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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 일본의 상황은 아메리카·아프리카와 중국 대륙의 중간 정도였습니다. 일본은 아메리카·아프리카처럼 분열 상태였지만, 유럽 세력이 본격적으로 일본에 접근하기 시작하는 16세기 중반에 이르면 분열에서 통합으로 서서히 방향이 바뀌어갑니다. 그 계기는 유럽 세력의 일본 접근을 상징하는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1549년 일본에 상륙한 사건입니다.
-42쪽
https://youtu.be/InG-d9-TaE4
1540~1550년대 일본은 전국시대에서 통일로 향하던 시기여서 분열보다는 통합으로의 열망이 컸고, 센고쿠 다이묘들은 수많은 전쟁 경험을 통해 유럽의 신무기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절실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럽 세력을 몰아내는 것 이상으로, 자신들이 일본을 지배하는 데 불만을 품은 백성과 불교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일본을 포함한 동중국해 연안 지역에 나타난 유럽 세력의 핵심은 군사 집단이 아니라 선교사였습니다. 한마디로 일본은 실력과 운에 의해 간신히 유럽의 군사적 진출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실력보다 행운에 의해서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46쪽
일본인 이야기, 김시덕, 전쟁과 바다, 조선과 가톨릭, 신부 추방령, 소요시시, 규슈 평정, 시마즈 가문, 전국시대, 에도시대, 상인, 해적, 노예, 오다노부나가, 도쿠가와이에야스
외부로부터의 충격과 새로운 기술의 탄생은 이렇게 인간 사회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17세기 일본의 경우, 전 세계의 기축통화가 된 일본 은을 대량으로 생상하게 된 것은 조선의 발달된 은 제련 기술이 일본으로 전래된 덕분이고, 상업출판이 융성하게 된 것 역시 조선과 유럽의 인쇄술이 일본에 전래된 덕분이었습니다. 즉 기술이 들어오면서 사회 시스템이 바뀌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정신과 물질적 조건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120쪽
일본은 한국과 매우 다른 역사적 경험을 지녔습니다. 그 경험의 차이가 가장 크게 두드러지는 부분이 16~17세기 남중국해 연안에서 전개된 일본인의 활동, 그로부터 촉발된 유럽과의 접촉입니다. 이런 차이를 못 본 척하고 한자 문화권이니, 유교 문화권이니, 왕인 박사니 하며 한국과 비슷한 것만 찾아서는 결코 일본의 참모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121쪽
즉, 기계를 만들기 위한 핵심적인 부분들은 책에 적혀 있지 않을뿐더러, 글자로만 기록하거나 전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포르투갈인 왜구가 조총을 직접 가지고 와서 일본인들에게 사용법을 가르쳐준 것은 그런 의미에서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징비록』에도 나와 있듯이, 임진왜란 직전에 쓰시마 측에서 조총을 선물로 주었으나 조선이 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류성룡의 언급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137쪽
다행히 최근에는 일본에서도 유럽 가톨릭의 자료를 통해 16~17세기 일본을 연구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치 고대 중국을 연구할 때 땅속에서 갑골문자나 백서, 죽간, 목간 같은 출토 문헌이 나오기 전에 제작된 문헌과, 막대한 양의 출토 자료를 활용하는 20세기 후반 이후의 연구 내용이 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출토 문헌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지 않은 『주역』 해설서를 읽는 것은 헛된 일이 될지 모릅니다. 백 년 뒤의 세계인들은 지금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고대 중국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222쪽
저는 말라카가 유럽의 식민지가 되고 일본이 그렇게 되지 않은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말라카가 일본보다 훨씬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에 위치해 있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포르투갈이 동남아시아의 향료 무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핵심 교역지인 말라카를 장악해야 했습니다. 이에 반해 일본은 무역의 대상으로서는 매력적이었지만 다른 지역고 교역하기 위한 무역 거점은 아니었습니다. 태평양을 이용해 무역 루트를 만든 스페인으로서도 어딘가 거점을 찾는다면, 자체적으로 무장되어 있어서 정복하는 데 애로 사항이 많은 일본보다는 저항이 약한 필리핀을 차지하는 것이 훨씬 손쉬웠을 것입니다. 말라카와 일본은 모두 자체적으로 잘 무장되어 있었지만, 두 나라가 처한 지정학적 위치가 달랐기 때문에 말라카는 식민지가 되고 일본은 살아남은 것입니다. -277쪽
전쟁과 바다,
일본의 근세를 열다
오늘의 일본을 있게 한 과거를 무려 4세기의 시간을 가로지르며 깊숙이 들여다보는 기획 『일본인 이야기』의 첫 번째 책은 전국시대에서 에도시대로 넘어가는 16~17세기의 일본 근세를 조명한다. 이 장대한 드라마의 출발점은 일본이 아닌 네덜란드다. 저자는 “전투 없이 거래 없다”라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유명한 구호가 전시 포스터로 걸린 국립기록보관소 앞에서 일본의 근세를 열어젖힌 전쟁과 바다에 대해 생각한다. 대체로 내부의 전쟁이 일본을 통일로 향하게 하는 길이었다면 바다는 외세로부터의 침략을 막는 방패이자 중국 대륙과의 교류를 막는 방해물이었다. 이 전쟁과 바다라는 두 가지 변수가 맞물리고, 부딪히고, 변화하는 가운데 근세 일본은 조선, 중국과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일본인 이야기 1』은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역사의 중심에 선 인물부터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를 오가던 상인, 해적, 노예 등 역사서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이들까지 전국시대에서 에도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전쟁과 바다가 만들어낸 갖가지 역사적 우연들을 헤쳐나간 인물들을 조명하고, 이들이 내린 결단에 주목하게 한다. 일본은 바다를 경유해 도래한 새로운 세계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일본의 근세를 전례 없이 치밀하고 역동적으로 그려낸 이 작업은 일본을 더 깊고 넓게 바라볼 수 있는 시야뿐 아니라 수준 높은 통찰을 제공한다.
일본은 어떻게
조선, 중국과 다른 길을 걷게 되었을까?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서쪽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동쪽으로 타이완과 파푸아뉴기니에 이르는 지역의 패권을 장악한 네덜란드가 왜 유독 동중국해 국가들에서는 군사적으로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던 것일까?” 하는 질문을 던진다. 『일본인 이야기 1』을 관통하는 이 ‘왜 유독?’이라는 질문에 책은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답을 모색한다. 첫째, 인간 세상에서는 때로 법칙보다 우연이 더 크게 작용하고, 둘째, 인간 개개인의 삶에서는 노력 이상으로 행운이 중요하며, 셋째, 정치 분야 이상으로 경제와 군사 분야가 인간 세계를 전진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일본이 완전한 쇄국이나 식민지화의 길을 걷지 않으면서 이른 시기부터 독자적으로 글로벌 네트워크에 편입될 수 있었던 요인을 이 세 가지로 설명한다.
1542년경 포르투갈이 일본에 조총을 소개하고, 1549년 예수회 신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상륙한다. 조총과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것이 우연히도 무장 세력이 아니라 십자가를 든 신부였다는 것은 일본에 큰 행운이었다. 당시 일본이 초강대국이었던 중국처럼 “중화 외에 가치 있는 것은 없다”라고 외칠 만한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역량을 갖추지 못했고, 내부적으로도 분열되어 각 지역 장군들이 세력을 넓히기 위해 군사력을 증강하고 무기를 개량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는 것도 일본에는 천운이었다. 17세기 초반 마침내 동인도회사를 위시한 네덜란드가 일본에 접근했을 때 일본이 이미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를 거쳐 도쿠가와 막부가 전국을 평정한 시기였으며, 따라서 네덜란드의 무력행사를 저지할 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던 점, 그리고 조선에서 건너온 회취법을 도입해 은의 산출량이 획기적으로 증가하던 시점에 스페인 제국의 번영을 이룬 볼리비아의 포토시 은광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점도 일본이 식민지의 길을 걷지 않고 독자적으로 글로벌 네트워크에 편입될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위기와 우연을 기회로,
역사의 결정적 장면을 담다
물론 역사는 이처럼 뜻밖의 일들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저자는 위기나 우연을 기회로 바꾼 역사적 결단과 책략을 살펴봄으로써 근세 일본에서 얻을 수 있는 통찰을 찾는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일본 내 ‘난학’의 발전이다. 일본과 유럽의 교류를 말할 때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난학은 사실 일본이 느낀 위기의식의 결과였다. 대항해시대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유럽과 접촉할 기회가 더 많았던 나라는 일본이 아니라 명·청대의 중국이었다. 유럽의 군사적 위협에 맞설 만한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외부보다는 내부의 위협을 신경 쓰기 바빴던 중국에 비해 18~19세기 전환기의 일본은 국내 정치가 안정을 찾아가던 와중에 수백 년 만에 유럽 국가의 공격을 받은 것이어서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덕분에 러시아에서 아담 락스만 일행이 도착하기 전부터 러시아가 광활한 시베리아를 넘어 알래스카까지 정복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주로 의학과 자연과학 위주로 연구해 오던 난학을 지리학과 군사학으로까지 범위를 넓혀 러시아 문제에 대응했다.
난학이 막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서구의 문물을 수용하는 창구였다면, 일본 내 일부 엘리트를 비롯한 피지배층은 가톨릭을 통해 서구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저자는 오다 노부나가의 장손인 오다 히데노부, 임진왜란 당시 외교 교섭에 관여한 나이토 다다토시, 명문 유학자 집안 출신의 기요하라 에다카타, 의학자 마나세 도산 등의 인물이 가톨릭 신자였다는 사실을 단순한 에피소드로 다루지 않고 16~17세기 일본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삼는다. 막부 초기부터 가톨릭은 탄압의 대상이었지만 하비에르 신부가 일본에 도착한 이래 가톨릭 신자가 되어 세계 각지로 뻗어나간 일본인들은 그 자체 근세 일본의 인적 네트워크가 되어 일본이 세계와 접촉하는 통로로 기능한다. 그 밖에 저자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 상당수가 마을을 이루고 교회를 세워 가톨릭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 한국인에게도 생소한 역사적 사실에도 주목한다. 이들 중에는 카운 비센테나 오타 줄리아처럼 막부의 탄압 아래 비극적으로 생을 마친 인물들도 있었고, 이 비극은 2백 년 뒤 조선에서 되풀이된다.
일본 역사의 최종판!
일본인도 모르는 일본 이야기
가톨릭이 일본에 미친 영향력은 16~17세기 이후에 제작된 일본 문헌, 그리고 오늘날 전국시대와 에도시대를 이야기하는 수많은 문헌과 연구에서도 간과하거나 감추다시피 한 대목이다. 저자는 이를 일본의 역사를 단순히 일본 내부의 문제로만 보려는 시각이 가진 패착이라고 보고 광범위한 문헌을 발굴하고 정리해 일본인도 잘 모르는 일본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일본 국내의 통일 전쟁과 유럽 국가와의 교섭, 그 과정에서 가톨릭의 역할과 영향력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가운데 일본의 근세가 더욱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더불어 조선의 인쇄술과 은 제조법, 그리고 조선인 가톨릭 신자와 일본의 역사가 얽혀 들어가는 장면은 한국 독자 입장에서 흥미로운 시선으로 일본을 들여다보는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현재의 일본을 이해하고 대처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저자는 “한국과 비슷한 것만 찾아서는 일본을 알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일본인 이야기』는 명확한 관점과 시각으로 일본의 역사를 바라보기를 원하는 독자들의 갈증을 풀어줌과 동시에 역사를 통해 기대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보편적 통찰을 제공한다.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눈앞에 두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일본인 이야기』는 그 답을 찾아나가는 이들에게 훌륭한 레퍼런스가 되어줄 것이다.
시리즈의 첫 권을 펴내며
『일본인 이야기』 시리즈는 일본의 참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그 역사와 문화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16세기 전국시대부터 1945년 일본의 패전에 이르는 일본의 4세기를, 동아시아와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국제관계의 맥락에서 살펴보고 총 다섯 권의 책으로 갈무리할 예정이다. 16세기~17세기를 다룬 『전쟁과 바다』를 시작으로 2권은 17세기 중반~18세기 중반을 다루는 『백가쟁명』, 3권은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을 다루는 『북로남왜』, 4권은 메이지유신 전후를 다루는 『일본의 두 번째 기회』, 5권은 19세기 말~패전 전후를 다루는 『보통국가에의 지향과 좌절』이 계획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