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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마태오 13,54-58
지식이 끊기면 은총도 끊긴다
사랑하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시자 사람들은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능력에 놀랐습니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라고 묻습니다.
분명 그들이 아는 부모나 형제, 자신들에게서 그 능력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해를 추구하거나 더 많은 것을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은혜를 받으려면 그 은혜의 근원인 대상과 그 은혜에 내가 합당한 자세가 있는지 알려고 해야
합니다.
빌라도처럼 “진리가 무엇인가?”라고 하며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아이는 먼저 부모를 믿습니다.
그리고 알아갑니다.
그러나 어른은 좀 다를 수 있습니다.
지적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먼저 알려고 하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은총이 주어집니다.
당신을 알려고 하루 5분도 투자하지 않는 이에게 그들이 청하는 은총을 주실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가는 교만만 커져 하느님을 자신들의 종으로 여기게 됩니다.
6.25 동란 당시 피난 중 물에 빠져 간신히 살아나 고아가 되어 길거리에서 구두를 닦다가 열일곱 나이에 미군 부대에서 세탁 같은 허드렛일을 하던 이철호씨가 있습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알아야 했습니다.
나에게 은총을 줄 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는 미군들이 맡긴 옷가지들에서 때가 잘 빠지지 않으면 삶아 빨았습니다.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포격으로 파편을 맞아 그 수술 때문에 여차여차 노르웨이에서 살게 된 그는 남이 버린 음식을 주워 먹다 배가 너무 고파 요리사가 되고자 하였습니다.
보통 요리를 배우려면 주방에서 2~3년씩 감자만 깎는 일이 주어졌습니다.
그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요리의 종류에 따라 골라 쓸 수 있도록 감자를 여러 모양으로 깎아
놓았습니다.
나에게 은총을 줄 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던 것입니다.
바로 6개월 후에 요리를 배울 수 있었고 대학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요리 공부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공부와 일을 하고 대학은 수석으로 졸업합니다.
공부에 대한 열정이 어땠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현재 노르웨이 라면 시장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백만장자입니다.
높은 수준의 연봉을 받으며 일을 하다가 거의 30년 만에 한국에 들어와 라면을 먹었는데
너무 맛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노르웨이에 라면을 팔아보기로 결심합니다. 물론 그들은 라면을 수세미라고 부르면서 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직접 스프를 그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서 농심에 자기 이름을 딴 라면 브랜드를 만들어 노르웨이에 팔았습니다.
우스운 모습으로 CF 광고에 직접 출연하고 요리사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라면 시식을 직접 해 주었습니다.
『세이노의 가르침』의 저자 세이노도 현재는 1,000억 대의 자산가이지만, 자신이 파는 것과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사람입니다.
미군 부대에 있는 대학을 다녔을 때 먹고살고자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화장품이나 식료품들을 가방에 넣어 갖고 부유층 아파트들을 돌아다니며 팔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대부분 그런 물건들은 아줌마들이 팔았고 나 같은 남자 대학생은 전혀 없었기에 경비실을 통과하기도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문을 열어 준 고객들에게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하였다.
우선 나는 모든 상품에 붙은 영문 라벨들을 사전을 찾아가며 모조리 외웠다.
바세린 연고 하나를 팔더라도 눈 화장을 지울 때 사용하면 좋다는 내용도 잊지 않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눈 화장을 지울 때는 면봉을 사용하라고 하였고 면봉도 함께 팔았습니다.
스팸 햄을 팔 때는 새로운 요리법들도 알려 주었습니다. 결국 한 명의 고객을 만나게 되면
얼마 후 그 고객이 다른 고객을 소개하여 주었는데 정말 그 숫자가 기하급수로 늘어났으며
사전 주문도 생겨났습니다.
은총은 알려는 이에게 주어집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그의 그림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더는 우리에게 그림을 그려 주지 않았습니다.
알지 못하면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하.사.시.’를 읽게 된 계기가 현재 제가 받는 은총의 거의 모든 원인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나타나엘은 선입관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필립보의 권유로 예수님을 만나 사도까지 되었습니다.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이전의 내가 가진 지식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지금 모습대로 살고 싶어 변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입니다.
은총을 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에게 은총을 주시는 분을 알려고 하는 노력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2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 13,54-58
고향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유!
마태오 복음사가 표현에 따르면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못마땅하다는 표현은 ‘마음에 들지 않아 불쾌하다.’ ‘기대, 희망,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거북하고 싫어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유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본격적인 공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셨던 예수님께서는 전국 방방곡곡을 두루 다니시며
하늘나라의 신비를 설명하시면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십니다.
나자렛으로 향하던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설레었겠습니까?
어서 빨리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지들, 동기들과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에게도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드뎌 안식일이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고향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반응은 반반이었습니다.
예수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경탄할만한 말씀, 전무후무한 말씀에 완전히 빠져든 사람들, 마음 깊숙히 감명을 받고 그 자리에서 회개한 사람들, 결국 예수님을 구세주 하느님으로 고백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마태 13, 54-56)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릇된 질문, 그릇된 의혹으로 인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먼저 던졌어야 할 질문은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가?’ 여야 했습니다.
일단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분 말씀의 진의(眞意)를 정확하게 파악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지만, 건성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마음으로, 심장으로, 영혼으로, 전력투구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들은 사실 예수님의 말씀에 귀와 마음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결국 나자렛 사람들의 결정적인 문제는 ‘개방성의 결여’였습니다.
삶의 진리, 신앙의 진리는 인간적인 눈과 마음으로는 이해하거나 수용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그래서 신앙의 신비의 주인공이신 예수님 앞에 우선 마음과 영혼, 정신을 활짝 개방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성장 과정을 잘 알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자신의 무능력 때문이 아니라, 고향 마을 사람들의 불신 때문에 그곳에서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적은 인간 측의 활짝 열린 마음과 깊은 신앙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사람, 자신의 영혼을 완전히 개방한 사람에게는 놀라운 기적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승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기적을 계승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나자렛 사람들의 실수와 불행은 우리를 심각한 자아 성찰로 초대합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살았으며, 오랜 세월 동고동락했던 나자렛 사람들이 그분으로부터
가장 멀어지는 결과가 초래되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교회 가장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 교회 안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예수님과 가장 멀리 서 있는 존재로 전락하기는 너무나 쉽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강론>
(2024. 8. 2. 금)(마태 13,54-58)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4-58).”
1)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낮춤’을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예수님께서 시골 나자렛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모습을 취하신 것은, 또 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목수 일을 하신 것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신 ‘낮춤’입니다.
주님께서 바오로 사도에게 하신 다음 말씀을
그 ‘낮춤’의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ㄴ).”
코린토 1서에 있는 다음 말들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24-25).”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코린 1,27-31).”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것은, ‘가장 낮은 사람’도 구원하기 위해서인데, 그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려고, ‘나에게’ 오신 분입니다.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지위, 직책, 직무, 학위,
명예, 재산 따위는,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원래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학위나 직책 같은 것을 내세우면서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교만이고, 허영인데, 그 교만과 허영심도 죄가 되는 일입니다.
2)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35-36).”
‘나자렛’은 예수님께서 다니신 ‘모든 고을과 마을’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나자렛 사람들도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을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에, 나자렛에 가셨습니다.
고향이라서 특별히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그렇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향이라는 점 때문에 나자렛에 가신 일을 특별한 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할 것이라고,
또는 환영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른 고을보다는 좀 더 호의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이 환영하거나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는커녕,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보고, 즉 적대감과 반감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아마도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나자렛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나자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해석하면,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이방인들은 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데, 하느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다는 너희는 왜 나의 복음을 믿지 않느냐?”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면, “고향과 집안이라는 이유만으로 존경과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이 됩니다.
3) 루카복음을 보면,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4,29).
그 일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에게는, 그 일이 장차 자신들이 겪게 될 일에 대한 ‘일종의 예방주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파견하실 때 다음 말씀도 하셨습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마태 10,24-25)”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