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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1 개요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은 국보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 법당으로서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다. ‘무량수’의 의미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상징하는 무한한 광명[無量光; Amitãbha]과 영원한 생명 즉, 무량수[無量壽; Amitãyus]에서 온 것이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 예산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49호)과 더불어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목조 건축물로 꼽히고 있다.
2 화엄종찰 부석사의 중심 법당, 무량수전
봉황산(鳳凰山) 중턱에 자리 잡은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16년(676)에 의상(義湘, 625~702)이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펼친 곳이다. 무량수전의 건립 시기는 「봉황산부석사개연기(鳳凰山浮石寺改椽記)」와 「무량수전후측서북우공포묵서(無量壽殿後側西北隅栱包墨書)」에 적힌 기록을 근거로 하여 고려 우왕 2년(1376)에 중수한 것으로 보는 설과 원융국사(圓融國師)가 부석사에 주석했던 11세기에 중창했다는 설이 있다. 11세기 중창설의 주요 근거로는 동아시아 전통 건축에서 들보 위에 세워서 종도리(지붕 위 가장 높은 곳인 용마루 지붕 아래에서 서까래를 받치는 나무)를 받치는 짧은 기둥(소슬대공)의 형태가 이른 시기라는 점, 귀기둥에서 창방(昌枋: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부재로 지붕의 하중을 기둥으로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는 구조재)의 뺄목이라 불리는 부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 추녀의 부재 결합 방법이 고식이라는 점 등을 들고 있다.
무량수전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내부 기둥 8개, 외부 기둥 16개에 추녀를 받치는 보조기둥인 활주(活柱) 4개를 더해 총 28개가 사용되었다. 내부 기둥인 내진주에 감주법[減柱法: 내부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기둥 열의 내부 기둥 중 일부를 없애고 대신 큰보(大量)를 사용하는 방식]이나 이주법[移柱法: 기둥을 이동시켜 공간을 효율성 높이는 방식으로 불단이 중앙에서 뒤쪽으로 이동할 때 많이 나타남]을 적용하지 않은 것은 고대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정면은 건물의 중앙칸인 정칸과 정칸 옆인 협칸의 길이가 약 14자(4.2m)로 같으며 협칸 옆인 퇴칸은 10자(3m)로 총길이는 약 18.75m이고, 측면의 전·후면 칸은 10자(3m)이고 중앙 칸은 18자(5.4m)로 11.52m가 되어 총면적은 216㎡(65평)이다.
기단은 화강석을 가공하여 만든 지대석, 면석, 갑석 등을 결합하여 구성한 이른바 가구식기단(式基壇)이다. 기단 정면에는 3개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중앙 계단을 측면 계단보다 1.5배 이상 넓게 함으로써 중앙 계단의 위계를 높이고 있다.
창호(窓戶)를 살펴보면 정면과 배면에만 문(門)을 설치하였고 측면은 벽체로만 이루어져 있다. 정면은 기둥과 문으로 구성되어 있고, 창방 상부 일부에만 벽체가 사용되었다. 종이를 건축자재로 사용하는 것이 제한적이었던 고려 시대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무량수전 정면의 원래 모습은 지금처럼 기둥과 문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봉정사 극락전과 같이 벽체를 넓게 사용하고 그렇게 크지 않은 창문 몇 개를 달아낸 형태였을 것이다. 고려 시대의 창문은 판문이나 살창 구조이기 때문에 단열을 위해서 창을 크게 만들지 않았고 건물 배면에 남아 있는 창문이 정면에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3 고대 건축의 백미(白眉)
고대 건축에서는 시각적 안정감을 주기 위해 기둥에는 배흘림과 귀솟음 및 안쏠림 기법을 사용하고, 지붕에는 앙곡과 조로 기법을 사용한다. 배흘림기둥이란 단면이 원형인 원기둥의 중간 지름을 크게 하고 상·하 부분을 좁게 해서 항아리 모양의 기둥을 만드는 방법이다. 현존하는 건물 중 배흘림 양식이 강하게 나타나는 건물은 무량수전 이외에 강릉 임영관 삼문이 유명하다. 귀솟음은 모서리 기둥인 우주(隅柱)를 다른 기둥보다 더 높게 하여 추녀를 높이는 방법이고 안쏠림은 우주를 안쪽으로 기울여 안전을 도모하는 방식이다. 무량수전에는 착시에 의한 왜곡 현상을 막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이 같은 다양한 기법들이 시도되었다.
무량수전은 팔작지붕을 가진 현존 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이다. 팔작지붕에서 합각의 무게를 받치는 중요 부재는 측면의 외부 기둥과 대들보 사이에 걸리는 부재인 충량(衝樑)인데, 이 부재는 순천 정혜사 대웅전(1617년)에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무량수전에는 충량 부재가 사용되지 않았다. 충량 부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량수전에 팔작지붕 설치가 가능했던 이유는 건물 안쪽 기둥인 내진주를 제거하지 않고 기둥이 있어야 할 원래의 위치에 모두 기둥을 설치한 정치법(正置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고려 시대 건물은 총 6개가 남아 있다. 남한에는 주심포 양식인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 강릉 임영관 삼문과 부석사 무량수전 4개가 있고, 북한에는 다포양식인 사리원 성불사 응진전, 황주 심원사 보광전 2개가 있다. 이중 부석사 무량수전과 심원사 보광전만이 팔작지붕이고 나머지는 모두 맞배지붕이다. 일반적으로 주심포 건물에는 맞배지붕, 다포 건물에는 팔작지붕이 조합되곤 하는데 성불사 응진전은 다포 건물이지만 맞배지붕이고, 무량수전은 주심포 건물이지만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결국 두 건물은 주심포에서 다포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혼용되는 양식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감주법(減柱法)을 사용하면 큰 대량을 사용해야 하는데 무량수전에서는 정치법(正置法)을 운용하였기 때문에 굳이 큰 대량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무량수전의 대량은 감주법이 사용된 대들보에 비해 크기가 작고, 단면을 보면 하부는 항아리처럼 좁게 만들어 기둥 상부 공포의 소로에 결부되도록 하였다. 무량수전 대량의 항아리 형태는 한옥 구조 발달사에서 초기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주목되는 부분이다.
4 무량수전 내부의 모습과 주존불의 조성
부석사 무량수전 내부에는 앉은 크기가 2.75m에 달하는 대형의 소조아미타불좌상(국보 제45호)이 봉안되어 있다. 부석사 주존불은 고려 시대까지 현존하는 소조불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상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부석사 상이 우견편단에 촉지인(觸地印)을 결하고 있는 점을 들어 석굴암 본존불을 재현한 목조석가불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진행된 조사에서 불상의 소재가 나무가 아닌 흙임이 밝혀졌고, 존명 또한 아미타불로 정정되었다. 원융국사 비문에는 좌우보처 없이, 아미타불만을 독존으로 봉안한 이유가 ‘화엄일승(華嚴一乘)’ 사상에 기반한 창건주 의상대의 의도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불단을 서쪽에 치우치게 배치하고, 불상은 동향을 하도록 하였다. 불전의 진입 방향과 불상 봉안 위치를 어긋나게 배치한 것을 두고 서방 극락정토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장치로 이해하기도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같이 불상을 서쪽에 봉안한 예는 영광 불갑사 대웅전, 대전 고산사 대웅전,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 양산 통도사 영산전 등이 있다. 이들 불전에 모두 아미타불을 모신 것은 아니지만 무량수전과 공통된 공간 구성 의도가 엿보인다.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1915~1935)에 실린 무량수전 내부 사진을 보면 20세기 초까지도 법당에 전돌이 깔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미단 안쪽에는 현재 2종의 크기가 다른 전돌이 남아 있다. 전돌의 존재는 마루가 깔리기 전 법당의 모습과 원형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다. 크기가 작은 전돌에는 녹유를 시유한 흔적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녹유전은 대부분 사격(寺格)이 높은 성전사원(成典寺院) 또는 최상의 건축물에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었다. 녹유전이 사용되었던 사찰은 부석사를 비롯하여 영묘사지(靈廟寺址), 황룡사지(皇龍寺址),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 감은사지(感恩寺址) 등이 있다. 녹유전은 통일신라시대 황실 사찰에 버금가는 사찰에서만 출토됐다는 점에서 부석사의 사격(寺格)을 짐작 할 수 있다.
불단은 가장 안쪽에 방형대좌가 있고, 이후 2차례에 걸쳐 목재 수미단이 증축된, 총 3중 구조로 되어있다.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형대좌는 가로 2.65m, 세로 2.17m, 높이 1.06m의 크기로 7톤에 달하는 불상의 하중을 지탱하고 있다. 방형대좌는 적심석과 기와, 잡석, 진흙으로 채워져 있다. 대좌 안을 기와로 채워 넣는 방식은 백제 건물지에서 보이는 ‘와적(瓦積)’기단이 활용된 것이며, 와적기단은 소조불 제작 방식과 더불어 백제의 기술이 신라에 전파된 일례로서 경주 낭산 능지탑(陵旨塔)의 기단부 네 면에 안치된 대형 소조불좌상의 대좌에서도 확인된다.
배흘림 양식
고려 시대의 건축 양식. 기둥의 가운데 부분이 볼록하게 나온 형태. 기둥을 직선으로 만들면 착시 현상에 의해서 기둥의 가운데 부분이 안으로 들어가 보여 건물이 불안정하게 보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착시 현상으로 들어가는 만큼을 나오게 하여 전체적으로 건축물의 안정감을 갖게 하였다. 고려 시대 목조 건축물인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이 대표적인 배흘림 양식 건축물이다.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榮州 浮石寺 塑造如來坐像)
종목 국보 제45호(1962년 12월 20일 지정)
주소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榮州 浮石寺 塑造如來坐像)은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부석사 무량수전 안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 국보 제45호 부석사 소조여래좌상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6월 28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높이는 2.78m로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또한 온몸이 금빛 찬란하여 매우 정교한 솜씨로 지어졌는데, 고려시대 유일의 소상(塑像, 흙으로 빚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건립 연대나 자세는 하남 하사창동 철조석가여래좌상과 같다. 소조인 만큼 모델링이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과 위엄을 동시에 갖춘 조상이다. 불상은 토심(土心)에 칠금(漆金)을 입혔고 광배(光背)는 목판 위에 흙을 입힌 것으로 풍만한 얼굴과 두 어깨, 그리고 의첩(衣褶) 등에 소조의 특색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천의의 주름은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은 신라 말기 형식에서 출발하고 있으나 더 정연하게 되어 있으며 굵은 입술과 광배만 아니면 신라 말기까지 연대를 올릴 수 있는 작품이다.
현지 안내문
이 불상은 진흙으로 만든 소조불상인데,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불상 높이는 278cm이며,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는 불상의 뒤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일반 사찰과 달리 법당 중앙의 정면이 아닌 서쪽에 마련된 불단 위에 모셔져 있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불상을 모신 법당이 서방 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을 모신 무량수전이라는 사실과, 부석사 '원융국사비' 비문에 "좌우에 다른 보처 보살을 모시지 않고 아미타불 한 분만 모셨다"라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임이 확실하다.
통일신라시대 불상 조형을 충실히 계승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온몸에 금빛이 화려하며, 고려 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수법을 보이는 걸작이다
영주 부석사 조사당 (榮州 浮石寺 祖師堂)
종목 : 대한민국 국보 제19호(1962년 12월 20일 지정)
소재지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 (북지리)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에 있는 고려후기 승려 원응국사가 중건한 사찰 건물. 전각. 국보.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고려 말기 또는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 건축물로서 내부에 부석사의 창건주인 의상스님의 상(像)을 봉안하고 있다. 본래 벽면에는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그린 6폭의 부석사 조사당 벽화(국보, 1962년 지정)가 있었다. 이 벽화들은 무량수전 안에서 보관하다가 지금은 유물전시관인 보장각(寶藏閣)에서 전시하고 있다. 조사당 앞 처마 밑에는 의상스님이 사용하던 지팡이를 땅에 꽂았더니 자라났다는 전설이 깃든 골담초가 있다.
부석사 조사당은 창건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장여(長欐)주2에 기록된 묵서(墨書)주3에 따르면 1377년(우왕 3) 원응(圓應)국사가 다시 세웠고, 1490년(성종 21)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이후 조사당은 부분적인 보수만 있었을 뿐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573년(선조 6)에는 지붕을 보수하였으며 1709년(숙종 32)에는 기와를 교체하였다. 1916년에 해체 수리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장여에서 고려시대 중건과 조선 초기의 공사 내용이 기록된 묵서가 발견되었다. 1985년에는 벽화를 모사하여 복원하였으며, 1994년에 벽화전시관을 건립하였다. 1996년에는 서까래와 기와를 교체하였고, 2005년에 도리 등 부식된 목재와 함께 기와를 교체하였다.
부석사 조사당은 무량수전의 북동쪽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작은 건물로서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건물이다. 기단은 면석과 갑석으로 조성하였고 그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았다. 기둥은 약간의 배흘림주4이 있는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공포는 외부에 출목이 있는 간단한 형식으로 장식이 없다. 첨차(檐遮)는 상부 공안(栱眼)을 완전히 따내 확실하게 눈에 띈다. 가구 구조(架構構造)는 5량 구조로서 제공 위에 대들보를 걸치고 그 위에 포대공을 놓아 종보주5를 받쳤다.
종보 위에는 사다리꼴 모양의 대공과 소로를 놓아 종도리 장여와 종도리를 받게 했으며, 종도리 하부에는 인(人)자 모양의 솟을합장을 결구하였다. 솟을합장은 종보의 윗면을 비스듬히 파내고 솟을합장을 꽂은 후 쐐기를 박아 튼튼하게 결구하였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정면 처마는 서까래와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주6이고 배면 처마는 서까래만 사용한 홑처마주7이다. 건물 내부 바닥에는 본래 전돌주8을 깔았으나 지금은 참배가 편리하도록 마루를 설치하였다.
부석사 조사당은 작은 규모의 주심포 건물로서 공포 형식이 특색 있다. 공포는 위아래 소로의 위치가 일치하지 않으며 살미(山彌)와 첨차를 깎아 낸 수법도 독특하다. 외목도리주9 하부는 첨차가 없이 살미가 직접 외목도리를 받는다. 이처럼 외목도리 하부에 첨차를 사용하지 않는 건물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1962년 지정)과 영암 도갑사 해탈문(국보, 1962년 지정) 등 고려 말∼조선 초기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대들보와 종보는 단면이 항아리 형태로서 윗면의 모접기가 거의 없다. 대들보의 보머리는 위쪽이 아래보다 넓게 하고 삼분두(三分頭)로 깎았으며 종보의 폭과 높이는 2:3의 비율을 보여주고 있다. 보의 단면 비율과 다듬기 방법은 다른 건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평면은 고대 건축에서 사용하던 엄격한 비례체계에서 벗어나 완척(完尺) 위주로 평면을 설정하는 경향으로 변화해가는 과도기적 양상을 지니고 있다. 창호는 정면 가운데 칸에만 출입문을 달고, 좌우 협칸에는 살창을 설치하였으며, 나머지 삼면은 벽으로 처리하였다. 이러한 창호 구성 형식은 오래된 건축 수법인데 조선 초기의 건물인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국보, 1962년 지정)에서 볼 수 있다.
부석사 조사당은 평면 계획과 가구 구조, 부재의 형태와 치목 방법 등이 고려 말 조선 초기의 건축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비슷한 시기의 건축물과 달리 장식이 절제되어 있다. 또한 부석사 조사당 벽화(국보, 1962년 지정)는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영주 부석사 조사당벽화(榮州 浮石寺 祖師堂壁畵)
종목 국보 제46호(1962년 12월 20일 지정)
수량 6면(부석사 성보박물관 내 보관 중)
주소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영주 부석사 조사당 벽화(榮州 浮石寺 祖師堂 壁畵)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조사당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벽화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46호로 지정되었다.
이 벽화는 부석사를 창건하고 우리나라에서 화엄종을 처음 시작한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부석사 조사당(국보 제19호) 안쪽 벽면에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지금은 벽화가 있는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 유리상자에 담아 보관하고 있다.
국보 부석사 조사당 벽화는 일제시대인 1916년경 조사당 해체수리시 분리되어 무량수전에 안치되었다가 1979년경 보호각으로 옮겨졌다. 이후 부석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해왔다. 그러다 지난 2020년 6월, 국립문화재연구원에서 보존처리 중에 있다. 한편, 벽화가 있었던 조사당 벽면에는 손연칠 선생이 그린 복원 벽화가 있으나, 지금은 원본 벽화를 스캔 출력한 사진이 걸려 있다.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백색·금색 등으로 채색하였으며, 각각의 크기는 길이 205 cm, 폭 75 cm 가량이다. 양쪽의 두 천부상은 우아한 귀족풍으로 양감이 풍만하며, 가운데 사천왕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 보는 건장한 모습이다. 훼손된 부분이 많고 후대에 덧칠하여 원래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율동감 넘치는 유려한 선에서 고려시대 불화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건물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 조사당을 세운 연대가 고려 우왕 3년(1377)임을 알게 되었으며, 벽화를 그린 연대도 같은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앞 石燈)
종목 : 국보 제17호(1962년 12월 20일 지정)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사로 345 (부석면, 부석사)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8각 석등. 국보.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높이 2.97m.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상하 비례의 교묘함이나 조각의 정교함에서 신라시대 석등 중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이다.
4매로 짠 방형의 지복석(地覆石) 위에 1석으로 된 지대석(地臺石)이 놓였는데 지대석의 네 면에는 각각 2구씩의 안상(眼象)이 장식되었으며 상면에는 팔각의 하대석(下臺石) 받침 2단이 마련되었다.
하대석은 모서리를 향하여 한 잎씩 복판복련(複瓣覆蓮)이 조각되었고 꽃잎 끝은 말려서 귀꽃이 되었다. 특히, 복련 중심에는 높은 3단의 받침이 있어 연꽃 속에서 간주(竿柱)를 받쳐 올리는 듯이 표현되었다. 간주는 전형적인 팔각주(八角柱)로서 굵기나 높이가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고 있다.
상대석(上臺石)은 통식을 따라 평박(平薄)하나 여기에 조각된 8엽의 앙련(仰蓮)은 상당한 입체성을 보여주고 있다. 화사석(火舍石: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은 팔각으로 네 곳에 장방형 화창(火窓)을 내었고 화창 주위에는 작은 구멍을 돌려 뚫었으며 나머지 네 면에는 앙련 위에 보살입상 1구씩이 조각되었는데 조각수법이 매우 정교하다.
옥개석(屋蓋石)은 낙수면이 우뚝하고 추녀 밑에 약간의 반전(反轉)이 있고, 정상에는 복련이 조각되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榮州 浮石寺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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