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3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마태오 14,1-12
두 종류의 행복이라는 마약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인간은 무엇으로 살까요?
왜 어떤 사람들은 무기력증에 시달리거나 심지어 자살까지 하게 될까요?
그 비밀은 ‘행복’에 있습니다.
행복에 취해야 삶의 의욕도 생깁니다.
한 사향노루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람이 불 때마다 어디선가 오는 사향의 냄새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그 냄새가 나는 근원지를 찾아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그 사향의 근원지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찾아도 더는 그 근원지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자살을 선택합니다.
절벽에서 뛰어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가면서 깨진 자신의 몸 안에서 사향의 향기가 솟구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쫓는 행복이 없다면 삶을 살아갈 힘을 잃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있습니다.
문제는 위 사향노루처럼 그 행복을 외부에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배고플 수밖에 없고 결국 그 배고픔을 더는 채울 길이 없게 되면 죽음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삶이 행복이라는 미끼로 자신을 연명시키는 것입니다.
영화에 보면 마약을 팔 때 우선 몇 번은 거저 줍니다.
그리고 그 맛에 길들었을 때 비싼 값에 마약을 판매합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중독됩니다.
우리는 그런 중독된 상태로 태어납니다.
사실 모든 동물은 이 행복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동물들은 먹이를 먹을 때 가장 행복해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 행복이 오래간다면 더는 먹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죽게 됩니다.
다시 배가 고파야 그 행복을 느끼고 싶어서 먹이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런 행복에 중독되면 동물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많이 나오는 영화의 ‘좀비’와 같이 됩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오늘 복음에 등장합니다.
바로 헤로데입니다.
오늘 복음은 헤로데가 요한 세례자를 죽이는 내용입니다.
요한은 그나마 헤로데에게 충언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도 군중이 무서워 요한을 죽이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헤로데가 요한을 죽일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중독된 행복을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상 행복에 대한 집착이 자신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 목소리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면 누구나 우리 안에서 들려오는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목을 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법원은 최근 데보라 짐머만이라는 여성에게 ‘태아 살인미수죄’를 적용해 자녀 양육권을 박탈했습니다.
알코올중독자였던 짐머만은 임신 9개월인 상태에서 한 파티에 참석해 많은 양의 술을 마셨습니다.
그녀는 만취한 상태에서 산욕을 느껴 딸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신생아의 혈중알코올농도가 무려 0.2%에 육박했습니다.
산모의 상습적인 음주로 인해 신생아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였습니다.
법원은 함량 미달의 모정에 대해 ‘양육권 박탈’을 선언하고 ‘살인미수죄’를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술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한 어머니의 무책임이 한 어린이에게 ‘저능아’라는 비극적인 이름을 남겨주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세상 행복에 중독된 만큼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행복은 죽어갑니다.
사랑에서 오는 행복도 하나의 미끼입니다. 살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행복은 영혼을 살게 합니다.
올해 백 세가 되시고 ‘백 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을 쓴 김형석옹은 장수의 비결을 물었더니 ‘절제’라고 대답했습니다.
육체의 만족을 절제하는 삶이 장수의 비결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언제 가장 행복했느냐고 물으니 ‘사랑 때문에 힘들었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행복과 육체의 행복,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를 잡으려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행복에 무관심해도 안 됩니다.
삶의 의욕을 잃게 됩니다.
어차피 행복은 생존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랑으로 육체가 죽는 행복을 선택할 것인지, 육체의 행복을 찾아 사랑으로 오는
행복의 목을 칠 것인지는 우리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점점 세상의 행복을 끊어가고 있다면 참 잘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끊어가는 세상의 행복이 이웃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참으로 잘 사는 것입니다.
어차피 행복에 취할 거면 영원히 살게 만드는 행복에 취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3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14,1-12
지금 우리에게는 또 다른 세례자 요한이 필요합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로서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방의 통치권자였습니다.
두 지방을 합해봐야 경기도 정도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왕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었습니다.
굳이 칭하자면 영주, 분봉왕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그에게 아첨하며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헤로데 안티파스, 둘의 관계는 참으로 묘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세례자 요한을 두렵게 여기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존경하기까지 했습니다.
때로 세례자 요한이 곤경에 처할 때 보호해주기도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건네는 날카로운 직언에 힘겨워했지만, 기꺼이 귀를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헤로데 안티파스는 원치도 않았던 기가 막힌 일-세례자 요한의 참수-을
저지르고 말았을까요?
모든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기 한 목숨 부지하려고 잔머리를 너무 굴렸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갖은 꼼수와 권모술수를 발휘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가당착에 빠져 결국 패가망신하게 된 것입니다.
동쪽에 위치한 나바태아 사람들이 끊임없이 국경을 넘보기 시작하자 힘이 딸렸던 헤로데 안티파스는 그들의 왕 아레타 4세와 협상을 체결합니다.
작은 강아지가 큰 개를 만나면 배를 발랑 뒤집어 항복을 표시하듯이 헤로데 안티파스는 아레타4세 왕 앞에 깨갱하고 납작 엎드렸습니다.
왕의 딸과 마음에도 없는 정략 결혼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의 결혼생활이 만족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헤로데 안티파스는 이복동생 헤로데 필립보스를 찾아가 그의 아내 헤로디아를 유혹합니다.
갖은 감언이설로 꼬셨겠지요.
허영심이 가득했던 헤로디아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인륜을 저버리고 결혼을 승낙합니다.
이를 알게 된 아레타 4세 왕의 딸은 스스로 친정으로 돌아가 버리게 되지요.
헤로디아는 헤로데 필리포스와의 사이에서 난 딸 살로메를 데리고 헤로데 안티파스의 품에 안깁니다.
당대 비리와 악행을 자행하던 고위층 지도자들의 천적이었던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안티파스와
헤로디아를 그냥 둘리 만무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공공연하게 천륜을 거스르는 두 사람의 악행을 고발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차례에 걸쳐 개인적으로 헤로데를 찾아가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거듭된 고발에 헤로데 안티파스의 마음은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부끄럼 없이 패륜의 길을 걷던 헤로디아는 복수심에 치를 떨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 위협도 해봤습니다.
설득도 해봤습니다.
별의 별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세례자 요한의 입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헤로데 안티파스는 전도차 애논을 떠나 갈릴래아로 건너온 세례자 요한을 체포합니다.
그리고 사해 동쪽 에브론 건너편에 위치한 마케론데 성안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헤로디아의 계략에 의해 서기 28년경 참수 당함으로서 짧은 예언자로서의 삶을 마감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묵상하며 우선 악이 선을 제압한 것 같아 큰 서글픔과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악 앞에서 단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던 세례자 요한의 더 큰 선,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그 당당함, 흔들리지 않는 신앙 앞에 큰 감동도 동시에 밀려왔습니다.
오늘 우리의 어두운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고민 끝에 찾아냈다는 나라의 중요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한숨만 터져 나옵니다.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천민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지역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애처로운 어린 양들을 까마득한 절벽 앞으로 몰아가는 죽음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옆에서 같이 걸어가던 이웃이 쓰러지든 말든 내 앞길만 헤쳐 나가는 극도의 이기주의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또 다른 세례자 요한이 필요합니다.
이건 정말 아닙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라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예언자가 필요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8월3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14,1-12: 헤로데가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기가 목 베어 죽인 요한 세례자가 더 큰 권능을 가지고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부활했다고 믿었다. 헤로데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취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헤로데의 동생 필리포스는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으나, 처남과 다투는 바람에 장인은 딸을 데려갔고, 형인 헤로데가 그 여자와 결혼했다. 그래서 요한 세례자는 율법에 따라 이방인들처럼 되지 말고 불신앙에 물들지 말라고 경고하였는데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살아있는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도덕적 훈계로 헤로데를 자극하였다.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4절) 말함으로써 요한은 즉시 곤경에 빠지게 된다. 사악한 사람을 훈계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해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한은 율법이 말하는 것, 구원에 합당한 것, 사랑에 합당한 것을 이야기했지만, 그 대가는 감옥에 갇히는 것이며 죽음만이 남아 있다. 인간의 마음을 바로잡고 죄가 되는 행실을 물리치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뿐이다. 요한이 강직한 사람이었다.
헤로데의 생일날,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고 있다. 사람들은 춤에 빠져들었다. 관능적 쾌락이 매우 잔인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스라엘은 죄와 세상의 쾌락에 빠져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팔아버렸다. 딸은 제 어머니의 부추김으로 율법의 영광을 상징하는 요한의 머리를 가져다 달라고 한다. 그리하여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담겨 소녀에게 주어졌다(11절 참조). 잔치는 살인 현장이 되고 생일은 장례 날이 되었으며 그 식탁은 원형경기장이 되었다. 헤로데는 괴로워했다고 하지만, 괴로워하는 척했을 뿐이다. 그는 이미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불법이라고 말한 요한을 죽이려고 했던 헤로데였다. 이렇게 그는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는다. 우선, 동생의 부인인 헤로디아를 유혹함으로써 불륜을, 그 여인에 의해 세례자 요한은 죽임을 당했으며, 또 얼마 안 가서 평판이 나빠져 자신도 폐위되고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봉사직은 나 자신뿐 아니라, 모두가 함께 성장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참된 권위는 사랑과 봉사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진리를 전하는데 굴함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고, 참된 봉사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권능이 다른 사람들 앞에 더욱 드러날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