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미워하지.
말고 싸우지 말며 진실을 가지고 교류하자는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1755)는 한
일 관계가 성신 교류로 가길 기원했다 일본인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위하여 조선어 학교인
한 어학소(韓語學所)를 설립했고 대마도 박물관에 가면 그가 쓴 조선어 교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메노모리호슈와.
조선통신사 연구 모임이 어언 10년이 넘어 회원남녀 모두가 친하게 지낸다 대마도에서 개
최하는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선박을 이용해서 대마도에 향했다
한양에서.
에도에 이르기까지 400여 년 전부터 조선통신사의 행렬이 있었다 묻길로 뱃길로 수개월이
걸리는 먼 길에서 조선통신사는 선진 문화와 기술을 일본에 전달하고 두 나라가 평화적으
로 교류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통신사.
일행은 새로 지어진 숙소, 절, 별장 등에 묵으면서 고급문화의 향기를 흩뿌렸다 통신사 일
행이 묵은 숙소 주변에는 글이나 그림을 받으려는 많은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국서를
갖고 떠난 통신사는 당시 최고의 학식과 교양을 갖춘 지식인들로 엘리트였다.
조선 사람의 아이를 잉태하면 번에서 양육하는데 소홀함이 없도록 배려함은 머리 좋고 잘
생긴 우수한 조선의 혈통이 탐나기 때문이다.
여인네들은.
조선통신사 일행들에게 요염한 교태를 부리며 연일 접근하였다 대마도 시모노세키 히로시
마 등에 조선통신사가 자나 간 흔적의 팻말을 볼 수가있다 우리나라에는 통신사 여정의 역
사적인 흔적이 별로 남아있지 않아 아쉬움을 더할 뿐이다.
17~19세기,
12차례나 일본을 다녀간 조선 왕조 외교사절 통신사의 여로는 한반도에서 대한해협을 건
너 일본열도의 서부 중앙부를 관통하며 지나간 조선통신사의 수 천리 여행길 그들이 머문
건축물,시설물을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는 일본 학자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조선통신사.
정사 행렬은 일본 무사가 먼저 길을 연 뒤 취타대의 뒤를 따라 양국시민 행렬 단은 다양한
조선통신사의 복장으로 길게 이어 이즈하라 시가를 행진한다 구름이 잔뜩 끼고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도 했지만 대마도 시가지에서 조선통신사 재현하는 그 시간은 반기기라도 하
듯이 비기 뚝 그쳤다.
대마도는 남북으로82km 동서로18km인 길쭉한 섬으로 거제도의 2배 크기인 섬에 전체
인구 고작 35,000명 정도 평소 대마도에 가보면 거리는 조용하고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보
기 어렵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기는 처음이다.
먼저 일본 무사들이 길을 터주면 그 뒤에 위용을 갖춘 조선통신사 일행이 뒤를 따른다.
조선통신사는 과거 화려한 역사를 장식했으나,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지워진 역사였다
그러나 지금 일본에서 조선통신사의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조선통신사의 의의가 서서
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현재 양국 역사교과서에는 조선통신사에 대한 역사적 의의가 기재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통신사가 묵었던 일본 지방자치단체에서는 해마다 통신사 행렬을 재현하는 축제를
열어 한일 양국의 젊은이들이 함께 참석하는 행사를 개최하는 등 통신사의 교류를 새로운
한일관계에 접목시키고 있다 무사는 말을 타고 고삐 잡은 하급무사 아시카루는 찌까다비
나 조리를 신는다.
조선통신사는 국가에서 파견한 외교사절이었으나 일본의 특권층뿐만 아니라 일본 민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이는 실로 엄청난 외교 효과를 가져왔다
아시카루가 메고 가는 저 통속에는 중요한 문서가 들어있을 것이다.
전립을 쓴 일본 병사의 차림, 대마도의 10만석 번주였던 宗家는 임진왜란 이후조선과의 관
계를 회복하기 위해 조선통신사를 애도까지 호위 안내했다.
조선통신사의 방일은 일본 관리들과 학자 그리고 문인들은 조선통신사가 머무는 지역에서
그들을 직접 만나 학문과 예술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고 조선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과정은 결과적으로 일본 지역 문화의 발달로까지 이어졌고 지역 문사들이 발굴되
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조선 복장을 한 행렬이 기치를 높이 들고 따르고 있다.
조선통신사가 파견되었던 에도 시대는 일본의 르네상스라고 불릴 정도로 유학이 장려되고
한문학이 번성한 시대로 일반 서민들도 학문이나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았기 때문에 조선
통신사의 방일은 일본의 관리 학자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도 커다란 화제가 되
었다 가마같이 생긴 저 속에 조선왕이 보낸 귀중한 국서가 담겨져 있다.
일본 민중들은 조선통신사와의 문화교류가 원칙적으로 차단되어 관리들이나 지역 문사들
에 비해서 원활하게 전개되지는 못하였으나 지역적으로는 기상 악화로 인한 대피장소 순
풍을 기다리는 정박항으로서의 특수성을 띠고 있는 곳도 많아 조선통신사가 민가에 분숙
할 경우 민중들과 자연스럽게 교류가 형성될 수 있었다 노란 복장을 한 취타대는 북을 울
리고 태평소 날나리를 불면서 행진하며 흥을 돋우고 있다.
노란 복장을 한 취타대는 북을 울리고 태평소 날나리를 불면서 행진하며 흥을 돋우고 있다.
옛날 날라리 불고 북 두드리고 행진하는 취타대는 관리의 행차나 군대의 행진에 사용되었
다 우리가락이 좋다.
이윽고 조선통산사의 정사를 태운 가마행치기 나간다 옛날 대마도 시모노세키, 히로시마,
닛코, 에도에 이르려면 정사, 부사의 체력도 뒷받침이 되어야한다.왕복 행차에 짧게는 6개
월 보통 1년이 걸린다.
조선통신사가 순수하게 사행인원만 400~500여명에 이르는데다 다양한 분야의 최고 인재
들이 수개월에 걸쳐 일본의 서쪽 20여 주(州) 50여개 도시를 왕복했던 역사상 유례없는 문
화 외교사절단이였다.한국의 타악기는 어느 악기보다 경쾌함과 신바람을 몰고 온다.
조선통신사는 두 국가의 교류는 격변하는 시대적 흐름에 발맞추기 위해 이루어진 것으로,
비록 그 의도는 다분히 정치적인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두 국가의 활발
한 문화 교류로 이어지면서 200여 년간 조선과 일본이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
초석이 되었다.철릭을 입은 조선 병사들의 모습이 왜병보다 당당하고 기운차게 보인다
행진의 마지막 길모퉁이 좌측 끝트머리 흰색 건물이 대마도 시청쪽 저 길로 쭉 올라가면
아리아케 산기슭에 위치한 반쇼인(万松院)은 대마도 번주의 묘지다 대마도는 한국과 밀접
한 존재라는 것은 변함이 없으며 과거 긴 우호의 역사적 흔적이 남아있다.
첫댓글
짧은 人生을 살다 간 여행작가 히구치 이치요(桶口一葉)와 그 스승
인 나카라이 토스이(半井桃水)의 이야기와 半井桃水가 對馬藩 嚴原
에서 태어나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釜山 草梁倭館에도 있었다는
事實 日本 江戶幕府시절 武士들은 兵農分離에 의해 대부분은
죠카마치(城下町)에 定着하여 藩主의 家臣(公務員)이 되었으며 日本의
사무라이(武士)는 1867년 明治維新 당시 약 31萬名정도였다고 합니다.
풍신수길은 미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오다 노부나가 휘하의
말단 아시카루가 되었지요 노부나가는 자기의 가신인 대머리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기습을 받고 죽음을 당했는데,이때 히데요시
는 미쓰히데를 처단하여 주군의 원수를 갚으면서 세력을 불렸다.
말년에 과대망상증과 정신 착란마저 보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공
하여 삼천리강토에 엄청난 고통을 안겨줬다 정유재란을 일으켜
조선침략에 나섰으나 조선전투의 불리한 결과에 크게 상심하여
야파로 62세의 나이로 죽었다.히데요시는 출신이 미천했기 때문에
글을 읽지 못하고 교양이 없는 인물로 나중에 오사카 전투에 패하여
아들마저 자결하고 후사는 끊겨버렸지요
오래전 명치와 대정 당시 대마도 태생의
문학가 니 카라이 도스이의
일생을 감명 깊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저곳이 우리의 땅이었는데
그런 생각이 듭니다 지리적으로 볼 때
대마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국과의 연을
끊을 수가 없나 봅니다 뭐든지 건성으로
판단할 것 같은 마초님
게시물을 읽노라면 또 다른 섬세한 면을 보게 됩니다
민간교류를 나누는 아름다운 세미나
였던 것 같습니다.청정지역이며 우리 역사의
흔적도 보인다니 호감이 가는군요
해박한 일본의 역사지식에 에 놀랍습니다
마초님! 계속 정진하시길 많은 역사교육을
배우고 있습니다
건강하세요~^^*
아항 그러셨구나 明治와 大正 당시
대마도 태생의 문학가 半井의 일생
을 감명 깊게 읽었셨군요
그래요 우리는 있는 것도 종교적
문화때문에 우상숭배라고 없애버
리는데 왜인들은 역사나 유적들
대부분 가공하여 만든 것인데
세월이 흐르니 진짜같이 보이는데
대마도를 보면 지리적 위치나 분포
생물들 다 우리나라에 훨씬 가깝지요
당연히 우리 것으로 주장해야
하는데 이승만 대통령 외에는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없는데
대마도에서 제일 가까운 육지
지역에 표시탑을 만들어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지자제가 언제 생길지 암울합니다 ㅠㅠ
귀한 흔적에 감사를 드립니다
마초님
대마도 민간 외교
멋지게 잘 다녀오셨네요
덕분에 처음 보는
생소함도 접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처음 대마도 땅을 밟을 때가 30년 전쯤으로
그때는 부산에서 가는 편이 없어서 후쿠오카
에서 배를 타고 대마도에 들어간 것인데 한국
사람을 진객으로 생각합디다.술집에서 시킨
것 외 별도로 무료 술을 대접 받았습니다
1년에 한 번씩 한국과 일본에서 세미나를 20년
이상 개최하여 참가했고 내년 10월에도 개최
합니다.일본의 시각에서 본 일본에서 출판한
책도 집에 몇 권 있습니다.회원들 중에는 주일
대사출신 인류학을 전공한 학자 보수적인
판결로 유명한 판사출신 변호사,큐슈 대학에서
근무했던 경력자들이 있는데 주로 조선통신사
가 일본에 끼친 영향 등을 논하고 정치적 논쟁
이나 첨예한 부분은 서로 피하고 있습니다.
귀티 나는 멘트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여행 일본을 다녀 오시고 후기글을 참세밀하게도 올려주셨네요.
수원에서 해마다 정조임금 행차하신 모습을 준비를 많이도 해서 보여 주시던데 허리통증때문에 요즘은ㅇ구경도 못하는데
사진으로 행사모습 올려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오늘 역사공부 잘 하고 갑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수고 많았고 늘항상 건강 하세요.11월의 첫날 행운이 늘 함께 하시길 빌어요.
허접스런 졸작을 이렇게 칭찬을
하시면 이 몸 어찌하나요 ㅎㅎ
일본인들과 역사 이야기라면
우리는 당연히 고개를 못 들지
우리가 한때 식민지 민으로 연명했으니,
그러나 월남 전선에 지원하여
헬리콥터잠 비행기로 베트콩을 혼쭐 내
고 귀국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한수
벌고 들어가지요ㅋㅋ
흔적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좋은 글과 사진 잘 읽고 잘 보앗습니다
대마도는 우리와 인연이 깊은 곳이죠
삼별초 난에 피신한 섭가와 부가의 삶의 터전이었으니까요
지리적으로 대마도는 우리나라 땅인 것인데.......
지금도 남천동에선 행사를 하고 있죠
오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와 이에야쓰에 관한 일화가
앵무새에 대한 일화를 성격으로 판단하는 글이 있죠
울지 않은 새는 필요가 없다, 울게 만든다, 울때까지 기다린다 라는,,,,
잘 읽고 갑니다^^
역사란 후세의 위정자들이 자신들 역사
의 구미에 맞게 뜯어고치기도 하고 각색
하기도 하고 그런 역사를 세기가 한참
흐르면 멋모르는 후손들이 바른 역사라
고 착각하기도 하는 것인데 그래서 세
상에 정확한 역사란 조금씩 빗나가서
아주 정확한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고.역사를 바르게 뜯어고치려는 선각
자도 국민들도 가뭄에 콩 나듯이 존재하
기도 하는 것이지요
고운 흔적에 감사를 드립니다
마초님의 댓글을 달면서 조선과 일본의 역사 한 페이지를 상세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정말 좋은 글을 올려주셨습니다.
대마도에 나타난 조선 통신사의 모습,
의상이 화려하면서도 품위가 있고
풍채가 아주 의젓하고 당당해 보이는 조선시대의 분들을 보니 마음이 아주 든든합니다.
철릭, 옷을 입은 분들의 취타대가 연주하는 소리를 듣고 싶읍니다.
꿈에서나 들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대마도는 세종대왕 때 우리나라의 땅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인터넷도 쉬쉬하고 있는 것 같아요.
늘 건강하시고 즐거운 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요 이렇듯 대마도는 아침에 부산에서 출
발해 히타카츠에 내려 대마도를 일주하고 이
즈하라 까지와서 다시 배를 타고 한나절만에
다녀올 수도 있는 곳 우리 반도에서 이어진
우리 땅이 당연히 맞지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맞불 차원의 국수적인 대응은
오히려 설득력을 얻기 어려운 만큼 국민들이
대마도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관심을 제고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수차례 대마도를 가고
오고 보고 느끼고 다니면서 이 땅이 우리 땅인
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독도가 우리나라땅이라고 최초로 명시되어
있는 고서는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내신 약천공
이 쓴 "약천집"에 나오지요 대마도는 독도보다
도 더 우리나라 곁에 붙어있어 바다밑을 탐사
해 보면 우리 육지에서 뻣어나간 대륙봉이라고
한다 일본본토에는 까투리가 없는데 유독
대마도에만 있는 것을 보아도 우리 땅임에
분명하여 우리 땅이라고 강력하게 선포해야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선배님 여여 하시죠 혼자의 마음을 넋두리로
적어본 재미없는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단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