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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4월 13일, 타이거 우즈, 마스터스 골프 대회 최연소 우승
1997년 4월13,미국의 골프천재 타이거
우즈가 마스터스 골프대회에서 우승했다.
세계 메이저 골프대회에서의 첫 승이었다
.18언더파라는 엄청난 스코어에 2위와
12타 차의 압도적인 차이로 세계 골프
역사에 새 장을 열어젖힌 것이다.
사상최초의 흑인챔피언, 사상 최고스코어,
사상 최연소 챔피언(21세), 사상 최다 점
수 차 우승,사상 최장타. 아버지의 엄격한
지도로 일찌감치 ‘골프 신동’으로 불렸던
우즈는 3살 때 TV쇼에서 정규코스 9홀을
48타로 끝내 시청자들을 기절초풍하게 했다.
2009년 11월 성추문에 휘말려 무기한 골프
중단을 선언했다가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아
PGA마스터스 대회를 통해 본격적인 복귀를
선언했다.
▶ 2016년 오늘,
골드만삭스 "부실대출 인정, 51억 달러 납부" : 미 투자은행 골드만삭스가 2008년 금융위기의 원인이 된 모기지 담보증권 부실 판매와 관련해 거액의 벌금을 납부하다.
월스트리트의 가장 고상한 살인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결말!
http://me2.do/5aFvXSF0
▶2015년 독일 ‘양철북’의 작가 귄터 그라스 사망
독일 ‘양철북’의 작가 귄터 그라스 (Gunter Wilhelm Grass)독일 뤼베크 에서 사망 (1927년 10월 26일 폴란드 단치히 자유시에서 출생~)1999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 양철북,『넙치』,텔크테 에서의 만남, / 『암쥐』, 『무당개구리의 울음』,『광야』, 『나의 세기世紀』, 『게걸음으로 가다』,『라스트 댄스』, 『세계화 이후의 민주주의』, 『양파 껍질을 벗기며』, 『암실 이야기』양철북
Die Blechtrommel
양철북을 치는 난쟁이 오스카의 시각에서 나치 점령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까지의 파행적인 독일 역사를 그린 작품이다.
귄터 그라스(Günter Grass)
독일 전후문학을 대표하는 소설로 작가의 고향인 단치히(Danzig)를 무대로 펼쳐지는 『고양이와 쥐』(1961), 『개들의 시절』(1963)과 함께 ‘단치히 3부작’을 구성한다. 1924년 단치히에서 태어난 1인칭 화자 오스카는 3살 때 추락사고로 성장이 멈춰버린 난쟁이다. 30회 생일을 맞이하는 1954년, 오스카는 어느 정신병원에서 자신의 가족사와 단치히의 소시민적 세계를 자신의 관찰과 체험을 통해 묘사함으로써 나치 정권의 광기어린 행태가 가능했던 사회적 배경을 고발하고 있다.
언제나 양철북을 치고 다니며 높은 목소리를 내어 유리를 깨뜨리는 희한한 능력을 가진 주인공 오스카만큼이나 기존의 도덕적, 성적, 종교적 터부를 깨뜨린 현실묘사와 사건이 그로테스하고 알레고리적으로 묘사된다. 태어났을 때 이미 완전한 성인의 지성을 지녔지만 멈춰버린 성장으로 인해 ‘영원한 아이’가 되어버린 오스카는 ‘아래로부터의’ 시각을 통해 전쟁과 전후시기의 세계를 관찰한다. 이 소설은 1979년 폴커 슐렌도르프(Volker Schlöndorff)에 의해 영화화되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으며, 1959년 출간된 이 작품으로 그라스는 199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010년 국제 선교단체인 예수전도단
이 설립50주년을 맞아 afterThis(이 일 후에)라는 주제로4월13일부터16일까지 분당 만나교회에서 50주년
▶2009년 폴란드 서부 카미엔포모르스키
에 있는 노숙자 보호소에서 학재가 발생,
최소21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2009년 신종플루인 인플루엔자ah1n1
멕시코 오하카주에서 발생 전세계로 확산.
▶2004년 서울 서소문로 입구 태평로에
첫 횡단보도 신설
▶2004년 주유소 ‘공짜 화장지’ 서
피부염 유발 유해물질 검출
▶2003년 인간 ‘게놈 지도’ 완성
2003년 4월 13일 인간 게놈 지도가 100% 완성됨됐다. 이로써 단백질로 이뤄진 기나긴 ‘소설’을 해독하는 생명의 ‘알파벳’을 인류가 완전히 손에 넣게 됐다.
이 알파벳들이 어떤 조합으로 어떤 의미를 만드는지를 파악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인간의 신비를 규명할 수 있게 됐다. 당시 전체 인류의 5%가 윌슨병, 고셔병, 다운증후군 등 유전자 결함으로 인한 유전병으로 고통 받았었다. 그러나 완성된 게놈 지도가 결함이 있는 유전자를 쉽게 찾을 수 있게 해줌으로써 유전자 치료의 획기적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실제로 이번에 게놈지도를 완성한 연구진은 새로 해독된 20번째 염색체의 염기서열이 당뇨병, 백혈병, 어린이 습진 같은 질병과 연관된 유전자를 찾는 데 큰 도움이 될 전망이라고 밝혔다.
그동안의 연구로 찾아낸 인간의 유전자는 모두 2만5000~4만 여개로 이 유전자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단백질을 만들고, 그 단백질이 체내에서 서로 상호 작용하여 인체의 신비한 생체 작용을 이뤄나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인간 게놈 지도의 완성은 성인병·암과 같이 유전병 외의 다른 질병 치료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됐다.
▶2002년 원로가수 현인씨 별세
가수 1세대’의 대표주자
“아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 온다.”
국민가요라고 할 만한 ‘신라의 달밤’은 가수 현인(본명 현동주)이 부른 곡이다. 무명가수이던 현인은 1947년 ‘신라의 달밤’을 발표하면서 스타가 됐다. 일제 강점기에 노래를 시작한 그는 ‘가수 1세대’의 대표주자였다. 또 현인은 당시에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예명을 사용해 화제가 됐다.
1919년 부산 태생. 현인은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의 징용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샹송과 칸소네를 부르며 가수활동을 시작했다. 광복 직후 귀국한 그는 고향 경음단이라는 7인조 악단을 만들어 활동했다. “성악을 전공한 음악도가 유행가를 부를 수 없다”며 자존심을 지키던 그는 작곡가 박시춘씨의 권유로 ‘신라의 달밤’을 취입했다. 이후 ‘신라의 달밤’은 트로트 가수 이미자, 나훈아, 재즈가수 말로 등이 불렀고, 2001년에는 김혜수·차승원·이성재 주연의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져 또 한 번 화제가 됐다.
현인은 ‘신라의 달밤’ 외에도 피란민의 애환을 그린 ‘굳세어라 금순아’나 ‘비 내리는 고모령’ ‘청포도 사랑’ ‘전선야곡’ 등을 불러 한국전쟁으로 실의와 절망에 빠졌던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줬다. 또 번안곡인 ‘베사메무초’ ‘꿈 속의 사랑’ 등을 불러 이국적인 번안곡 열풍을 이끌었다. 현인은 성악가 출신답게 성악을 바탕으로 한 혀 짧은 소리에 턱을 떨며 부르는 독특하면서도 절도 있는 창법으로 유명했고, 당시 민요나 트로트 일색이던 대중음악계에 혁신을 일으켰다.
현인은 지병인 당뇨병을 앓다 2002년 4월13일에 별세했고, 장례는 한국연예예술인장으로 치러졌다. 향년 84세. 사후에 ‘굳세어라 금순아’의 무대인 부산 영도대교 남단에 현인의 동상과 함께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비가 세워졌고, 경주에도 ‘신라의 달밤’ 노래비가 세워졌다. 또 그를 기리기 위해 2005년부터 그의 고향인 부산에서 매년 현인가요제가 열리고 있다.
▶2001년 남아공 축구장 대형 참사로 43명 사망
▶2000년 16대 총선 출구조사 발표와
실제 개표결과와의 큰 차이로 방송사 망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
▶ 1999년. 안락사 도와준 의사 잭 케보키언, 2급 살인죄로 10~25년 징역형 선고
루게릭병 말기환자의 안락사를 도와준 잭 케보키언 박사(70)에게 2급 살인죄가 적용돼 10∼25년 징역형이 선고됐다. 미국 미시간주 오클랜드 순회법원 제시카 쿠퍼 판사는 1999년 4월 13일 “법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글을 쓰거나 강의하고, 언론을 통해 의견을 개진할 수 있지만 법을 어겨서는 안된다”며 검찰 구형대로 이같이 판결했다.
쿠퍼 판사는 환자에게 통제된 약물을 투여한 혐의도 인정, 3∼7년의 징역형을 추가 선고했다. 판결문이 낭독되는 순간 케보키언 박사는 전혀 동요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곧 수갑이 채워진 채 법정을 나섰다고 CNN방송은 전했다. 케보키언 박사는 최근 9년간 죽음을 앞둔 사람이나 불치병 환자 130여명의 안락사를 도와주었다고 시인해 ‘죽음의 의사’로 알려진 인물. 1998년 9월 17일 미시간주에서 루게릭병 환자 토머스 유크(52)에게 치사량의 약물을 투여,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또 이 장면을 비디오 테이프로 녹화, 며칠후 CBS방송의 ‘60분’ 프로를 통해 방영토록 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98년 영국 에딘버러 로슬린 연구소(Roslin Institute) 이언 윌 머 트(Ian Wilmut) 박사팀 복제양 돌리, 새끼양 보니 출산
▶1998년 미국 대형은행 네이션스뱅크와
뱅크아메리카 합병
▶1997년 골프천재 타이거 우즈,
마스터스 골프대회 우승
▶1995년 한국-이집트 국교 수립
▶1995년 정보통신윤리위원회 발족
▶1993년 행정쇄신위원회 발족
▶1991년 지중해 최악의 원유 유출사고 발생
▶1990년 KBS노조,
서기원사장 퇴진-방송민주화요구 파업
▶1988년 전두환 전대통령 정계은퇴
▶1987년 4ㆍ13 호헌조치
5공화국 마지막 해인 1987년, 국민들은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를 후보로 선출해 간접선거 방식인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는 데 거세게 저항했다. 대학가 역시 서울대생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위의 열기가 절정에 달해있었다. 그러나 5공 정권은 민심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한술 더 떠 1987년 4월13일 전두환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통해 ‘헌법 개정 논의를 금지한다’는 이른바 ‘4ㆍ13 호헌조치’를 발표, 시민항쟁에 맞섰다. 당시 경찰은 전두환 정권의 4ㆍ13 호헌조치에 맞서 전국 20개 도시에서 개최된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원천봉쇄했고 전국에서 3천8백31명을 연행했다.
그러던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 군이 교문 앞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 6월 시민항쟁의 불을 댕겼다. 6월 10일 마침내 ‘박종철군 고문살인 및 은폐 규탄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시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이것이 바로 도시 중산층과 샐러리맨들까지 가세, 한국 근대사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6월 항쟁’의 시작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위에 참여하지 않던 일반 시민들까지 대거 길거리로 몰려나온 이 시위로 ‘4ㆍ13 호헌조치’를 발표하며 독재정권 연장을 꾀하던 5공 정권으로 하여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6ㆍ29선언을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1983년 을숙도 철새보호구역 60만평 해제
▶1983년 미국 시카고시장 선거에서 최초로 흑인 당선
▶1982년 노인헌장 제정
▶1980년 박찬희,
한국프로복싱 사상 첫 5차방어 성공
▶1977년 한국-수단, 국교수립
▶1974년 북한 인민문화궁전 준공
▶1973년 개정약사법 발효
▶1968년 동백림사건` 항소심 선고
1968년 4월 13일 서울고법 형사부가 ‘동백림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을 열고 정규명, 정하룡 , 임석훈 등 3명에게는 사형, 조영수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리고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피고인 15명에 대해서는 1심판결을 모두 깨고, 형량을 줄이는 판결을 내렸다.
구 동독의 동베를린(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적화공작단사건으로 알려진 `동백림사건`은 관련자인 임석진(명지대 조교수.철학박사)씨가 귀국하여 자수함으로써 밝혀졌다. 1967년 7월 8일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대학교수를 비롯, 유학생 예술인 의사 공무원 등의 지식인들이 동베를린 주재 북한공작단에 포섭되어 1958년부터 1967년 사이에 비교적 통행이 자유로운 동베를린에 거점을 두고 동독 주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간첩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건국사상 최대의 정보사범사건이었다.
1967년 12월 3일 선거공판에서 관련자들에게 국가보안법·반공법·형법(간첩죄)·외국환관리법 등을 적용하여 조영수·정규명에게는 사형, 정하룡·강빈구·윤이상·어준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하여 구속 107명, 학계-문화계의 저명인사 등 관련자가 194명에 이르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상주장학관을 급파하여 유학생 및 해외인사들의 반정부활동을 감시했다. 그러나 공소장의 내용과는 달리 사회 일각에서는 이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건 당사자들은 관련자들을 처음 만났으며, 평양을 방문한 적도 없고, 북한으로부터 간첩활동을 하라는 지령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간첩단사건이 조작되었다고 현재 재평가되고 있는 점을 감안해보면 이 사건 역시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확한 재평가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1966년 민주사회당, 주비대책위원회 구성
▶1966년 사이공 공항 베트콩에 피습
▶1961년 영화 ‘오발탄’ 개봉
오발탄
誤發彈
1961년 대한영화사가 제작한 이범선 원작, 나소운·이종기 각색, 유현목 감독의 영화. 6·25동란 후 한국 사회의 빈곤과 부조리를 고발적으로 그렸다는 점과 철저한 리얼리즘의 영상으로 묘사되었다는 전후 최대의 문제작이다.
1961년 대한영화사가 제작하였고, 촬영 심재흥(沈載興)에 음악 김성태(金聖泰), 그리고 김진규(金振奎)·최무룡(崔茂龍)·문정숙(文貞淑) 등이 출연하였다.
이 영화는 6·25전쟁 후의 한국사회의 빈곤과 부조리를 고발적으로 그렸다는 점과 철저한 리얼리즘 영상으로 묘사되었다는 면에서 전후 최대의 문제작이라고 일컬어졌다. 이처럼 이 작품이 전후 최대의 문제작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인간을 절망의 밑바닥에 내던지게 한 빈곤과 부조리의 사회를 고발적으로 표현한 데 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중요한 것은 유현목 감독이 제시한 철저한 리얼리즘의 영상미학이 특이하였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유현목의 영상적인 표현기법은 이때까지 스토리텔링 위주의 기법을 벗어난 새로운 영화언어(映畫言語)를 보여주었다는 면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현실을 철저하게 응시하는 롱 테이크의 화면들, 한 장면 안에서 몽타주되는 이미지, 소리와 화면의 대립되는 몽타주, 이러한 기법들은 그 주제의 심각성과 함께 한국영화에서 처음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상황과 인간의 대립에서 구원을 찾을 수 없었던 주인공인 영철은, 미친 듯이 “가자! 가자!”라고 외치는 어머니와 양공주로 변신한 명숙, 은행강도 끝에 살인까지 하게 된 동생 영호의 사건, 그리고 아내의 죽음으로 돌이킬 수 없는 절망에 이르게 된다. 10분이 넘는 영철의 마지막 방황의 장면은 이 영화가 제시한 영상적인 리얼리즘의 순수하고 시적인 놀라운 표현이다.
「오발탄」은 그 주제의 심각성과 표현의 무서운 현실성으로 5·16군사정변 직후 한때 상영금지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제7회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 출품하였다.
▶1959년 일본-북한 제네바서 재일동포 북송회담 개최
▶1949년 로마교황청 한국 승인
▶1948년 루마니아 인민공화국 헌법 제정
▶1943년 카틴 숲 학살 사건 현장 발견
2007년 안제이 바이다 감독의 영화‘카틴’의 한 장면.
1940년 4월 13일 독일이 러시아 남부 스몰렌스크의 카틴 숲에서 폴란드 장교들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것을 발표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독일은 소련에 의한 폴란드인 학살의 증거라고 발표했지만, 소련은 나치에 의한 폴란드인 포로 학살이라고 반박했다.
1990년 당시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Gorbachev)는 카틴 사건에 대한 소련의 잘못을 인정했고, 이후 공개된 당시 문서를 통해 1939년 폴란드로 쳐들어간 소련이 카틴 숲 근처의 수용소에서 학살한 2만1768명의 명단이 알려졌다. 당시 스탈린은 폴란드가 독립국을 만들지 못하도록 폴란드의 엘리트들의 처형을 지시하였다.
2010년 4월 10일 키틴 사건 70주년 기념식 방문차 러시아로 가던 중 레흐 카친스키(Kaczynski) 폴란드 대통령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고, 이후 러시아와 폴란드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2010년 4월 28일 사건의 책임이 구소련에 있음을 증명하는 비밀 서신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1941년 소련-일본 중립조약 조인
▶1941년 베오그라드, 독일군에게 함락
▶1937년 소련 작가 일리야 일프 사망
▶1936년 소설가 최인훈 출생 - 남북한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파헤친 ‘광장’
▶1934년 미국 전쟁채무 불이행국에 융자정지 결정
▶ 1919년 4월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법통과불의에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우리 헌법의 뿌리를 제공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오늘, 중국 상해(上海)에서 수립됐다. 임시정부는 1945년 11월 김구 등 요인들이 환국할 때까지 독립운동의 총 본산이었다.
임시정부는 3·1운동의 소산이었다. 상하이 독립운동가들은 4월 10일 임시 의정원을구성하고국호를대한민국이라고했다. 고종이 1897년 선포한 대한제국의 ‘제국’(帝國)이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국(民國)국으로 바뀐 것이다. 임시헌장(憲章) 공포에 이어 13일 임시정부수립을내외에선포했다.
임시정부는민주공화제를기본이념으로삼고의정원이라는대의기관을설치해권력의분배와견제라는민주정치의기본원리에충실했다. 우리 헌법이 법통을 임정에서찾는이유도바로여기에있다.
이념은 숭고했지만 길은 가시밭길이었다. 1년에 한차례 이상 청사를 옮겨야 했다. 현재 상해 청사는 1926년 3월부터 윤봉길 의거로 상해를 탈출하는 1932년 5월까지 사용한 마지막 청사. 일제의 보복을 피해 8년간 옮겨다니는 고난의 피난살이 끝에 1940년 중경(重慶)에 안착했다. 이 과정에지도체제가바뀌기도했지만삼권분립에입각한민주공화제를유지했다.
임시정부시대는광복후인 1945년 11월 요인들이 귀국함으로써 막이 내렸다. 임정요인들은 미군정의 반대로 정부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개인자격으로 환국해야만 했다. 임시정부의 전통과 이념은 해방공간에서또다른 난관에 부딪혀야만 했다.
▶1919년 인도 암리차르 학살 사건 발생
▶1914년 영화감독 하길종 출생 -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
▶1909년 하싯트 터키황제, 청년당원 학살
▶1906년 아일랜드 극작가 사뮤엘 베케트 출생
▶1901년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 출생
▶ 1808년 이탈리아/미국의 전화기 발명가 메우치(Meucci, Antonio) 출생
메우치 [Meucci, Antonio, 1808.4.13~1889.10.18]
이탈리아 “진짜 전화발명자 메우치 알리자”
이탈리아 정부는 최근 자국 출신의 안토니오 메우치를 세계 최초의 전화 발명자로 널리 알리기 위해, 그의 업적을 기리는 우표를 발행하는 등 본격적인 복권작업에 나섰다고 2일 영국 <비비시방송>이 보도했다.
흔히 전화를 처음으로 발명한 이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메우치가 벨보다 훨씬 앞선다.
1808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난 메우치는 42살 때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는 직장에서 병상에 누워있는 아내와 통화하기 위해 전화를 발명해 1871년 특허 출원까지 했으나, 투자자를 만나지 못해 실패했다. 5년 뒤 벨이 다시 특허 출원을 해서 상용화에 성공함으로써, 그는 모든 이의 기억 속에 ‘전화 발명자’로 남게 됐다.
반면에 메우치는 가난에 시달리다 1889년 81살의 나이로 쓸쓸하게 숨졌다. 오랫 동안 잊혀졌던 그의 이름은 지난해 6월 미 하원이 그를 공식 복권시키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면서 다시 부활했다. 미 하원은 “만약 메우치가 10달러만 갖고 있었다면 특허권을 유지할 수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지 못해 벨에게 특허권이 넘어갔다”며 메우치를 ‘전화 발명자’로 공식 인정했다.
메우치 기념행사 참석을 위해 최근 이탈리아를 방문한 메사추세츠공과대학 과학자 니콜라스 네그로폰티는 그러나 “새로운 걸 발명하고도 돈을 벌지 못한 이가 메우치만은 아니다”라며 “벨 역시 빈곤 속에 숨을 거뒀다”고 말했다.
전화기의 발명자로 안토니오 메우치를 복권시키는 결의안이 미국 하원 통과 (2002.6.16)
전화기의 발명가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Bell, Alexander Graham, 1847~1922)이 아니라 이탈리아 출신의 미국 이민자 안토니오 메우치(Meucci, Antonio, 1808~1889)라는 사실을 미국 하원이 표결을 통해 마침내 인정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17일 '전화기와 관련된 역사를 새로 쓰게 됐다'며 이같이 보도하고, 이번 표결 결과에 이탈리아인들이 매우 기뻐하고 있다고 전했다.
가디언지 보도에 따르면 미국 하원은 16일 메우치가 발명해 1860년 뉴욕에서 시연됐고 당시 현지 언론에도 보도된 '텔레트로포노(Teletrofono)'가 최초의 전화기이며, 벨은 메우치의 자료를 입수해 16년 뒤에 특허를 받아낸 데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메우치 사후 113년 만에 인정했다.
그동안 벨의 자서전과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메우치의 사연을 아는 여러 세대의 이탈리아인들과 마찰을 빚어왔다.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메우치는 전기충격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연구하던 중 소리가 구리선을 통해 흐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본격적인 기술개발을 위해 1850년 뉴욕으로 향한다
그는 특히 몸이 마비된 아내를 위해 침실과 자신의 작업실을 연결하는 시스템을 개발, 1860년에 공개 시연회를 열었다. 이 기계를 보다 정교하게 고친 그는 영구 특허신청에 필요한 250달러가 없어 1871년 1년짜리 임시 특허를 신청했다. 그러나 그는 제품 상용화를 위한 재정적 후원자를 찾지 못했으며, 3년 뒤에는 임시 특허조차 갱신하지 못했다.
그러자 메우치와 연구실을 함께 사용하던 벨은 1876년 특허를 내고 웨스턴 유니언 전신회사와 계약을 맺어 큰 돈을 벌며 유명인사가 됐다. 메우치는 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며 이 재판은 승리를 눈앞에 둔 메우치가 1889년 숨지면서 중단됐다
▶ 1743년 미국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출생
▶ 1742년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초연
▶ 1695년 프랑스 우화작가 라 퐁텐 사망
▶ 1609년 임해군 피살
▶ 1594년 낭트칙령 공포
▶ 1594년 4월 13일 앙리4세가 낭트에서 프랑스의 신교도에게 조건부로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 칙령은 신교파인 위그노에게 조건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약 30년 간 지속된 프랑스의 종교전쟁(일명 위그노전쟁 1562∼1598)을 종식시킨 점에서 의의가 크다.
앙리4세가 즉위할 당시 프랑스는 신·구 양파의 종교적 대립으로 국내는 이분되었고, 혼란이 극도에 달했다. 왕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직접 신교에서 구교로 개종하면서 신교도(위그노)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유를 인정하고자 이 칙령을 공포한 것이다.
이때부터 신교도도 비로소 공직을 가질 권리가 생기고, 예배와 관혼 상제의 집행, 유언의 등기 등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파리를 제외하고 어떤 지역에서든 공동예배가 가능해졌고 신교도의 최고회의·목사회·서임권 등도 공인됐다. 또한 칙령은 비밀조항으로 백 수십 곳의 도시에 신교도의 자치특권을 인정했다. 그로 인해 그 도시들이 신교도의 무장지역이 되어 반란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신교 측은 지역을 제한받은 것이 불만이었고 가톨릭은 신교를 인정한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앙리 4세가 일생동안 네 번의 개종과 30여 차례의 암살위협에 시달리면서도 힘을 쏟은 결과 종교전쟁은 서서히 끝이 나고 프랑스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해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난 1685년 10월 18일, 절대왕정을 수립한 루이 14세는 결국 낭트칙령을 폐지하고, 신교도의 권리를 일체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남·서 프랑스에 많이 살던 약100만 명의 신교도 중 약 40만 명이 영국 네덜란드·프로이센 등지로 망명하였는데, 그들은 대부분 근면한 상인·기사·공예인·군인이었으므로 프랑스로서는 적지 않은 경제적 손실을 보아야 했다.
▶1397년 흥인지문(興仁之門-현 동대문) 창건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문. 보물 제1호이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솦트리종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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