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소수서원 (榮州 紹修書院)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위치한 서원.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541년(중종 36)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이듬해 이곳 출신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祠廟)를 설립하였고, 1542년 유생 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추가 배향하였다.
1546년(명종 1)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 방책을 보완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사문입의(斯文立議)를 마련하여 서원의 향사(享祀)에서부터 학전(學田)과 서적의 운용 및 관리, 노비와 원속(院屬)의 관리 등 서원의 운영·유지에 필요한 제반 방책을 마련하였다.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은 서원을 공인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조정에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賜額)과 국가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1550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되었고, 아울러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되었다. 또한 명종(明宗)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하사하였다.
이러한 조처를 통해 소수서원은 공인된 교육기관으로서, 이후 다른 서원들의 설립과 운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는 서원이 단순한 향사와 교육 기능 수행만이 아닌, 지방 사림(士林)들의 정치·사회 활동에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의미도 포괄하고 있어, 소수서원의 설립과 발전 내용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사액을 받기 이전까지 백운동서원은 풍기 사림들의 호응을 받지 못 했다. 그 이유는 서원이 풍기에 세워지긴 했으나, 경상도 내 각 군현 유생들에게도 교육 기회가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액을 받고,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私學)의 위치를 굳힘에 따라 풍기의 사림들도 적극적으로 서원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처럼 소수서원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한 부분을 담당하면서 향촌 사림의 정치적·사회적 기구로 정착되자 이후 전국에 서원들이 설립, 운영되어 조선시대 사학의 중심기관으로 발전하였다.
그 뒤 1633년(인조 11) 주세붕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서원의 지나친 건립과 부패로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경내 건물로는 문성공묘(文成公廟)·명륜당(明倫堂)·일신재(日新齋)·직방재(直方齋)·영정각(影幀閣)·전사청(典祀廳)·지락재(至樂齋)·학구재(學求齋)·서장각(書藏閣)·경렴정(景濂亭)과 탁연지(濯硯池)·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1963년 지정) 등이 있다.
그 밖에 1963년 국보로 지정된 안향 초상, 1968년 보물로 지정된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1981년 보물로 지정된 주세붕 초상이 소장되어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있다.
서원의 배치는 강학(講學)의 중심인 명륜당이 동향, 배향의 중심 공간인 사당(祠堂)이 남향이며, 기타 전각들은 어떤 중심축을 설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배치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자리 잡고 있어 곧바로 명륜당의 남쪽 측면으로 출입할 수 있게 되어있다.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중앙의 대청과 온돌방 및 마루방으로 되어있고, 대청·온돌방·마루방 주위로 툇마루를 둘렀다.
기단은 장대석(長臺石)을 바른 층 쌓기 하여 높게 만들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아 두리기둥[圓柱]을 세웠다. 또한 기둥 윗몸에 앙서[仰舌] 하나를 내어 기둥머리인 주두(柱頭)와 결구시킨 초익공(初翼工)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架構)는 5량(五樑)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平柱) 위에 걸고, 동자기둥을 세워 마룻보를 받쳤으며, 그 위에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일신재와 직방재는 각각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서 다른 서원에서는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서원에서는 하나의 연속된 채로 건립하여 편액(扁額)을 달아 구분하고 있다.
이 동서 양재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 및 협실 앞의 툇마루로 되어 있다. 기단은 정면에는 다듬은 장대석을 바른 층 쌓기 하였으나, 후면에는 거친 사괴석(四塊石)들을 바른 층 쌓기 하였다. 기단 위에 놓인 막돌 초석 위에는 방주(方柱)를 세웠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 위에 걸고 간결한 동자기둥을 세워 마룻보를 걸었으며, 이 위에 판대공(板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팔작기와지붕을 이루고 있다.
문성공묘는 명륜당의 서북 측 따로 쌓은 담장 속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맞배집으로 장대석의 낮은 기단 위에 원형의 주좌(柱座)가 있는 다듬은 초석이 있고, 그 위에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또한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밑면에 초각한 첨차와 소로[小累], 그리고 끝이 날카로운 쇠서[牛舌]를 내어 결구한 초익공식(初翼工式)을 이루고 있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전면 고주(高柱)와 후면 평주 위에 걸고, 첨차로 짜인 동자기둥을 놓아 마룻보를 받친 후, 이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맞배지붕의 양측 박공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한 풍판(風板)을 달았다.
그 밖에 서고·전사청·고직사(庫直舍) 등은 모두 사당 담 밖에 세워져 있다.
소수서원은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명칭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학문의 길 사색의길’...영주 세계유산 소수서원 명품 둘레길
유경훈 기자
투어코리아 기사 승인일 : 2022.03.01.
코로나 팬데믹 이후 보다 한적하고 보다 안전한 장소를 찾아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꽃 소식 당도하는 3월, 가족 또는 친구, 연인과 함께 영주 소수서원 둘레길을 걸으면서 우리들 일상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은 어떨까.
세계유산 소수서원 명품 둘레길에서 사색에 젖다!
영주 소수서원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1543년 이후 350여 년간 약 4천여 명의 유생을 배출한 학문의 핵으로 명망이 높았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영주시는 유네스코 등재 당시 강조되던 서원 주변의 ‘경관 가치’를 극대화하고 소수서원만이 갖춘 특별함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문화재청과의 협업해 둘레길을 조성했다.
둘레길은 소수서원 매표소에서 시작되어 취한대-광풍대-소수박물관-영귀봉-소혼대까지 약 1.3km에 이른다.
▷소수(紹修), 다시 이어서 닦다.
일반적으로 문화재를 관람할 때 입구에서 출구까지 내부 동선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소수서원 명품 둘레길은 익숙한 흐름을 벗어나 색다른 시각으로 서원을 조망하는 특별함이 있다.
서원의 부속 건물을 하나씩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서원 바깥으로 다시 자연스레 길이 이어져 병풍같이 둘러싼 소백산의 풍광으로 관람객을 인도하는데 ‘다시 잇는다’라는 소수(紹修)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고고한 선비를 닮은 숲, 학자수림(學者樹林)
소수서원 매표소 입구에 들어서면 우람찬 소나무 군락이 눈에 가득찬다.
운치 있게 뻗은 소나무 가지들은 서원에 가까울수록 서원을 향해 뻗어 있는 모습이 마치 서원에 공경을 표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예부터 소나무는 사철 푸른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모습이 선비의 기개와 닮았다 하여 학자수(學者樹)라고도 불리는데, 소수서원 소나무에서 더욱 그러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기록에 따르면 소소서원 소나무는 서원의 원장과 원생들이 직접 심었다고 한다.
숲 가운데 띄엄띄엄 보이는 작은 묘목들은 학자수의 ‘후계목’이라고 불리는데, 이곳에 뿌리를 내린 큰 소나무들의 후손이다.
우람찬 소나무 향을 듬뿍 느끼며 상쾌하게 걸음을 내딛다 보면 어느새 취한대와 죽계천이 고개를 내밀어 그다음 코스로 트레커를 안내한다.
▷퇴계가 아끼고 주세붕이 즐기던 취한대(翠寒臺)와 죽계(竹溪) 멋
취한대는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한 다음 해인 명종 4년(1549)에 만든 누대로, 주변에 나무를 손수 심고 취한대라 이름 지었다.
취한대는 주로 원생들이 휴식을 취하던 장소였다고 한다.
소나무 숲에서 취한대로 가려면 죽계천을 건너야 하는데, 이 물길은 문헌 기록에도 자주 등장한다.
이황이 이곳의 아름다움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소수서원을 세운 조선 중기 풍기군수 주세붕도 이곳의 경관을 즐기며 시를 읊었다 한다.
죽계천 양쪽에 우거진 나무들을 배경 삼아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500년 전 그분들이 느꼈을 감동이 그대로 전달되는 듯하다.
▷광풍대(光風臺)에서 탁청지(濯淸池)를 보며 세상 시름 씻어보자!
취한대를 지나 물길을 따라 연화산 방면으로 걸어가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돌릴 수 있는 광풍정(光風亭)이 나타난다.
본래 ‘광풍대’라 불리던 곳으로, 퇴계 이황이 ‘제월광풍(霽月光風)’이라는 말에서 가져와 붙인 이름이란다.
제월광풍은 ‘비가 갠 뒤의 맑고 상쾌한 경치로, 도량이 넓고 시원한 인격’을 비유한 말인데, 광풍정에 앉으면 뒤쪽에서 상쾌한 공기가 연화산 기슭을 타고 내려오고 앞쪽으로는 연못인 탁청지가 시야에 들어와 기분이 맑아지고 개운해져 이황 선생이 전하는 광풍대의 의미를 절로 깨달을 수 있다.
▷명품 둘레길의 끝, 소혼대(消魂臺)에서 작별의 정을 나누다.
광풍대를 뒤로 하고 소수박물관을 지나 죽계교를 건너면 봉긋하게 솟은 둔덕을 돌아 나가게 되는데, 그 형상이 마치 거북이가 알을 품는 모습처럼 보여 ‘영귀봉(靈龜峰)’이라 부른다.
영귀봉을 감싸고 돌면 어느새 서원 바깥으로 접어들면서 둘레길 막바지 코스에 들어서게 되고 그 끝에 소혼대가 나타난다.
소혼대는 본디 조선시대에 원생들을 만나러 온 사람들이 작별의 정을 나누던 장소라고 한다.
중국 남조의 문인 강엄(江淹)이 ‘사람의 혼을 녹이는 것은 오직 이별뿐이다’라고 읊은 데서 나온 이름인데, 그 뜻을 헤아리고 나니 둘레길 끝이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길의 시작부터 끝까지 인문과 자연의 미학을 모두 품은 소수서원 명품 둘레길은 바쁜 일상으로 지친 우리의 몸과 마음에 멋진 위로의 시간을 선사해 줄 것이다.
새싹이 움트는 봄, 명품 소수서원 둘레길에서 소중한 사람들과 사색의 시간을 즐겨보자.
영주 소수서원 (榮州 紹修書院) 안내도
영주 소수서원 (榮州 紹修書院) 지도
영주 소수서원 (榮州 紹修書院)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