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백성 가운데 가난한 이들 말고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2열왕 24,8-17; 마태 7,21-29 /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2024.6.27.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멸망과 희망이 교차되는 이야기입니다. 남 유다 왕실의 임금 여호야킨은 조부 선왕 요시야가 어렵사리 개혁해 놓은 노선을 계승하지 않고 “자기 아버지(여호아하즈의 아들 여호야킴)가 하던 그대로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습니다.”(2열왕 24,9) 이리하여 나라의 힘이 쇠약해지고 말았으므로, 앗시리아 제국의 뒤를 이어 일어난 바빌론 제국의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군대를 보내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남 유다 왕국을 멸망시켰습니다. 이때가 기원전 587년 경인데, 열왕기 저자는 이 참혹한 사태를 두고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유다를 멸망시키려고 그들을 유다에 보내신 것이다. 므나쎄가 지은 온갖 죄 때문에, 유다를 당신 앞에서 물리치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그런 일이 유다에 일어났다.”(2열왕24,2-3) 당시 중동 일대의 지역에서 벌어지던 국제 정치의 역학 구조로만 보자면 신흥 강대국 바빌론이 쇠약해진 앗시리아를 멸망시키고, 인접한 강대국 이집트의 팽창을 막기 위하여 유다 왕국을 멸망시킨 것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느님의 눈으로 국제 정치 현실을 해석하기 때문에, 바빌론을 도구로 삼아 하느님께서 유다 왕실의 죄악을 벌하신 것으로 본 것입니다. 이것이 열왕기를 비롯한 역사서 저자들의 역사 신학입니다. 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여호야킨 왕을 비롯하여 모후와 왕비들, 내시들과 나라의 고관들, ‘훌륭한 사람’ 즉 지식인들 칠천 명과 대장장이를 포함한 기술자들 천 명 그리고 전투할 수 있는 건장한 모든 사람을 바빌론으로 데려갔습니다(2열왕 24,15-16). 하느님의 강하신 손으로 이집트 제국의 사백여 년 종살이에서 풀려나 가까스로 독립 왕국을 세운 지 오백여 년 만에 또 다시 또 다른 제국의 노예로 끌려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빌론 유배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권세도 없고, 지식이나 기술도 없으며, 재산도 없는 가난한 이들을 유다 땅에 남겨 놓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나라 백성 가운데 가난한 이들 말고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2열왕 24,14ㄴ) 이들을 ‘암하레츠’(amhartz)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남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바빌론의 우상 숭배 풍조에 물들지 않고 경건하게 하느님을 섬겼던 이 암하레츠들은 유배 기간 동안에 이사야를 비롯한 예언자들이 전해 준 메시아 대망 신앙을 받아 들여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동족들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후에도 그리스계와 로마의 세력들의 침략과 지배가 끊이지 않아 지배 엘리트들이 우왕좌왕 하면서 신앙의 정체성을 잃어 버리고 흔들리는 가운데에서도 메시아 대망 신앙을 동족들 가운데에서 보전해 온 ‘아나빔’(anawim), 즉 ‘하느님의 경건한 이들’로 성장합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유다인들 가운데 오셨을 때, 그분의 신성을 알아보고 맞이한 소수의 유다인들이 바로 이 아나빔들입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0-11) 메시아를 맞아들이고 받아들였던,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마리아와 요셉, 시메온과 안나 그리고 세례자 요한 같은 이들이 대표적인 아나빔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다의 멸망은 이스라엘 민족의 커다란 비극이었으나,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남겨 놓으신 섭리는 희망의 씨앗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의 최종 결론으로서, 바로 이 아나빔들을 염두에 두고 선포하신 복음입니다. 어제 들은 복음, 즉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마태 7,17)는 말씀에 이어서 실행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4) 그렇지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으면서 믿은 척 했던 사람들은 낭패를 보게 된다는 말씀이 곁들여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그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며, 심지어 그 이름으로 많은 기적까지 일으킨다고 하더라도”(마태 7,22), 그것은 예수님의 관점과 입장에서는 엄연히 불법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마태 7,23)
예수님께서 내리신 이 살벌한 경고의 말씀을 오늘날 우리 교회 현실에 적용하면 무슨 뜻이 될까요? 예언 활동에 속하는 일들이란 미사에서 강론하고 예비자와 신자들에게 각종 교육을 실시하며 특별한 날에 각종 메시지를 발표하는 일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개인적으로 마귀를 쫓아내거나 사회적으로 구조악과 싸우는 정의 평화 활동을 뜻하는 구마 사도직, 병자와 장애자들을 돌보는 치유 사도직 그리고 큰 능력으로 대형 행사를 치루어 내는 등 기적을 일으키며 현대화된 사회복지 등 기타 사업들이 번창하는 일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능히 해낼 수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기준에는 턱없이 모라자란다는 뜻입니다. 교회사의 많은 구간에서 이러한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고, 심지어는 지금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현 교황도 교황직 즉위 직후 펴낸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이러한 세태를 ‘영적 세속성’이라고 규정하며 매섭게 비판하신 바 있습니다.
“영적인 세속성은 경건함으로 보이는 것 뒤에 그리고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보이는 것 뒤에도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의 영광과 개인적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 바리사이들을 질책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 이는 궁극적으로 특정 규칙을 엄수하거나 과거의 특정 가톨릭 양식에 철저하게 충실하다는 것을 내세워, 자기가 다른 사람에 대해 우월하다고 느끼고 자신의 힘만을 믿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 역시 겉으로는 교리와 규칙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아도취적이고 권위적인 엘리트 의식을 갖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 이런 교활한 세속성은 우리 가운데 여러 가지 태도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전례에, 교리에, 그리고 교회의 특권에 대해서는 여봐란 듯이 몰두하지만, 복음이 하느님께 충실한 백성과 현 시대의 구체적 요구에 실질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 사람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 이러한 영적 세속성에 빠진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서 그것도 멀찍이 떨어져서 [현실을] 지켜보기만 합니다. 이들은 자기 형제자매의 예언(고발)을 배척합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다른 사람의 실수를 끊임없이 지적합니다. 이들은 자기가 어떻게 보이는지에만 집착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선한 것으로 가장한 엄청난 타락입니다.” (복음의 기쁨, 93-97항)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124위 순교자들을 시복하러 방한했을 당시에 한국 주교단과의 만남에서도 같은 취지로 이렇게 강론하였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주교님 여러분! 여러분 모두에게 큰 사랑으로 인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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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가난한 이들이 복음의 핵심에 있다고 늘 말해왔습니다. 또한 복음의 시작과 끝에도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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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의 시대에 떠오르는 한 가지 위험에는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저 ‘사교 모임’에 그치고 마는 위험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신비적 차원을 잃고, 성체 성사를 기념하는 능력을 잃으며, 고작 하나의 영적 단체에 머물게 되는 위험입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가난한 이들은 더 이상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적절한 역할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교회와 공동체들은 그 자체가 중산층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이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가난한 이들이 심지어 수치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것은 영적 ‘번영’, 사목적 번영의 유혹입니다. 그런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아닙니다. 오히려 부유한 이들을 위한 교회 또는 돈 많고 잘나가는 이들을 위한 중산층 교회입니다.
…
저는 여러분 주교들께서 좋은 일들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러분을 훈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신앙 안에서 자신의 형제를 확인해야 할 의무를 지닌 한 형제로서, 저는 여러분께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의 교회는 번영하는 교회이고, 매우 선교적인 교회이며, 위대한 교회입니다.
악마가 교회의 예언자적인 구조로부터 가난한 이들을 제거하려는 이런 유혹의 씨앗들을 뿌리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악마로 하여금 여러분이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 잘나가는 이들의 교회가 되게 만들도록 허용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그렇게 된다면) 그 교회는 아마도 ‘번영의 신학’을 펼치는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그저 그런 별 쓸모없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서울,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강당, 2014.8.14)
교우 여러분!
모래 위에 집을 지어 봤자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면 다 무너져버립니다. 복음이라는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고, 사업체처럼 교회를 운영하거나 세상에서 흔한 취미생활 하듯이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그러한 교회나 신앙생활은 시련이 닥치면 다 무너져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에 입각한 교회 쇄신이 어려워 보이고 복음 말씀에 따라 사는 신앙생활이 불가능해 보여도 그 길이 아니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달리 갈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권위가 그러했던 것처럼 교회에 권위가 살아 있으려면, 어려워도 그리고 힘들어도 복음에 입각한 쇄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의 첫 머리에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살아 가려면, 어려워도 그리고 힘들어도 복음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 곧 암하레츠 가운데에서 아나빔이 메시아를 맞이할 수 있었듯이, 복음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오늘날의 아나빔입니다. 집은, 모래 위가 아니라 반석 위에 지어야 합니다. 성경의 역사신학이 남겨준 교훈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살아 있는 진리입니다. 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