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내용의 글을 올려주신 이곳 카페장님 이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늦었지만 우선 새해 인사부터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그동안 자유대한민국을 위해 열심히 싸우신 여러분들의 노고가 헛되지 않도록 대한민국이 바로 서는
첫걸음을 딛는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해 3월부터 저는 이 문제를 여론화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여러 곳에 기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좌파정권에 의한 왜곡된 현대사의 여파와 역대 정권의 무지로 인해 너무나 오랫동안 말살되온 건국대통령의 업적과 왜곡 전파된 그릇된 지식으로 인해 별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자유대한민국이 이땅에 창업된 것은 우리 민족사에서 대단히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5천년 한민족 역사 이래 최초의 근대국가로 탄생했으며, 해양국가로,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근간으로 한 근대국가로 탄생했다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건국 60주년을 맞는 금년은 더욱 뜻깊은 해이며, 더구나 세계12위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을 기리는 전국민적인 성대한 잔치를 배설함이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뜻깊은 이 시점에 좌파정권을 붕괴시킨 이렇게 의미 깊은 해에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화폐를 발행함에 있어 이렇듯 졸속행정으로 전 세계에 전파될 대한민국의 화폐도안인물로 '김구'를 선정함은 우리 스스로 우리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부정하는 행위임을 위정자들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김구를 화폐도안 인물에서 배제시켜도 건국대통령의 초상이 선정될 확률도 낮으며 또한 현재 대통령 당선인인 MB가 가장 존경한다는 안창호가 선정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에서 감히 강력하게 주장하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이명박 당선인은 일찌기 안창호 기념사업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자신 또한 안창호를 가장 존경한다고 여러 차례에 걸쳐 언급을 했던 바입니다. 김구에 대해서는 이제 어느 정도 대한민국 정체성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고, 또한 아직도 생존해 계신 어르신들은 김구 선생 말년의 행적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많은 힘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고액권 화폐 선정위원회의 결과나 여론 조사 결과를 볼 때 김구 보다는 오히려 안창호에 대한 선호도가 더 높았으며, 특히 이명박 당선인까지 안창호를 존경한다고 하므로, 안창호에 대한 여론 몰이가 거세게 일어날 것에 대한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정초 연합뉴스에 10년 좌파 정권 시절에는 김대중과 노무현이 일방적으로 존경한다는 김구가 뜨고, 백범기념관이 정부 자금으로 거대하게 세워졌으나, 이번에는 안창호를 존경하는 이명박이 당선되었으니, 효창운동장 대신 도산공원이 뜨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한 기사가 올라오자 그렇지 않아도 우파 원로 역사학자들이 우려하던 바가 보도로 나오자 아연 실색하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단 김구는 절대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인물이 될 수 없다는 취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글을 올렸고, 또 많은 분들이 글을 올려 주셨으므로 여기서는 김구가 대한민국을 상징할 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를 올리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1948년 4월 19일, 김구와 김규식 등 일단의 인물들이 김일성과의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월북했습니다. 그리고 남북연석회의의 구체적인 결과물로 발표된 것이 이른바 4.30성명임을 아시는 국민들도 많겠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모르는 분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4.30성명은 총 4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가장 중요한 4번 쩨 조항은;
4. 상기 사실에 의거하여 본 성명서에 서명한 제 정당 사회 단체들은 남조선 단독 선거의 결과를 결코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 또 이러한 선거로서 수립되는 단독 정부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며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
김구는 남조선 단독 선거의 결과를 결코 승인하지도 않을 것이며 이러한 선거로 수립되는 단독 정부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며 지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항간의 김구 추종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 부분을 의식적으로 배제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인물이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국체로 건국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인물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대한민국을 부정한 인물이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인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것입니다.
즉, 바꿔 말하자면 안동 김씨 집안을 철저히 배척하던 인물을 안동 김씨 집안을 상징하는 인물로 선정한다는 말인데 이는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훼손되고 파괴된 대한민국 정체성과 정통성 확립을 위해서는 이렇듯 졸속으로 결정된 고액권 화폐 초상인물 선정에 대해 다시 한번 심사숙고하여 그 결정을 미루고, 건국 6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에,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인물이 고액권 화폐 초상인물로 선정될 수 있도록 고려하는 정책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근대 국가에서, 자본주의의 상징인 화폐야 말로 전 세계에 대한민국을 알리는 막중한 역할을 하는 강력한 도구임을 새삼 인식하고, 차제에 고액권 화폐 발행을 강행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redenomination을 고려해 봄이 옳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서민 경제를 생각해서라도 10만원권 화폐가 아닌 redenomination이 합당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소견이기도 하며, 고액권 화폐로 인해 겪게 될 서민들의 불편을 고려해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바른 정치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연하여 안창호에 관해서는;
안창호는 알다시피 중국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1924년 12월, 미국에 거주하는 가족 상봉을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합니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대부분 자신들의 가족과 함께 중국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거나 국내에 가족의 일부를 남겨 놓아 일제 치하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창호는 유일하게 자신들의 가족을 모두 미국으로 이주시켜, 일제 치하의 고초를 겪지 않았습니다.
이때 미국에 있던 교포에 의해 미국의 정보기관에 익명투서가 들어갑니다.
그 투서의 내용은 안창호가 소련을 드나들며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하는 등 안창호의 사상이 의심되므로 조사해 달라는 투서였죠. 그래서 미국 이민국에서 안창호에게 통지를 합니다. 그러나 공교롭게 LA로 통지를 보내면 이미 안창호는 LA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있고 하는 식으로 엇갈렸지요. 그러던 차 1925년 안창호는 시카고에서 check되고 시카고 이민국에서 조사를 받게 됩니다. 시카고 이민국 직원과의 인터뷰에서 당신은 공산주의자이냐라는 질문에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답변을 하는 등 일단은 무혐의로 일단락 지게 됩니다.
이러한 투서가 들어가게 된 동기는 전혀 근거없는 음해는 아니라는 것은 다음 사실을 보면 유추할 수 있습니다. 상애에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임시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 박사가 상해 임정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1921년 이승만 박사가 상해에서 돌아온 이후 발생한 임정 분규 과정에서 안창호는 5월11일 노동국총판직을 사퇴하고 임정에서 손을 뗏지요.
그리고는 임정 개조를 주장합니다. 이른바 개조파의 대두지요. 임정 개조를 주장하는 세력은 23년 1월3일 상해에서 국내외 61개단체가 참석해 국민대표회를 열지만 좌익과 우익, 좌익내 고려공산당과 전러공산당 등이 갈등을 빚다가 안창호계는 탈퇴하고 급진파만으로 조선공화국 을 선포합니다. 안창호는 임정을 개조하여 자신이 임정을 장악하기 위해 좌우합작을 하지만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련의 공산주의자들과 상해공산당, 고려공산당과 합종연횡을 했던 전력이 있었기에 미국 정보기관에 이러한 투서가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어찌보면 좌우합작의 효시는 안창호라 해도 과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해방 후 여운형과 김규식에 의해 주도되었던 좌우합작이 1920년대 초반, 이미 상해에서도 임시정부의 장악을 위해 안창호에 의해 좌우합작이 시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3.1운동 이후 안창호에 의해 설립된 흥사단 국내 지부로 발족한 수양동우회는 "개인과 사회가 유기체라는 사고에 입각하여 개인을 본위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인식했는데, 이러한 인식은 수양동우회가 지향하는 근대 자본주의사회를 건설하는 주체가 건전한 인격을 함양한 지식인과 자본가 등 조선의 소수엘리트, '중추계급'이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이러한 인식에서 수양동우회는 회원 개인의 실력양성에만 치중하고 대중적 실력양성운동은 도외시했는데, 이것은 '절대독립'의 목표를 내걸고 대중을 직접 대상으로 하는 민중계몽과 민중동원의 방법을 구사했던 신간회와 다르다.
이런 점에서 1927년 2월, 사회주의운동과의 제휴와 함께 반자치론을 표방하고 등장한 신간회는 수양동우회 내에도 변화의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왜냐하면 수양동우회는 회원 몇몇이 조선총독부가 조종하는 자치운동에 가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운동자들 사이에서 자치운동 세력의 기반으로 간주되던 수양동우회는 신간회 창립을 주도한 민족주의좌파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었고, 이 때문에 신간회 창립과정에서 배제되었다." 고 국가보훈처 이현주 연구관은 '일제하 수양동우회의 노선과 안창호' 편에서 이렇게 결론을 맺었습니다.
안창호의 인식은 대중계몽이 아닌 소수 엘리트 양성과 그 소수 엘리트 계급이 중추계급이어야 한다는 논리로, 이는 황장엽의 인간중심 주체사상의 '사회주의는 계급 타파를 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계급이 정권을 잡아서는 안되고 자주성, 창조성, 휴머니즘을 갖춘 사회주의적 교양인이 지도 해야 한다'는 대목에서도 보여지듯 사회주의적 교양인이 지도해야 한다는 말은 다시 말해, 지식인에 의한 전체주의 1당 독재 즉, 지식인 독재로 계급타파한다는 것과 안창호의 소수 엘리트론은 일맥상통한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흥사단의 세력은 좌우합작 형태로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일전의 고액권 화폐 초상인물 선정 여론조사에서도 안창호가 수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안창호의 사상에 대한 바른 인식이 전무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현 시점에서 김구를 내리면 그 자리를 차지할 인물이 안창호가 될 확율이 상대적으로 높아졌기에, 대한민국 정통성과 정체성을 수호하는 측에서는 또다른 우려를 금치 못하는 것입니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도 두어달 후에는 활동을 재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학도님, 안녕하세요? 그동안 저도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할일이 더 많다는 것은 알면서도 아무래도 생업도 걱정이 되구.... 아이구 그 놈의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이 이리도 실감이 날 줄이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 역시 자료 수집은 꾸준히 하고 있었지만 그런 이유로 글을 쓰지도 자료들을 인터넷에 올리지도 못했었습니다. 건국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식 수준이 이렇게 낮으니, 이명박 정부에 큰 기대를 하기 어렵습니다. 국가 발전은 지도자와 국민이 함께 이루는 것인데, 국민 편에서 준비가 안되어 있습니다. 건국 대톨령을 모르는 이런 잘못된 사관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라가 발전하기를 기대하다니요. 과거를 모르면 미래를 내다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도 석달 후에는 꼭 활동을 재개할 목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역사학도님은 무슨 활동을 계획중이세요?? 약간의 힌트라도...
제3의사나이님, 답변을 드렸는데, 답변을 드리는 사이 로그아웃되어 있어서 그만 글이 아깝게 다 날라가 버렸네요. 아마 아직은 공개하여서는 아니되는 계획이었나 봅니다. 그 답변은 나중에 다시 드려야 할 것 같네요.
저는 본래 기독교 진리를 배우며 전하기 위해 부름받은 신학도인데요. 제가 성스러이 여겼던 선지동산이 어떻게 김대중의 지령으로 유언비어 진원지가 되었는지 그 과정을 목격하였습니다.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모르면서 김대중의 지령을 맹신하고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던 이들이 정계 거물들이 되어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치유될 줄로 알았던 광주사태의 상처가 역사 왜곡으로 굳어져가고 있습니다. 저는 신학도이지만 역사학과 국제정치학을 누구 못지 않게 정론으로 수업할 기회가 있었으며, 나라와 선교를 위한 기도 제목을 알기 위해 수업했었지요. 그 분야를 전공할 때 갖추었던 지식은 단지 나라를 위한 기도 제목을 아는데
사용하려 했었습니다. 정치 시사에 관해서는 연구만 할 뿐 입밖에 내지 않는 것이 저의 신조요, 신앙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군복무했던 지역에서 두 여중생 윤화사고가 났을 때 범대위가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반미 촛불시위가 세계 top news가 되었으며, 배후에서 북한 세력이 적화통일의 기회로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을 때 제가 군복무했으며, 제가 그 지역 청소년들과 더불어 활동하였을 때 익혔던 지형에 대한 증인이 될 책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시사토론에 참여하게 된 출발이었으며, 제가 풀타임 기독교 사역으로 돌아가기 전에 매듭져야 할 이슈들이 금년에 남아있습니다.
교계 내에서도 두 다른 사관이 충돌하고 있는 현실은 제가 간과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직접 겪으며 목격하였던 사실들에 대한 증인이 되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본래는 나라와 선교를 위한 기도 제목을 알기 위해 전공하였던 사회과학 분야들에서 받은 훈련을 사용하여 한국 근현대사 사료들을 수집하고 공유하는 일을 단 몇달간만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시간 여건이 어렵지만 그것이 금년의 저의 실행 목표이며, 그 어떤 사역보다도 우선순위를 그 일에 두려 한답니다.
2008년도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역사학도님 열심히 하시고 석달후에 맘껏 글을 쓰면서 일을 하자구요.. ^^* 국민이 어리석으면 깨우칠 수 있도록 해야 되겠지요.
천지님의 구국운동이 빛을 발하고 있는 새해 주님의 은혜 가운데 힘차게 출발하세요. 박복덕 목사님 소식은 오랫동안 접하지 못하였는데 듣고 계신지요.
박복덕 목사는 지만원 박사님 재판에 참석했다고 하더군요
부산에서 서울까지 오기 힘드셨을텐데도 그분의 지박에 대한 충심은 변함 없으셨군요.
새해 인사를 못드렸네요. 역사학도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역시 아직도 밖에서 바라보는 건국대통령에 대한 인식은 싸늘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보수우파의 민족주의 거두 이승만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못할 시 역사학도님의 말씀대로 대한민국 미래에 대한 기대는 난망이라는 생각입니다.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참된 뜻을 모른다면 그러한 어리석음을 계속 범하겠지요.
이승만 박사의 건국과 반공이 있었기에 제가 존재할 수 있었으며, 조국 있는 인간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정치적 건국 대통령 이승만 없는 정치적 건국 대통령 박정희 있을 수 없음에도 건국 대통령의 독립운동의 은공을 기억하는 국민 수가 그토록 적은 이런 안타까운 현실에 저도 오래 인내할 수는 없습니다.
워싱턴에 있는 교포들과 미주지역 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그리고 국내의 이승만사랑회 등이 워싱턴에 이승만 박사 동상 건립을 추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주로 미주 동포들의 성금과 국내에서 성금 모금에 동참해서 제작하기로 했지요. 이승만사랑회 대외적 첫 사업입니다. 연합뉴스에도 보도가 되었지요. 무려 50년이라는 긴 세월을 어둠속에 묻혀있었고, 역대 정권 통치권자들이 모두 부정하고 폄훼해 왔으므로 짧은 시일내로 바로 잡히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세대가 이승만 박사를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라는 생각에 안타깝습니다. 50대가 초등학교 입학할 당시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어렴풋이 기억이 남아있
제가 미국의 여러분야의 학자들로부터 한국이 농업국에서 산업국으로 탈바꿈하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비결은 이승만 대통령의 토지 개혁에 있었다는 사실을, 1960년대에 다행히 한국은 산업화가 지주들의 완강한 저항을 받지 않는 사회가 되어있었기에 가능하였다는 사실을 배운 때가 198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왜 그 사실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역사가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 것인지 의아하기만 합니다. 미국에 건국 대통령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교포들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며, 저도 건국사 배우며 알리기에 잠시나마 전념할 기회를 가지려 합니다.
하이구~~ 강만길의 무식을 들어보세요. 이승만 박사가 농지개혁을 6.25이전에 단행해서 거의 완료했다는 객관적인 기록이 밝혀졌음에도 대한민국은 농지개혁을 하지 않았고 김일성만 농지개혁을 했다고 헛소리를 해대고 있는데요.
역사학도 님, 박복덕 목사는 지박사에게 변함없이 충성하는 것으로 압니다만 요즘은 잘 모릅니다. 언제 조용히 대화를 나눌 때가 있을겁니다. 물론 사람에게는 장단점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특히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을 할 때에 진실하고 바르게 일을 하면 존경을 받습니다. 거짓되고 아첨하는 분들은 깨달아서 바로 행해야 되지만 안될 시에는 결국 도퇴되는 것을 봅니다.
그분의 구국운동을 향한 뜻은 숭고하였으되, 이회창님에 대한 편견이 좀 있으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