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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기도가 우리네 교회에서 뜨거운 감자이다.
새벽예배에 가보면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유창한
방언기도로 좌중의 기를 죽이는 이들이 꼭 있다.
필자의 제자가 귀띔해주기를, 이름만 대면 유명한
어느 목사가, 자신은 방언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로 삼았다는 책을 써서 많은 이들이
그러한 기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방언을 하지 못하는 많은 크리스천들은 방언을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방언연습을 시키는 데를 기웃거리기도 한다.
뭐, 지인으로부터 예언연습도 시키는 데가 있다고
들었는데, 방언 연습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닌가?
필자에게 기도코칭을 의뢰한 어떤 분은 자신의
기도방식은 방언기도를 하는 것인데, 필자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를 하라고 해서
혼란스러우며 바꾸는 게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이렇듯 방언기도는 우리네 크리스천에게 뜨거운
감자이다.
필자의 칼럼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필자의
목회철학이자 사역의 원칙은 성경에 기록한 대로
가는 것이다.
성경에 없다면 당연히 인정을 하지 않고, 성경에
있는 행위라도 신비스러운 부분들은 인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신비스러운 부분들은 필자가 꼭 체험한 것만 인정한다.
왜냐면 악한 영들의 계략과 공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교묘하기 때문에 돌다리를 두드리듯 조심스럽게 하지
않으면 언제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방언을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가?
사도행전의 사도들과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라고 하였을 때, 마가의 다락방에서
전심으로 기도하자 방언이 터지면서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방언은 성령이 임재 하는 증거인 셈이다.
또한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새 방언을 할 것을 말씀하셨다.(막16:17)
그러므로 성경에서 언급한 방언은 성령의 은사중의
하나로서 믿는 자들의 표적이며 성령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통로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통상 받아들이는 방언은 어떠한가?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방언기도를 하는 것은 성경적인가?
하는 것이다.
방언이 성령의 임재라면 방언기도를 오래 한사람은
당연히 성령의 다양한 열매가 있으며 모든 기도마다
응답을 경험하며 각종 은사를 통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능력 있는 기도의 종이 되어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방언기도는 유창하게 하는데 오랜 신앙의
연륜에도 신앙이나 성품의 변화도 없고 체험도 없으며
신앙의 능력과 삶의 힘도 없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없는 자신만의 방언일 것이다.
그리고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방언하는 것은 사실
큰 문제이다.
방언이란 성령과 깊은 교제로서 몰입되는 기도가 되어야
비로소 방언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몰입이 된다고?
필자도 적지 않은 시간동안 기도훈련을 거쳐 오랜 세월
기도의 강을 건넜다.
그런데 지금도 기도를 시작하면 성령이 몰입되는 기도를
할 때까지 2,30분간 하나님을 간절히 부르며 성려의 내주를
간구한다.
그러면 서서히 몰입이 되는 것을 경험한다.
하물며 다른 이들에게 기도 코칭 하고 있는 필자의 경우도
그러한데,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몰입이 되는 사람이라면
필자가 찾아가 배워야 하는 달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거나,
아님 자신이 지어내는 방언일 것이다.
그 증거는 새로운 방언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에 몰입되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의 방언들은
새로운 방언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사람마다 주기적으로 다르기는 하지만 일 년 내내
같은 방언만 하지 않는다.
그런데 항상 똑 같은 방언만 하고 있다면 이는 오랫동안
해온 습관으로 자신도 모르게 반복하고 있는 방언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방언은 깊게 몰입되는 기도를 방해한다.
그냥 기도시간만 채우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말하자면 기도하고 있는 상태를 즐기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성령에 몰입되는 기도를 하면 기쁨과 평안이 샘솟듯
마련이다.
그래서 기도에 몰입되면 그 상태를 빠져나오기 싫다.
그러나 하루 종일 기도만 하고 있을 수도 없고, 중보기도나
간구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상태에서 다른 기도로
들어가야 한다.
하물며 성령에 몰입되는 상태를 즐기는 것도 그럴 수
없는 데, 그냥 주구장창 방언을 반복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이는 잘못된 기도의 모습일 것이다.
성령에 몰입되어 교제하는 가운데 나오는 방언이라면
분명한 성령의 열매가 있고 능력 있는 기도를 하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지어낸 방언일 뿐이다.
방언에 대한 아주 심각한 얘기를 해보겠다.
필자의 사역중의 하나는 귀신을 쫒아내는 축출사역이다.
그래서 이들을 쫒아내면서 적지 않은 정보와 지식을
갖게 되었다.
그중의 하나가 방언에 대한 것이다.
한마디로 악한 영들의 공격 방식 중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 중의 하나가 영음으로 생각 속에 넣어주는 것과
방언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이 여기에 속아서 악한 영의
노예가 되고, 이러한 교회에 속아 찾아온 불쌍한 양들도
적지 않다.
필자에게 찾아온 귀신들린 자들 중 악령의 교회인지
몰라 예배와 기도회에 참석해서 귀신들이 들어온
경우도 더러 있다.
목회자가 악령의 조종을 받는 좀비가 되었는데,
그곳 양들의 위태로운 처지야 말해 무엇하랴?
그들에게 영음으로 주는 말들은 자신들만 천국에 가며
특별한 은혜를 받고 있다는 투가 주종을 이룬다.
또한 그곳 사람들은 기도만 하면 유창한 방언이 쏟아진다.
그래서 악령의 교회에서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쫒아낼 때 그곳에 있던 목회자와 교인들이 하던 방언을
하나씩 쏟아내면서 나간다.
그렇다면 악한 영이 주는 방언은 성령이 주는 방언과
특별한 차이가 있을까?
귀신이 하는 방언은 대개 높은 음으로 기분 나쁘게
들리는 방언이 많지만 그렇다고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의미한 음절을 무한 반복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그 방언들이 아름답게 들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령의 방언이라고 집어낼만한 특징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쨌든 악령들도 방언을 유창하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령께서 최근에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의 방언은
이롭지 않다.’고 말씀해주셨다.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라면 진정성이 없이 말로만
신앙행위를 하는 자들을 일컫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가?
그렇다면 방언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입만 열면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들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이 분명하다.
이런 방언기도는 몰입되는 기도를 방해한다.
성령에 몰입되는 기도를 하려면 전심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성령의 내주를 몸부림치면서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렇지만 방언기도를 하면 아주 쉽고 편해서 자기만족의
기도로 채우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방언기도를 무시하거나 폄훼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에 몰입되어서 하게 되는 방언기도는 기도의 깊이를
더해준다.
필자는 방언기도를 자주 하지 않지만, 귀신을 쫒아낼
때라든가, 갑자기 악한 영의 공격으로 두려움이 엄습하거나,
강력한 성령의 능력을 요청할 때는 방언기도를 사용한다.
이렇듯 방언기도를 성경적으로 사용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하게 되면 금상첨화일 것이지만, 방언기도를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서 남에게 보이려는 속내, 혹은
잘못된 관행을 따라하거나, 습관적으로 타성에 젖어하는
방언기도라면 성령에 몰입되는 기도를 방해하는
잘못된 기도일 것이다.
그런 방언기도는 아무리 오래 해도 성령의 열매가 없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네 교회에서는 방언기도자체를
폄훼하거나, 성경적인 방언기도를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방언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방언기도를 하려면 먼저 성령이 몰입되는 기도를 먼저
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방언이 나오면
그 때 하면 된다. 방언기도를 하더라도 자신은 마음속으로
얼마든지 다른 기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도 때마다 방언기도에 빠져 즐기는 행위는
기도가 발전되지 못하게 하므로, 중보기도나 개인적인
간구 혹은 찬양이나 경배, 회개, 감사기도가 필요하면
다시 보통의 기도로 돌아와서 기도하길 바란다.
그렇지 않고 방언기도를 맹목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하게 되면 성령이 이끄시며 몰입하는 기도인 기도의
강을 건너지 못한다.
기도의 강을 건너야 능력 있는 기도를 할 수 있고
각종 은사를 경험하며, 영혼을 구원하는 기도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하시는 도구로 살아갈 수 있다.
끝으로, 악한 영이 주는 방언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며
자신의 방언이 성경적인지 늘 살펴보고, 일부러 방언을
연습하거나 인위적으로 방언을 하는 것을 절대 금해야
하는 것을 노파심에서 말해둔다.
그런 사람에게 악한 영이 틈타기 때문이다.
방언은 성령이 주시는 선물이지 인위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제인 토욜 아침에 신 목사님과의 방언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 자리에서, 막 16장과 행 2장의 방언은
외국어임을 제가 주장하였고 신 목사님도 공감하셨다.
다만 고전 14장1절에서의 하늘의 언어의 경우는 예외이겠지만,
신 목사님의 경우의 한정엔, 공감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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