동하였으며, 친일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수합의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註29)
이와 같이 한말의 의병 및 그와 관련이 있는 인사들이 조직한 풍기광복단
은 만주 독립운동기지건설을 지원하기 위해 연락을 취하며 일본인이 경영하는 광산이나 친일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국내에 기반을 둔 독립운동단체가 비밀결사활동을 통해 국외의 독립운동기지를 지원함으로써 항일독립운동의 국민적 기반을 마련한다는 투쟁 방략에 따른 것이었다.
풍기광복단은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와 합류하여 1915년 7월 15일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로 발전하였다.
민단조합은 1914년 9월 경북 문경지역에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결성된 비밀결사이다. 1918년 이동하·이은영·김낙문·이식재李湜宰·이세영 등이 체포되면서 조직이 노출되었다. 註30)
문경지역은 소백산맥을 배경으로 한 천혜의 요새로서 문경군 동로면東魯面 적성赤城은 동학교도의 근거지였고, 함창의 태봉은 동학교도의 봉기 이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지역은 일제의 침략으로 직접적인 압박을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1896년 이래 의병들과 일본군의 격전이 거듭된 곳이었다. 1894년 안동에서 결성된 서상철의 갑오의병과 1896년 을미의병기 안동의병진을 비롯한 7개 군 연합의병진의 태봉전투는 함창 태봉에 주둔한 일본군 병참부대의 공략이 목표였다. 또 1896년 을미의병과 1905년 이후 의병투쟁에서 창의하였던 문경 출신 이강년이 풍기·순흥·예천, 그리고 충청도의 제천·단양 등지의
의병세력을 규합하여 활동하였다. 이러한 의병세력을 기반으로 조직된 것이 민단조합이었다. 註31)
민단조합 결성을 주도한 인물은 의병대장 이강년 휘하에 있던 이동하를 비롯하여 이강년의 조카 이식재, 이강년의 군자장 최욱영崔旭永, 순국의사 김순흠金舜欽의 아들 김낙문 등이었다. 이들은 한말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의병전쟁에서 활약하던 의병출신으로 국권상실 이후 재기를 모색하고 있었다. 민단조합의 조합원 중 강봉주·이은영은 1912년 결성된 대한독립의군부에 참여하였으며, 채기중 등은 1913년 결성된 풍기광복단을 주도했던 의병출신이었다.
민단조합의 결성은 이동하가 주도하였다. 이강년의진의 참모장으로 활동하던 이동하는 이강년이 피체된 뒤 강원도 영월로 도주하였다가 최욱영·이명상 등과 함께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뒤 1912년 7월 노병직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상주읍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0월 노병직·구동식보은·손일현경산·강봉주연산·김정오 등과 선산의 장승원으로부터 군자금을 강탈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동하는 음력 12월 동지 권병칠의성·조용필예천·김성추의성 등과 중국의 안동현으로 망명하여 회인·통화·유하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14년 9월 귀국하였다. 그후 문경·안동지역, 충북 충주, 경기도 여주 등지를 무대로 하여 민단조합을 조직하였다. 註32)
이동하는 민단조합의 결성에 앞서 이은영·이무영 형제와 이종황황간·권영직황간 등과 비밀리에 협의하여 서울에 본부를 두기로 하였다.
그뒤 문경에 내려 온 이동하는 민단조합을 결성하면서 자신은 충남민단조합장, 이은영은 충북민단조합장, 이세영은 경북민단조합장을 맡았다.
민단조합의 주요 구성원은 이강년의병진에 참여하였던 양반유생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외에 대한독립의군부와 풍기광복단, 그리고 의병세력이 참여하고 있는데, 최욱영·채기중·노병직盧炳稷·김동연金東淵·강병수·강봉주·권병칠權秉七·조용필趙鏞弼·김성추金聲秋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註33)
이동하는 문경군 동로면당시 예천 출신으로 1896년 1월 창의하였던 이강년의 문경의진에 종사로 참여하였고, 1907년 이강년이 다시 봉기하자 참모參謀와 군자장軍資將을 역임하였던 인물이다. 註34) 1908년 6월 이강년이 청풍淸風 작성鵲城에서 부상을 입고 피체된 뒤 의병진이 무너지자 이강년의진의 군자장 최욱영·이명상 등과 재기를 도모하였다.
성명 | 생몰년 | 신분 | 거주지 | 관련단체 | 활동상황 | 비고 |
이동하 | 1856~ 1919 |
양반 | 경북 문경 | 이강년의진 | 문진의진 종사 이강년의 참모·군자장 민단조합의 충남민단조합장 |
1990 애국장 |
이은영 | 1868~ 1921 |
양반 | 충북 영동 | 독립의군부 | 대한독립의군부 참여 | 1990 독립장 |
김낙문 | 1872~ 1942 |
양반 | 경북 안동 | 이강년의진 | 민단조합 대한독립의군부 가입 |
1992 건국포장 |
이식재 | 양반 | 경북 문경 | 이강년의진 | 민단조합 제천 근부면사무소 습격 |
||
이세영 | 1869~? | 양반 | 충북 제천 | 독립의군부 | 홍주의진 민종식의진 참모장 이강년의진 감군장 대한독립의군부 참여 후 만주 망명 |
1963 독립장 |
최욱영 | 1855~ 1919 |
양반 | 경북 문경 | 민긍호의진 | 이강년의진 민긍호의병진 참여 이강년의진 군자장, 민단조합 제천 근북면사무소 습격 |
1997 국민장 |
노병직 | 1855~? | 양반 | 경북 상주 | 이강년의진 | 성재 허전의 문인 김운로와 소리산에서 창의 이강년의진 좌종사 이동하와 군자금 모집 |
1968 국민장 |
강병수 | 1882~ 1921 |
양반 | 경북 상주 | 이강년의진 풍기광복단 |
이강년의진 종사 이동하와 군자금 모집 민단조합 제천 근북면사무소 습격 |
1963 독립장 |
강봉주 | 양반 유생 |
충남 공주 | 노병직부대 | 의병장 노병직 부하 독립자금 모집 중 피체 |
||
조용필 | 1867~ 1946 |
양반 참봉 |
경북 예천 | 이강년의진 풍기광복단 대한광복회 |
한말 토포장, 참봉, 직강 군자금모집 경고문 발송 |
1977 대통령표창 |
이동하는 국권상실 이후 1911년 12월 23일 만주로 건너갔다가 1914년 9월 귀향하여 김낙문·이은영 등 의병 동지들을 규합하여 민단조합을 결성하였다. 1918년 1월 민단조합의 조직이 일경에게 노출되면서 피체된 이동하는 5월 30일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하고 있던 중, 1919년 6월 청주 감옥에서 일경의 고문으로 의식이 불명인 상태에서 석방되어 고향인 동로면 명전리鳴田里로 오던 중 고향 마을이 보이는 소구리재에서 순국하였다. 註35)
이은영은 13도창의대진소 총대장 이인영의 아우로 의병에 참여하였
다. 이인영은 1908년 1월 부친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문경으로 돌아왔다가 상주를 거쳐 충북 영동군 황간면 금계동에 이거하였다. 그후 이인영은 1909년 6월 7일 피체되어 9월 20일 순국하였다. 註36) 이은영은 1913년 9월 임병찬이 조직한 대한독립의군부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1914년 4월 대한독립의군부의 조직이 노출되어 관련자가 체포되면서 이은영은 경기·강원·충북·경북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14년 9월 이동하가 국내로 잠입하자 함께 민단조합을 결성하였다. 註37)
김낙문은 예천군 김천군 출신의 양반유생으로 순국열사 김순흠 註38)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춘달春達이고 자는 모죽慕竹이다. 1907년 3월 이강년이 제천에서 창의하자 그의 막하로 들어가 단양전투와 충주전투, 그리고 청주전투에 참가하였으나, 일경에 체포되어 3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註39) 1908년 9월 아버지 김순흠이 단식 순국한 뒤 1911년 민단조합을 결성한 이동하에게 군자금을 제공하였고, 노병직·김동연·강병수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3년 임병찬이 조직한 대한독립의군부에 가맹하기도 하였다. 註40)
이식재는 이강년의 생질甥姪이다. 최욱영·강병수 등과 함께 제천군 근북면사무소를 습격하여 100원을 탈취하였으며, 그뒤 충북 및 경북 일원에서 활동하다가 김낙문의 권유를 받고 민단조합에 가맹하였다.
이세영은 1895년 홍주의진에 참가하였고, 1897년 육군참위陸軍參尉에 임명되어 육군정위陸軍正尉로 승진하였다. 1906년 민종식의진閔宗植義陣의 참모장, 1907년 7월 이강년의진李康秊義陣의 감군장監軍將으로 참여하였다. 1907년 10월 이세영은 의병 90명을 거느리고 좌군장으로 활동하던 중, 註41) 1908년 이강년이 부상을 입고 피체되자 귀향하였다. 그후 1913년 대한독립의군부에 가맹하였으나 1914년 5월 그 조직이 노출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이동하를 만나 민단조합에 참여하였다. 註42)
최욱영의 호는 청계淸溪, 자는 송산松山으로 문경 출신의 의병장이다. 1907년 원주의 민긍호와 기맥을 통하여 신림 안강리神林 安康里에서 창의한 뒤, 제천·단양·영월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횡성에서 교전 중 총상을 입었다. 1907년 8월 이강년의병진에 참가하여 군자장軍資將이 되었고, 1908년 청풍 작성전투에서 이강년이 부상으로 피체되자 귀향하여 권태준權泰俊으로 변성명하여 은신하였다. 1913년 2월 의병 김재성金在性으로부터 광무황제의 밀서를 받고 부하들과 함께 군자금 모집과 동지 규합을 시작하였다. 1914년 11월 민단조합에 참여하여, 12월 김낙문 등과 제천 근북면사무소를 습격하여 100여 원을 탈취하기도 하였다. 1915년 6월 공주지방법원에서 강도교사죄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19년 8월 순국하였다. 註43)
노병직은 상주군 화동면 이소리以所里 출신이며, 전직 참봉으로 이강년의병진에 좌종사佐從事로 참여하였다. 註44) 1908년 이강년이 피체된 뒤 의병진이 무너지자 재기를 위해 1911년 이동하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註45) 1912년 강봉주·손요득孫了得 등을 시켜 안동 하회의 참봉 유시일柳時一의 금품을 탈취하였다는 죄목으로 1913년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註46)
강병수는 호가 신암信菴이며 문경 출신으로 일명 강순필姜順必이다. 그는 이강년의병진에 종사從事로 참여하였고, 1908년 이강년이 피체된 뒤 의병진이 무너지자 재기를 위해 1911년 이동하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기 시작하였고, 1914년 제천 근북면사무소를 습격하여 100여 원을 탈취하기도 하였다. 註47)
권병칠權秉七·조용필·김성추金聲秋 등은 이강년의병진에 참여한 인물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예천과 의성에 거주하고 있었다. 註48) 그중 조용필은 한말 용궁현 내하면 지보촌의 집강執綱으로 화적토벌에 참여하여 탁월한 용력과 의협심으로 명망을 떨친 인물이다. 註49) 1907년 8월 이강년의병진에 소모召募로 참여하였고, 그후 풍기광복단·민단조합·대한광복회 등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민단조합원을 비롯하여 이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은 의병출신이다. 신분적으로는 대부분 보수적인 양반유생 출신이며, 지역적으로는 소백산맥 남쪽 낙동강 연변의 예천·문경·상주 일원의 인사들이다. 또 이들은 풍기광복단·민단조합·대한광복회의 단원이거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민단조합은 의병세력을 규합한 비밀결사로 처음부터 대한독립의군부나 풍기광복단과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대한독립의군부는 1913년 1월 호남지역에서부터 조직되기 시작하여 1914년에는 거의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었다. 그리고 대한독립의군부 활동의 방향과 방법을 제시한 「관견」을 전국에 배포하였다. 민단조합에서도 이 「관견」을 접수하였고, 대한독립의군부의 활동에 참여하였다. 註50)
1914년 9월 민단조합을 결성한 이동하는 1915년 이후 경성에서 이은영·이무영李茂榮·이종황李鍾晃·권영직權寧直 등과 동지의 규합과 자금의 조달을 계획하였다. 먼저 권영직을 경남 밀양으로 파견하여 박인근朴仁根·김강년金康年·유영봉柳永奉을 경성으로 불렀다. 그리고 박인근을 의군부 정위正尉·김강년을 의군부 참위參尉·유영봉을 의군부 참령參令에 임명하여 사령장을 주고 군자금의 출금을 약속 받았다. 이들은 밀양으로 귀환하여 1916년 3월 군자금을 가지고 경성으로 오던 중 성환역에서 체포되었다. 4월 박인근과 이종황은 징역 3월에 처해졌고, 이동하는 도주하였다. 註51)
한편 민단조합은 풍기광복단과 한층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1916년 10월 김낙문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강원도 영월의 중석광 운영자금을 강탈하기 위해 채기중 등 부하 10여 명을 광부로 위장하여 파견하였다. 곧이어 이식재와 조우경趙禹卿·趙在夏을 파견하였으나 실패하였는데, 註52) 채기중은 풍기광복단의 중심인물이다. 그리고 이동하의 경우에도
일찍이 이강년의병진에 참여한 바 있는 의성의 권병칠·예천의 조용필·의성의 김성추 등과 도만하였고, 그뒤 권병칠·조용필·김성추 등은 풍기광복단에 참여하였다. 註53)
1914년 9월 민단조합의 결성을 전후하여 단원들은 의병의 잔존세력 또는 그들과 연계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이동하는 1911년 4월 노병직과 같이 부하들을 이끌고 풍기 등지에서 부호들을 대상으로 활동자금을 마련하고 있으며, 7월에는 노병직·한익원韓翌源 등과 상주읍을 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 이동하는 10월 20일 노병직상주·구동식具東植 : 보은·손일현孫日鉉 : 경산·강봉주연산·김정오金正五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1916년 6월 이동하는 자신의 명의로 군자금 200원을 제공하라는 격문을 작성하여 이식재로 하여금 경북 예천군의 부호 박심수朴尋洙를 대상으로 군자금조달계획을 실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식재의 경우에도 1914년 11월 최욱영·강병수 등과 같이 충북 제천 근북면사무소를 습격하여 100여 원을 강탈하였고, 충북·경북지역에서 동지를 규합하기도 하였다. 김낙문의 경우에도 노병직·김동연·강병수 등 10여 명과 함께 활동하였다. 註54)
1918년 1월 이동하·이은영·김낙문·이식재·최욱영 등이 충북 제천경찰서에 검거되어 보안법위반 및 강도범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와 같이 민단조합은 충북 및 경북 북부지역에 거주하던 의병출신의 복벽주의 유림들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였다. 대한독립의군부·풍기광복단 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의병적 활동을 통해 군자금을 모집하여 만주 독립운동기지건설을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음력 7월 15일 풍기광복단과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가 합류하여 결성하였다. 대한광복회는 1918년 그 조직의 전모가 노출될 때까지 국내외 독립운동단체 중 가장 규모가 컸고, 광범하게 활동하였던 단체였다.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이 합류하게 된 배경은 양 조직의 인적 교류에서 기인한다. 1913년 정월 풍기에서 결성된 광복단이 채기중·양제안 등을 중심으로 만주와 연락을 취하며 독립군기지에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고 있을 때, 박상진은 대구를 중심으로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 있었다. 박상진은 1913년 정월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 양제안을 만나 채기중을 소개받았다. 풍기광복단에서 양제안은 대구·만주 등지에서 만나는 이복우·박상진 등을 채기중과 연결시켰고, 註55) 나아가 산남의진에서 함께 활동한 바 있는 우재룡을 박상진에게 소개하기도 하였다. 註56)
양제안의 『양벽도공제안실기』에서는 박상진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은 만주에서 명성이 널리 알려졌는데, 하루는 건장한 청년 두 사람이 찾아 와 울면서 국사國事를 말하기를 “주권을 회복하는 계책이 장차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선생의 고명하신 지견知見으로 장래를 선도善導하여 주심이 어떠하겠습니까.” 공이 말하기를 “풍기에 채기중蔡基中이 있으니 진정한 의사요 또 영웅이다. 바야흐로 어진이를 부르고 의사를 맞이하고 있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가서 참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고로 이복우李福雨와 박상진朴尙鎭은 만주로부터 풍기로 와서 공의 차자 한위漢緯와 채기중를 방문하여 만나 대사를 결정하고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였다. 註57)
박상진은 규장각 부제학 박시규朴時奎의 장남으로 경남 울산군 농서면 송정松亭에서 태어났지만, 곧 백부 박시룡朴時龍에게 출계하여 경북 경주군 외동면 녹동鹿洞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자는 기백璣伯, 호는 고헌固軒이었다. 박상진은 6세인 1889년부터 경주 녹동에서 4종형 창고蒼皐 박규진朴煃鎭에게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註58)
박규진은 일찍이 족친 소암小庵 박시술朴時戌에게 수학하다가 묵은默隱 박시주朴時澍와 함께 안동의 척암拓菴김도화金道和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 후 박시주는 서파西坡 유필영柳必永의 문하에서 더 공부한 뒤 진보 흥구현 청송군 진보면 흥구리로 이거하였고, 박규진은 울산으로 귀향하여 1898년까지 지내다 역시 진보 흥구로 이거하였다. 이때 박상진은 거의 10여 년을 박규진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註59)
1898년 박상진은 경주의 대지주 최현교崔鉉敎의 장녀 영백永伯과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4종형 박규진이 진보 흥구로 이거하자 역시 박상진도
흥구로 들어갔다. 진보 흥구는 산수가 아름다운 천험의 요새지로 세상을 등지고 은거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이미 이곳에는 1894년 선산 임은林隱에서 이거하여 1896년 진보에서 창의했던 유학자 방산 허훈과 김산의진에서 창의했던 왕산 허위, 그리고 성산 허겸 註60)3형제가 은거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영양군 입암 출신의 권영만權寧萬이 이곳 진보에 우거하고 있었으며, 또 이곳에서 멀지 않은 청송 보현산의 두마리斗磨里에는 허위와 김산의진에 참여하였던 벽도碧燾 양제안도 은거하고 있었다.
1899년 초 박상진은 허위의 문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부터 박상진은 이들과의 교분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이들은 모두 을미의병에서 창의하여 국권회복을 모색한 척사적인 의식을 가진 유림이거나 의협적 인물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허위는 이건석李建奭 등과 더불어 구국상소를 올리는 등 적극적인 행동력을 통해 자신의 경륜을 펼치고 있었다. 특히 박상진은 허위의 인품과 경륜, 그리고 그의 의병활동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듣고 그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1899년 2월 1일 허위의 경륜과 포부를 듣게 된 고종황제는 환구단 참봉을 제수하였고, 이에 허위는 상경하였다. 註61) 박상진도 1902년 상경하였다. 이미 서울에는 스승 허위, 생부 박시규, 양부 박시룡 등이 벼슬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상진은 허위의 문하에서 정치와 병학을 수학하며, 註62) 점차 노골화되어 가는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한국침략을 직접 체험하였다.
1904년 1월의 러일전쟁과 2월의 한일의정서의 체결에 따라 전국적인 비난과 반대가 격렬하게 일어났다. 특히 허위의 배일격문排日檄文 註63)은 유림들의 배일언론투쟁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도화선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허위를 따르던 박상진은 철저히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박상진은 1905년 2월 개교한 양정의숙 전문부 법률학과에 입학하여 1908년 제1회로 졸업하였다. 註64) 이때 백산 안희제도 1905년 상경하여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하였다가 1년 후 양정의숙으로 옮겨 1908년 박상진과 함께 졸업하였다.
한편 박상진은 양정의숙에 입학한 1905년 중국인 반종례藩宗禮를 따라 중국 천진을 여행하며 무기를 구입하였고, 나아가 개화선각자를 비롯한 주한외교관 및 외국인 선교사들과 교제를 통해서 신문물과 신사상을 수용하기도 하였다. 註65) 또 1907년에는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의 소개로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되는 이준李雋을 만나기도 했다. 註66)
박상진은 양정의숙에서 법률학을 공부하며 신학문과 신사상을 수용
하였지만,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투쟁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허위는 1906년 6월 이강년·여중룡·우용택·이병구 등 김산의진의 동지들과 창의를 논의한 바 있었는데, 註67) 1907년 가을 비로소 경기도 연천에서 창의하였다. 註68) 당시 양정의숙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고 있던 박상진은 직접 의병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강화의영에 5만 원의 자금과 무기를 제공 註69)하는 등 적극적으로 허위의 의병활동을 지원하였다. 더욱이 박상진은 1906년 허위와 함께 의병활동을 했던 평민의병장 신돌석과 형제의 의를 맺고 있었고, 註70) 1907년에는 김좌진과 의형제를 맺는 것 註71) 등으로 보아 의병세력과 유대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허위의 창의에 무심할 수 없었다.
1908년 10월 21일 허위가 순국하자 박상진은 혼자 반장返葬하였고, 나아가 초려草慮에서 상례를 다 하였다. 註72) 당시의 상황에서 피신할 수밖에 없었던 가족들을 대신해 스승의 시신을 수습한 후 예를 다해 장례를 치렀고, 스승의 뜻을 계승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조선을 독립케 하려는 결의”를 하게 되었다. 註73)
박상진은 양정의숙을 졸업하던 1908년 3월 설립된 교남교육회에 가입하였다. 이때 교남교육회에는 그의 생부 박시규를 비롯하여 1906년 결성되는 신민회에 참여한 남형우·박중화·상호·유인식·이경희·장지연, 1908년 9월 결성되는 달성친목회에 참여한 서상일·배상렴·
남형우·이근우·김용성, 1910년 결성되는 대동청년단에 참여한 안희제·서상일·이원식·최병찬·박중화·남형우·손영순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허위와 을미의병기에 김산의진에서 창의한 여영조·여중룡·허환, 의령의진을 결성하여 진주의진의 의병장 노응규와 협력하였던 이청로 등의 보수적인 유림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교남교육회 회원들은 일찍부터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하였던 계몽적인 유생이었고, 을미의병 이후 상경하여 현실정치에 참여하여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는 반한일의정서·반황무지개척요구·반일진회 등을 목표로 배일언론투쟁을 전개하였던 보수적인 유생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교남교육회 활동을 통해 교육의 진흥을 통해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10년 국권상실 이후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교남교육회에 참여했던 박상진도 교남교육회 회원들과 교류하며 사상적인 변신을 모색하고 있었다. 특히 박시규가 교남교육회에 평의원을 역임하고 있었던 점과 허위의 형 성산 허환이 교남교육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었던 점은 박상진의 현실인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물론 박시규는 대한제국의 현직 관료로 신교육을 받은 경험이 없어 신학문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시 국내·외적인 정세에 대해 어느 정도는 파악하여 교남교육회에 참여하는 등 현실을 인식하였고, 신문물이나 신서적에 계몽되어 진보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박상진의 경우에는 박시규와 허위를 인연으로 재경 영남 인사들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계몽운동 참여는 이러한 사실을 반증한다.
박상진은 1908년 9월 조직된 달성친목회의 회원으로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달성친목회는 1908년 9월 5일 이근우·김용선 등의 발기로 조직된 계몽운동단체로 그 목적은 한국인 청년의 교육·실업 장려를 표방하였다. 나아가 재경 영남인들이 조직한 교남교육회와 그 하부조직인
법률야학강습소·하기강습소·청년교육구락부 계몽운동과 교육활동에 치중하였다. 1910년 국권상실과 함께 겨우 명맥을 이어가던 달성친목회는 1913년 9월 서상일에 의해 그 조직이 정비·강화되면서 비밀결사로서의 성격을 가진 독립운동단체로 이행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달성친목회는 대동청년단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으며, 1915년 음력 정월 15일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의 조직기반이 되었다. 註74)
박상진이 달성친목회에 가입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교남교육회에서 활동하던 남형우·안희제·서상일 등과의 인연으로 함께 달성친목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다. 남형우는 경북 고령 출신으로 보성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교남교육회의 평의원을 역임하였는데, 고령 출신의 김재열이나 대구 출신의 서상일 역시 보성중학교 학생으로 참여하였다. 또 안희제는 경남 의령 출신으로 사립 흥화학교興化學校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1905년 상경하여 보성중학교 경제과에 입학하였다가 1년 후 양정의숙으로 옮겨 1908년 박상진과 함께 졸업하였다. 서상일은 대구 달성학교를 졸업한 뒤, 1907년 보성학교 법학과에 입학, 1909년 졸업하였다. 그는 1908년 9월 달성친목회에 참여하였으며, 1909년 10월 교남교육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1909년 10월 안희제와 함께 대동청년단을 결성하기도 했다.
남형우·안희제·서상일 등은 교남교육회 계통의 계몽지식인들이었다. 안희제는 경남 일원에서 계몽운동을 전개하며 근대적인 학교설립에 앞장서서 활동하던 중 대동청년단의 결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고, 서상일은 대구를 중심으로 달성친목회를 결성하여 동지들을 결속하고 있었다. 또 남형우는 보성중학교 교사로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박상진은 교남교육회를 인연으로 이들과
동지적 결합을 하게 되었다. 註75)
1908년 10월 21일 허위가 순국하자 박상진은 매국대신을 처단하려는 의열투쟁을 계획하였다. 1909년 1월 17일 융희황제의 남서순행을 계기로 송병준 등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으나 동래온천에서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註76)
1910년 봄 박상진은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 판사로 임명되었으나 즉시 사임하였다. 註77) 왜냐하면 허위의 순국과 국권을 약탈하기 위한 일제의 사전포석이 진행되던 상황에서 더 이상 현실에 안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10년 박상진은 신민회에서도 활동하였다. 박상진이 신민회의 회원이었다는 구체적인 자료는 없지만, 이에 관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註78)
◇ 고헌 박상진 선생 약력
동년1910년 겨울에 대한독립의군부 간부로 피임되자 곧 왜적에게 비밀이 탄로되어 일부 간부가 왜병의 총탄에 절명되고 사산망명하여 국내에서는 해산되여졌다.
단기 4244년 신해 춘에 안동현 신의주 안동여관을 독립운동 기관 여관으로 설치하고 독립의군부 간부이시던 신단재申丹齋씨와 양기탁씨가 체류하여 국내외의 연락을 취하여서 선만 각 대표총회를 개최코 각각 분담 임무를 정할 시 국내
의 책임은 선생이 피선되었다.
◇ 고 광복회 총사령 고헌 박상진씨의 약력
4243년 경술 춘에 판사시험에 합격되여 평양법원판사로 임명되었으나 즉시 사임하셨다. 동년에 남북만주로 일주하고 귀로에 함경도 강원도 산곡을 역류하야 동지들을 서울로 중심 삼아 회합토록 요약하고 … 국조國祚가 왜노에게 그만 멸절되자 씨는 분석忿惜의 심을 금치 못하여 형제제종을 회합하여 말씀하시기를 실국한 인민이 학교를 졸업한들 하何에 용用하리오. 전생명을 국가에 바쳐야 된다하고 가족을 경북 경주 외동면 녹동 구별장에 귀임시키고 씨는 즉시 중국 안동현 신의주에 여관을 설치하여 독립운동기관으로 정하고 차를 주도할 인人으로 구독립의군부舊獨立義軍府 간부 신채호·양기탁·이윤재·김좌진·손일민 제씨를 정하여 국내외 연락을 하도록 하고 국내의 전책임은 씨가 담당하였다. 만주로 ○○하여 왕往에 김대락·이상룡·이시영 형제가 신흥학교를 경영함을 보고 대규모의 추진을 계획하였음. 그후 길림성 이차구 신흥촌으로 분교함에 각 분교 중 중심교가 됨. 귀국 후 동지들을 소집하여 보부상을 가장하여 만주로 이주 입군할 것을 선전하여 대성과를 수收하였다.
위의 자료에 의하면, 대한독립의군부는 신채호·양기탁·이윤재·김좌진·손일민 등과의 관계로 볼 때, 신민회를 지칭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내용은 신민회의 독립군기지창건운동에 관한 것이다.
신민회는 1910년 3월 일부 간부들이 국외 망명을 결정하고 국외의 독립군기지를 창건하기로 하였다. 5월에는 나머지 국내 간부들의 일부도 집단적으로 서간도지방에 이주하여 독립군기지 창건사업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신민회 총감독 양기탁은 직접 자신이 일제의 병탄 직후인 1910년 8월 말 독립군기지 후보지로서의 간도 일대를 답사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9월과 10월에 7차에 걸쳐 시찰원을 파견하여, 11
월 서간도를 독립군기지 후보지로 선정하였다. 같은 해 12월 중순 양기탁의 집에서 열린 서간도 이주회의 후 신민회의 서간도 이주민 모집사업은 급진전되었다. 1911년 일제가 ‘안명근사건’과 ‘안악사건’을 일으키고, 뒤이어 ‘105인사건’을 조작하였으나, 신민회의 독립군기지 창건사업은 계속되어 1911년 1월 이동녕·이회영 등과 이상룡 등의 안동유림이 도만하였다. 이들 이주민에 의해 신한민촌이 건설되었고, 1911년 4월 경학사와 신흥강습소가 창설되었다.
박상진이 신민회에 가입한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1910년 봄 신민회가 해산한 후 그 간부들이 독립군기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세 차례 만주와 연해주, 중국 상해 등지를 방문한다.
박상진은 1910년 만주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고광복회총사령고헌박상진씨의 약력」에서 볼 때, 1910년 만주를 여행하고 돌아온 박상진은 서울에 있던 가족들을 귀향시켰다. 그리고 신민회 해산 후 1911년 초 안동현에는 양제안, 신의주에는 손일민을 앞세워 각기 안동여관을 설치하여 경영하게 하였고, 註79) 신채호·양기탁·이윤재·김좌진·손일민 등은 국내외 연락을 하도록 하고 국내는 자신이 담당하였다.
1911년 봄 박상진은 다시 만주와 연해주의 우국지사들을 방문하여 이상룡·김동삼·이시영·허혁 등을 만나 이들이 경영하고 있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보고 국내 지원을 담당하기로 한 뒤 귀국하였다. 박상진은 1911년 10월 15일 양부 박시룡의 회갑연을 빌미로 국내의 동지들을 소집하여 만주의 소식을 전달하고 만주 이민사업을 통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는 신흥강습소의 후원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리하여 박상진은 이민과 양병을 목적으로 한 유세대를 편성하였는데, 이 유세대를 경천어동지회敬天語同志會라고 하였다.
1911년 말 다시 만주로 들어간 박상진은 상해 등지를 여행하였다. 이때 박상진은 상해·남경 등지에서 신해혁명과 독립운동계를 돌아보았다. 註80) 박상진은 신해혁명을 직접 보고 비밀·폭동·암살·명령 등의 방략으로 국권회복의 달성을 생각하였으며, 그에 따른 방대한 군자금의 필요성을 통감하였다. 註81)
1912년 만주에서 귀국한 박상진은 대구에서 자본금 24만 원의 곡물상 상덕태상회를 설립하였다. 註82) 박상진은 평소 서상일·최준 등과 인적관계를 맺고 있었고, 또 일찍이 개명한 대부호가 안주하고 있던 대구를 택하여 상덕태상회를 설립하였다.
1913년 박상진은 다시 상해 및 남경을 여행하였고, 남경에서 손문을 방문하였다. 이때 박상진은 우리의 처지와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역설하면서 도와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 결과 중국의 군관학교 내에 조선인의 훈련을 위한 특별부의 설치를 승낙 받았다. 그러나 한국 독립군기지에 대한 문제는 동삼성장에게 미루므로 성과가 없었다. 이때 손문은 박상진에게 감사의 기념품으로 자신이 소지하고 있던 미국식 권총 한 자루
를 기증하였다. 註83)손문이 1913년 8월 일본으로 망명하기 이전의 일이다. 그후 박상진은 동삼성장 장작림張作霖을 만나 10여 회에 걸쳐 군사기지문제를 논의하였다.
1913년 봄 박상진은 만주에서 양제안을 만났다. 그는 1913년 정월 만주에 들어가 활동하고 있었다. 박상진은 이복우와 함께 그를 만나 풍기에서 광복단을 조직하고 활동하고 있던 채기중을 소개받았다. 註84) 1913년 정월 풍기에서 결성된 광복단은 채기중·양제안 등을 중심으로 만주와 연락을 취하며 독립군기지에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고 있었다. 풍기광복단에서 양제안은 산남의진에서 함께 활동한 바 있는 우재룡이나 대구·만주 등지에서 만난 이복우·박상진 등을 채기중과 연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1913년 9월 대구의 서상일이 달성친목회를 재흥하여 강화하였다. 서상일은 1913년 3월부터 9월까지 중국의 장백과 러시아의 니꼴리스크를 방문하고, 하얼빈·장춘·봉천 등지를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註85) 이때 서상일은 상업시찰로 위장하고 해외의 독립운동 정세를 파악하고 돌아왔다. 당시 러시아의 니꼴리스크에는 친형 서상규徐相奎가 잡화상을 경영하고 있었고, 여기에서 노백린·이동휘·이상설 등을 만났다. 註86) 9월 21일
귀국한 서상일은 달성친목회를 재흥하였는데, 이때 만주에서 귀국한 박상진도 뜻을 같이하여 참가하였다.
1914년 3월경 박상진은 상덕태상회와는 별도로 대구에 5천 원을 투자하여 포목무역상을 개설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군수산업은 뜻밖에 호황을 맞았다. 그러나 9월 생사가격의 폭락으로 6개월만에 포목무역업을 정리하고 말았다. 그러나 상덕태상회는 무역상으로서 1915년까지도 건재하였다. 더욱이 박상진은 상덕태상회를 거점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만주를 왕래하고 있었는데, 1914년 음력 11월경 중국에서 후일 광복회의 황해도지부장 이관구를 만나게 되었다. 註87) 1915년에 들어서면서 만주나 노령을 연결하여 적극적인 지원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박상진은 임병찬을 중심으로 결성된 대한독립의군부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12년 결성된 대한독립의군부는 1913년 1월 호남지역의 조직이 완료되었고, 1914년 3월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하기 위해 북한지역에서 활동하던 중 5월 23일 노출되었다. 이때 박상진도 허위의 아들 허학, 충남 청양의 사위 이기영 형제, 경남 함안 출신의 의병장 정재호, 허위의병진의 정철화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註88)
박상진은 1915년 정월 15일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의 단원으로 단원으로 참가하였다. 박상진은 의병활동과 관련을 가지고 있던 정운일·변상태·황병기 등과 밀착하여 활동하였다. 이리하여 박상진은 풍기의 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의 관련인사들과 교유를 확대하며 활동기반을 확대하고 있었다.
1915년에 들어서면서 만주나 노령을 연결하여 지원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필요성이 있었다. 조선국권회복단의 최대 과제는 만주나 노령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군대양성과 무기의 구입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설립 초기 국권회복단의 단원들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재력을 가졌으므로 자신의 재산을 희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재산만으로는 독립군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었다. 따라서 대구를 중심으로 국내 자산가들로부터 일정액을 갹출하여 군자금을 조달하기로 계획하였다.
박상진은 국권회복단의 정운일·최병규·최준명 등을 내세워 대구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의 모집에 나섰다. 이때 박상진은 만주에서 반입한 권총 10자루 중 일부를 김재열과 최준명에게 보관시키고 있었다. 1915년 4월경 최준명은 서창규를 만나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다시 6월경 최병규·정운일·김재열 등이 권총을 소지하고, 서창규를 만나 재차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돈이 없다는 이유로 끝내 거절당했다.
1915년 7월 15일 광복회가 결성되었다. 註89) 조선국권회복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박상진이 풍기광복단의 채기중 등과 제휴하여 조직하였다. 풍기광복단은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력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의병적 인사들이 조직한 단체였기 때문에 박상진과 뜻을 함
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한말 의병활동에 참가했던 우재룡·권영만 등 의병 출신과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의 이시영·정순영·홍주일·정운일·최준 등이 박상진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리하여 박상진과 채기중을 중심으로 광복회의 조직은 발전되어 갔다. 註90)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대한광복회의 결성 이전부터 박상진을 비롯한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의 인사들은 매우 밀착되어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대한광복회의 결성이 이루어졌다.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의 채기중·박상진·이복우·우재룡 등은 대한광복회를 결성하는데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양제안은 이들의 동지적 결속에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풍기광복단과 민단조합, 그리고 조선국권회복단의 조직을 배경으로 국내외를 연결하는 활동을 전개하다가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1915년 7월 15일 대구에서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결성 당시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소몽은 세상사가 제대로 되지 아니함을 마음 조리게 여겨 선발하여 비밀히 모험용사대 80여 명을 조직하고 만주로부터 권총과 탄환을 구입하여 전국에 출몰하면서 부호의 금고를 강탈하여 군자금으로 공급하고자 했다. 박상진은 본시 경주의 부호로 여러 해 동안 대구에 있으면서 동지를 규합하는데 가산을 많이 썼으나 아직 여력이 있었다. 박상진은 경주에 거주하고 대구를 왕래하며 적극적으로 운동을 전개하였다. 박상진과 채기중 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며 모험단원 최고부인 우재룡·권영만·유창순·김한종 등 다수인이 왕래하였다. 공의 장자
는 두마리斗磨里에 있었던 까닭에 기맥을 통하기 위하여 통신으로 연락하는데 공의 삼부자三父子의 힘을 입었다. 註91)
대한광복회는 결성 초기에 80여 명의 단원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회원 상호간의 연락을 양제안과 그의 두 아들이 보현산의 두마리와 풍기에 거주하며 맡고 있었다. 대한광복회의 결성 초기 회원이 약 80명이라 할 때, 조선국권회복단에서 대한광복회로 합류한 인사는 박상진·김재열·정운일·이시영·홍주일·최준 등 투쟁적인 인물이거나 자산가들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대한광복회는 풍기광복단의 의병적 맥락을 강하게 계승하고 있었다.
대한광복회의 조직은 경상도지역뿐만 아니라 전국 각도 및 서간도와 북간도에까지 확대하였다. 그 조직망과 주요 인물을 다음과 같다. 註92)
사 령 관 박상진
지 휘 장 우재룡·권영만
지 부 장 채기중경상도·김한종충청도·이병찬전라도·김선호경기도
최봉주함경도·조현균평안도·이해량황해도·김동호강원도
본 부 회 장 박상진 이하 최준·이복우 등
만주사령관 이석대
국 외 손회당만주 안동여관·정순영봉천 삼달양행 정미소 등
위의 조직망과 주요 인물을 통해서 볼 때 광복회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까지 그 조직을 확산하였다. 광복회는 본부를 중심으로 국내지부와 길림광복회만주지부, 그리고 국내외에 연락기관을 설치하였다.
대한광복회는 결성 이후 각도별 지부장을 주축으로 하는 최고부 인사를 중심으로 꾸준히 조직을 확산해 나가고 있다. 대한광복회의 조직 확산에 특히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인사는 박상진·채기중·우재룡·김한종 등이었다. 그중 경상도에서 채기중·양제안·박상진·우재룡 등과 충청도에서는 김한종·엄정섭·김경태 등의 의병전쟁계열이 본회의 활동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박상진은 강원도 삼척의 김동호金東浩와 경성의 김노경金魯卿을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김동호는 삼척군 원덕면장으로 있던 1913년 4월 임원리임야측량사건林源里林野測量事件으로 대구형무소에 복역 중이었는데, 여기 대구형무소에서 1916년 음력 9월 박상진을 만났다. 註93) 김노경은 1917년 음력 10월 초 경성 남문여관南門旅館에서 만나 대한광복회의 취지를 설명하고 권유하여 가입시켰다. 註94) 따라서 대한광복회의 조직은 강원도와 경성에까지 확산되었다.
채기중은 경북 함창 출신으로 직접 의병투쟁에 참가하지 않았던 양반유생이다. 註95) 유생의 신분으로 그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는 풍기 이주 이후이며, 이미 이곳에는 팔도에서 모여든 우거자寓居者들이 집결하고 있었다. 광복회로 조직을 확산한 뒤 채기중은 박상진과 협의하여 전라도의 이병호李秉昊를 가입시켰으며, 註96) 또 충청도 예산의 김한종도 가입시켰다. 註97) 이로써 대한광복회의 조직은 전라도까지 확대되었다. 우재룡도 박상진의 명령을 받고 만주로 가서 주진수朱鎭洙·양재훈梁在勳·손일민孫一民·이홍주李洪珠 등과 접촉하여 서간도의 부민단扶民團
이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대한광복회를 연결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註98)
이정희李庭禧는 경북 청도 출신으로 석주 이상룡과 왕산 허위와 친분에 의해 박상진과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할 것을 피로서 맹세하였다. 박상진이 광복회를 결성하자 이정희는 이석홍李錫弘·양한위梁漢緯·유진태兪鎭泰·권영목權寧睦 등을 가입시켰고, 1916년에는 박상진과 사돈이 되었다. 註99)
대한광복회는 1918년 1월 관계자의 활동이 발각되면서 확산된 조직의 전모가 어느 정도 드러났다. 일제의 판결문과 『고등경찰요사』를 통해 대한광복회 회원을 정리하면 〈표 8〉과 같다.
성명 | 생몰년 | 신분 | 직업 | 거주지 | 경력 | 관련단체 | 활동 | 비고 |
박상진 | 1884~ 1921 |
양반 | 상업 | 경주 | 평리원 판사사퇴 양정의숙 |
국권회복단 | 허위 문인, 1911 만주 여행, 1912 상덕태상회 |
|
채기중 | 1873~ 1921 |
양반 | 유생 | 함창 | 풍기광복단 | 영월금광습격 1917 정승원 처단 1918 박용하 처단 |
||
임세규 | 1875~ 1921 |
영주 | 1917 정승원 처단 1918 박용하 처단 |
|||||
권국필 | 1866~ | 양반 | 서당교사 | 영주 | ||||
손기찬 孫基瓚 |
1886~ 1979 |
칠곡 | 풍기광복단 | 만주 안동에서 여관업 1917 정승원 처단 협조 |
||||
조용필 | 1867~ 1946 |
서당훈장 | 예천 | 이강년의진 | 풍기광복단 민단조합 |
토포장·참봉·직강 군자금모지병고문발송 |
||
윤창하 尹昌夏 |
1883~ | 양반 | 농업 | 예천 | 군자금 모집 경고문 발송 | |||
정진화 | 1873~ 1945 |
양반 | 농업 | 예천 | 풍기광복단 | 광복회 군자금 수합 | ||
조재하 | 1872~ | 농업 | 영주 | 부호 | ||||
강병수 | 1882~ 1921 |
양반 | 문경 | 이강년의진 | 민단조합 풍기광복단 |
1914 근북면사무소 습격 | ||
이종영 李鍾韺 |
양반 | 안동 | 부호 | |||||
김재열 金在烈 |
1884~ 1948 |
미곡상 | 고령 | 보성·경신 학교 |
달성친목회 국권회보단 |
이두훈 문인 | ||
정재목 鄭在睦 |
영천 | 부호 | ||||||
이형덕 李亨德 |
||||||||
권영만 權寧萬 |
1877~ 1964 |
양반 | 유생 | 영양 | 진보의진 | 대한광복회 참모장 1917 경주우편마차 습격 1920 주비단 조직 |
||
우재룡 禹在龍 |
1884~ 1956 |
양반 | 군인 | 창녕 | 산남의진 | 산남의진 선봉장 1915 광복회 조직 |
||
손일민 孫一民 |
1884~ 1939 |
양반 | 밀양 | 임시정부 | 1918 대한독립선언 1919 서로군정서 참모 1925 신민부 검사원 |
성명 | 생몰년 | 신분 | 직업 | 거주지 | 경력 | 관련단체 | 활동 | 비고 |
김한종 | 1883~ 1921 |
상민 | 서당훈장 | 예산 | 홍주의진 | 1916 조선총독 암살 계획 | ||
장두환 | 1894~ 1921 |
상민 | 농엄 | 천안 | 풍기광복단 | 대한광복회 충남 책임자 1917 장승원 처단 |
||
유창순 庾昌淳 |
1889~ 1944 |
농업 | 괴산 | 홍주의진 | 풍기광복단 | 1917 장승원 처단 | ||
김경태 金敬泰 |
1880~ 1921 |
상민 | 농업 | 청양 | 구한구군 홍주의진 |
1916 조선총독 처단 계획 | 金永根 | |
김재창 金在昶 |
1887~ 1961 |
양반 | 미곡상 | 예산 | 군자금 수합 인천에서 곡물상 경영 |
|||
조종철 趙鍾哲 |
1891~ 1957 |
양반 | 농업 | 천안 | 풍기광복단 | 張容淑 등 충청도 부호 대상 군자금 모집 |
||
김재풍 金在豊 |
1884~ 1960 |
양반 | 서당훈장 | 예산 | 군자금 모집 활동 | |||
강석주 姜奭周 |
1896~ 1950 |
양반 | 농업 | 아산 | 인천 거점 활동 1927 유교부시회 참가 |
|||
성문영 成文永 |
1873~ 1961 |
양반 | 아산 | 홍주의진 | 풍기광복단 | |||
성달영 成達永 |
1887~ 1993 |
양반 | 아산 | 홍주의진 | 천안 연락 거점 활동 | |||
이재덕 李在德 |
1888~ 1961 |
양반 | 미곡상 | 예산 | 김재정의 제자 인천 연락 거점 군자금 모집 활동 |
|||
김상준 金商俊 |
1885~ 1944 |
상민 | 농업 | 예산 | 김재정의 제자 군자금 모집 |
|||
정태복 鄭泰復 |
1888~ | 면장 | 홍성 | 1927년 유교부시회 활동 | ||||
황학성 黃學性 |
1883~ 1947 |
미곡상 | 청양 | 인천 연락 거점 1912 인천미두취인소 중개인, 국내 연락책 |
||||
유중협 柳重協 |
1891~ | 상민 | 농업 | 천안 | 풍기광복단 | 천안지역 정보수집 군자금모집 활동 |
||
김원묵 金元默 |
1892~ 1962 |
양반 | 농업 | 예산 | ||||
김재철 金在哲 |
1873~ 1930 |
예산 | ||||||
정우풍 鄭雨豊 |
1879~ | 상민 | 농업 | 아산 | ||||
신양춘 申陽春 |
1884~ | 괴산 | ||||||
정운기 鄭雲淇 |
1887~ 1943 |
서당훈장 | 괴산 | 풍기광복단 | 1914 보은면장 박창빈朴昌彬에게 권총 10정 인수 |
성명 | 생몰년 | 신분 | 직업 | 거주지 | 경력 | 관련단체 | 활동 | 비고 |
이관구 李觀求 |
1885~ 1952 |
양반 | 상업 | 송화 | 대성학교 숭실학교 명륜대학 |
동제사 가입 1916 안동 삼달양행 장춘 상원양행 설립 |
||
성낙규 成樂奎 |
1889~ | 양반 | 신문기자 | 해주 | 매일신문사 | 기자·총독 암살시도 신채호와 친밀 |
||
조선환 曺善煥 |
1888~ | 양반 | 유생 | 신천 | 의병 협력 | 유인석, 최익현 문인 총독 암살 시도 |
||
이석희 李錫熹 |
1889~ | 양반 | 유생 | 해주 | ||||
변동환 邊東煥 |
1870~ | 양반 | 유생 | 평산 | 의병 협력 | 유인석 문인 1894 진사과 합격 |
||
조인혁 曹仁爀 |
1872~ | 양반 | 유생 | 해주 | ||||
김동호 金東浩 |
1877~ 1928 |
면장 | 삼척 | 1913 임원리임야측량사건 | ||||
이병호 李秉昊 |
1886~ | 보성 | 군자금 조달 | |||||
이명서 李明瑞 |
광주 | 곡물상 군자금 조달 |
||||||
어재하 魚在河 |
서울 | |||||||
최면식 崔勉植 |
1891~ 1941 |
광주 | 1914 군자금 수합증 피체 1917 대한광복회 |
|||||
문응극 文應極 |
1882~ | 미곡상 | 용천 | 안동현 삼달양행 |
대한광복회 회원 명단을 보면, 경상도 17명, 충청도 20명, 황해도 6명, 그외 강원도·전라도·경기도·평안도 등 기타 지역이 6명으로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다. 우선 주목되는 것이 대한광복회는 풍기광복단의 의병적인 맥락을 계승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박상진이 참여하여 대한광복회를 조직함으로써 보다 광범위한 의병세력이 규합되었
으며, 동시에 계몽운동계열의 투쟁적인 인사들까지 영입되었다.
풍기광복단의 단원들은 대부분 이강년의병진이나 민종식의병진에 참여했거나 관련을 가진 인사들이 주축이 되었다. 그밖에 경상도의 허위의병진과 산남의진, 황해도와 평안도의 유인석의병진·최익현의병진·박문일의병진 등에 참여했던 인사들까지 여기에 가세하였다.
먼저 〈표 8-1〉에서 경상도지역의 인사들을 보면, 강병수 등이 이강년의병진으로 풍기광복단에 참여하였고, 대한광복회로 조직이 확대되면서 역시 이강년의병진에 참여했던 조용필 등 경북지역의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註100) 한편 김산의진·민종식의병진·산남의진에 참여했던 양제안과 허위의 문인 박상진이 풍기광복단의 채기중과 연결되면서 을미의병시 진보의진의 권영만·산남의진의 우재룡 등의 의병출신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김재열을 비롯해서 정운일·이시영·홍주일·최준 등 조선국권회복단의 단원도 참여하였다.
충청도지역 인사들의 참여도 이강년의병진과 깊은 관계 속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을미의병시 문경에서 창의한 이강년은 호좌의진유인석의병진에 참여했고, 1907년 제천에서 다시 창의하였는데, 여기에 관련된 의병계열의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표 8-2〉에서 볼 수 있듯이 한훈과 유창순은 민종식의 홍주의진 출신으로 풍기광복단에 참여했고, 註101) 엄정섭은 이강년의병진에 참여한 인물로 풍기광복단에서 활동하였다. 註102) 이미 풍기광복단에 가담한 유창순·엄정섭 등과의 인연으로 역시 홍주의진 출신인 김한종도 참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김한종에 의해 홍주의진 출신인 권상석·윤병일·정태복·
성달영·성문영 등이 참여한 것으로 보이며, 그리고 김한종의 부친 김재정의 제자인 김상준과 이재덕이 참여하였다. 또 김원묵·김재철·김재인·김성묵은 김한종의 집안과 대대로 친분이 두터웠으며, 김재풍·김재창은 김한종의 삼촌이었다. 註103)
한편 황해도를 비롯한 평안도 출신의 대한광복회원은 위의 〈표 8-3〉에서 볼 수 있는 인사들을 포함하여, 이관구의 『의용실기』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확인할 수 있다.
양택선梁擇善 : 海州·고후조高後凋 : 海州·윤헌尹헌 : 中和·이문성李文成 : 海州·박원동朴元東 : 鳳山·오찬근吳瓚根 : 海州·박동흠朴東欽 : 泰川·양봉제梁鳳濟 : 博川·임용승林庸昇 : 博川·조용승趙鏞昇 : 豊川·조백영趙百泳 : 豊川·이학희李鶴熹 : 海州·조현균趙賢均 : 定州·최정현崔正鉉 :龍岡·이근석李根奭 : 信川·한성근韓聖根 : 信川·이화숙李和淑 : 瓮津·유준희柳準熙 : 寧邊
위의 인사들은 황해도와 평안도 출신으로서 유인석·최익현·박문일·송병선의 문인들이다. 유인석의 문인인 양택선·변동환·조선환·고후조·윤헌 등은 유인석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참여하였다. 오찬근은 최익현의 문인이었던 그의 아버지 오봉영吳鳳泳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박동흠·양봉제·임용승은 박문일의 문인이며, 조용승·조백영은 송병선의 문인이다. 그리고 이학희·이석희·조현균·최정현 등은 정확한 계열을 알 수 없으나 명망 있는 유생이었다. 그 외에 변호사인 이근석, 청림교 교주 한성근, 부호인 이화숙, 『매일신보』 기자인 성낙규, 서울 금융연합회 이사인 유준희 등도 명망이 있는 인물들로 대부분 위정척사론자들이었다. 註104)
이와 같이 대한광복회의 회원은 경상도 출신의 박상진·채기중·우재룡·권영만 등을 주축으로 하여 의병전쟁계열의 인사들이 참여했다. 그리고 점차 전국 각처로 활동 영역을 확산하여 충청도·전라도·황해도 등지의 의병세력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대한광복회는 풍기광복단의 목적을 계승한 독립운동단체였다. 즉 풍기에서 채기중은 “생산작업生産作業에 구애받지 않고 3가三家의 재산을 모두 합하여 풍기에 혁명기관을 비밀히 설치하고 엄밀히 전국 의려義旅의 잔당장교殘黨將校와 모험용사를 모집하여 바야흐로 대사大事를 도모할 계획” 註105)하에 혁명기관으로서 대한광복단을 결성하였다. 이것은 국권상실 이후 국내에서 활동기반을 상실한 의병계열의 인사들이 만주나 노령으로 망명하여 1911년 중국 신해혁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대한광복회가 결성되는 1915년은 대외정세가 매우 급전하는 시기였다.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과 일본의 산동반도 침략에 따른 양국의 개전설開戰說, 그리고 1915년 일본의 21개조 요구와 원세개의 매국적인 승인 등으로 중국 국민의 대일개전설對日開戰說은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혁명기관으로서 대한광복회의 설립은 일제의 무단통치로부터 무력투쟁을 통한 독립의 쟁취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여기서 혁명은 군사행동을 전제로 한 일제의 구축이었고, 이것은 세계 각국의 혁명이나 중국 신해혁명의 교훈에 따른 공화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혁명이었다. 즉 박상진·김한종 등 대한광복회원이 경찰의 심문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대한광복회의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여 공화정共和政을
실현하는데 있다”는 것이나, 註106) 대한광복회가 전라도에 보낸 통문에서 “민국民國을 건설하자면 국왕이 없는 기회를 이용해야 한다” 註107)는 것에서 보면, 대한광복회는 근대국가 이념으로서 공화주의共和主義를 표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급변하는 대외정세 속에서 박상진 등의 국권회복론은 대한광복회의 결성으로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국권회복론은 그의 비밀秘密·폭동暴動·암살暗殺·명령命令이라는 4대 강령四大綱領으로 나타났고, 이것은 다음과 같은 대한광복회의 실천사항으로 더욱 구체화되었다.
(1) 무력준비武力準備 : 일반부호의 의연義捐과 일본인이 불법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해 이로써 무장을 준비함.
(2) 무관양성武官養成 : 남북만주에 사관학교士官學校를 설치하고 인재를 교양해 사관을 채용함.
(3) 군인양성軍人養成 : 우리 대한의 의병·해산군인 및 남북한이주민을 소집해 훈련 채용함.
(4) 무기구입武器購入 : 중국과 로국에 의뢰해 구입함.
(5) 기관설치機關設置 : 대한·만주·북경·상해 등 요처에 기관을 설치하되, 대구에 상덕태尙德泰라는 상회의 본점을 두고, 각지에 지점 및 여관 또는 광무소를 두어 광복회의 군사행동·집회·왕래 등 모든 연락기관으로 함.
(6) 행형부行刑部 : 일본인 고등관과 우리 한인 반역분자는 수시수처隋時隨處 포살을 행함.
(7) 무력전武力戰 :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본인 살육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 완성을 기함. 註108)
이와 같은 실천 사항에 따라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의 모집, 무관과 군인으로 구성된 독립군의 양성, 무기구입, 활동 조직의 설치, 친일 부호의 처단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위의 강령과 실천 사항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군자금의 모집은 부호의 의연금과 일제가 징수하고 있는 세금의 압수, 각지에 설치하는 잡화상의 이익금으로 충당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무관과 군인으로 구성된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계획이었다. 여기에 소요되는 인적 자원은 의병 및 해산군인과 만주 이주동포를 소집하여 충당하고, 이들을 만주의 독립군기지에서 훈련하여 무장투쟁과 국내진공을 감행한다는 것이었다.
셋째, 광범한 상업조직을 설치하여 연락기관으로 삼는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즉 “국내 요지 1개소에 1만 원의 자본으로 100개소의 표면상 잡화점을 개업하여 그 이익으로 국권회복자금을 마련하고 무기를 구입하여 준비를 마친다” 註109)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으로 박상진은 상덕태상회를 설립하고 국내·외 각처에 상업 조직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넷째, 행형부를 설치하여 일본인 고관 및 한인 반역자를 처단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요인을 제거하겠다는 의도인 동시에 한인의 독립의식을 고취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일어난 대표적인 사건은 1916년 이관구의 조선총독암살기도사건과 장승원張承遠·박용하朴容夏 등의 처단사건이었다.
다섯째, 무력이 완비되면 최후의 목적인 무력전을 단행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제적 여건이 성숙될 때, 만주의 독립군과 국내의 독립운동단체가 서로 호응하여 독립전쟁을 통하여 일본을 구축한다는 최종의 목
표인 국내진공작전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대한광복회는 그 조직망을 확충하고 무력투쟁을 실현하기 위한 강령을 마련하여 박상진의 주도하에 추진하였다.
일제의 무단폭압정치하에서 국권회복을 표방한 비밀결사 형태의 독립운동단체인 대동청년단이나 조선국권회복단은 그 활동 거점으로 상업조직을 활용하고 있다. 註110) 대한광복회의 경우에도 매우 광범한 상업조직을 이용하고 있었다.
대한광복회가 활동 거점으로 삼았던 상업조직은 대구의 상덕태상회를 본거로 영주의 대동상점을 비롯하여 삼척 김동호金東鎬·광주 이명서李明瑞·예산 김재창金在昶·연기 박장희朴壯熙·인천 이재덕李在德과 황학성黃學性·용천 문응극文應極 등의 국내 거점과 만주 안동安東 삼달양행·장춘 상원양행 등 국외 거점이 있었다. 註111) 그외에 여관이나 음식점 또는 서울 어재하·안동 이종영·고령 김재열·영천 정재목鄭在睦 등의 사가私家도
연락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연락 거점은 “모든 연락기관의 본부를 상덕태상회에 두고 한만韓滿 각 요소와 북경·상해 등에 지점 또는 여관·광업소 등을 두어 연락기관으로 삼는다”는 강령 제5항에 따라 설치된 것이었다. 註112) 당초 대한광복회는 100개소의 잡화상을 설치하여 상업으로 그 활동을 위장할 계획이었는데, 대부분 곡물상이 설치되었다.
그 이유는 곡물상이 연락에도 편리하지만, 재정적인 면에서도 유익했기 때문일 것이다. 1910년대는 무단통치와 회사령 등으로 민족기업이 성장할 수 없는 때였으므로 곡물상과 같은 농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상업이 가장 손쉬운 것이었고, 또 충분한 거래량이라던가 광범한 교역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곡물상은 거래를 가장한 자금의 송달도 가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군자금의 제공자는 중소지주일 수밖에 없었으니 일제의 눈을 피하여 금전거래도 용이하였다. 註113)
대한광복회의 거점으로 설치된 곡물상 중에서 그 본거지는 박상진이 경영하던 대구의 상덕태상회였으나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註114) 다만 영주의 대동상점에 대해서는 그 설치 경위와 활동 내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국내에서는 일인의 통치로 수비병기관이 주밀하여 잠적활동이 매우 곤란하므로 군자금 기백만원을 거둬들여 만주로 보내어 밖으로는 로국과 중국을 연결하고 안으로는 병사를 훈련하여 사직의 광복을 도모하는 것으로 상계로 삼았다. 암암리에 풍기의 학교 훈도 박제선朴濟璿·춘양의 교원 유명식柳明植·박계양朴繼陽·
이교덕李敎悳·권영목權寧睦·정의극鄭義極을 시켜 풍기·순흥·영주·춘양·내성의 유산가를 망라하여 대동상회를 조직케 하였다. 권영목으로 하여금 금고를 장리掌理케 하였다. 註115)
영주 대동상점은 대한광복회의 결성 초기에 군자금의 모집을 위해 개설된 잡화점이다. 1918년 3월 영주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이던 권영목이 피체됨으로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註116) 여기에서 우리는 대한광복회의 활동 조직이 영주를 비롯한 주변 일대에 매우 치밀하게 형성되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대동상점사건의 판결문에 따르면 징역 8개월의 형을 선고받는 박제선을 비롯하여 무죄 방면되는 이교덕·정응봉·김노경, 그리고 권영목·유명수 등이 연루되고 있으며, 한편으로 박상진과 접촉하고 있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대동상점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은 대한광복회원이거나 그에 동조하고 있는 풍기·순흥·영주·춘양·내성 등지의 부호 및 교원들이다. 이들은 대동상점이 표면상으로는 잡화점이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만주를 중심으로 해서 국권회복의 활동을 개시할 것이므로 이 비용을 얻기 위해서는 영주에서 상업을 경영하다가 남만주로 이동하여 조선인을 규합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거사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註117) 이것은 당시 국권회복운동이 표방하던 독립운동기지의 건설이라는 방략에 따른 것으로 대한광복회를 비롯한 국내의 국내 독립운동단체들의 활동 목적과 같은 것이었다. 우선 그 활동 경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박제선은 일한합방 당시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 교유로 생도들에게 병합의 불가함을 주장타가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은 이래 일제 당국의 주목을 받고 있던 인물로 당시 풍기공립보통학교豊基公立普通學校훈도였다. 평소 배일사상을 품고 있던 그는 권영목과 뜻을 같이 하고 구한국의 국권을 회복할 계획을 세운다는 모의에 따라 필요한 자재를 모을 수단으로 상업을 경영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915년 8월 영주에서 잡화점인 대동상점을 개설하고, 1916년 이교덕·정응봉·유명수 등을 가맹토록 하였다. 당시 권영목과 이교덕은 영주의 부호 자제였으며, 정응봉은 풍기에서 서당을 열고 있었고, 유명수는 박제선의 처남으로 봉화 내성공립보통학교乃城公立普通學校 부훈도로서 사직하고 점원이 되었다.
자본금은 이교덕이 대부분을 출자한 것 같고, 그 외 권영목이 토지 80두락, 유명수가 토지 70두락을 대여 형식으로 투자하였다. 그리고 표면상 권영목은 경영을 맡았으나 실제로는 박제선이 주재하였고, 권영목은 보통상인과 달리 상업보다 독립운동에만 전념한 것 같다.
한편 박제선은 1917년 8월 독립운동기지를 선정하기 위해 만주를 시찰하고 봉천에 이주한다는 목표하에 서울로 돌아와서 서울에서 김노경과 계획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동년 11월 이후 권영목·정응봉·이교덕 등과 경성 남문여관에서 밀의하고 먼저 권영목을 만주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권영목으로 하여금 만주지방에서 조선인을 규합하여 길림독군 맹사원의 허락하에 군대교육을 실시함과 동시에 조선인의 자제들을 교육하다가 시기를 보아서 국권회복운동을 개시하기로 하고 영주의 대동상점을 폐쇄했다. 한편 이들은 남문여관에서 박상진과 접촉하기도 하였다. 註118)
이와 같이 영주의 대동상점은 박제선·권영목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설립된 잡화점이었다. 박제선은 만주·경성·영주를 왕래하며 박상진 등과 기맥을 통하고 만주 이주를 모색하였다. 특히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대한광복회가 이미 설립된 만주의 독립운동기지를 후원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독립운동기지의 건설을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대동상점의 구성원을 통해서 볼 때 대한광복회는 조선왕조의 복벽을 주장하는 보수적인 유림에서 출자한 의병계열의 인사들만이 참여한 것이 아니라, 신교육을 받은 인물들도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각지에 상업조직을 설치하고 활동하던 대한광복회는 우선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해서 가장 시급한 문제가 군자금의 모집이라고 생각하여 실행에 옮겼다. 처음 대한광복회를 결성한 박상진은 우선 자신의 재산부터 헌납하여 설립한 상덕태상회를 통해 독립운동자금을 지속적으로 마련코자 하였다. 註119) 이러한 점은 풍기광복단의 결성 초기 채기중의 경우에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독립운동자금으로 헌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국내 요지에 1개소 1만 원의 자본으로 100개소의 표면상 잡화점을 개업하여 그 이익으로 국권회복의 자금을 마련하고 무기를 구입하여 준비를 마친다” 註120)는 방침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 부호들의 의연금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는 밀접한 관련 속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미 박상진은 1915년 4월경 최준명崔俊明으로 하여금 서창규徐昌圭를 만나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요청토록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다시 6월경 최병규崔丙圭·정운일鄭雲馹·김재열金在烈
등이 권총을 소지하고, 서창규를 만나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돈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바 있었다. 註121) 1915년 7월 15일 대한광복회가 결성된 뒤 먼저 박상진은 의연금 모집에 호응하지 않던 서우순을 협박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대구권총사건이다. 즉 1916년 음력 8월 초순 박상진은 조선국권회복단에서 같이 활동하던 이시영·정순영·홍주일·정운일·김재열 등과 대구의 최병규崔丙圭·최준명·김진만金鎭萬·김진우金鎭禹 등에게 명령하여 군자금모집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註122)
한편 박상진은 1916년 6월부터 이관구·성낙규·조선환 등과 안동현에서 조선총독의 암살을 계획하였다. 이때 박상진은 이관구에게 권총 2정을 제공하였고, 성낙규와 조선환은 이 권총을 각기 한 자루씩 가지고 서울에 잠입하였다. 곧이어 이관구도 서울에 왔고, 권총은 광복회의 새로운 계획에 사용하기 위해 박상진이 파견한 권성욱權成旭 : 百草·國弼·相錫에게 인계되었다. 귀국한 박상진도 서울에서 체류하던 중 총포화약령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註123)
대구권총사건으로 체포된 국권회복단원들은 1917년 6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김진우 12년, 김진만·정운일·최병규 10년, 권국필·최준명 2년, 박상진·김재열 6월, 홍주일 5월, 이시영은 4월의 징역을 각각 선고받았다. 註124)
대구권총사건으로 박상진은 1917년 11월 6개월 만기 출옥해 침체된 국내조직의 재정비와 함께 신흥무관학교와 관계를 복원하는 등 다시 강력한 투쟁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운산금광의 수송마차습격사건으로 일
제에 체포된 만주사령관 이진룡 후임으로 김좌진金佐鎭을 임명하였다. 註125) 그밖에도 1918년 직산금광稷山金鑛 註126)과 상동광산上東鑛山 註127)의 습격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또 김좌진을 중심으로 중국화폐의 위조를 계획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註128)
그후 대한광복회는 경상북도를 비롯한 각처의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갹출하기로 하고 다음과 같이 계획하였다.
본인김한종은 유창순과 박상진의 집을 찾아갔더니 박은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군자금의 조달이 급선무이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선全鮮 각 부호를 조사하여 이들에게 포고문을 송달하고 금전을 갹출시킬 예정이므로 이에 진력하라. 이 포고문은 중국의 동지들께 부쳐 중국에서 발송키로 하고, 발송 후는 암살을 결행하여 인심을 소란케 함으로써 포고문의 위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군자금의 갹출에 힘써라. 註129)
이리하여 박상진은 경상도·충청도·강원도·전라도·황해도 등 각 도 자산가들의 주소·성명·재산액 등을 파악하여, 작성한 명단을 토대로 할당액과 포고문을 동봉, 중국 또는 국내에서 이것을 우편으로 우송토록 했다. 註130)
그리고 박상진은 대구권총사건 때와 같이 자산가들이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먼저 부호 1명을 암살함으로써 자금조달을 용이케 하는 한편 경각심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註131) 이 계획에 따라 암살대상으
로 선택된 인물이 칠곡의 장승원,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 전라도 보성의 양재학梁在學, 벌교筏橋의 서도현徐道賢이었고, 실제로 장승원암살사건과 도고면장 박용하암살사건을 통해 대한광복회를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되었다.
장승원암살사건은 박상진이 1916년 권성욱을 시켜 2차에 걸쳐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후, 1917년 11월 10일 풍기광복단의 채기중·강순필·유창순으로 하여금 단행토록 하였다. 註132) 장승원은 한말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던 중, 당시 평리원장 허위에게 의병 자금으로 20만 원을 헌금하기로 약속하였으나, 그뒤 위약하여 허위의 제자인 박상진이 처단하게 되었다. 註133)
도고면장 박용하암살사건은 1918년 1월 24일 김한종과 장두환이 주관하여 결행한 것이다. 박용하는 악질면장으로 지목되어 있었고, 또 부호로서 군자금의 헌금을 배당 받은 후에 일경에 신고를 했던 인물이다. 박용하는 우재룡이 전달한 권총으로 김한종과 장두한의 지휘에 따라 김경태金敬泰와 임세규林世圭·鳳柱가 처단했는데, 그 배후에는 박상진이 있었던 것이다. 註134)
도고면장 박용하암살사건 후 1월 27일 천안군 성환에서 장두환이 체포되고, 예산에서 김경태·임봉주 등 4인이 체포됨에 따라 광복회의 전모는 노출되고 말았다. 註135) 이어서 경상북도 경찰부에서도 엄밀한 수사에 착수하였고, 박상진은 안동 이동흠李棟欽의 집에 은신하며 국외 탈출을 계획하던 중 생모의 생명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가했다가 2월
1일 피체되었다. 또 이관구는 조선총독암살계획 이후 황해도 일대에서 군자금 수합에 열중하다가 1918년 6월 해주 조하동趙夏東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註136) 이때 만주로 피신했던 한훈은 1920년 김상옥의 암살단사건暗殺團事件으로 검거되었고, 註137) 역시 만주로 피신했던 우재룡·권영만·심영택沈永澤·소진형蘇鎭亨 등은 1920년 주비단사건籌備團事件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註138)
한편 1915년 11월 17일 경주 광명리光明里에서 일본인이 징수하여 마차로 운송하던 경주·영일·영덕 등 3군의 세금 8,700원을 우재룡과 권영만이 습격하여 탈취하였다. 註139) 그외 황해도 회원인 성낙규·조선환·이관구 등에 의해 1916년 음력 6월의 조선총독암살사건, 註140) 이미 살펴 본 영주의 대동상점사건 등이 주목된다.
대한광복회는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이 통합되어 전국적인 조직망을 가진 혁명단체로서 공화주의를 그 이념으로 하였다. 뿐만 아
니라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운동기지건설을 지원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무력투쟁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