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리지
《택리지》(擇里志)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이 1751년(영조 27년)에 저술한 인문 지리서이다.
팔역지(八域誌) · 팔역가거지(八域可居地) · 동국산수록(東國山水錄) · 동국총화록(東國總貨錄) ·
형가승람(形家勝覽) · 팔도비밀지지(八道秘密地誌) 등 여러 이름으로 전해 오고 있다.
어떤 지리적 요건을 갖춘 곳이 살기에 좋은 곳인지를 실학적 입장에서 저술하였다.
이 책은
사민총론(四民總論),
팔도총론(八道總論),
복거총론(卜居總論 : 地理·生利·人心·山水),
총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팔도총론〉에는 조선 전토를 팔도로 나누어 그 지방의 지역성을 출신 인물과 결부시켜 밝혔고,
〈복거총론〉에는 살 만한 곳을 입지조건을 들어 설명하였다.
전자는 지방지지(地方地誌)에, 후자는 인문 지리적 총설에 해당한다.
전반에서는 특히 사람과 자연환경과의 관계를 중시한 지인상관론(地人相關論)을 설파했으며,
후자에서는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다음과 같은 입지조건을 들고 있다.
첫째 지리적 조건을 들었으며,
둘째 생리(生利)를 들었다.
셋째로는 인심을 들었으며,
넷째로 산수의 경치가 좋은 것을 들었다.
끝에 가서 해거(海居)·강거(江居)·계거(溪居)의 세 곳을 비교하여 말했다.
무릇 복거의 땅이라고하는 것은 지리가 생리 위에 있어 그것을 다음으로 한다.
그 다음이 인심이며 그 다음이 산수인것이다.
이 네 가지는 (서로 중요해서) 하나라도 결여되면 땅을 즐길 수 없는 바이다.
지리가 비록 빼어나다고는 하나 생리가 결핍된다면 오래 거할 수 없지 않겠는가?
생리가 비록 좋다고는 하더라도 지리의 상황이 나쁘다면 역시 오래 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다행히) 지리와 생리는 모두 좋으나 또한 인심이 각박하다면 반드시 후회하는 바가 생기지 않겠는가?
(또한) 가까운 곳에 산책하여 자연을 감상할 곳이 없다면 성정을 쏟아내 도야할 수 없을 것이다.
요즘 택리지 보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심심할 때 여기저기 훑어보는데, 현재의 관점으로 보더라도
너무 들어맞는 얘기가 많아서 아주 재미있다
특히 복거총론의 인심부분에 상세하게 수록된 당파싸움이야기는
그 세세함과 객관적인 분석과 문젯점의 지적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당파싸움에 골몰하게 됐는지
그게 오늘날에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지 느낄 수가 있다
18세기는 헬조선이었다 - 이중환의 택리지의 결론
https://cafe.daum.net/isbobyb/EiUl/25921
시간이 되시는 분 들은 한번 살펴 보시면 어떨까 싶다
인터넷 곳곳에 택리지 전문이 떠돌아 다닌다
나는 219페이지짜리 한글번역판의 PDF파일을 구해서 보는데
실학자인 이중환의 실용적인 글에 매료된다
조선팔도의 지리와 생리, 산수 등을 그렇게 세세하게 잘 썼을 수가 없다.
앞쪽에 나오는 우리나라의 팔도총론의 앞부분을 보면
우리나라 역사의 개략을 볼 수 있다. 재미있다.
아래에 인용해 본다
택리지의 팔도총론 부분
팔도총론(八道總論)
곤륜산(崑崙山) 한 줄기가 대사막의 남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되었고,
이로부터 크게 끊어져서 요동(遼東) 벌판이 되었다가 벌판을 지나 다시 솟아 백두산이 되었는데,
곧 《산해경(山海經)》에서 말한 불함산(不咸山)이 이것이다.
산의 정기가 북쪽으로 천리를 달려가면서 두 강을 사이에 끼었다가,
남쪽으로 향하여 영고탑(寧古塔)이 되었고, 등 뒤로 뻗은 한 줄기가 조선 산맥의 최고봉이 되었다.
우리나라 팔도(八道) 중 평안도는 심양(瀋陽)과 가까이 있고,
함경도는 여진과 가까이 있으며, 그 다음 강원도는 함경도와 닿아 있다.
황해도는 평안도와 닿았고 경기도는 강원도와 황해도의 남쪽에 있다.
경기도의 남쪽은 충청도와 전라도고, 전라도의 동쪽은 경상도다.
경상도는 옛날 변한(卞韓)·진한(辰韓)의 땅이고,
경기·충청·전라도는 옛 마한 (馬韓)과 백제의 땅이다.
함경·평안·황해도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땅이었고,
강원도는 별도로 예맥(濊貊) 땅이었다.
이 나라들의 흥망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으나,
당(唐)나라 말엽에 왕건 태조가 삼한을 통합하여 고려를 세운 후 이것을 우리 나라가 계승한 것이다.
동쪽과 남쪽과 서쪽은 모두 바다인데, 오직 북쪽만이 여진과 요동으로 통한다.
산이 많고 들이 적으며, 백성들은 유순하고 공손하나 도량이 좁다.
길이는 3천 리에 뻗었으나, 동서로는 천 리가 되지 못하고,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중국 절강성(浙江省)의 오현(吳縣)과 회계현(會稽縣) 사이에 닿게 된다.
평안도 북쪽에 있는 의주(義州)는 국경의 첫 고을로, 대략 중국의 청주(靑州)와 위도가 비슷하다.
우리나라는 대체로 중국과 일본의 사이에 있다.
옛날 요임금 때 신인(神人)이 개천현(价川縣) 묘향산(妙香山) 단목(檀木) 아래
석굴 속에서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이름은 단군(檀君)이며 구이(九夷)의 임금이 되었다.
그 연대와 자손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록을 할 수가 없다.
그 후에 은(殷)나라의 기자(箕子)가 조선왕이 되면서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
그 손자 기준(箕準)에게까지 계승되었으나, 진(秦)나라 때에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에게 쫓겨
바다 건너 전라도 익산(益山)에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마한(馬韓)이라 했다.
기(箕)씨가 다스리던 지역은 역사에 자세히 기록되지 않으나, 진한·변한 과 함께 삼한의 하나가 되었다.
혁거세(赫居世)는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에 나라를 일으켜 경상도를 모두 차지했다.
그리고 진한·변한의 여러 지역을 정복하여 국호를 신라라 하고 경주에 도읍했다.
박(朴)씨·석(昔)씨·김(金)씨가 서로 바뀌면서 왕이 되었다.
위(衛)씨는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멸망했다.
그 후 한나라에서 백성만 데려가고 땅은 버렸는데,
주몽(朱蒙)이란 이가 말갈(靺鞨)에서 일어나 평양에 거점을 두고 고구려라 했다.
주몽이 죽자 그 둘째 아들 온조(溫祚)가 한수(漢水) 이남을 점령하여 마한을 멸망시켰다.
국호를 백제라 하고 부여(扶餘)에 도읍했다.
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당(唐)나라 고종(高宗) 때에 멸망했는데,
당나라에서 땅은 버리고 군사를 철수시키자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땅이 모두 신라 땅이 되어 버렸다.
신라 말에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이 이 땅을 갈라 차지했으나 후에 고려가 통일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건국의 대략적인 역사다.
신라 이전까지는 세 나라끼리 전쟁이 그치지 않았지만,
남은 기록이 적기 때문에 고려부터 비로소 자세한 역사를 말할 수 있다.
첫댓글 좋은글 감사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