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꾸준한 운동, 균형 잡힌 영양소 섭취…. 이런 교과서적인 방법 외에 새로운 답(?)이 여기 있다. 바로 남성의 고환을 잘라내는 ‘거세’다. 조선시대에 가장 오래 산 사람은 왕도, 양반도 아닌 바로 내시(환관)였다.
조선 시대 각 계급의 평균 수명. 조선 내시의 평균 수명은 70세다. 왕(평균 47세), 양반(평균 51~56세)보다 오래 살았다.
유럽의 거세된 남자 연구- 13년 더 오래 산다
미국 뉴욕주립대 제임스 해밀턴 교수와 고든 메슬러 교수는 1969년 거세된 영국, 독일, 아일랜드 혈통의 백인 남성들이 평범한 남성들보다 약 13년 더 오래 산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정신병원에서 거세당한 정신지체자, 정신박약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다. 1900년대 유럽에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거세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거세되지 않은 남성 집단의 평균 수명은 약 56세였고, 거세된 남성 집단의 평균 수명은 약 69세였다.
이 연구에는 약점이 있다. 거세 후 수명이 길어지는 현상이 정신지체자나 정신병원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만 일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 필자의 연구는 이 결과가 정상적인 남성 집단에서도 나타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100년을 산 내시가
연구에 사용한 양세계보의 첫 장. 양세계보는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 중이다.
조선시대에 작성된 양세계보(養世系譜)는 세계에서 유일한 거세된 남자들의 족보다. 양세계보에는 내시 777명의 가계도 기록이 있다. 이 족보는 이윤묵(1741-1816)이 만들었으며, 윤득부를 시조로 한다.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내시들에게 왜 족보가 필요했을까. 양세계보의 서문은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아! 길러준 은혜도 낳아준 은혜에 못지않게 의가 큰 것이니 그것을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양세계보에는 육십갑자에 따라 태어나고 사망한 연도가 표시돼 있다. 이 기록과 당시 조선 임금의 이름, 통치년수를 비교하면 내시의 정확한 수명을 계산할 수 있다. 이런 방법으로 정확하게 수명을 계산할 수 있었던 내시는 777명 중 81명. 이들의 수명을 조사한 결과, 조선시대 내시의 평균수명은 약 70년이었다. 당시 문관, 무관가문의 양반 남성들보다 평균 14~19년 정도 오래 살았다. 특히 81명의 내시 중 3명은 ‘100세인’이었다. 100세인이란 100세 이상 생존한 사람을 의미한다.
거세한 남자가 오래 사는 이유
내시의 수명은 왜 길까. 먼저 개체의 수명이 어떻게 정해지는지를 이해해 보자. 대부분의 생명체는 개체별로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죽는다. 그래서 인간이 속한 포유동물은 생식을 통해 유전자를 대물림해서 영속성을 이어간다. 따라서 생명체는 성장하면서 생식을 담당하는 기관이 잘 발달하도록 에너지를 분배해야 한다. 이렇게 생애 중 에너지 분배과정의 결과로 노화의 속도가 결정되고, 개인의 수명이 정해진다.
진화적 관점에서 이를 설명하는 두 가지 가설이 있다. 하나는 생식과 신체 유지에 필요한 자원(에너지)의 분배가 최적화되면 그 개체가 최장의 수명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설이다. 또 하나는 유전자가 같은 개체도 어떤 환경에 노출되느냐에 따라 수명이 달라진다는 가설이다. 두 가설은 모두 내시의 수명이 길어진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해 준다. 내시는 생식기관을 잘랐기 때문에 생식기관을 발달시키고 유지하는 데 드는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 또 거세로 남성성을 잃어버린 후 바뀐 발달과정이 내시의 수명을 늘렸을 가능성이 있다.
거세로 인한 여성화도 유력한 설명이 될 수 있다. 포유동물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암컷의 수명이 수컷보다 길다. 노화 관련 연구자들이 수컷의 수명을 줄이는 용의자로 꼽는 것은 바로 남성호르몬이다. 남성호르몬은 면역력을 약화시켜 남성의 수명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내시의 수명이 긴 이유도 내시가 남성 성호르몬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여자가 남자보다 평균 수명이 길다. 남성호르몬이 그 용의자로 꼽힌다.
대표적인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분자모형.
남녀, 노화 과정 자체가 다르다
왜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살까. 거세된 남성처럼 남성의 특성을 잃게 되면 여성만큼 오래 살 수 있을까. 노화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질병이 성별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 남성은 여성보다 심혈관 질환에 걸릴 확률과 이 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매우 높다. 한편 흡연을 하는 여성은 남성과는 다른 대사 능력 때문에 남성보다 폐암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다.
남녀의 차이에 대한 연구 중 가장 활발한 분야는 성 특이적 호르몬에 의한 면역 기능에 대한 것이다. 남성호르몬은 일반적으로 면역 능력을 떨어뜨린다. 여성은 남성호르몬이 몸 안에 적기 때문에 남성보다 면역기능이 강하다. 그래서 여성은 감염성 질환에 남성보다 덜 걸린다. 대신 여성은 강한 면역 반응 때문에 나이가 들면서 류머티스관절염 등 자가면역질환에 걸리기 쉽다. 반면 남성은 남성호르몬 때문이 면역기능이 여성에 비해 낮은데도, 나이가 들면서 더 빠르게 면역 기능을 잃는다. 따라서 남성은 나이가 들수록 여성보다 면역 능력이 더 떨어진다. 그렇다면 면역기능의 차이가 남녀의 수명 차이를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일까.
정답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최근 연구 결과를 종합해보면, 실험동물의 간이나 지방 같은 주요 조직에서 성별에 따라 유전자 발현이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방 조직에서는 전체 유전자의 38%, 간 조직에서는 전체 유전자의 31%가 성별에 따라 발현에 차이를 보였다. 이 결과는 성별에 따른 차이가 작지도 않고, 또 단순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또 남녀 간 차이가 발생하는 다양한 생물학적 기능을 이해하는 것이 성별에 따라 달라지는 노화기전을 규명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연구원이 DNA 마이크로어레이로 유전자를 분석하고 있다. 최근 유전자 연구에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는 마이크로어레이 기술은 노화연구에서도 핵심역할을 한다.
소식하면 장수하는 이유 : 여성화
오래 살겠다고 거세를 하는 남성은 없을 것이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 중 사람의 수명을 늘릴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방법은 ‘소식’, 즉 적게 먹는 것이다. 동물 실험 결과 소식은 실험용 쥐의 수명을 약 1.5배 늘린다. 심지어 약간의 소식도 쥐의 수명을 적게나마 늘려줄 수 있다.
소식을 시작하는 시기도 중요하다. 노년에 시작해서는 수명이 연장되는 효과를 볼 수 없다. 발생이 끝난 시점에서 바로 시작하는 것이 효과가 가장 크다. 중년에 시작하기만 해도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소식을 하게 되면 유전자 발현에도 큰 영향을 미쳐 나이 들어 변하는 유전자 발현을 크게 줄인다. 주목해야할 것은 소식을 한 수컷 쥐의 유전자 발현 패턴이 암컷 쥐와 비슷해진다는 부분이다. 이는 유전자의 ‘여성화’가 수명을 연장시키는 데 중요한 요소임을 시사하고 있다.
소식을 해서 수명이 늘어난 수컷 쥐와 남성성을 잃어버린 대신 수명이 늘어난 내시에는 어떤 생물학적 연결 고리가 존재할까. 노화 연구가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대한 해답과 함께 노쇠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장을 열 것을 기대해 본다.
- 글
- 이철구 | 고려대학교 생명공학부 교수
- 미국 위스콘신-매디슨대에서 박사,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채플힐캠퍼스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2005년 3월 고려대에 부임해 생명과학대학 생명공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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