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15. 큐티
요한복음 1:1 ~ 5
예수님은 로고스요 하나님이시다
※ 육신이 되신 하나님, 이 신비는 이해의 영역을 넘어서는 초월의 영역이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사건이지만 이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의 복음서가 씌여지고 한 세대가 지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남은 유일한 사도이자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요한은 당시의 영지주의로 인한 진리의 훼손과 세 복음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도록 이끄시는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붓을 들어 복음서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요한복음을 독수리에 비교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공관복음은 모두 땅에 거주하는 사자(마태)와 사람(마가)과 황소(누가)로 비교한 반면에 요한복음은 유독 하늘을 날며 비상하듯이 초월적이고 공관복음과는 다른 관점의 특이한 면이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가장 쉬운 헬라어 표현으로 단문 위주로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너무나 깊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이 사건들을 나열하고 정리하는 식의 표현이라면 요한복음은 한 사건이나 문제에 깊숙이 들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관복음을 일간지에 비유하고 요한복음을 월간지에 비교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은 각 진술마다 사도 요한의 평생의 깨달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을 압축해서 넣어놓았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담아낼 수 없는 작업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들어있는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다 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 위대한 작업이 될 것입니다. 2025년 말씀 묵상을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하고자 합니다. 프롤로그와 예수님의 등장, 첫 번째 유월절, 두 번째 유월절, 세 번째 유월절,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이렇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묵상하고자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임하게 되길 소원합니다.
관찰 :
1) 태초, 말씀, 하나님
-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a. 요한복음 1:1에 사용된 단어들 : 태초, 말씀, 하나님
a.1. 태초 : 아르케(ἀρχή). 원 뜻은 ‘맨 처음’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간이 시작되기 전, 시간을 초월한 절대적 시점을 가리킵니다. 이 의미는 절대적 종점을 전제로 하는 단어입니다. 그렇기에 영원성을 또한 전제하지 않으면 그 주권의 개념도 모호해집니다.
a.2. 말씀 : 로고스(λόγος). ‘레고’(지혜롭게 말하다)에서 파생했습니다. 원뜻은 ‘지혜롭게 말하는 능력’, 혹은 ‘이성’, 여기서는 지혜의 근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a.3. 하나님 : 데오스(θεὸς). 유일하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a god이 아닌 God입니다. 창조주,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b.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따랐던 존재였습니다. 요일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말씀하면서 자신이 경험한 존재임을 분명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c. 사도 요한의 요한복음을 통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이미 1:1에서 다 드러나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도마의 고백 요 20:28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으로 이어져 드러나고 있습니다. 도마의 고백은 단순히 도마의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요한의 고백이기도 하고, 모든 사도들의 궁극적인 고백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요한복음의 핵심적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2) 만물을 지으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 2절.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시기에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시는 창조 사역에 가장 적극적으로 동참하셨습니다. 비록 성자의 존재가 가려진 듯이 보이지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셨음을 사도 요한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그가 깨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영역이기도 합니다.
-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시기에 천지 창조 사역에 예수님께서 관여하지 않으심이 없으십니다. 말씀하시매 그대로 된 것이 창조 사역의 개요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의 만물은 그야말로 모든 것입니다. 시간도, 공간도 그 만물 안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 창조된 모든 만물을 보전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의 영역이 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한번 그 능력이 발현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 능력이 함께 하기 때문에 세상이 유지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빛”은 태초에 해와 달과 별이 존재하기 이전의 신비한 빛, 생명의 빛, 창조의 빛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고, 살게 하시고, 죽게 하시는 주체가 되시는 분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는 고백과 본문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 5절.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실 때, 이 온 우주는 암흑으로 덮여있었습니다. 거기에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으로 우주에는 빛이 쬐이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이 우주에는 창조의 빛, 생명의 빛, 신비의 빛이 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비추기 시작한 하나님의 빛은 계속해서 쉬지 않고 비추이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로 그 빛을 대체하게 하셨지만, 그것은 일반은총적인 은혜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신비의 빛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은 지금도 비추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이 잉태되고, 모든 생명이 유지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 절은 특별히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빛이 비추게 되었지만 세상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이 도통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들은 궁극적으로 어둠이기에 그 어떤 어둠도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에 반대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은 모두 패망하고 말 뿐인 것입니다. 빛은 어둠에 비추지만 어둠은 빛을 방해하거나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가르침 :
1) 여호와의 증인들은 요 1:1 이 구절을 가지고 “하나님은 말씀이다”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하나님이셨다”는 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의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고자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이시며, 그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의 이 가르침은 요한복음 전체를 통과하는 중요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2) 로고스 = 말씀 = 성경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로고스 이시고, 말씀이시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냐 하는 것은 오늘날도 동일한 가장 중요한 믿음의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신 인간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간들의 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옥에 가는 인생들의 비참함을 보고 고민하기 이전에 내가 구원받은 은혜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은 엄밀히 말해 남의 불행을 염려할만큼 그렇게 여유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 자신의 비참함에서 구원받은 은혜를 먼저 깊이 알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격하고, 그 은혜가 너무 커서 나도 예수님이 사랑하신 다른 인생을 바라보고, 다른 인생이 구원받는 길을 알려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4) 다른 모든 사도들이 죽고 사도로서는 홀로 남은 상황에서 사도인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이 구절을 기록하였을지를 생각해 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음으로 펜을 잡고 파피루스에 기록을 남기기 시작하면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성령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는 엄위하신 광경을 바라보면서 이 글을 기록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글은 인간의 어떤 지혜와 상상으로서도 표현해 낼 수 없는 하나님만이 알려주시고 보여주시는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5) 예수님은 만물을 지으신 창조의 주체이시고, 또한 그 모든 만물을 보전하시는 능력을 발휘하시는 분이십니다. 암흑의 우주에 비취인 생명의 빛은 그 이후로 소멸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 능력으로 살리시고, 새롭게 하시고, 생명을 보존하시는 역사를 이루시고 계십니다. 그 능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이 땅에 왔다가 사라지신 그런 위인이나 슈퍼 히어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잘 깨닫은 바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이셨고, 성령의 감동케 하심으로 말미암은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적용 :
1)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 로고스이신 예수님, 성령님을 인해 찬양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구속주 예수님, 임재주 성령님을 다시금 경배합니다. 세 분 하나님의 온전하신 연합으로 하나되심을 찬양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 그가 누구인가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신약의 모든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이 메시지의 크기와 깊이를 더 많이 알아가길 소원합니다. 내가 아직까지 경험하고 알아왔던 것은 그저 조족지혈(鳥足之血, 새 발의 피)일 뿐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더 깊이 알아가고, 그래서 더 바르게 증거하고 전달하는 메신저로서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내가 먼저 바로 알지 못하면 바르게 전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3) 포이메네스 영성 수련 중에는 다른 본문으로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넥시오 디비나라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은 글로 나누는 것은 몹시 한계가 있는 묵상이었습니다. 새로운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는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