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책을 나갔다. 그리고 계획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 여학원 쪽으로 옮겨져 갔다. 캠퍼스를 두루 거닐다가 돌아올 무렵,
나는 아사꼬 신발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날 잊어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왔던 그 우산을
연상한다. <쉘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내가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꼬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꼬와 나는 밤 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 것 같다.
그후 또 십여 년이 지났다. 그동안 제2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고
또 한국 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꼬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통에 어찌 되지나 않았나, 남편이 전사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동경을 들러 미우라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미우라 선생네는 아직도
그집에서 살고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한국이 독립이 돼서 무엇보다도 잘 됐다고 치하를 하였다. 아사꼬는 전쟁이 끝난 후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2세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서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꼬가 전쟁 미망인이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2세와 결혼하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꼬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십여년 전 내가 아사꼬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아, 이쁜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꼬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십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꼬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가는 아사꼬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십 년이더 지났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 장교라는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꼬와 나는 절을
몇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꼬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이 순간
이 순간 내가
별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할 사실이다
플루트 연주자
바통을 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찬란한 존재다. 토스카니니 같은 지휘자 밑에서 플루트를
분다는 것은 또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다 지휘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 콘서트 마스터가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오케스트라와 같이 하모니를 목적으로 하는 조직체에서는 한 멤버가 된다는 것만도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각자의 맡은 바 기능이 전체 효과에 종합적으로 기여된다는 것은
의의 깊은 일이다. 서로 없어서는 안 된다는 신뢰감이 거기에 있고,
칭찬이거나 혹평이거나, ‘내’가 아니요 ‘우리’가 받는다는 것은 마음 든든한 일이다.
자기의 악기가 연주하는 부분이 얼마 아니 된다 하더라도, 그리고 독주하는 부분이 없다 하더라도
그리 서운할 것은 없다. 남의 파트가 연주되는 동안 기다리고 있는 것도 무음(無音)의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야구 팀의 외야수(外野手)와 같이 무대 뒤에 서 있는 콘트라베이스를 나는 좋아한다.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스켈소’의 악장 속에 있는 트리오 섹션에도, 둔한 콘트라베이스를
쩔쩔매게 하는 빠른 대목이 있다. 나는 이런 유머를 즐길 수 있는 베이스 연주자를 부러워한다.
전원 교향곡 제3악장에는 농부의 춤과 아마추어 오케스트라가 나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서투른 바순이 제때 나오지 못하고 뒤늦게야 따라나오는 대목이 몇 번 있다.
이 우스운 음절을 연주할 때는 바순 연주자의 기쁨을 나는 안다.
팀파니스트가 되는 것도 좋다. 하이든 교향곡 94번의 서두가 연주되는 동안은
카운터 뒤에 있는 약방 주인같이 서 있다가, 청중이 경악하도록 갑자기 북을 두들기는 순간이 오면
그 얼마나 신이 나겠는가? 자기를 향하여 힘차게 손을 흔드는 지휘자를 쳐다볼 때, 그는
자못 무상(無上)의 환희를 느낄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공책에 줄치는 작은 자로 교향악단을 지휘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지휘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토스카니니가 아니라도
어떤 존경받는 지휘자 밑에서 무명(無名)의 플루트 연주자가 되고 싶은 때가 가끔 있었다.
첫댓글 하늘에서 구름을 벗삼아 환하게 웃고계실 古人의 명복을 빕니다..
가슴 절인.. 님의 글귀에 내 가슴 쥐어 뜯는 듯... 아픕니다..
피천득의 인연이란 책을 몇권을 사서... 친구에게 주고.. 또 다른 친구에게 주고... 내가 갖고.. 내가 다시 사고....
글이 좋아 퍼갑니다.
저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