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에 겁없는 도둑처럼 다가온 노란 햇빛은 그대로 내 발끝에서 멈추었다. 나는 지금 거실 쇼파에 앉아 저번 달 여성잡지를 들치락거리고, 조지 윈스턴의 lullaby를 듣는 한편으론 그 리듬에 어설프게나마 발가락들을 꼼지락거리고 있다. 이런 나를 보면 여느 사람들은 내가 아무렇지 않아 보이겠지. 짧은 숏팬츠를 입고 흰 나시티를 입은 채 우유를 마시고 있는 내가 괜찮아 보이겠지. 아니, 나는 괜찮은 편이다. 일주일 전 애인을 잃었는데도 이렇게 노곤하도록 태연한 내가 나도 놀라울 지경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까. 이 여성잡지는 그가 일하던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고 조지 윈스턴의 lullaby는 그가 평소 좋아했던 음악이었다는 것을. 그런 사실조차 모른 채 나를 독하다고 직언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몰래 비웃음을 흘리는 것을 어느 순간 즐기게 되었다. 마치 교사 앞에서 건들거리며 너따위는 절대 모를 거야라고 생각하는 어린 학생이 된 기분이다.
그래, 애인은 조지윈스턴의 lullaby를 좋아했다. 음색이 마치 서너살 짜리 꼬마가 둥그런 공을 굴리며 가지고 노는 것마냥 장난기어리다며. 그 말에 나는 눈웃음을 흘겼다. 그건 당신도 똑같아. 당신도 어린 아이같은 걸. 그러면 애인은 수줍은 듯이 정말 순수한 소년처럼 웃었다. 소년같기도 하지만 드문 호남아인 그는 정말 평소에도 장난이 많았고, 엉뚱하기까지 한 발상을 해내 주위를 호탕하게 만들곤 했다. 인기를 얻으려는 작위적인 의도가 아닌, 오직 천진난만한 성격으로 상대의 마음을 풋풋하게 하는 그를 볼 때마다 나는 작가 특유의 성정에 눈을 빛냈다. 그와의 이야기를 꼭 원고에 옮기리라. 그를 바라보는 내 시선을 글로 써 그에게 선물하리라. 그를 만날 시간에 내 머릿속은 언제나 다양한 문체와 시선이 복잡한 바이오 리듬으로 엉켜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가 같은 기획사 동료들과 계곡에 다녀온다고 했을 때 별 걱정없이 보냈던 것일까. 바이 걱정을 안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보다 내 눈 앞은 그가 계곡에 간다는 또 다른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에 타깃이 되어 있었다. 그가 계곡으로 떠난 날 나는 친구들과 치마를 사고, 함흥 냉면집에 가서 냉면 한 그릇을 비우고,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 재방송을 보았다. 그것도 모자라 최운표의 시집까지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눈꺼풀이 무거워져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었다.
다음 날 알게 된 그의 부음. 휴일이어서 12시즈음에야 잠에서 깬 내게 걸려온 통부은 정말 황당했다. 무엇보다 실감이 나질 않았다는 것이다. 혹시 이 전화, 장난전화는 아닐까? 의심마저 들 정도로 그의 죽음은 내게 전혀 현실감을 실어주지 못했다. 전화를 끊었을 때엔 어쩐지 갈비뼈 몇 대가 시큰 아파왔다. 그 날의 기분은 아직도 어떤 표현을 찾지 못하고 있다. 황황하다고 해야 하나. 죽음에 관한 글을 여러 번 쓸 때마다 난 언제나 그 심정을 현실처럼 표현하기 위해 애썼었다. 이렇게 '실감이 안난다'라는 대목도 여러 번 쓴 적이 있다. 하지만, 마치 속의 것을 모조리 비워낸 듯한 그 메슥거림과 빈 느낌은 처음이었다. 내가 기고를 막 하기도 전에 떠난 그. 오롯이 남은 나는 우습게도 그 순간에도 원고에 신경이 가 있었다. 아직 시작도 못한 글은?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는? 글의 완결은 어떻게 꾸미나? 그것이 나는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건 줄 알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것은 그 사람을 찾는 애탄 부르짖음으로 동화되었다. 장례식에서의 기억은 날아가던 기고한 새다리에 매달았다. 기억을 잃었다. 잊었다.
지겹도록 오전을 지배했던 조지 윈스턴의 lullaby를 꺼버렸다. 지금 생각난 거지만 우리들의 글을 구상했을 당시-비록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나는 그의 이름 대신에 무엇을 집어넣을까 고민했던 적이 있다. 단순한 이름을 쓰기 보다는 좀 더 내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부각시킬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었고, 그래서 나는 원고 안의 그를 Dearest라고 불렀다. 그랬다. 내 가슴 속 필드 안의 그는 지칭 Dearest였다.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그 날 샀던 치마를 입고, 치마에 걸맞는 얇은 옷을 걸치고, 굽이 낮은 구두를 신고 거리를 나선다. 갑자기 먼지 안에 갇힌 듯 숨이 텁텁해진다.
폭양이 푹석 주저앉은 오후의 거리는 비디오를 느리게 감는 듯이 침체되고 조용했다. 아파트단지를 빠져나와 빈 공터를 지나 시내로 나왔다. 잠시 치마 주머니를 확인했다. 지갑이 있었다. 그제야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을 자신이 생긴다. 지갑 안에 있는 돈이면 하루종일 발 아프게 거리를 맴돌아도 충분한 배짱이 생길 테니까. 무료한 도시는 푹 찐 더위를 신경쓰게 만든다. 내 옆을 지나가는 저 여자도 이 더위가 맘에 들지 않았던지 눈에 띄도록 화장에 염려하는 눈치다. 나는 금방 더운 열기에 매료되어 처진 눈을 한다. 이제 더위에 질렸다는, 그래서 말도 안나온다는 얼굴을 하였다. 그러나 집에 가고 싶다는 갈망따윈 어느 곳에도 존재치 않았다. 길을 아는 대로 걷다가 신호등 앞에 멈추어섰다. 저편에서는 이 쪽으로 오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는 이름 모를 사람들이 몇몇 서 있었고, 나는 그 쪽으로 가기 위해 신호를 기다린다. 문득 그 사람들 너머 작지도 크지도 않은 식당의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더울 때는 이열치열이라구. 사나이는 그런 거야. 자랑스레 웃으며 말하던 Dearest가 떠올랐다. 나는 곧바로 식당으로 가서 비빔밥을 시킨다. 고추장 좀 많이 해서 주세요. 이런 말을 덧붙이자 넉살좋은 뚱뚱한 아주머니는 알았다면서 물을 한 컵 따라준다. 식당 안에 손님은 나뿐이었는지, 호젓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할 일을 마쳤는지 고무장갑을 빼면서 나오는 또 누군가의 식당 아주머니는 손으로 부채질을 해가며 빈 식탁의자에 털썩 앉는다. 하이고, 덥다. 더워. 뭔 날씨가 이렇게 덥다야.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지탄을 내뱉는다. 나는 물 한모금을 들이 마신다. 곧 비빔밥이 나왔다. 고추장이 아까 말한 대로 많이 나온 건지, 적게 나온 건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혀 끝에서 신맛이 발동되는 것을 느낀다. 숟가락으로 엉성하게 비빔밥을 비볐다. 이 식당에선 아니었지만 언젠가 Dearest와 함께 비빔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 때 우린 누가 더 빨리 먹나 시합을 했었고, 코에 땀이 점점이 맺히고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고추장에 비벼진 밥을 먹다 우린 서로의 얼굴을 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폭소를 터뜨렸었다. 주위의 몇몇 사람들도 무슨 걸신들린 사람마냥 먹어대는 우리를 질린 듯이 바라본 것도 기억한다. 하지만 난 이제 이 매운 비빔밥을 혼자 먹는다. 게걸스럽게 먹는다. 앞에 시합하는 사람이 있는 것마냥 급하게 퍼먹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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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힘들죠?; 죄송해요 대사를 전혀 넣지 않았어요(.. );
한번쯤 이런 순수소설 써보고 싶었어요. 대야도 물론 팬픽은 아니지만,
요즘들어 팬픽은 쓰는 것보다 보는 재미에 살죠 이히히;
Dearest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이누야사 3기 엔딩 곡
제목이 Dearest에요^^ 들으면 들을수록 너무 좋아요 ㅠ_ㅠ; 아유미가
불렀죠;; 헤에. 단편이 될지 장편이 될지는 아직 저도 결정 못지었다는;
에..그리고, 저번 winter story 下에서 리플 주신 감이하고 아라시언니
:D 모두 땡쓰~! 감사하구요,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해요:D
즐거운 월요일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