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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언약
히 8:7-13
7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8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9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10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11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12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히 8:7-13 / 옛 계약은 이미 효력이 없습니다. 만일 그것이 흠이 없었다면 또 다른 계약을 무엇 때문에 세웠겠습니까? 8) 하나님께서는 옛 계약에서 흠을 발견하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아, 너희는 똑똑히 듣고 알아라.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 전체를 상대로 새 계약을 체결하겠다. 9) 물론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도 계약을 체결한 일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그것과 아주 다른 새 계약이다. 그들의 조상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나는 그들을 데리고 나왔다. 내가 이렇게 그들을 해방시키던 날에 그들과 계약을 체결하였다. 나는 그 계약을 충실하게 지켜 주었으나 그들이 일방적으로 그 계약을 깨뜨려 버렸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미워하고 징계하였다. 10) 그러나 이제 내가 이스라엘 백성과 체결하려는 새 계약은 계약 자체가 완전히 옛 것과 다를 것이다. 이 계약은 내가 각 사람과 개인적으로 체결하겠다. 나는 이제 나의 새 계약을 돌판에 써서 그들에게 주지 않고 그들 각자의 마음과 양심에 새겨 놓겠다. 나는 이렇게 내 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새겨 놓고 그들의 부드러운 살과 핏속에 넣어 주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도록 하겠다. 11) 그러면 아무도 다른 사람을 훈계할 필요가 없고 아무런 자기 형제에게 주님을 알고 두려워하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는 가장 천한 사람에게 가장 존귀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내가 누구인가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12) 이렇게 모든 사람이 나를 알 때가 오면 나도 모든 인간의 불순종과 반역을 용서하고 더 이상 인간의 악행과 허물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온 세상의 주인으로서 하는 말이다.' 13)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셨던 옛 계약을 세 계약으로 바꾸시면서 이렇게 새로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제 옛 계약은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구시대의 유물일 뿐입니다.
옛 언약은 불완전하여 새 언약을 요청합니다. 옛 언약은 돌비에 새겨졌지만 새 언약은 마음과 생각에 새겨지는 언약으로 옛 언약의 폐지를 의미합니다.
저 첫 언약(7-9) 첫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었던 시내 산 율법 언약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율법을 준행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준행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으리라는 것입니다(출 19:5; 24:1-8). 둘째는 더 좋은 언약 즉 새 언약을 가리킵니다. 첫 언약이 무흠하였다면 둘째 것을 요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세우심으로 첫 언약이 완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아니한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셨는데(렘 31:31-34), 언약을 파괴한 장본인은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파괴된 옛 언약을 대신해서 이스라엘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새 언약의 대상은 혈통상 이스라엘 민족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온 세상의 모든 백성으로 확대되었으며, 임시적이고 현세적인 것에서 영원하고 내세적인 것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맺으리라’라는 새 언약은 미래 능동태 동사로서 새 언약의 내용이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고 최종적 실현을 향해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 날 후에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리라(10-13)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돌판에 새겨 주었지만, 새 언약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지워지지도 지울 수도 없는 마음에 새겨져 이제는 파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보혈의 공로를 힘입는 사람들을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치심으로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라고 하십니다. ‘또 각각 ...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십계명은 돌비에 새겨진 것으로 전체가 그것을 읽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각 개인의 마음 지, 정, 의 모든 요소에 전인격적으로 새겨져 내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두드러진 차이점입니다. 그들은 이론이 아니라 그분과 철저한 사랑을 통해 체험적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적용: 만일 당신의 온 생애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다면 사람들의 가슴은 당신의 무언(無言)의 언어로도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 안에 사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노동 뒤의 휴식이야말로 가장 편안하고 순수한 기쁨이다. -임마누엘 칸트. 우리가 쓸 수 있는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에너지가 소진이 되면 반드시 충전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기계는 전기 등으로 충전을 하지만 사람은 휴식으로 충전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로 충전해야 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주인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대제사장이신 예수 안에 거하며 주되심을 고백하며 회복되어지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새 언약의 필요성과 내용
히 8:7-13 / 김길수 목사
들어가는 말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옛 언약을 대체하는 새 언약의 등장을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약을 세우셨으니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새 언약이다. 오늘은 왜 새 언약이 필요했으며 어떻게 약속 되었고 새 언약의 내용은 무엇이며 새 언약의 탁월성이 무엇인가를 살펴봄으로서 은혜를 받고자 한다.
1. 새 언약의 필요성
- 8:7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 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여기서 첫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었던 계약인 율법과 규례와 계명을 가리킨다.(출19:3-8,24:7-8,신6:1-3) 그러나 모세의 율법은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구원을 얻는 행위 언약 이었다. 사람의 행위로는 이 율법을 지킬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육신이 연약하여 율법을 감당 못하고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 따라서 사람마다 이 언약을 어김으로 언약은 흠이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사 의식을 세우신 하나님께서 죄 있는 자마다 성소에 와서 짐승의 피를 흘려 제사 지냄으로 죄 사함을 받았으나 그런 후에도 또 죄를 짓고 계속 짐승의 피를 흘려 제사를 지내야 했기 때문에 이 또한 흠이 많은 언약이 되었으며 옛 언약은 흠과 티가 많아 효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 첫 언약이 무흠하였다면 둘째 것인 새 언약을 요구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씀 한다. 결국 옛 언약은 인간의 내면 즉 양심까지 깨끗하게 할 수 없는 불완전하였기 때문에 새 언약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음을 나타낸다.(히 9:9-10) 다시 말하면 흠이 있고 불완전한 옛 언약을 완전케 하기 위해서는 새 언약이 필연적으로 나오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새 언약을 선포하시게 되었다는 말씀이다.(7절)
2. 새 언약의 약속
- 8:8-9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 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
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언약이란 상대적인 것으로 양쪽 모두가 지켜야 한다. 양쪽 중 어느 한 쪽이 언약을 깨면 결국 그 언약은 무효가 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을 하셨다. 이에 기록자는 렘 31:31-34의 말씀을 인용하여 첫 언약을 대체할 새 언약에 대한 약속을 설명하고 있다. 첫째,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란 말씀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즐겨 쓴 말로서 약 600년 뒤 앞으로 도래할 메시아 시대를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세우시는 때란 바로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날 신약 시대임을 알 수가 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렘31:31)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에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한 국가로 존속하여 있지 않고 두 왕국으로 갈라져 있다가 북왕국 이스라엘은 망하고 남 유다만 남아있던 시대이다. 따라서 두 왕국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고 한 것은 언젠가 이스라엘도 회복 될 것이란 희망을 주었을 뿐 만 아니라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별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자들과 더불어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는 상징적 의미도 담고 있다.(8절) 결국 새 언약이란 훗날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의 피 언약을 예표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 위해 주권적으로 제시하신 약속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후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의 진리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불문하고 주어진 점에 의해 입증되었다.(행10:44-48)또 이 새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모세를 통하여 맺었던 첫 언약인 율법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미래에 주실 것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하셨다. 첫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방적으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언약을 취소해버렸고 저들을 돌보지 아니하셨음을 말씀 한다.(9절)
3. 새 언약의 내용
- 8:10-13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언약이라 말씀 하셨으매 첫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기록자는 렘 31:31-34에 나타난 새 언약의 내용을 계속 설명한다. 이 새 언약은 예레미야서에서 언급된 후 몇백년 동안 잊어 버렸던 보화이다. 약 600년 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잔을 가지고 축사하사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새 언약의 피니라”(마 26:26-30, 막14:22-26, 눅22:19-20,고전11:25)고 하셨다. 또 주님은 “새 언약”이라고 할뿐만 아니라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고 하셨다. 새 언약의 내용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첫째, 하나님의 법을 사람의 생각에 두고 마음에 새기겠다는 것이다. 옛 언약은 돌판에 새긴 것이지만 새 언약은 자기 백성의 마음의 비에 새겨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법과 명령에 순종하는 새 언약의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이다.(고후3:3) 이것은 옛 언약이 할 수 없었던 내적 변화 즉 양심의 정결 곧 인격과 삶의 변화를 나타낸다. 이는 인간의 영이 살아나고 성령님이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믿음의 법에 따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 성령으로 사람 속(영)에 들어와 사람과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으로 역사함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 이는 하나님과 사람 간에 긴밀한 관계가 형성된다는 점이다.(10절) 둘째, 하나님의 법을 사람 속에 넣어 하나님을 다른 사람이 가르쳐 알게 하지 않고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알게 하셨다. 이 말은 하나님을 깊이 아는 지식의 직접성을 뜻한다. 새 언약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다. 이는 새 언약에 참여하는 자 마다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보다 풍성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계시를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직접 심령 속에 오셔서 영으로 말씀을 기록하고 생각나게 하며 가르치시고 성령으로 증거하게 하셨기 때문이다.(11절, 요일2;27) 셋째, 하나님은 죄와 불의에 대해 영원하고 완전한 사죄를 하시며 기억하지도 아니하신다. 이제 새 언약에서는 죄를 위해 반복하여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다.(히7:27)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세우신 언약이므로 예수님의 보혈에 의지해서 나오기만 하면 된다. 어떠한 죄를 지었다해도 주님 앞에 진정 회개하고 나오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며 하나님께서 그 죄를 기억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죄 사함은 은혜의 복음이며 이것이 새 언약의 특징이다. 만일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서도 우리 인간의 기억 때문에 죄책감에 사로잡힌다면 이러한 마음을 가져다주는 것은 사탄이다. 하나님은 기억도 하지 않겠다고 말씀 하셨는데 사탄은 우리를 참소하려고 자꾸 과거의 죄를 기억나게 한다. 이 때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쳐버리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한다.(12절) 이제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제 새 언약의 내용에서 관심을 돌려 새 언약의 “새로운 것”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선포하셨다는 것은 옛 언약이 불완전하여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게 하기 때문에 새 언약을 통하여 옛 언약을 페기 시키고 (히7:11-12) 온전한 그리스도의 대속사역과 중보사역으로 완전히 대체 시키셨다는 것을 말씀한다.(13절)
4. 새 언약의 탁월성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면서 새 언약을 약속하셨고 새 언약이 세워진 것인데 이 새 언약은 옛 언약에 비해 다섯 가지 측면에서 탁월성이 강조된다.(10-12)
첫째, 복종의 자세 면에서 옛 언약은 외형적이지만 새 언약은 내면적이라는 면에서 탁월함
둘째,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옛 언약은 하나님의 선택이 강조되지만 새 언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신다는 면에서 탁월함
셋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 면에서 옛 언약은 선지자나 제사장을 통한 간접적인 지식이나 새 언약에서는 성령을 통한 개인적 직접적인 지식이라는 면에서 탁월함
넷째, 죄 사함의 측면에서 옛 언약은 반복적인 속죄제사가 필요하나 새 언약에서는 반복적인 제사가 필요 없고 완전하고 영원한 죄 사함이라는 면에서 탁월함
다섯째, 언약의 내용과 효력의 측면에서 옛 언약은 불순종으로 효력을 상실했으나 새 언약에서는 사람들의 불의에도 불구하고 내용과 효력은 영원성을 가지게 됨으로 탁월함
* 맺는 말
오늘 우리는 새 언약의 필요성,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한 새 언약의 약속, 새 언약의 내용과 새 언약의 탁월성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다음 시간에는 옛 언약의 핵심인 인간 제사장을 통한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구속과 새 언약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하고 완전한 구속을 세부적으로 비교 대조를 통해서 위기와 절망의 시대에 살고 있는 히브리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과거를 덮어주는 용서와 현재를 위한 중보, 그리고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미래의 상속을 갖고 있다는 점을 말씀 하면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 되심을 제시한다. (요약 끝)
히 8:7-13이 구약이 폐지되었다는 뜻인가요?
새 언약(신약)을 주시고 처음 것(구약)은 낡아지게 되어져 없어져가는 것이라고 합니다.(13절) 첫 언약이 흠이 없는 것이었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다고 합니다.(7절) 성경이 대놓고 구약의 폐지를 주장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결국 구약은 이미 지나간 것으로 신약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성경이 구약폐지를 주장할 리는 없기에 혼란스럽습니다.
[답변]
올바른 성경해석법
성경을 해석함에는, 제가 이 사이트에서 입이 닳도록 강조한 대로, 본문부터 몇 번이고 깊이 묵상하여 그 뜻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그 뜻을 앞뒤 문맥의 의미의 흐름과 비교하고 그 책의 주제와도 연결시켜 봐야 합니다. 나아가 저자의 저작 동기와 저작할 당시의 상황도 살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미 신학자들이 성경 66권 본문 전부를 그렇게 해석한 바탕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기독교교리와도 대조해봐야 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교리와 어긋나는 해석은 일단 틀린 것입니다. 질문자께서 성경이 구약폐지를 주장할 리 없다고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 해석이 교리와 위반됨을 눈치 챈 것이고 그럼 그런 해석은 틀린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왜 또 어떻게 틀렸는지 확인할 차례인데 처음부터 다시 본문을 찬찬히 따져볼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새롭게 맺을 언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신약성경만으로 충분하려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언약이 각각 무엇인지부터 정확히 알아야합니다. 상기 본문에서 새 언약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표현해, 아니 찾아내어 보십시오. 만약에 너무 길어서 어렵게 여겨지면 10-12절에서 찾아보십시오.
몇 번이고 잘 따져가며 읽어보면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10절의 끝)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구절은 그 언약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안에 관한 것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라는 말로 시작했으니 예수님이나 구약의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신 것을 인용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용한 말씀들은 모든 성경이 표가 나게끔 한 칸 들어가는 방식으로 진술한 후에 (대부분의 성경책은) 관주로 표시해 놓아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상기 10-12절의 경우는 예레미야 31:33-34라고 작은 글씨로 적혀있습니다. 따로 그 예언을 찾아볼 필요 없이 상기 본문과 똑같습니다.
그럼 두 번째 질문으로 구약성경에서 인용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당연히 같은 분일 뿐 아니라 예레미야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간절한 마음으로 이미 예언했던 것이 이제 신약시대에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이 폐기되었다면 히브리서에 이런 인용을 해선 안 되며 그럼 신약시대 이후의 성경의 독자는 이런 전후사정을 정확히 알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이유 하나만으로 구약성경은 필수입니다. 신약성경은 반드시 구약에 근거해서 해석되어야 하고 그와 동시에 구약도 신약에 의해 더 정확히 이해되어지는 것입니다.
신약과 구약의 차이
이제 세 번째 질문입니다. 구약 시대에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고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백성이었으나, 신약시대에는 아닙니까? 그럴 리는 절대로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본문의 뜻만 간략히 따져도 하나님의 언약 자체는 절대로 변화되거나 취소되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가 그분의 백성이 된다는 언약의 본질은 창세 때부터 마지막 날까지 영원토록 변화 수정 왜곡 포기 되지 않습니다. 선악과 금령에서부터 계시되었고 원시복음(창3;15)도 바로 그 내용입니다. 그 언약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낼 때에 그와 그의 후손 이스라엘에게 다시 재확인되었고 모세(출19:3-6)와 다윗(삼하7:8-17)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출3:15) 아담과 이브를 창조할 때부터 하나님은 모두의 하나님이었고 모두는 그분의 백성이었습니다. 인류와 맺은 당신의 언약의 내용은 영원토록 동일하나 인간 이성과 믿음의 발달 단계에 맞추어서 조금씩 더 명확하게 드러났을 뿐입니다
그럼 언약 내용은 동일한데 왜 상기본문은, 아니 렘31:33,34 은 구태여 새 언약이라고 표현했습니까? 말씀드린 대로 언약을 실현하는 방안이 달라졌는데 그 변하지 않는 언약 내용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신자의 심령에 하나님의 사랑이 확고히 각인 되어서 깨달아 알게 되고 전혀 의심치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은 때가 차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창3:15, 갈4:4) 예수님이 골고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한 제물로 바쳐짐으로써 명백하게 드러나고 온전히 실현되었습니다. 당연히 상기 본문에서 “그날 후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모두의 죄 값을 감당하시고 완전한 제물로 바쳐진 날 후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날 후에는 구태여 “여호와를 알라고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그들의 불의를 긍휼이 여기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 사역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다시는 정죄함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롬8:1-2)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고후3:3) 바울은 그래서 자기가 전한 십자가 복음은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여 신자들의 마음 판에 새겨졌다고 말한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작 동기와 주제
상기 문단의 뜻을 더 정확히 하려면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히브리서 저자의 저작 동기와 당시의 상황과 주제 등과 비교해 봐야 합니다. 이전에 제가 쓴 글에서 간략하게 그 부분만 아래에 인용해보겠습니다.
본문을 정확히 해석하려면 히브리서도 어떤 수신자를 대상으로 어떤 상황에서 기록한 것인 지부터 살펴야 합니다. 책의 제목 그대로 유대인 신자들이 대상입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을 유대인들이 먼저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오래 고대하던 메시아임을 인정할 수 있었고 또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기왕에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급속히 성장함에 자기들 기득권이 줄 것을 염려한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유대인 신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핍박은 우상을 믿는 이방제국 로마보다도 여호와를 같이 믿고 따르는 유대교로부터 먼저 있었습니다.(행8:1) 거기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목격한 1세대 증인들도 시일이 지나면서 거의 죽었기에 그 후 세대들에게는 복음이 아무래도 생생한 진리로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유대교에선 아무 공로 없이 주는 십자가 구원은 무효하며 유대인이라면 조상대대로 지켜온 모세율법을 반드시 준행해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이 믿음을 지키려면 본토 친척 아비 집과 완전히 인연을 끊어야 했습니다. 또 오직 성령의 충만함에 힘입어야만 그런 핍박 멸시를 견딜 수 있는데다 실은 온전하게 거듭나지 않는 신자들도 많았습니다. 결국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신자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신분적 우월성은 물론, 십자가의 영단번의 대속제사를 구약의 제사들과 비교해서 예수를 믿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단호하고도 객관적으로 변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도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장차 올 약속인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얻었음도 함께 설파합니다.(히11, 12장, 11:26) (아래 링크 참조하십시오.)
히브리서 저자는 그래서 상기본문 바로 앞 7장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적 우월성을 천사, 모세, 멜기세덱 등과 비교해서 변증했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만이 흠결이 전혀 없는 대제사장으로써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완전한 제물이 됨을 확증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이어지는 9장과 10장은 구약의 동물 대속제사의 불완전성을 설명한 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영단번(永單番, once for all)의 제사가 되어서 구원이 영원히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중간에 위치하는 8장은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중보자 되심을 변증하는 내용입니다.
구약에서 효력이 다한 것은?
따라서 상기본문에 구약성경이 소멸되고 신약성경으로 충분하다는 뜻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는 말씀은 살펴본 대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한다는 언약 자체가 아니라 그 진리가 계시되어지고 실현되는 방식만 달라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방안만 새 것으로 대체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9,10장이 동물제사법은 일시적이고 불완전하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고, 너무나 당연한 문맥상 흐름으로 상기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8:13의 뜻까지 정확하게 풀어주고 있습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9:9,10)
성경이 스스로 성경의 일부가 취소되었다고, 정확히 말해 계시의 효력의 시한(時限)이 차서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었다고 공식적으로 말하는 유일한 구절입니다. 이 장막은 9:1-8절까지 설명한 대로 성막에서 동물 제물로 드려지는 구약의 속죄제사법을 말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은 음식과 정결에 관한 구약의 규정들을 말합니다.
개혁할 때까지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죽음으로 영원한 제사가 실현될 때까지를 뜻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구약 중에서, 그것도 율법 중에 제사법과 정결례만 효력이 다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상기 9절의 “이 장막”(동물 제사)이 “온전한 장막”으로 바뀌었다고 바로 이어지는 구절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1,12)
구약시대는 영원하고 완전한 예수 십자가 구원으로 가는 준비과정입니다. 구약성경의 내용도 복음을 상징 예표 예언하는 기록입니다. 구약성경의 창조와 타락과 예수님 십자가 복음에 대한 예언과 계시가 없으면 신약성경은 아무 의미가 없고 자칫 도덕 종교 교과서로 전락됩니다. 죄인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 되지 못합니다.
상기 본문에 대해 이런 의문이 생기는 것은 비록 여러 구절을 함께 묶어 해석하려 노력했으나 여전히 일부 구절의 문자적 의미에 묶이는 큰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살펴본 대로 옛 언약이 없어졌다고 여겨지는 8:13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바로 이어서 9장이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9장만 천천히 8:13과 비교해서 읽어봐도 이런 의문은 생길 수 없고 제가 상기처럼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질문자님도 이미 그런 뜻이 아니라고 짐작은 했지만 왜 아닌지 궁금해 하셨기에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성경 공부하듯이 답변 드린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의문은 성경 안에서 거의 다, 그것도 앞뒤 문맥에서 심지어 본문 안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의 원전은 장과 절의 구분이 없고 죽이어서 저작되었습니다. 당연히 성경 독자도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도덕적 종교적 계명이나 진리를 하나씩 모아서 편집한 책이라면 한절씩 따로 읽고 적용해도 될 것입니다. 구약의 잠언(엄밀히 따지면 그렇지도 않지만)을 빼고는 한 저자가 특정 주제를 갖고서 일관된 논리의 흐름에 따라 저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절대로 한 구절이나 한 문장만 따로 떼어서 읽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특별히 신약성경의 서신서들은 길이도 비교적 짧은데다 특정한 주제를 논문 식으로 변증해나가기 때문에 반드시 책 한 권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해서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출애굽 때와 달라진 하나님의 법
히브리서 8:7-13 / 김홍덕
율법과 제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새로운 법을 주셨다는 말씀은 영원히 동일하신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이것은 우리들의 신앙 전반에 깔려 있다. 대표적인 것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신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도 성경에 여러 번 말씀하셨다. 히브리서 8장에도 나온다.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찌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새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연약과 같지 아니하도다(히 8:8-9상).
성경을 읽고 볼 때 이런 사소한 의문을 가지면 빨리 성경을 알 수 있다. 조건이 있다면 의문이 되는 괴리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특히 하나님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두고 문제에 접근하면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늘 교정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 무궁히 언제나 동일하시다고 했는데 새로운 언약을 주신다고 하시는 것이 이상하지 않으면 한 마디로 새 언약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새 것에 관심이 없으니 지금 것에 만족하고 있고, 또 누가 새것이 있다고 해도 갈등하시 않는 것이다.
스마트폰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세운 언약을 스스로 번복하시나는 말씀은 당연히 이상해야 한다. 특히 사람인 나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하나님의 법이 바뀌었다면 재빨리 그 법에 적용을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는 분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여기서 기준은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는 분이라는 것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언약을 번복하는 것은 나타난 것이고, 변치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본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고,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본성이지만 어떨 때는 혼내고 어떨 때는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것이 그렇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새 언약을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않다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게 되면 사람에게는 새로운 법이다. 이것은 궤변이 아니다. 육신으로 나서 세상을 자기 좋을 대로 살다가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세계, 태초가 열리는 것이다.
그렇게 거듭난 사람이 되면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알고 하나님의 태초가 열리기 전이나 열린 다음이나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셨는데 나 자신이 새로운 법 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안다. (사실 이런 고백과 경험이 없다면 거듭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다.)
히브리서 중반에 제사에 관하여 특히 예수님께서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심을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하여 제사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달라진 것은 하나님께서 제사에 대하여 생각하신 것이 달라진 것이 아니다.
달라진 것은 내용 없이 형식만 하나님께 드려지던 제사가 내용이 온전해진 제사가 된 것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그 심령에 순종하므로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삶이 되기를 바라신다. 그렇게 되려면 사람이 자기 삶을 하나님께서 주관하도록 자신을 내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제사의 본질이다.
그런데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과 그들의 제사는 그 본질이 아니라 형식만 준수하므로 하나님께 드릴 제사에 대한 책무를 다했다고 여기는 제사다. 행위로 하나님의 뜻을 다한 것으로 여기는 면죄부 비슷한 것이다. 그런 제사가 온전하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께 어떻게 드려져야 하는지를 십자가에서 보이셨다. 육신을 죽음에 내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로 가신 과정과 의미가 핵심이다.
사람이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주장을 실현하는 것에 나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것임이 보이셨다. 그것이 십자가의 핵심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자기 옳다는 것에 내 육신의 수고를 내어 주는 것, 하나님은 나의 삶을 그것에 쓰시겠다고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는 제사는 다음이 아니라 나의 삶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지, 소나 양을 잡고 시대가 바뀌었으니 소나 양 대신 돈을 내는 것이 온전한 제사가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과 그 안에 있는 제사의 본질을 보이셨다.
그로 인하여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그의 보내신 뜻이 모든 사람이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악인을 위하여 악인들의 주장에 따라 십자가를 지는 것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임을 보고 자기 삶의 존재 목적과 정체성이 그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이 나와 그들의 삶이 온전한 제사가 되었다. 그들에게 새로운 언약과 율법이 완성된 것이다.
형식만 지키는 법에서 온전한 내용을 지키는 세계가 열린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새 언약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새 언약을 돌에 새긴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긴 것이라고 하신다. 심령에 하나님의 법이 있어 그 법이 그 사람의 삶을 주관하는 법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새 언약이 열린 것이다.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의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 백성이 되라라(히 8:10).
내가 새 언약을 맺으리라
히 8:6-13 / 주병열 목사
누가복음 14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청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 사양했습니다.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종이 돌아와서 주인에게 그대로 고했습니다. 집 주인이 진노하면서 그 종에게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다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종이 주인의 명대로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주인이 다시 명했습니다.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그리고 말하기를 전에 청함 받았다가 거절한 사람들은 하나도 잔치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23절의 ‘강권하여’라는 말은 ‘팔을 비틀어서라도’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의지가 담긴 구원의 역사를 드러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인간 구원 의지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또 얼마나 강한 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옛 언약에 실패하자, 다시 당신의 자녀들에게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 언약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언약입니다. 이 언약의 요지는 예레미야 31장 31-34절 말씀에 나옵니다. 이 말씀을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 8장 8-12절까지 인용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 본문의 핵심 키입니다.
말씀의 요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통해 구원의 길,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 의지가 실제로 드러난 가장 강력한 사건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건입니다. ‘큰 잔치 비유’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성부 하나님의 인간 구원 의지에 대해 보여주신 비유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보여주신 구원의 의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날 밤 제자들과 나눈 최후의 만찬에서 친히 주신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옛 언약은 돌에 새겨서 만든 언약이었지만, 새 언약은 그들의 마음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시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3장 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점은 이것입니다. 출애굽기 24장에서 모세를 통해 옛 언약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실 때 백성들은 한 목소리로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3절) 이것이 옛 언약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이것은 백성들이 의지적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지를 표현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살겠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새 언약의 특징이 그 반대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두 번째 다시 주시는 새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지를 7번이나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내가 하리라 (I Will Do)’ 는 말씀이었습니다.
8절, “내가 새 언약을 맺으리라”
10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10절,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될 것이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될 것이다”
11절, “내가 나를 그들 모두에게 나타내겠다”
11절,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 것이다”
12절,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길 것이다”
12절, “내가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다”
출애굽기 24장에서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고, 다짐하지만,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짐하시고,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바로 누가복음 14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의 초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팔을 비틀어서라도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의지를 가지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당신의 법을 새겨놓으심으로 우리가 실패하지 않고 주님을 따라 오도록 하셨다. 십자가 사랑의 사건으로 주도적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이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새 언약에 실제적으로 인간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누가복음 15장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보여줍니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돌아온 유산을 달라고 아버지에게 요청해서 자기 몫을 받아서 타향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작은 아들은 모든 돈을 탕진하고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도 배를 채울 수 없는 상황에 이릅니다. 이 때 그는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이 넉넉하고, 품꾼조차도 굶주리지 않고 있음을 기억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버지 집을 그리워합니다.
이때 그는 “스스로 돌이켜”(17절) 아버지께로 가기로 작정합니다. 억지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가는 것입니다. 작은 아들은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옵니다. 선한 의지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인한 아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협박하지 않았고, 강제로 어떤 규율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집을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 아버지는 너무도 무능력한 모습으로 비칠 만큼 아들에게 아무 강제력도 동원하지 못하십니다.
하지만 아들은 결국 아버지를 기억하고 돌아옵니다. 무엇이 그를 돌아오게 했을까요? 그것이 바로 그의 마음에 넣어놓으신 새 언약입니다.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이었습니다. 아들이 요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언약은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맺으신 언약이었습니다. 우리의 동의를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본래 헬라어로 언약이라는 말로 사용하는 단어는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디아데케이고, 다른 하나는 ‘순데케’입니다. ‘순데케’는 대등한 관계에서 맺는 언약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디아데케’()는 일방적인 계약입니다. 그래서 ‘디아데케’의 본래 의미는 유언장이라는 뜻입니다. 유언은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지 않습니다. 유언은 무조건 그 효력을 발생합니다. 누구도 유언장의 내용을 바꾸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맺은 새 언약은 바로 ‘디아데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언약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집을 나간 아들은 자신의 마음에, 아버지가 넣어 놓으신 언약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는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이키는 것은 억지가 아닙니다. 힘든 것도 아니며, 억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원함이었습니다. 스스로 돌이켰습니다. 아들의 마음에는 아버지께로 돌아가려는 선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어디에서 이런 선한 의지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아버지를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 집이 얼마나 풍족한지 그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돌이킴은 기쁨이었고, 자원함이었고, 감사였습니다.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간다고 해서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 할 소리, 못할 소리 다 하고 나왔는데, 정말 염치 없이 어떻게 되돌아 갈까? 그런 생각 하지 않았습니다. 형은 자신을 어떻게 볼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지 스스로 하는 것은 힘든 것이 아닙니다. 자원함으로 하는 것은 비록 죽음의 자리도 어렵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불 속에 있는 자식을 구원할 때 불의 뜨거움을 상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원함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원함으로 하는 것은 비록 죽음의 자리라고 하더라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 언약의 요지는 “내가 새 언약을 맺으리라”는 것이다. 그분이 주도적으로 맺으신 언약이며, 이것은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하나님의 새 언약은 우리로 하여금 자원하는 마음과 기쁨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 속에 넣어준 사랑의 언약, 십자가의 사랑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원함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옛 언약은 무조건 그 언약을 지켜야 하지만, 신약에서 주시는 새 언약은 그 언약을 지킬 수 있는 힘까지도 함께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맺은 언약을 따라 주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다시 자원함과 기쁨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복음의 비밀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눅10장)를 우리를 잘 압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길을 지나가다가 제사장과 레위인도 그냥 지나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줍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그 사람을 돕는 것은 그의 책임도 아니고, 의무도 아닙니다. 그는 그 일을 그야말로 자원함으로 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하면서 왜 내가 이런 어려운 일을 해야 하는가 하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사람을 만나면서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사람이 걸렸는가 하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의 자원함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의 기쁨이었습니다. 강도 만난 자가 자신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하고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면서 그는 곤혹스러움과 불편함이 아니라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렸을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체험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주님 앞에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이런 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는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도적이고 의지적인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난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주심으로 인간을 사랑한다는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 줍니다. 십자가에 담겨진 의미는 너무도 심오하고, 깊습니다. 아무리 묵상하고 생각하고 연구해도 그 십자가의 신비는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묵상하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좇으십시오. 십자가에서 삶의 원리를 찾고, 십자가에서 삶의 지혜를 구하고, 십자가에서 삶의 은혜를 얻으십시오. 십자가를 알면 삶이 담대해 지고, 능력을 얻습니다. 십자가 안에 거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참된 길을 찾게 됩니다.
둘째, 천국을 소망하십시오. 천국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종적인 상급입니다. 천국은 새 언약에 주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새 언약은 모두 천국에서 누릴 것의 그림자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소망할 때 우리는 진짜로 하나님의 새 언약, 디아데케를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이었지만, 그 안에 참된 인간의 자원함과 기쁨과 능력을 경험하게 하는 그 은혜의 최종적인 경험은 천국에서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소망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떤 것으로 우리의 신앙을 포장해도 그것은 가짜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소망하십시오. 천국에 대한 소망이 나에게 얼마나 확실하게 있는지를 점검함으로 내 신앙의 현주소를 확인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넣어주신 새 언약으로 우리 안에 참 소망과 자원함과 기쁨을 누리는 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언약과 구속
예레미야 31:31-34, 히브리서 8:7-13, 9:15-17 / 김형익 목사
1. 주님께서 말씀하신 새 언약(눅 22:19~20)
주님께서 잡히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430년 종살이를 마치고 해방되던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 식사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을 나눠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녁 먹은 후 포도주 잔을 나누어주시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특별한 밤에 제자들은 매우 특이한 말씀을 듣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그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말은 새 언약이란 말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이란 말을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렘 31:31~34; 32; 33:14~16)가 사용했고 에스겔 선지자(겔 34:23~26; 36:25~27)도 예언한 바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선지자들의 예언과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복음을 이해하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하기에 오늘 이 부분을 함께 상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2.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새 언약(렘 31:31~34).
무엇보다도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새 언약에 대한 약속이 어떤 내용인지를 살펴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대 왕국 말기에 유대의 멸망을 선언한 선지자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소망의 약속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새 언약에 관한 약속이었습니다. 31절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고 했습니다. 33절에서는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과 유다가 혈통적인 의미로 쓰였는가, 영적인 의미로 쓰였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이 새 언약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입니다. 이 문제를 숙제로 남겨놓고 다음의 내용을 보도록 합니다. 이 언약은 출애굽 때 맺은 시내산 언약과는 다르다고 말합니다(32절).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시내산 언약과 다르다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가지고 계속 이 새 언약의 약속의 내용을 먼저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새 언약의 약속 안에는 네 가지 내용이 주어집니다.
A.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중생
첫째로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한다는 것입니다(33절).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주실 때 돌비에 기록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 언약은 돌비가 아니라 심비에 기록하여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3장에서 비교한 것과 같이 이 구절은 중생 곧 죄인의 마음 속에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B.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화해(하나님과 죄인의)
두번째는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33절). 32절에서 옛 언약 하에서는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다”고 하였는데, 이제 새 언약 하에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관계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일어나게 될 화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에 전격적인 화해의 사건이 일어나게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C.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사랑과 신뢰와 복종을 가져오는 지식
셋째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차원의 하나님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새 언약에 속한 모든 자에게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지식이 주어질 것이기에 그들은 아무에게도 여기에 대해서는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일서 2:20,27의 말씀이 바로 이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지적인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분명한 확신을 의미합니다.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예배할 수 있는 지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기본적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지만, 확신에 속하는 것이고, 이 지식으로 인하여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고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순종하는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한 것은 바로 이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탄식했을 때의 의미가 그것입니다(호 4:6). 그러나 새 언약의 백성들은 사랑과 신뢰와 복종을 가져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D.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언약 백성의 속죄
넷째는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34). 이것은 새 언약의 백성들의 죄를 속하는 것이 얼마나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약속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인 시내산 언약은 죄를 지을 때마다 반복적으로 속죄의 제사가 필요했을 뿐 아니라 양심을 깨끗하게 해줄 수는 없는 것이었지만, 새 언약은 그 백성들을 양심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며(히 9:14) 영원히 온전케 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히 10:14).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한 가지는 이 완전한 속죄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 곧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3. 새 언약에 대한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히 8:7~13)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새 언약의 약속이 의미하는 바가 대략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더 중요한 단서를 히브리서를 통해서 얻게 됩니다. 히브리서는 바로 지금 우리가 상고한 이 구절들을 해석하는 열쇠를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8:7~13을 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거의 정확하게 예레미야 선지자의 새 언약의 약속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A. 첫 언약과 새 언약의 비교
히브리서 기자는 첫 언약인 시내산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함으로써 새 언약의 우월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말은 첫 언약이 무슨 잘못이 있거나 그 내용이 그릇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앞서 던진 두번째 질문, 새 언약이 어떤 의미에서 옛 언약과 다르다는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에서 뭔가 전혀 다른 내용을 가지는 새로운 법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기 백성에게 한 새 마음을 주신 것이 다르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법의 거룩하고 의로운 요구들과 일치하는 마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말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롬 7:22). 이것은 단지 지적인 이해의 수준이 아니라 우리의 깊은 정서와 의지의 영역까지를 차지하여 하나의 성향(inclinations)이나 경향(tendencies)이 형성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참된 순종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앞서 말씀드린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곧 성령께서 죄인의 내면에서 행하시는 중생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복종하게 하는 지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옛 언약인 시내산 언약은 순종을 보장할 아무런 대책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새 언약과 옛 언약의 본질적 차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새 언약은 결코 옛 언약의 갱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앞서 제가 제기한 이 새 언약의 약속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부분인 첫번째 질문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새 언약의 약속이 누구에게 주어진 것인가? 혈통적 이스라엘인가,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인가 하는 것입니다. 첫 언약인 시내산 언약은 자연적이 것 즉, 혈통적 이스라엘 백성에게 관련된 것이지만, 새 언약은 영적으로 얻어지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적 이스라엘이 된 교회에게 주어지는 약속이었다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외부적인 것으로 행위에 속하는 것이었지만, 새 언약은 내면적인 것 즉 마음에 속한 것입니다. 주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며,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여자를 보고 음욕도 품지 말라는 것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이처럼 새 언약은 내면의 마음에 관계된 법이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셋째로 옛 언약은 국가 이스라엘에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예수를 믿는 모든 신자 개개인들에게 주어진 언약입니다. 옛 언약은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새 언약은 영원한 언약입니다. 시내산 언약은 온 땅에 임하게 될 하나님의 종말론적 나라를 예기하는 일시적이고 과도기적인 질서로서 의도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조건적이고 모형으로서의 시내산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 사명이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쇠하여 없어지는 것이라고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입니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히 8:13).”
B.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와 맺어진 은혜언약의 총체다.
결국 히브리서 기자가 예레미야 선지자의 새 언약의 약속을 해석하는 것을 이렇습니다.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와 맺어진 은혜언약의 총체라는 것입니다. 이 새 언약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대로, 범죄한 후 아담과 하와에게 간접적으로 주어진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언약의 약속, 그리고 다윗에게 주어진 영원한 은혜언약의 약속의 성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새 언약은 어느 미래의 천년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루어질 남아있는 약속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10:16~17에서도 반복해서 히브리서 기자가 예레미야의 약속을 인용하는 이유입니다.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와 맺어진 은혜언약이라는 것입니다.
4.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으로 주어졌다(히 9:15~17).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15~17이 독특하게 이 언약을 유언이라고 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에 한 번 언급했습니다마는, 신약성경이 언약을 의미하는 구약의 히브리어 단어 ‘베리트’를 의미할 때, ‘신데케’라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언을 의미하는 ‘디아데케’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신약성경만이 아니라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주전 3세기의 서기관들도 언약을 번역할 때 그 자체로 언약을 의미하는 ‘신데케’대신 보통 유언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디아데케’라는 단어를 썼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의도적인 번역입니다. 신데케라는 말은 계약, 언약을 의미하지만, 이 말이 전달하는 강력한 뉘앙스는 ‘쌍무적’인 계약이란 점입니다. 두 동등한 당사자의 계약이란 점인데, 이것이 구약의 언약을 번역하기에는 부적절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언을 의미하는 ‘디아데케’를 선택했는가? 이 단어가 비록 언약을 설명하는데 한계를 지니는 점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의 본질적 성격을 드러내는데 더 합당했기 때문입니다. 유언은 결코 쌍방적 계약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유언한 자의 의지이며, 유언한 자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집행되는 법적 효력을 지니는 계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오래도록 강조했던 은혜언약의 성격이 무엇입니까? 범죄후 아담에게 주신 언약,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다윗에게 주신 언약이 다 은혜언약이었습니다. 그 성격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겠다, 내가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쪼개진 고기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이 아무리 범죄해도 다윗의 언약은 깨어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었습니다.
A.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심으로 새 언약의 효력을 발생시키셨다.
이것이 히브리서 10:16의 의미입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디아데케라는 단어를 신약성경의 모든 곳에서 언약, 혹은 계약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10:16과 17절에서만 유언이라고 번역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분명하게 히브리서 기자가 유언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는 그 새 언약의 수혜자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해하기 쉽게 유언의 수혜자가 되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B. 유언의 수혜자(beneficiary)
어떻게 유언의 수혜자가 됩니까?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죽으셨고 그 죽으심의 효력으로 유언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히 10:17), 이 말씀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으셨습니다. 새 언약의 중보로 첫 언약 때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들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고”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15절 말씀의 의미입니다.
C. 유산 상속의 권리는 빼앗길 수 없다(롬 4:14,16).
그러므로 성경이 강조하는 단어 가운데, ‘기업’이라든지, ‘유업’ 혹은 ‘상속자’, ‘후사’와 같은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산 상속의 수혜자가 되는 것은 그 사람의 노력 여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유언의 수혜자가 되는 것은 유언한 사람의 유언장의 내용에 따르는 것입니다. 유언한 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유언의 수혜자가 되기 위해서 선행을 얼만큼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유언장에 쓰여진대로 법이 집행할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유언의 수혜자들이 유산 상속의 권리를 빼앗길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4:14,16의 말씀의 뜻입니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상속자)이면 믿음은 헛 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그러므로 후사(상속자)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이 유산, 생명보다 귀한 기업은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5. 새 언약의 백성들의 특징은 중생으로 얻어진 새 마음이다.
옛 언약으로 대표되는 시내산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라고 했습니다. 돌비가 아니라 우리의 심비에 기록하시겠다는 말씀은 중생,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이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선한 의지, 선한 성향을 창조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새 언약의 약속이 어디서 이루어졌습니까?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믿는 모든 자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그 마음 속에 주셔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마음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렘 32:40). 이것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새 언약의 약속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으로써 이미 모든 믿는 자에게 빼앗길 수 없도록 주어진 유산인 것입니다. 중생, 거듭남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는 중생은 없습니다. 거듭남은 우리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게 만들며,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살고 싶은 성향을 우리 속에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믿는 자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알지 못하시는 분들은 그 확실한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를 맛보신 분들은 그 확실한 은혜 가운데 거하시기를 구하십시오. 이것이 우리로 하늘의 유업을 얻게 하는 거져 주어진 자격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