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자유의 길 /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김종선
해인사 전모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구름처럼 모여든 인파, 장사진을 이룬 행렬 , 무엇이 저렇듯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이곳으로 향하게 했을까. 갖가지 상념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방금 친견한 성철+ 스님의 사리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확실한 대답을 얻을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 문제들이 앞을 다퉈 고개를 내민다.
나뭇잎에 옥구슬처럼 내려앉은 아침이슬에서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찿아드는 행,불행에서 절대자의 존재를 도리질 하지 못하면서도 확실한 길을 몰라 나는 아직 종교선택도 못하고 있다.
목사님의 설교, 큰스님의 설법, 펼쳐든 책속에서도 아직은 천당과 지옥, 인과응보에 의한 윤회설에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러한 내가 성철스님 사리 참배에 한 자리 낀 것은 사진으로 보아온 그 신비스런 결정체를 직접 대하고 싶기도 했지만, 이 기회에 수평에 선 잣대를 부처님께로 기울여 보자는 숨은 의도가 있었던것이기도 했다.
새벽 단잠을 설치고 이곳에 와 냉기에 덜덜 떨면서 너덧시간의 줄을 선후 친견할 수 있었다. 이번 성철스님의 열반은 불교계의 위상이 한층 더 높아졌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타종교인, 비종교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집중시켰다.
그중엔 호기심에 찬 눈들도 더러는 있었겠지만, 거의 사람들은 진정한 불교의 교리나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장례 7일동안 50여만명의 추도 인파가 몰렸고, 모든 매스컴이 앞다퉈 특집을 내는가 하면 다비식 이후 사리 친견만도 하루 2,3만명에 이른단다.
사리는 범어로 sarira인데 한문 음력으로 사리라 했고, 우리나라에선 신골, 영골 이라고도 한단다. 몸전체가 사리인 전신사리, 낱알같은 쇄신사리, 살아있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생신사리, 석가모님 몸에서 나온 진신사리 등으로 구분된단다. 석가모님 부처님 몸에서는 여덞섬 네말이나 나왔다 했고, 이번 성철 스님의 사리는 110과가 나왔다고 보도되었다.
석가모님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우리나라 양산 통도사와 오대산 상원사에도 봉안되어 있는 것으로 듣고 있다. 사리는 수행자가 오욕을 단절하고 청정한 계행과 흔들림 없는 선정으로 깨달음의 길로 나가는 과정에서 생기게 된다고 불가에선 말한다. 하지만, 또 한쪽에선 사람의 척수가 참나무불의 고열을 받아서 생겨진 돌이라고 하니 그저 불가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흔히 사리를 가리켜 "오색 영롱한 보석처럼 빛난다" 고 표현들 하는데 평범한 사람의 눈이어서인지는 몰라도 내 시선에 닿은 첫 느낌은 "꼭 차돌 같구나" 하는 비유어가 저절로 튀어 나왔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볼수록 광채가 나고 신비스러워 더 머물고 싶었지만, 뒷사람들에 떠밀려 아쉬움을 안은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영결식을 치룬 큰 마당에는 그때의 식단이 그대로 서있고 조화속에 묻힌 영정의 스님은 엷은 미소를 띄었지만 위엄있는 모습으로 내려다 보신다.
양 기둥에는 열반송을 두 행씩 나누어 적었는데 수 없이 암송을 하며 뜻을 헤아려 보지만 그저 안개 속처럼 아리송할 뿐이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수행의 근본을 삼았던 계율, 선정, 설법 그 어느 것 하나에도 허망한 상이 떠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역설로 표현한 것이라고 어느 스님은 말했지만 , 이 송을 읽고 정곡을 찌르는자 몇이나 될까 싶다.
궁현당에 눈이 가니 목탁소리와 금강경 독송이 어울려졌던 장례때의 많은 스님들이 보이는 듯 하고 법구를 모셨던 꽃집운구, 1천여개나 되었다는 가지각색의 만장물결, 다비장의 불꽃 등 그 장엄했던 의식 행렬도 보이는 듯 했다.
부처님과 성철 스님을 생각해본다. 불교의 골수는 불생불멸과 중도의 세계를 깨치는 일이라고 했다.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가진 우리들의 자성을 일깨우는 일이라 했다. 그러기에 많은 선승들은 일체가 나지도 않고 일체가 멸하지도 않는 진리를 깨우쳐 영원한 자유의 길로 나가기 위해 화두를 붙잡고 뼈를 깎는 고행의 길을 택한 것이다.
중도란 넘치거나 부족하지 않은 중간의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모순 대립된 양면이 생멸을 초월하여 생이 멸이 되고, 멸이 생이 되는 반복과정 속에 끝내 융합을 가져오는 상태를 의미한단다. 즉 모순이 융합된 상태를 말한다.
만법이 불법이라는데 그 깊이를 어찌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있으랴. 누군가 이런 말도 했다. 아니, 성철스님은 실제 사회나 국민을 위해서 무슨 일을 했으며 부모 처 지식까지.......
눈을 바로 뜨지 못한 속인들의 세계에선 나올 법도 하다. 누구나 불성이 있다고 가르치는데 검은 막이 가려져 그것을 믿지 못하고 찾지 못하니 어쩔 수 있겠는가. 이 세상 많이 살아도 백세를 넘기기 어려운데 영원한 진리를 찾는 큰스님이야 이 초로같은 짧은 인생에 연연하겠는가. 일체를 버려야 깨달음을 얻는다고 옛 조상님들도 말씀하셨다.
장좌불와 8년, 묵언지정 10년, 누더기옷 두벌, 돈오돈수 큰스님의 대명사들이 짝 가슴에 찬다. 아무리 진리의 길을 찾았다 해도 그렇게 큰 고행은 그분 외엔 누구도 못할 것이라는 점이 바로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해인사로 향하게 하지 않았나 싶다.
다시 두 손을 합장하고 인사를 드렸다. 갈 때보다 느슨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온다. 먼산 등성이에 눈이 쌓여있고 갈잎, 솔잎은 발길에 채인다. 서걱서걱 갈잎의 소리가 서글프게 들린다.
언젠가는 나도 저 갈잎처럼 떨어져 나갈 것이다. 인과에 의한 업보, 좋은 옷을 입기 위해서는 좋은 업을 쌓아야 한다는데 다음 생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몰라 자꾸 옷깃만 여민다.
큰스님의 누더기 옷 위로 어느 백화점 고급 모피가 겹쳐진다. 이 두 옷의 값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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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산허리를 휘감아 돌던 안개구름이 물러서면서 두륜산 정상은 드러나기 시작했다.
순간 "아 하늘바다"
저절로 튀어나온 말이다. 구름은 바다요 , 산정은 무인도였다. 때마침 떠오른 동녘 햇살로 인해 더욱 환상적인 장면으로 감동을 준다. 어느 인위적 그림이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는가.
"언니 이 방학이 다 가기전 꼭 한번 해남에 들려요. 바닷바람도 쐬이고 그리고 이곳엔 이름난 절 ‘대흥사’가 있잖아요" 가정과 직장의 틀에서 훌훌 벗어나 단 며칠이라도 쉬어보라는 동생의 정성어린 편지를 받은 것은 개학을 며칠 앞둔 지난 여름 방학 때였다.
이튿날 동생은 "꼭" 자를 넣어 전화까지 또 했다. 방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주방으로 종종 걸음치며 무엇 하나 얻은 것 없이 다 가버리는 방학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던 참이라 동생의 편지는 반가웠고 가족들의 양해를 구하는 데도 한 몫을 했다. 그래, 오랜만에 하루 밤만이라도 산사에서 쉬리라. 물소리, 바람소리, 풍경소리를 들으면서.....
해남여행은 서둘러졌고 유감스럽게도 산사의 유숙은 어려웠지만 절 가까운 여관에서 1박하고 이른 새벽 절 입구에 다다랐다. 이른 시간이어서 인지 발길도 뜸했다.
자물쇠도 없는 일주문, 아무나 들어가도 되는 문이었다. "피곤한 자여, 쉬어가시오, 목마른 자여, 목을 축이시오" 가깝게 손짓을 하며 반기듯 했다. 일주문을 지나자 불이 문이 닿는다. 걸음을 멈추고 현판을 응시하며 그 뜻을 생각한다.
"속세와 천국이 따로 없다. 성인도 속인도 따로 없다. 부처와 중생도 따로 없다........" 경내가 가까워지면서 조금 더 마음이 엄숙해진다. 불법의 세계를 동서남북으로 지킨다는 사천왕문을 지나니 여러채의 전각과 요사채, 선방이 좀더 확실히 드러났다.
아무래도 먼저 발길이 닿는 곳은 대웅전이다. 독실한 불교 신자도 못되면서 법당을 그냥 지나치지 못함은 아마도 내마음 어느 한 자락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지혜를 얻고 내심 간절한 염원도 이뤄보자는 소박한 기대감이 도사리고 있는 증거이리라.
우축 옆문을 통해 합장을 하고 조용히 들어섰다. 한 가운데엔 잿빛 승복의 정갈한 차림을 한 젊은 스님 한 분이 목탁을 치며 염송을 하고 지극히 정성스럽게 반복 절을 하고 있다. 두 무릎을 끓고 두 팔을 바닥에 대고 머리를 깊게 숙여 절을 한다. 바로 오체투지법 이다.
나도 가만히 향을 꽂고 3배를 올린 후 스님 우측으로 무릎을 끓고 앉았다. 3존 불께서 내려다 보신다. 미소를 띄우지만 안광은 빛나고 부드러우면서도 근엄한 표정이다.
"나는 너의 모든 것을 다 안다" 무슨 주문이 필요하겠는가. 약사전을 돌아 대웅전 좌편으로 자리한 명부전 앞에 섰다.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언제나처럼 내 마음은 서늘하다. 이승계의 통지표를 받는 곳이다. 삶을 마감할 때 만난다는 지장보살이 단 한 사람이라도 지옥행을 막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서있다고 하지 않는가.
업에 따라 내려지는 판결,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명명백백 죄목도 드러난다는 심판대인 곳이다. 저승사자에게 끌려와 무릎을 끓는 곳 열분의 시왕이 딱 버티고 앉아있다. 그중 다섯 번째의 시왕에게 제일 먼저 눈길이 갔다. 바로 그가 어린날부터 들어오던 염라대왕이기 때문이다. 좌편 진열대의 무수한 위패들이 한꺼번에 시선을 보내오는 듯해 얼른 발길을 옮겼다.
나는 죽으면 어떤 형벌을 받게 될까?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한일은 무엇인가? 자문해 본다. 환히 열린 요사체 대문안으로 주방이 보였고 아궁이엔 장작불이 이글이글 타고 있다. 커다란 가마솥엔 국인지 물인지 펄펄 끓고 있었다.
아직 공양 전인가 보다.
그 안으로 행자인듯한 동안의 승려들이 아주 유쾌하게 웃으며 여유시간을 갖는다.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요사채를 막 돌아서려는데 바로 사물이 걸린 누각이 딱 버티고 서있다. 범종, 법고, 목어, 운판 그 앞으로 가사 자락을 날리며 혼신을 다해 두들기는 어느 한 승녀의 모습이 환상으로 나타나고 그 심혼의 소리도 들린다. 번뇌와 망상을 부수는 소리, 집착과 욕망을 부수는 소리, 깨달음을 깨치는 소리로 ........
마지막으로 임진왜란 때 구국의 대업을 이룬 서산대사의 유물관과 천불상을 돌아보고 연당 맞은편 아주 작은 찻집에서 녹차를 마시며 불교의 윤회설을 거듭 생각해 본다. 업에 따른 보상은 일호 반점의 오차도 없다하지 않는가.
한 올의 머리카락 만큼도 어긋남이 없다지 않는가.
바늘보다도 더 정확한 심판대, 다음 나는 무엇으로 태어날 것인가. 일체 중생에게도 불성이 깃들어 있다고 부처님은 가르치신다. 생사를 되풀이하는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성불의 경지, 그 해탈의 문을 누구든 들어설 수 있다고 한다.
담담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온다. 짙은 안개는 말끔히 걷히고 맑은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다. 엊저녁 단비로 그 가뭄이 풀려서 계곡의 물이 시원스럽다.
수목은 울창하고 간간히 상큼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씻는다. 몇 시간내 사람은 수십배로 늘어난 듯 길이 좁고 나 또한 그 많은 인파에 밀리듯 내려오고 있었다. 모두여, 어디로 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