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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5일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마태오 14,13-21
예수님 앞에서 그 정도의 꿈밖에 꿀 수 없단 말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돌려보내야 한다는 제자들에게 그들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만약 제자들이 자신들이 함께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았더라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니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믿음과 제자들의 믿음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당신 믿음을 본받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씨를 뿌리십니다.
그 씨가 잘 자라면 새들이 깃들어 쉬게 됩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입니다.
행복입니다.
씨는 꿈입니다.
그런데 그 꿈은 누군가를 쉬게 하고 힘을 주는 일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자기가 가진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놓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지치지 않습니다.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것은 불안이고 인정받지 못함인데, 이웃을 행복하게 하려는 사명을 가진 이는 능력자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에 지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온 세상을 배불리고 더 나아가 온 우주에 이익이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단순히 나의 능력으로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식의 작은 꿈은 버립시다. 작은 꿈은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스웨덴의 화학자, 엔지니어, 발명가인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으며 355개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폭발물 산업에서의 그의 발명품과 사업 벤처는 그를 믿을 수 없을 만큼 부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노벨은 전쟁과 산업 분야에 널리 사용된 그의 발명품의 파괴적인 잠재력 때문에 종종 비판받았습니다.
1888년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의 동생 루드비히 노벨(Ludvig Nobel)이 프랑스 칸에서
사망했습니다.
프랑스 신문은 실수로 Ludvig 대신 Alfred의 사망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죽음의 상인은 죽었다(The Merchant of Death is Dead)라는 제목의 부고 기사에서는 노벨이 폭발물을 발명하고 폭발로 인한 파괴로 이익을 얻었다고 비난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보다 더 빨리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찾아 부자가 된 알프레드 노벨 박사가 어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노벨은 마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쿠르지 영감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고 난 후
변화하게 된 똑같은 충격을 받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재물이 자신에게 묶여 있다면
여전히 죽음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남을 것임을 깨닫습니다.
노벨은 자기 재산을 인류에 대한 긍정적인 기여에 보답하는 데 바치기로 했습니다.
그는 2,000억 정도 되는 재산으로 어떻게 세상에 지속적이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물리학, 화학, 의학, 문학, 평화 분야에서 업적을 이룬 개인과 조직에게 수여하는 노벨상을 제정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895년에 작성된 그의 유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남은 실현 가능 재산 전체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어야 합니다.
나의 유언집행인이 안전한 증권에 투자한 자본은 기금을 구성하고, 그 이자는 매년 전년도에 인류에게 가장 큰 이익을 안겨주었을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상금 형태로 분배되어야 합니다:
물리학, 화학, 의학, 문학, 평화.”
2,000억을 가진 부자들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노벨은 그 돈으로 온 인류를 먹일 방법을 찾았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의 노벨상 제정은 그의 유산을 ‘죽음의 상인’에서 ‘인류의 은인’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재물에 감사할 줄 알 때,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으로 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여길 때 사람은 그것으로 세상의 배를
불리는 일에 사용하게 되고 이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일이 됩니다.
먼저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물고기를 잡는 기술이든, 공부하는 기술이든, 예체능의 능력이든 그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 그것을 봉헌하면 주님께서는 그것으로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십니다.
나는 그 일의 일꾼이 됩니다.
이것으로 은총의 통로가 되고 이 은총의 통로가 됨으로써 그 은총을 주는 이와 하나가 됩니다.
이 때문에 5천 명을 먹이는 기적 안에서 정작 놀라는 것은 빵과 물고기를 봉헌하고 그것을 다시 나누어주는 자기 자신입니다.
하느님께서 도와주고 계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5일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마태오 14,13-21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기적의 원동력, 내 작은 나눔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 가장 우세한 특징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풍성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족하거나 모자라고, 궁색하고, 쪼들리고, 그래서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세월 고대해왔던 젖과 꿀이 철철 흘러넘치는 곳, 그래서 더 이상 가난도 눈물도, 아쉬움, 불평불만도 없는 그런 곳이 아닐까요?
복음서 여러 곳에서 하느님 나라의 ‘맛’을 살짝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탕자가 귀환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십시오.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태도를 기억해보십시오.
그 마음이 너무나 넉넉합니다.
그야말로 대자대비하십니다.
하인들은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암소도 한 마리 잡습니다.
풍성한 잔치가 벌어집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주린 배를 가득 채웁니다.
예수님께서 첫 기적을 행하셨던 카나의 혼인잔치를 생각해보십시오.
잔치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바로 잔치가 망했다, 파장이 되었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우리 인간들의 어쩔 수 없는 궁핍함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어서시니 즉시 상황은 반전됩니다.
여섯 개의 큰 돌 항아리에 가득 채워졌던 물이 순식간에 격조 높은 포도주로 변화됩니다.
그 양이 어마어마합니다.
약 600리터의 포도주입니다.
언젠가 맞이하게 될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잘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느라 군중들은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를 못했습니다.
하루만 굶어보십시오.
눈이 핑핑 돌면서 오로지 머릿속은 먹을 것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사흘을 굶어보십시오.
아무리 고상한 사람, 박학다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짐승으로 돌변할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좋은 말씀이 선포된다 할지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다니던 백성들의 구체적인 현실, 쓰라린 뱃속을 외면한 채 말씀만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의 필요성, 그들의 눈물, 그들의 슬픔,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하려는 동질감, 합일감, 일체감을 지니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귀여겨들어야 할 메시지의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 기적의 첫 출발점은 바로 우리 인간들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풍성함은 바로 우리 인간 측의 미약하고 작은 노력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군중 가운데 있던 한 사람의 작은 나눔(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어떻게 보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작은 나눔을 통해 당신 사랑의 기적을 시작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나눔이 빵의 기적의 원동력이자 구심점, 출발점이자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 사랑의 큰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내가 내어놓을 수 있는 작은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강론>
(2024. 8. 5. 월)(마태 14,13-21)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마태 14,14-20).”
1) 제자들이 자신들의 배고픔보다 군중의 배고픔을 먼저 걱정한 것은 ‘사랑’인데, 그들이 생각한 해결책은 군중을 돌려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상황에서는 제자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들의 건의에는 예수님을 걱정하는 마음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쉬시지 않고 계속 일하시는 것이 걱정스러우니까 일단 군중을 돌려보내자고 건의했을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자신들의 배고픔도 의식했을 것이고, 예수님과 자신들의 먹을거리를 어떻게 구할 것인지도 생각했을 텐데,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 대책이 없었습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아무 대책이 없을 때, 또는 해결 방법이 전혀 안 보일 때, 그때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해결책이 있다면 그대로 하면 되는 것이고, 그럴 때에는 청원기도는 안 바쳐도 됩니다.
감사기도는 바쳐야 하지만.>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라는 제자들의 말은, 몹시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그런데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음을 말씀드리는 ‘기도’와 같습니다.
2)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표현으로는 “그들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이지만, 뜻으로는 “그들을 보내지 마라.”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을 배고픈 상태 그대로 보내고 싶지 않은 예수님의 심정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뒤의 15장에 있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이 말씀은 ‘사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에 있는 말씀인데,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말씀’으로, 또 ‘치유의 은총’으로 사람들의 영적인 허기와 갈증을 해결해 주셨는데, 이제 육신의 배고픔도 해결해 주려고 하십니다.
3)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말씀은, 제자들 입장에서는 몹시 당황스러운 명령입니다.
그들에게는 돈도 없고 빵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정을 잘 아시면서도 그런 명령을
하신 것은, 당신이 따로 생각하신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말씀에 “내가 마련해 줄 테니.” 라는 뜻이 들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라는 제자들의 말은, 뜻으로는 “저희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입니다.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을 먹여야 하는 상황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4) 기적이란,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없었어도,
주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빵과 물고기를 재료로 삼아서 기적을 일으키셨고,
그 ‘기적의 빵’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빵을 받아서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명령이 말씀하신 그대로 실행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명령을 신앙인들이 잘 실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의 빵’을 군중에게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셨고, 그것을 받은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암시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 공동체는, 즉 교회는 사람들의 사정을 하느님께 말씀드리는(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바치는) 공동체이고,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은총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다시 나누어 주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느님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바로 그것이 교회의 본분이고 사명입니다.
만일에 세상을 향해서 담을 쌓아놓고서 신앙인들끼리만 똘똘 뭉쳐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일이 되고, 또 사랑 실천을 외면하는 일이 된다는 점에서도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