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무아설을 잘 이해하려면
지금 인류의 지성인들이 영혼의 실체를 알고 싶어 해요.
그러나 아~무리 과학적으로 연구해도 지금까지 영혼의 실체를 파헤치지 못했어요.
남방불교에서 이 부처님의《아함경》을 아~무리 봐도 ‘영혼체라는 것은 없다’ 이렇게 나와요. 영혼체 없다. 영혼체와 같은 고정불변의 실체는 없다.
이것을 영산불교에서는 깨기 위해서《붓다의 메시지》처음에는 그냥 영체라고 했고,
지금은 더 깊이깊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남방불교, 상좌부불교, 테라바다(Theravada)불교, 소승불교의 그 아비달마에서
써놓은 것은, <청정도론(淸淨道論>(Visuddhimagga, 남방 상좌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논서, 5세기경 붓다고사의 저술이다)이나
거기에서 써놓은 이야기는 정말 그렇게밖에 몰랐어요.
정말로 잘 본다는 것이 그것밖에 못 본거예요.
이 영혼체를 못 보니까 무아사상에서 볼 때 이것을 ‘생각의 흐름’으로 봐버려요.
무아에 위배가 안 되려고 하니까, 무아에 반하면 이것이 불법(佛法)이 아니라고
생각을 해가지고 이 영혼체를 ‘의식의 흐름’으로 봐버려요.
그래서 의식의 흐름, 생각의 흐름, 찰나생 찰나멸 이렇게 봐버려요.
그것을 윤회의 주체로 봐버려요.
이러한 남방불교나 지금 현재의 재래불교를 박살낼 교단은 영산불교밖에 없어요.
왜냐? 부처님의 무아설을 잘못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왜곡된 무아설, 이거 극복해야 됩니다. 불교를 망하게 한 주범이어요.
우리의 영혼체는 4겹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자세합니다. 4번 영체, 3번 영체, 2번 영체, 1번 영체 그러지요.
이 몸까지 하면 5개의 ‘나’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 요놈이(-몸뚱이) 죽으면 살아있었을 때의 모든 기억과 업이
그대로 영체에 반영되어 버려요. 시시각각 그리로 흘러들어가요. 반영되어요.
요놈이 죽으면 모든 기억과 모든 생각이, 업이, 인격이 4번 영체로 가요.
마치 다섯 장의 종이에다가 한번에 글씨를 쓰려면 종이 사이에 묵지를 넣어야 되잖습니까? 옛날에는 그랬어요. 그렇지요? 요즘도 그러나요?
요즘은 컴퓨터가 있으니까 복사해버리면 그럴 필요가 없지요.
옛날에는 묵지를 넣어요.
넣어가지고 딱 위에서 쓰면 밑의 다섯 장째까지 글씨가 나오잖아요.
알아볼 수 있도록 나오지요? 그와 같아요.
우리의 영체가 4개이지만 이 몸뚱이까지 다섯 개이지만 딱 하나로 겹쳐져 있어요.
그래서 생각을 하고 행위를 하는 것이 전부 반영이 되어요.
그대로 반영이 된다고요. 그렇게 보면 맞습니다.
그래서 이 몸뚱이가 죽으면 4번 영체까지, 1.2.3.4번 영체가 그대로 ‘나’예요.
내가 안 죽었는데 왜 죽었다고 할까? 죽었다는 관념이 없어요.
막 죽은 무주고혼은 그런다고 그래. 자기가 엄연히 있으니까. 알았습니까?
몸뚱이는 다 죽어버리고 흙밥이 되어버리고 재가 되어버렸지만
엄연히 영체를 지니고 있거든요.
1.2.3번 영체는 다 그 속에 겹쳐져가지고 4번 영체로 영가들(-무주고혼들)이
그러고 돌아다닙니다. 안 죽었다고 그래요. 참~재미있게 돌아다녀요.
그런데 거기는 복이 없으면 배가 고프고 추워요.
단종과 같이, 단종대왕(조선의 6대 임금. 문종의 아들. 1441~1457. 후에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알지요?
그렇게 해서 무주고혼이 된 사람들은 후손들이 또 우리 국민들이 애도하고
그 사당을 많이 지어서 항상 잘 해주고 그러니까 그 정도는 상당히 복이 많아요.
거기의 무주고혼은 괜찮아요. 그래도 우리가 단종을 4하늘까지 올려줬습니다.
자, 무주고혼, 춥고 배고프고 일반적인 생활이 그래요. 춥고 배고프고 아파요.
나쁜 병 걸려서 죽으면 무주고혼 되잖습니까? 명을 다 못사니까 그래요.
명부를 들어갈 때까지 그래요. 명부를 들어가게 되면 4번 영체는 카트(cut) 당해요.
왜 그러느냐? 4번 영체는 저 명부, 저쪽 세상하고 맞지를 않아요.
그 환경에 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자연법칙에 의해서 탁 카트 되어버려요.
그러면 카트 되어버린 4번 영체는 생명을 잃어버린 거예요.
이것은 애당초 유한한 생명체예요.
1.2.3번만 딱 명부에 간단 말이에요.
그래서 하늘까지는 3번 영체가 주체가 되어요.
그 속에는 1.2번이 있습니다.
1.2.3번은 항상 뭉쳐 다녀요.
성중하늘은 2번이 나와요.
극락은 1번 영체가 주가 되는데 2.3번은 1번 속으로 들어와요.
1.2.3번은 항상 뭉쳐 다녀요. 이것은 영원히 죽지 않아요. 영~원히 죽지 않아요.
그래서 이것은 불생불멸이어요. 그렇게 봐도 되어요. 불생불멸이어요.
이것을 내 주인공이라고 그래요. 이게 내 주인공인 거예요.
내가 업을 지으면 그 업이 전부, 그 업의 종자가 전부 1.2.3번 영체로 반영이 된다고요.
그래서 이숙(異熟)이 되어요. 거기서 자란다고요. 때가 되면 결과화 되는 거예요.
과보가 오고 과보를 받는 거예요.
그런데 남방불교에서 식(識)이라고 했잖아.
앞에서 의식, 의식의 흐름이라고 했잖아요?
식(識)은 절대로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거예요.
왜? 찰나생 찰나멸 한다고 했어.
찰나생 찰나멸 하는데 어떻게 그~다겁생의 죄업장이 또 식(識)이 기억이 보존 됩니까?
찰나생 찰나멸인데. 생멸이 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주체의 자격이 없는 거예요.
영산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영체는 생멸(生滅)을 하지 않아요.
1.2.3번은 절대 죽지 않아요. 절대 안 죽어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업종자가 여기에 반영이 되어가지고 밭에서 씨가 자라듯이
과보를 만들어 간다고요.
그렇기 때문에 유식(唯識)에서 이야기하는 제8아뢰야식도 아닌 거예요.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거예요.
식(識)이. 식(識)이라는 것은 이 육신이 없으면 활동 못해요. 죽어버려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있으니까 보고, 그래서 보는 식(識)이 생기는 것입니다.
눈이 멀어버리면 바깥 경계가 있어도 식(識)이 생길 수가 없는 거예요.
사람이 죽어버리면 그 식(識)은 끝나는 거예요.
그러나 영체가 있기 때문에 업종자가 전부 반영이 되어 저장이 됩니다.
1.2.3.4번 영체가 다 눈 달리고 귀 달리고 코 달리고 입 달리고 몸뚱이도 있고 그래요 여러분. 그것이 하나로 뭉쳐 있어요. 뭉쳐 있어요.
출처:2013년 자재 만현 큰스님 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