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창고에서 지식 소매상으로”
-심상우
2008년, 반년이 후딱 지나갔다.
좀 전에 지난 6개월의 내 생활 패턴을 통계로 내 보니, 오대산을 비롯하여 산에서만 70여 일, 즉 두 달 넘게 보냈다. 촛불집회 37일. 나머지는 먹고사는 일로 왔다갔다했다. 세 가지로 분석되니 참 단순하고 편하다.
내가 산에 가는 것은 이런저런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웃기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심신단련 때문이다.
몸이야 그렇다 치고, 배낭에 새로 읽을 책을 잔뜩 넣고 산에 오르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집에서나 도서관에서 책 읽는 거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그러나 막상 산에서 책을 읽기 시작하면 불편해진다. 올 상반기는 더욱 불편해졌다. 환경관련 책이나 사회문제를 다룬 책을 읽을 때 더욱 그러하다.
《인간이 만든 위대한 속임수 식품첨가물》, 《밥상이 썩었다 당신의 몸이 썩고 있다》,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 《맛있는 햄버거의 무서운 이야기》, 《지구환경보고서》, 《죽음의 향연》, 《얼굴 없는 공포, 광우병 그리고 숨겨진 치매》, 《도살장》, 《독소-죽음을 부르는 만찬》, 《죽음의 밥상》, 《육식의 종말》, 《희망의 밥상》, 《불편한 진실》, 《캘빈, 환경오염은 어디에서 시작되니?》 이런 책을 읽는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정치 경제에 대한 책은 나열하지 않겠다. (글 쓰는 사람이 책 읽는 거야 당연한 것이지만, 올해는 내가 예전에 잘 읽지 않았던 분야의 책들만 일부러 골라 읽었다.)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야말로 ‘불편한 진실들’에 놀라고, 책을 덮은 다음에는 익숙하고 안락한 텐트 속에서 밤새 불편해진다.
모두 인간이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짓인데, 지구는 병들고 인간의 환경은 날로 피폐해지고 있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아델리펭귄이 10년 내에 사라질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서글프다. 내가 자리 잡고 있는 지금, 여기가 안전하다고 저 멀리 북극의 빙하가 녹는데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오만 가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런 밤이 지나고 맞이하는 새벽! 산에서의 경이로움은 여전하지만, 다르다. 아둔한 내가 다르게, 느꼈다.
불편한 진실을 껴안고, 그저 그것을 내 머릿속 지식의 창고에만 쌓아두고 가만있어서는 안 된다는 어떤 절박함이 왔다. 아둔하지만, 이제 지식의 소매상, 상상력의 소매상으로 나서서, 내가 목도한 것들, 불편한 진실들에 대해 말해야겠다.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지식의 바다에 아주 작은 부분밖에 볼 수 없지만, 본 그것을 제대로 기록하는 일, 그것을 한 거룩한 사명으로 껴안게 되었다. 이제 겨우!
‘지식의 창고’가 있어야 ‘깜냥의 지식 소매상’을 할 수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그냥 묵혀두어 창고에서 재고품이 되고 썩어문드러지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알고 있는 진실, 생각한 모든 것, 느리게 가더라도 행동해야 하는 것, 하나의 문제이면서 공공의 문제인 것, 뭐 이러한 것들에 대해 성찰한다.
촛불집회! 다른 곳에 있었어도 시간은 간다. 멀리 있으면서도 바로 볼 수도 있다. 의도를 갖고 참여했을 수도 있고, 생각 없이 참여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참여해야만 아주 작은 진실이라도 알 수 있는 놈이다. 그래서 참여했다.
광우병, 아직 모른다. 과학과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어떤 것은 바로 먹는 것보다 뜸이 들고, 곰팡이가 피어야 제 맛을 내는 것도 있다.
뛰어난 사람은 통찰력으로 깨닫고, 안 봐도 확 깨우쳐 알겠지만, 아둔한 나는 몸에 수고를 끼쳐야만 몇 가지 알게 된다. 난 도사나 선각자가 되기에는 애초에 글러먹었다.
무작정 찾아간 월출산 아랫마을, 어느 집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자라던 박주가리를 보고, 열흘 뒤, 단지 그것이 궁금해서 다시 찾아가는, 참으로 쓸모없이 돌아다니는 나이지만, 불편한 진실을 위해서 더욱 불편해져야겠다.
불편한 생각을 품고 사는 나와 같이 사는 아내와 자식에게는 산에 갈 때마다 새벽을 앞에 두고 미안해한다. 어차피 호모사피엔스로 태어난 것! 어쩔 수 없는 부분도 많다.
단지 제자리걸음만 하는 지식의 창고를 버리고, 두 발로 재며 확인한 것들에 대해 선택과 집중해서 소매상으로 나서야 할, 아직도 참 모호하지만, 그게 나의 길이다.
쓸모 있는 사족 하나 : 둔한 놈이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고 있어!
첫댓글 선생님, 얼굴 가만히 떠 올리며 조근조근 말씀 하시던 모습도 가만 되새기며 눈 앞에 보이는 물상들에 정신없이 쫓아가는 나를 가만 붙들어 봅니다. 이 무더운 여름 건강 잘 챙기시면서 계십시오!
선생님, 그 지식들 제게 좀 파세요, 비싸더라도 사고 싶어요. ^*^ 알고 있는 진실, 생각한 모든 것, 느리게 가더라도 행동해야 하는 것, 하나의 문제이면서 공공의 문제인 것, 뭐 이러한 것들에 대해 성찰한다. 이 문장을 읽고 성찰하고 있습니다.
납량특집으로 환경관련 책들을 많이 읽었군요! ㅎㅎ, 고생하셨습니다. 보람도 있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